작년인가 재작년인가 황정은 작가의 추천으로 강렬한 <자두> 표지만 머리 속에 넣어두었다가 최근에 이주혜 작가가 신간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로 책읽아웃에 나왔길래 <자두>를 먼저 읽었다. 생각보다 얇고(하드커버라 두꺼워 보임) 글씨도 크고 자간도 넓어서 금방 읽게 되는 책이다(이런 편집 보면 종이 낭비 생각이 안들 수 없다…. 그러나 노안이 오는 눈엔 읽기 좋기도….).
화자는 번역가. 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의 번역을 마치고 편집자에게 메일을 보낸 후 담배 한 대를 피우고 곧 역자 후기를 보내달라는 편집자의 요청 메일에 역자 후기를 쓰며 과거를 회상한다. 곧 이 소설은 화자의 역자 후기이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책에 포함된 에이드리언 리치와 엘리자베스 비숍의 우연한 만남, 유사한 경험을 한 두 여성 시인의 사랑과 상실에 대한 공감의 이야기를 통해 화자의 회상이 시작된다.
과거 시아버지의 병원 입원으로 남편과 함께 돌봄을 수행하며 며느리로서 겪은 미묘한 부당함, 불편함, 어긋남으로 결국 남편과의 이혼에 이르게 된다. 대놓고 가부장적인 주장을 하는 시아버지나 남편이 아니지만, 젠틀함을 표방하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표피를 살짝만 벗겨도 거기 숨겨져 있는 다른 본심을 보게 된다. 오히려 여성 간병인 영옥씨와의 짦은 담배 한 대의 시간으로, 서로의 눈을 마주치는 것 만으로 이해 받은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게 매끄럽고 단단해 보이나, 속은 짓이겨지고 짓물러진 자두 같은 이야기다.
이주혜 작가는 번역가로 활동하다 뒤늦게 소설가로 데뷔했다는데, 본인이 실제 번역한 책을 모티브 삼아 이야기가 출발하는, 번역과 창작이 어우러진, 번역가라는 본인의 정체성을 살린 소설 도입부인 것 같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