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속’이라는 부모는 늘 돌아서면 마를 눈물이나 낳을 뿐이니까. 하지만 오 년 뒤에 터진 삼촌의 그 눈물은 도대체 어느 호적에 올라 있었던 것일까?
"그래 그 여자 내 가슴에서 떠나보낸 기라. 그제서야 알았지. 우리가 진짜 우리로 사는 인생이 을매나 되겠어여. 다 그림자로 살아가는 인생 아이라여? 그란데 그 여자하고 살았던 시절은 그래도 내가 나로 살았던 시절이구나, 그걸 깨달은 거라. 그 여자 여관에 버려두고 밤이 늦어 감포에서 경주까지 걸어갔지. 달도 참 밝은 밤이라. 한 손에 수면제 약병 들고 미친놈처럼 밤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불후의 명시 더 로드낫 테이큰」을 읊으면서 말이라. 투 로드 디버지드 인 어 옐로 우드, 앤 쏘리 아이 쿠드 낫 트래블 보쓰……… 이 불후의 명시가 그래 통속적인 시라카는 거를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다친 자리가 아픈지 온갖 인상을 쓰면서도 삼촌은 또 ‘앤 비 원 트래블러 롱 아이 스투드‘ 라고 중얼거렸다. - P172

보름달이라도 떠오른 것일까, 노란빛이 환하게 마음을 밝혔다. 명부전 돌아가는 진회색 축대 밑에 애기똥풀이 하늘 높이 노란빛꽃을 피웠다. 아기 손바닥 같은 초록 잎이 더운 공기 머금은 봄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렸다. 가느다란 꽃대를 따라 애기똥풀 노란 꽃이 끄덕끄덕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흔들었다. 노란 꽃잎 가장자리가 흐려지면서 노란색과 초록색과 진회색이 서로 경계도 없이 뒤엉켜버렸다. 꼭꼭 막아둔 마음의 가장자리도 그렇게 풀리는 모양이었다. 대웅전 마당으로 향하던 예정은 그만 오후 햇살이 옴큼옴큼 내려앉은 명부전 섬돌 한쪽에 앉아버렸다. 애기똥풀 꽃대처럼 여윈 예정의 그림자가 섬돌의 윤곽을 따라 비뚜름하게 명부전 맞배지붕 날카로운 그림자 사이로 섞여들고 있었다. 봄바람은 애기똥풀 노란꽃잎이나 흔들 줄 알았지, 예정의 마른 그림자나 떨리게 했지, 사래에 매달린 풍경 속 눈 뜬 붕어 한 마리 제대로 흔들지 못할 만큼 기운이 없었다. - P181

꽃 향기 훈훈한 봄볕을 너무 머금었는지 바람은 저 혼자서 무거워져 건듯 불어오다가 둥근 기와 박은 토담 모양으로 펼쳐진 비질 자국이 여전한 명부전 앞마당만 공연히 한 번 더 쓸어버리고는, 차령산맥 바로 밑이라 더이상 자라지 않고 가늘기만 한 대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인 뒤란을 휘돌았다. 북한계선까지 치밀고 올라온 대나무들은 예정이 지금 머무는 곳이 온대지역이라는 사실을 숨김없이 보여줬다. 하지만 예정의 마음은 사스래나무와 누운잣나무가 자라는 추운 지방의 풍경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그 바람 끊어진 자리 어디쯤에서 시선은 자꾸만 아물거리기만 했다. - P182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 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 나이많은 보살들의 얘기를 듣는 사이사이에 예정은 수의를 지을 때면 늘 읊조리던 그 열여섯 자를 중얼거렸다. 어떤 죄도 짓지 말며 무릇 선이란 받들고 행하며 스스로 그 뜻을깨끗하게 한다면 그게 바로 부처님이 가르친 모든 바라. 열심히 열심히 그 말을 되뇌며 연등을 만들었건만 허전한 마음만은 영영 메워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의를 지을 때만 해도 원하는 바로 그곳에 들어앉아 있던 마음자리가 며칠 연등을 만드느라 풀어지더니 그만 초파일에 뜻하지 않은 쪽으로 터져나왔다. 제비 맞으러 나온 애기똥풀이 하늘 높이 노란 꽃잎을 내걸었기 때문이었다. 그 줄기를 잘랐다면 아기 똥 같은 노란 즙이 배어나왔겠지. 따가운 그 노란이 예정더러 아프지 말라고, 아프지 말라고 달래주었겠지. - P183

봉우가 만든 최고의 낙서는 바로 ‘인생이란? 픽션에 불과하다‘였다. 어두운 산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망상이 빚어낸 허상과 직면하니 그야말로 인생은 픽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인생이란 꼭 이십 미터 정도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저 발걸음 소리 같은 것이다. 거기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손전등을 밝히며 다가가면 또 이십 미터쯤 뒤, 더 다가가면 또 이십 미터쯤 뒤로 물러설 게 분명했다. 따라오려면 따라오라지. 나는 지옥 그 밑바닥까지도 갈 수 있다구. - P192

평범한 한국인을 쥐에 비유하는 것은 그를 간첩에 비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위협적인 발언이었다. 말하자면 그 미국인의 발언은 비유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상당히 문제였다. 지금 생각하면사로 확연해지는 이 경계선이 체제의 틀이 됐다는 점은 놀랍기도하다. 이런 경계선 바깥, 그러니까 여러 가지 종류의 타자들이 흩뿌려지는 그 영역에는 거지, 부랑자, 장애인, 미친 사람, 간첩, 빨갱이, 전과자 등이 있었는데, 이들끼리는 서로 비유가 가능했다. 낯선부랑자는 간첩으로 의심받았으며 포스터에서 간첩은 곧잘 쥐꼬리를 가진 인간으로 그려졌다. 빨갱이 짓은 미친 짓이며 정신병자는 전과자처럼 사회와 격리시켜야만 하는 존재였다. - P210

막상 그가 비행기 조종사 복장에다가 사타구니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복개천 내부로 들어가 거대한 쥐를 잡아오겠다고 나섰을때, 그의 돌출 행동을 비웃기만 하던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만류하기시작했다. 암모니아가스로 가득한 그곳에 들어갔다가는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질식사할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물론 그가 들어가서 질식사하는 것이야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의 사체를 찾으러남은 사람들이 들어가야 하는 게 고역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나 그가 낯빛도 바꾸지 않고 그 우스꽝스러운 왕진가방에서 방독면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쓰자, 분위기는 점점 더 희극적으로 바뀌어갔고 사람들의 반응도 격렬해졌다.
"으사양반, 미친 지랄을 할라 캐도 곱게 하란 말이 있어여. 저 무 - P223

슨 지랄병이 도졌길래 그 지랄을 한단 말이고?"
"그캉께 들어가서 뒈지든지 말든지 그냥 냅버려두자캉께 뭔 구경 났다고 사람들이 이키 나왔나 안 카나."
"저래 들어가서 뒈지면 그것도 국립묘지에 갖다 묻는가?"
"지랄한다. 국립묘지가 쓰레기 매립장이가. 여 보라카이, 쥐포선생. 거 들어가봐야 아무것도 없다캉께로"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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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가끔 그렇게 형광펜으로 줄을 그은 신문기사를 편지봉투에 넣어 보내오곤 했다. 언젠가는 편지봉투를 뜯어보니 조선일보기사가 나왔다. 그때까지 나는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거나 조선일보에 글을 실은 적이 없었다. 펼쳐보니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유미리에 관한 기사였다. 아버지는 유미리라는 이름에, 그리고 ‘방황과 절망이 빚어낸 문학성‘이라는 홍사중씨의 칼럼 제목에 각각 붉은 형광펜 칠을 해놓았다. 동봉한 편지에 아버지는 "나는 너를 믿는다. 네 소신껏 희망을 갖고 밀고 나가거라. 어짜피 人生이란 그런것이 아니겠냐"라고 써놓은 뒤, ‘아니겠냐‘의 ‘겠’과 ‘냐‘ 사이에 ‘V자‘를 그려놓고 ‘느‘를 부기했다. 그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나는 ‘아니겠냐‘ 라고 쓴 뒤에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중간에 ‘느’자를 삽입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이가 생긴 뒤에야 나는 그게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알게 됐다. - P74

나중에 나는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인생은 그런 게 아니었다. 점점 자기 그림자 쪽으로 퇴락해가는 뉴욕제과점 구석 자리에서 나이가 스무 살 정도는 더 많은 사람을 앞에 두고 앉아 ‘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바로잡는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자라는 만큼 이 세상 어딘가에는 허물어지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바로 인생의 본뜻이었다.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는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사이에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제아무리 견고한 것이거나 무거운 것이라도 모두 부서지거나 녹아내리거나 혹은 산산이 흩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안에서는 부식된 철판에서 녹이 떨어져나가듯이 검고 붉은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죽어서 떨어져나갔다. 밀려드는 파도에 모래톱이 쓸려나가듯이 자잘한 빛들이 마지막으로 반짝이면서 어둠 속으로 영영 사라졌다. 내가태어나 어른이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말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운운하는 바보 같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던 때였으니까 나중에 신문을 받아들고는 무슨 신문기사에 ‘역전파출소 옆 뉴욕제과점이 집이기도 한 작가‘ 같은 표현이 다 실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또 누구란 말인가? 지금은 경기도에 사니까, 또 뉴욕제과점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누군가를 만나 나를 소개할 때면 "소설을 쓰는 아무개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아직도 고향에서 나는 ‘역전 뉴욕제과점 막내아들’로 통한다. - P75

직선제 개헌이 받아들여지고 대통령 후보들의 선거 유세가 한참일 때, 나는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었지. 웃긴 생각이었어.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어. 영양을 덮치는 들개들처럼 사람들은 아름답고 소중하고 정의로운 것이라면 달려들어 추하고 더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려. 짓밟고 때리고 뭉개고 나면 아름다움이란 그저 찰나에만 존재해 영원한 것은 더럽고 야비한 것들뿐이야. 푸른빛이여, 바다라면, 바다의 한때나마 꿈일 수나마 있다면, 정의란, 아름다움이란, 사랑이란 바다의 한때나마 꿈에 불과한 거야.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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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은하수, 솔~ 추억의 담배이름.
장미, 도라지, 백자, 한라산, 88도 기억난다 ㅎㅎ

1. 게이코
눈보라가, 검은보랏빛 어둠 속으로 두서없이 쏟아졌다. 그 눈보라 깊은 속까지 들어간 연통 끝, 위로 솟구치는 하얀 연기 아래로 누런 물방울 몇 맺혀 있겠다. 비스듬하게 물방울이 떨어지는 꼴을 눈여겨보지 않더라도 창으로 밀려와 부딪치고는 다시 허공으로 흩어지는 눈송이들만으로 바람의 세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삽시간에 천지사방이 그 바람 타고 올라선 자우룩한 눈안개였다. 눈기운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오토바이 뒤에 낚싯대를 싣고 떠나 갓밝이 날파람들이 서로 수런거리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말 못 하고 내일 오후까지는 이렇게 눈이 온다 했다.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마침 와뜰하던 차였다. 고립의 감정도, 무기력의 마음도 아니었고 다만 그 꺼물거리는, 혹은 반득이는 눈보라 앞에서 무너지는 가슴. 장막을 둘러친 그 시간을 잔드근하게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 P9

김씨가 뭐라고 더 퉁명부리기 전에 태식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된바람이 훅 얼굴로 밀어닥쳐 절로 두꺼비상이 됐다. 눈은 그쳐 있었다. 동 트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바닥에 깔린 눈 덕분에 주위가 희슥했다. 어디선가 닭 갖추는 소리가 들려와 소름이 돋았다. 태식은 주머니에서 거북선을 꺼내 물었다. 나라에서는 은하수도 만들고 솔도 만들었지만, 어쨌거나 태식은 거북선이었다. 거북선으로 담배를 처음 배웠으니까. 그러고 보니까 태식이 매캐한 담배연기를 처음 들이켰던 것도 열다섯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가고 싶은 곳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고작 제빵 기술자가 된 것뿐이지만.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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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27 23: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뜰하다-꺼물거리다-반득이는- 잔드근 하게

우리 말 너무 좋네요!

한국어 사릉하는 연수옹 만쉐!^^

햇살과함께 2022-10-27 23:58   좋아요 2 | URL
와. 첫 단락부터 깜짝 놀랐어요~
모르는 순우리말 단어들 잔뜩^^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황정은 작가의 추천으로 강렬한 <자두> 표지만 머리 속에 넣어두었다가 최근에 이주혜 작가가 신간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로 책읽아웃에 나왔길래 <자두>를 먼저 읽었다생각보다 얇고(하드커버라 두꺼워 보임글씨도 크고 자간도 넓어서 금방 읽게 되는 책이다(이런 편집 보면 종이 낭비 생각이 안들 수 없다…. 그러나 노안이 오는 눈엔 읽기 좋기도….).


화자는 번역가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의 번역을 마치고 편집자에게 메일을 보낸 후 담배 한 대를 피우고 곧 역자 후기를 보내달라는 편집자의 요청 메일에 역자 후기를 쓰며 과거를 회상한다곧 이 소설은 화자의 역자 후기이다에이드리언 리치의 책에 포함된 에이드리언 리치와 엘리자베스 비숍의 우연한 만남유사한 경험을 한 두 여성 시인의 사랑과 상실에 대한 공감의 이야기를 통해 화자의 회상이 시작된다.


과거 시아버지의 병원 입원으로 남편과 함께 돌봄을 수행하며 며느리로서 겪은 미묘한 부당함불편함어긋남으로 결국 남편과의 이혼에 이르게 된다대놓고 가부장적인 주장을 하는 시아버지나 남편이 아니지만젠틀함을 표방하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표피를 살짝만 벗겨도 거기 숨겨져 있는 다른 본심을 보게 된다오히려 여성 간병인 영옥씨와의 짦은 담배 한 대의 시간으로서로의 눈을 마주치는 것 만으로 이해 받은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겉으로 보기엔 멀쩡하게 매끄럽고 단단해 보이나속은 짓이겨지고 짓물러진 자두 같은 이야기다.


이주혜 작가는 번역가로 활동하다 뒤늦게 소설가로 데뷔했다는데본인이 실제 번역한 책을 모티브 삼아 이야기가 출발하는번역과 창작이 어우러진번역가라는 본인의 정체성을 살린 소설 도입부인 것 같다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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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10-04 14: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주혜 작가의 글을 읽고 에이드리언 리치의 책을 꺼내왔어요. 다만 저는 이주혜 작가의 단편 소설이 먼저였고 그 후에 자두 그리고 에이드리언 리치 꺼내오기로 순서가 약간 다르긴 합니다만. 신간이 나왓다는 소식에 얼른 구입해두었습니다. 후훗.

햇살과함께 2022-10-04 14:46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은 역시 책 부자~
저는 <자두> 도서관 대출하면서,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는 희망도서로 신청했어요~ 도서관에서 사줄지 기다려 봐야겠어요.
에이드리언 리치 책 500페이지가 넘네요?? 당장 못읽겠는데요?? ㅎㅎㅎ

다락방 2022-10-04 14:59   좋아요 2 | URL
저도 꺼내놓기만 하고 읽지는 못하고 있어요 ㅋㅋㅋㅋㅋ

햇살과함께 2022-10-04 16:0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다락방님 책상에 그런 책이 몇 권일까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들 ㅋㅋㅋㅋ

바람돌이 2022-10-04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악 저 3권이 이렇게 연결되는군요. 황정은 작가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
에이드리언 리치의 저 책은 제게 숙제같은 책.
그리고 이주혜작가네요. 이주혜작가 책도 담아갑니다.

햇살과함께 2022-10-04 23:19   좋아요 0 | URL
저도요~ 황정은 작가 좋아해요.
황정은 작가 책도, 황정은 작가 추천 책도^^
리치, 저에게도 새로 생긴 숙제네요 ㅎㅎ
 

엘리자베스 비숍, 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한번은 너무 답답해 통번역대학원 동기 K에게 하소연한 적도 있습니다. 그는 "언니가 텍스트를 너무 사랑하나봐. 원래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잖아" 하는 말을, 배꼽을 잡고 깔깔 웃는 토끼 이모티콘과 함께 보내왔습니다. 사랑이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K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만 넘길 수도 없었습니다. 텍스트를 너무 사랑해서 번역이 갈팡질팡하는 역자. 너무 잘하고 싶어서 자꾸만 꼬이는 해석. 저는 K의 말을 혼자만의 변명으로 삼으며 기나긴 겨울을 한권의 책과 함께 동굴에서 보냈습니다. 어느새 마감일이 왔고 2000매의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3월이었습니다. - P9

그러다가 앞의 문단을 만났고 이상한 환기를 경험했습니다. 단호하고 냉철하고 때로는 신랄한 문장들 가운데 유일하게 사적이고 솔직한 고백을 담고 있었으니까요. 저자가 드물게 내비친 사담을 향해 저속한 호기심이 발동했던 걸까요?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 치부하기엔 그 문단이 가시처럼 뇌리에 박혀 빠지지 않았습니다. 하루 목표랑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 불면과 싸울 때면 간혹 가본 적도 없는 그 고속도로 언저리를 더듬었습니다. 혼자 상상하고 짐작했습니다.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어떤 식으로 서로 ‘이해받고’ 있다고 느꼈는지, 미치도록 알고 싶었습니다. - P15

두 사람의 대화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에이드리언리치는 ‘자기 이야기가 이해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처럼‘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밝히지 않았죠. 실제로 리치는 그 어느 허구보다 극적이었던 그 ‘사건‘에 대해, 그후 세 아들과 함께 그 경험을 어떻게 헤쳐나갔는지에 대해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거라곤 모든 것이 시작되는 3월 봄밤에 두 여성 시인이 돌이키기 싫었을 지난날의 상실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사실뿐입니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자살로 잃고 그 일로 세간의 비난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했던 공통의 경험이 두 사람 사이의 어떤 차이를 훌쩍뛰어넘게 했겠지요. - P17

싱숭생숭하고 불안한 이 마음의 근원이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내가 오늘 하루 8만원을 주고 구입한 것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일까 헤아려보기도 했습니다. 시간인 줄 알았는데 시간만은 아니었고, 안도감일까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게 주어진 시간을 고스란히 계단참에 흘려보내고 있었고, 안도감은커녕 막연한 불안감으로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습니다. - P47

"어르신, 죽으려거든 날 좋을 때 죽어요. 이런 염천에는 죽지 말아요. 이런 날 죽으면 자식들 고생합니다. 부디 볕도 좋고 바람도 좋은 날 죽어요. 그래야 자식들이 덜 서럽습니다. 알았지요? 꼭 좋은 날에 죽어요. 우리 어머니처럼 염천에 죽어 자식 가슴에 한을 심지 말아요." - P77

양쪽 집에 이런 우리 부부의 뜻을 분명히 전달했는데도 제 부모는 여전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병원에 가보라고 충고했고, 시아버지는 아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저와 세진의 눈치를 봤습니다. 제 부모의 폭력적인 방식은 화가 났고, 시아버지의 수동적인 방식은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시아버지를 만났다가 아이 말이 나오면 집에 돌아와 꼭 세진과 다투게 되었습니다. 아이 이야기는 지치지도 않고 나왔습니다. 친척 누가, 혹은 이웃의 누가 손주를 봤다더라, 돌잔치를 한다더라. 출산율이 곤두박질친다더니 우리 주변 어디에선가 끝없이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시아버지의 방식은 좀 치사한 데가 있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아기 이야기를 꺼내놓고 갑자기 제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어버리거나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습니다. 그러면 저는 죄도 짓지 않았는데 용서를 받는 더러운 기분이 들고 말았습니다. - P91

영옥씨처럼 이 건물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만아는 은밀한 통로를 지나온 모양이었습니다. 영옥씨가 저를 난간 옆 불룩하게 튀어나온 턱에 앉혔습니다. 옥상 공기는 텁텁하고 습했습니다. 영옥씨가 실외기 더미를 덮은작은 지붕 구조물 틈에 손을 집어넣더니 담뱃갑을 하나꺼냈습니다. 그리고 담배 하나를 꺼내 불을 붙여 제게 내밀고 연달아 두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담배 한대를 피웠습니다. 어느 순간 서로 눈이 마주쳤고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풋 하고 웃음을터뜨렸습니다. 저는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로 웃었습니다. 절대로 웃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그렇게 웃고 나니 조금 힘이 나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날 우리는 옥상에서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 P105

소변기를 침대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려놓고 시아버지의 바지춤을 제자리로 올렸습니다. 이제 시아버지는 모든걸 체념한 사람처럼 제게 완전히 몸을 기대고 있었습니다. 저는 행여 시아버지를 놓칠세라 한껏 힘을 주며 버텼습니다. 그때 제 귀에 들려온 소리는 분명 착각도 환청도아니었습니다.
죽어라…… 죽어……… 콱………
이 이야기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습니다. 세진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제겐 그 무참함을 표현할 언어가 없습니다. - P113

시아버지는 그해 겨울에 죽었습니다. 어떤 죽음이었는지는 여기에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 죽음이 세진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고 제게도 깨끗이 지우는게 불가능한 어떤 감정을 안겨주었다고만 말하겠습니다. - P115

우체국으로 들어가 국제우편을 보낼 수 있는 우표를 샀습니다. 그날 산 엽서 중 가장 예쁜 엽서를 한장 꺼냈습니다. 기억 속의 라일락색 명함에 적혀 있던 간병인 파견업체 이름을 휴대폰으로 검색해 찾은 주소를 수신인란에 썼습니다. 엽서가 영옥씨에게 전달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지만 어쩌면 그 희박한 가능성 때문에 벌이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발신인란에는 제 이름을 적었지만 사실 영옥씨에게 제 이름을 알려준 기억도 없습니다. 유리병에 쪽지를 넣어 태평양에 던지는 것만큼이나 치기 어린 행위였지만, 제 마음만은절대로 우습지 않았습니다. 내용 칸에 볼펜을 대고 잠시 망설였습니다. 일단 영옥씨,라고 썼습니다. 그러고 또 한참을 머뭇거렸습니다. 문장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한 문장을 쓰고 밖으로 나와 우체통에 엽서를 집어넣었습니다.
"영옥씨, 아침에 잘 일어나고 있나요?"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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