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남씨 이야기
선남은 매일 저녁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비극의 자리에 자신을 가져다놓지 않기‘. 아빠 없는 아이를 가졌다고, 아빠 없이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한다고, 천지간에 아이와 나뿐이라고, 이런 불행의 문장들은 처음부터 선남의 것이 아니었다. 불행의 문장은 선남의 마음이 물러지거나 몸이 약해졌을 때를 기다렸다가 튀어나오곤 했다. 약한 틈새를 알고 단박에 공격해 들어오는 음험한 문장들을 선남은 경계했다. 지금은 오로지 자신과 아이의 삶에 집중할 때다. 더욱 단단해져야 한다. 그러려면 하규의 기억마저 버려야 한다. 선남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 수시로 되뇌었다. 하규에게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당장 이 험악한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하규가 아니라 선남과 아이였으므로. - P219

그동안 용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무모함과 무식함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자 얼굴이 숯처럼 달아올랐다.
- 봄의 왈츠 - P236

온은 이마를 찌푸리며 나를 탓했다. 간절히 기다리던 일이 무산되었을 때 슬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짜증이 솟구친 나는 율을 두둔하는 온에게 버럭 화를냈다. 간절? 고작 그런 일 따위에 간절하다는 말을 붙여? 네가 자꾸 오냐오냐하니까 애가 진짜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철딱서니 없게 굴잖아! 너는 개새끼처럼 며칠 예뻐하고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네가 망쳐놓은 애 버릇을 상대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야! 나뿐이라고! 온이 단박에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눈치 빠른 율이 분위기 수습에 나섰을 때야 나는 또 아이한테 감정노동을 시켰구나,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 셋은 주섬주섬 짐을 챙겨 들고 어색하게 호텔을 나와 오도리공원으로 걸어갔다.

이게 저승길을 환히 밝혀준다네. 이렇게 일주일 간격으로 봉숭아 물을 들이면 손톱에불이 들어 나중에 죽으면 저승길을 밝혀준다네. 내 팔자에 저승길을 마중 나올 살뜰한 부모도 없고 애틋한 남편은 더더욱 없으니 내 저승길은 내가 미리 밝혀야지 싶어서. 돈도 안 들고 얼마나 좋으냐? 안 그러냐, 이년아? 그러면서 엄마는 또 징그럽게 깔깔 웃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뭔가를 참으며 엄마의 손에 둥글게 빚은 봉숭아 반죽을 하나씩 올렸다. 그때 내 안에서 치밀어 올랐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저 순도 높은 분노만은 아니었기를, 백반 가루 같은 연민이 조금은 섞인 마음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이제야 나는 궁금해진다. 내가 스무살에 집을 떠난 이후 엄마의 봉숭아 물은 누가 들여주었을까? 엄마가 딱히 사랑하지 않았지만 미워하지도 않으며 짐승처럼 풀어 키웠던 어린 남동생들 중 한명에게 부탁했을까? 서울로 떠난 후 나는 엄마의 손을 자세히 들여다본적이 없다.)
- 그 시계는 밤새 한번 윙크한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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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임은 인문학, 문학, 역사, 건축 공부 모임이었고 답사, 탐방, 견학 모임이기도 했다. 살림과 육아로 바쁜 와중에도 굳이 만날 때마다 모임의 과제를 정하고 실행에 옮겼던 건 아마도 우리가 시간이 남아돌아 한가롭게 놀러 다니는 유한부인들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어디 한번 증명해보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한결같이 증명의 압박을 느꼈다.
-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 - P115

히읗의 요실금 역사는 일학년 여름방학 농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도 역시 니은이 곁에 있었다. 농사일을 도우며 ‘노동의 신성함‘이나 ‘민중의 위대함‘ 같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해서 따라갔는데, 동이 트기도 전에 담배밭에 나가 키만큼 자란 담뱃잎에 팔을 긁혀가며 일하다보면 너무 덥고 힘들어 욕만 늘었다. 노동은 신성하기 전에 일단 힘들었고 민중은 그 힘든 노동을 견디고 버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위대하다기보다 죄책감만 자극할 뿐이었다. - P181

저 아이들은 어떤 과정에서 강간을 응징의 한가지 방법으로 학습한 걸까? 디귿 선배를 비롯한 동아리 남학생들은 왜 저들의 미숙한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똑같은 수준으로 행동하는 걸까? 어쩌자고 히읗과 니은은 누군가의 사냥감이자 누군가의 수호 대상이 되었을까? 이를 악물고 참담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옆에 앉은 니은이 나직하게 말했다. 아씨, 오줌보 터지겠네. 순간 미처 느끼지 못했던 요의가 단박에 히읗을 덮쳤다. 히읗의 오줌보야말로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 물속을 걷는 사람들 - P183

그 할머나는 담장에 짐승이 그려진 다음부터 늘 꿈자리가 사나워 베개 밑에 부엌칼을 넣어두고 잠이 든다고 했다.
아유, 짐승은 싫어. 사람도 지긋지긋한데. 꼭 꽃을 그려요, 응? - P197

너 그거 아냐? 가난은 팔수록 가난해진다.
소년은 여자가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가난이 뭔지도 모르면서.
- 꽃을 그려요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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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지금쯤 흐느껴 울고 있을까. 오종은 차갑게 식어 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하는 고등어구이를 공연히 젓가락 끝으로 콕콕 찔러댔다. 심성이 곱고 정의롭기까지 한 아내는 지금 동정심에 버거워하고 있다. 오종은 고등어 눈깔을 푹 찌르며 기도했다. 제이의 남편이 하루라도 빨리 철들어 제이를 행복하게 해주기를. 제발 불온한 그들의 바이러스가 자신의 안온한 가정을 더는 위협하지 않기를.
- 여름 감기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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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도서 신청한 책. 연체하지 말고 빨리 읽고 반납하자.

이날부터 세 자매는 서로를 봄 여름 가을이라고 불러주었다. 가끔은 매화 난초 국화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름을 향한 불만이 커질수록 자매의 결속력도 단단해졌다. 물론 심사가 틀어지면 이 장소팔 고춘자야, 못생긴 추녀야, 소리가 주먹질과 함께 오가기도 했다. 가끔은 이름이비교적 평범한 둘째도 하지감자야, 하녀나부랭이야, 소리를 면치 못했다.
- 오늘의 할 일 - P11

네모가 후루룩 면발 빨아올리는 소리를 내며 커피를 마신다. 네모와 함께하는 커피 타임은 규가 좋아하는 일과 중 하나였다. 이번 미션에 합류해 처음 네모를 만났을때 그는 규의 눈으론 누가 누군지 구별이 잘 안 되는 이국의 청년일 뿐이었다. 네모라는 이름이 독특하다는 규의 말에 어렴풋이 짐작한 대답이 돌아왔다. 국적도 뭣도 거부한 채 노틸러스호를 타고 바닷속에서 살아가는 『해저이만리』의 네모 선장. 네모는 그 무엇도 아닌 존재라는 뜻의 라틴어를 제 이름으로 삼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니. 수십년째 내전으로 곪아가는 이 나라의 네모는 무엇을 거부하고 싶어서 스스로 그런 이름을 지었을까? 하지만 규의 의문이 무색할 정도로 눈앞의 네모는 도무지 긴장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눈부시게 하얀 이를 드러내며 헤벌쭉 웃기만 하는 태평한 젊은이였다. - P45

칠순이 훌쩍 넘은 노인네가 볼살이고 눈꺼풀이고 떨리는 거야 지극히 당연한 순리라고 규는 생각했다. 어머니는 규에게 어느 귀퉁이에 붙었는지도 모를 땅덩어리 사람들을 위한 답시고 제 피와 살을 만들어준 병든 어미의 고통은 모른척하는 천하의 싸가지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몸이 납덩어리를 매단 듯 천근만근이다, 눈밑이 칼바람에 속절없이 떨리는 문풍지처럼 파르르 떤다, 풀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눈앞이 뿌옇다, 어머니가 열거하는 고통은 가깝고도 구체적이었지만 규의 마음은 멀고 먼 추상의 고통을 향해 내달렸다. 그런 규를 향해 경멸의 표정을 감추지 않았던 남편과 달리 어머니는 온갖 악담을 퍼부으면서도 끝내 마지막 말만은 접어두었다. 규로선 언제고 들을 각오가 되어있는 그 말. 그래서 간혹 이곳의 낭자한 고통이 마음을 짓눌러올 때면 규는 어머니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스스로 읊조려보곤 했다. 제 자식 잡아먹은 년이 무슨 염치로 남의 자식을 살리겠다고…………
- 아무도 없는 집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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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11-16 2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지감자야 하녀나부랭이야 ㅋㅋㅋ

햇살과함께 2022-11-17 10:55   좋아요 1 | URL
‘하’자 이름을 놀릴 수 있는 신박한 별명이요 ㅋㅋㅋ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 2003년 제3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서른 즈음에‘를 들을 때처럼, 아련하고 쓸쓸하고 너무 일찍 말하여진 잊혀진 ‘청춘‘ 같은 단편이다. 이 책 덕분에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잠시 돌아가 보았지만, 작가님처럼 ‘행복한 경우가 더 많았‘는지는 모르겠다. 생경한 우리말로 살려낸 문장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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