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이별도 마찬가지였다. 전 남자친구가 된 남자친구를 카페에 남겨놓은 채 나와 걸으며 이별의 순간을 꼼꼼히 느껴보았다. 뒤통수가 당기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는 마음으로 드라마에서는 이럴 때 꼭 뒤에서 누군가 쫓아와 붙들지만, 그 오랜 학습 때문에 한 번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상상하게 되지만 절대 그럴 일은 없다는 걸 잘 아는 마음으로 단단히 팔짱을 끼고 옷깃을 여미고 바람이 사나운 겨울의 골목을 걸었다. 등이 굽지 않도록 허리를 계속 곧추세우며, 이제 더는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아가는 마음. 원래도 없었고 정말로 없다고 인정하고 앞을 보고 걷는 마음. 그건 슬픔에 잠겼다가 빠져나오는 일이기도 했고 그런감정에 취해 있으면 으레 조금 행복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해본 것‘ 리스트를 적는 일만큼 - P128

재인에게 중요했다. 그리고 그 둘은 떼려야 뗄 수가 없었다. 모르는 마음으로 모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으므로. - P129

모르겠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었다. 1회 체험권으로 난생 처음 필라테스 수업을 받으며 재인은 선생님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어 당황했다. 지시를 받아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 척추를 더 뽑으세요, 갈비뼈는 닫아요, 골반을 더 찍어내려요, 옆구리를 구부리지 말고 펴서 늘려요, 아랫배와 허벅지 사이에 근육을 당겨올리세요. 겨드랑이 뒤쪽 옆으로 만져지는 곳에 근육이 있다는 것도 재인은 처음 알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수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이 말을 뱉으면 재인이 그 말을 머릿속에서 해석하기 위해 일이 초 정도가 필요했다. 최대한 선생님의 표현 그대로 몸을 움직여보려고 애썼다. 어디 있는지 모를 근육을 머릿속으로 더듬었다. - P129

필라테스 수업을 하면서 은영이 수강생들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배에 힘을 주면 다리를 들 수 있어요, 였다. 배에 힘을 준 채 다리를 들라고 하면 수강생들 열이면 여덟이 무릎 관절에 힘을 꽉주었다. 그 힘을 빼라고 하며 은영은 항상 말했다. 배의 힘으로 드는 거예요. 다리에는 힘을 주지 마시고. 그러면 수강생 열의 일곱이 그게 뭔데요? 하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다리를 다리로 드는 게 아니라 배로 드는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스스로가 가끔 우습기도 했다. 자신도 근육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 P130

그때 자신도 똑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었다. 그런 광경을 상상하고 있으면 회사에는 너무 마음 붙이지 말고 대충 다니는 거예요, 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게 뭔데요? 하고 울상을 지었던 스물여섯의 신은영이. - P131

은영은 애써 평온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노력하지 말기를 노력했다. 사람을 붙들려는 노력을 하지 말기로 언제나 붙드는 역할은 그만하기로 계속 나오시나요? 하고 묻지 않기 위해 묵묵히 데스크 뒤로 들어가 분주한 척을 했다. 계속 나올 거냐고 물어도 상술처럼 보일 거야. 오해받을 거야. 한 달 동안 수강생들의 수업일정을 정리해놓은 일정표를 의미 없이 훑으며 그런 주문을 걸고 있었다. 일정표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재인은 탈의실에 들어가고 없었다.

- 근육의 모양 - P148

그날도 희재와 샌드위치와 수프를 먹으며 마치 한강이 가로놓여 건널 수 없는 이쪽과 저쪽처럼 다른 서로의 일상을 얘기하고있었다. 여러 이야기가 흘러가다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조금 지친다고, 내가 선택한 일이어도, 하고 말할 때 희재는 슬며시 지친 낯빛을 띄워 보였다. 내내 그랬던 것은 아니고 대체로 유머러스하고 활기차다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에 잠깐 지친 기색이 엿보이는 정도였다. 영은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선택한 일이어도 싫어지고 지치지 근데 뭐가? 요즘은 뭐가 제일 지쳐? 그렇게 물었을 때 희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 P161

영은은 그런 희재를 두고 저렇게 자기 말을 자기가 반박하고 의심하고 수정하는 것도 희재의 세계에선 흔한 일일까, 하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그마한 자기의 세계 안에서 살고 서로 다른 분위기와 풍습과 규칙을 지녔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친구를 표본 삼아 그런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 사회문화 과목 선생님이 된것 같은 기분이어서 재밌었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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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 편집자님 아니 작가님 첫 소설집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해서 받았다. <나주에 대하여>는 작년 신춘문예 당선시 기사로 읽었고 또 읽는다. 민음사 TV 말줄임표 애청했는데 요즘 뜸했네..

나는 완성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어떻게든 완성이 되는 형태여야 하겠지만, 완성처럼 보이는 미완성이어야 하겠지만.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이어지지 않은 것들은 끊어지지도 않으니까. 완성보다 미완성이 더 오래 지속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종결되지 않은 것들이 내 주변을 행성처럼 돌고 있는 편이 더 행복하다고. 하루의 끝에 이불을 덮고 누워 오늘은 어떤 이름이 붙은 미완의 행성을 떠올려볼까…… 그런 고민을 하고 누운 자리에서 하염없이 하염없이 과거의 사람들을 곱씹고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디에 살까 상상하는 일이 좋았다. 여러 생을 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만화를 그리게 되었다. 사는 생활과 그리는 만화는 비슷했다. 나는 짝사랑이 좋았고 완성하지 않은 여러 짝사랑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짝사랑하는 만화를 그렸다. 매듭지어지지 않는 사랑 키스하지 않는 주인공. 댓글은 아우성이었으나 나는 연재한 지 일 년쯤 지나서는 댓글도 잘 보지 않았다. - P12

그런 것들은 너무 많다. 이를테면 천희는 언제나 조금 느렸고 세상물정에 서툴러서 해맑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그 서툶이라는 것이 편의점 신상품을 오래오래 신기해한다든지 그런 걸 꼭 들어올려 360도로 돌려가며 구경하다 꼭 하나씩 떨어뜨려 주변의 걱정을 사곤 하는 것, 우유에 꽂을 빨대 대신 나무젓가락을 챙겨온다든지 커피 하나를 사면서 터무니없이 큰돈을 내거나 거스름돈을 잘못 챙겨도 모르는 수준의 서툶이었다.

- 새 이야기 - P31

그러나 규희는 내내 착각하고 있었다. 말투가 조심스럽다고 파괴력을 지니지 않은 건 아니다. 너만큼 모든 걸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하필 자신의 애인을 향해 약간, 이해가 안 돼, 라고 말한다는건・・・・ 그리고 내가 그 말뜻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 나에 대한 기만이다. 너를 사랑하고 너를 관찰해온 나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기만. - P54

나는 네가 뒤라스의 『연인』은 리스트에 넣고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넣지 않아서 너를 좋아했다. 나는 너의 취향을 대부분 신뢰했다. 종종 너무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만으로 일상을 구성하고 편집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의도하는 의도하지 않았든) 스스로의 약한 면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고 상처받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는 스스로를 전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네가 가진 다른 부분에서 느낀 호감이 그 작은 부분들을 상쇄시켰다. - P58

나는 생애 전반에 걸쳐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원망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성향을 가진, 내향 인간들을 항상 좋아하면서도 서운했다. 나는 매번 제안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사람을 천천히알아가고 조심스럽게 가까워지고 싶다는 사람들의 팔을 붙들고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흔드는 쪽은 백이면 백 나였다. 그런 나도 좀 병적인가. 어느 모임에서나 그런 유의 사람들을 좋아해 서촌으로 커피 마시러 갈래요? 광화문으로 생선구이 먹으러 갈래요? 하고 물으면 그들은 언제나 사려 깊은 표정으로 아, 네, 좋아요, 언제든 단이씨 편하신 시간에…… 라고 대답해왔다. 거절이 아닌것만으로 마음이 놓였지만 한편으로는 늘 속이 꼬였다. 너희들은 좋겠다. 우아하게 컨펌할 수 있어서 좋겠어. 누군가가 물어보면 음・・・・・・ 하고 고민하고 마침내 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서 좋겠다. 나도 그런 역할 좀 맡아보고 싶네. - P63

나는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어내며 너의 말을 듣는다. 기분은 좋았지만 한편으론 무슨 소린가 싶기도 하다. 나도 너처럼 우아하게 가만히 있어도 괜찮고 싶거든. 괜히 아무도 부추기지 않았는데 혼자 침묵에 불안해져 까불지 않고. 나도 누가 웃겨주면 웃고만 있고 싶다고. 내향 인간을 마주하고 속이 꼬인 사람처럼 또 그렇게 혼자 속으로 툴툴거렸다.

- 나주에 대하여 - P65

수언은 늘 솔지의 목소리가 복잡하다고 느꼈다. 고민을 털어놓고 이런저런 의견이나 감상을 말할 때의 목소리에 레이어가 있다고, 곁이 있었다. 수언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솔지를 풍부해 보이도록 하는 매력적인 곁이 아니라 쓸데없는 겹이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스스로 처세를 잘한다고 믿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의식하는 (그렇지만 자신은 매우 자연스럽다고 믿는) 자의식이 도드라지는 사람의 겹이었다.

- 꿈과 요리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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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12-07 1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등단작 기사로 읽고 민음사유투브에서 본 작가님인데 글맛이 있더라고요~

햇살과함께 2022-12-08 08:57   좋아요 1 | URL
겉으로 말하지 못하는 내밀한 생각, 갈등을 묘사하는 글이 좋네요~
주말엔 민음사 TV도 다시 찾아봐야겠어요~
 
운영전 보리 어린이 고전 13
서정오 지음, 이수진 그림 / 보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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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어린이 고전 시리즈 13권 운영전. 서정오 선생님의 우리 고전 다시 쓰기를 통해 쉬운 입말로 살려낸 책이다.


사극에서 항상 궁중암투의 조력자, 감초 역할로 나오는 궁녀. 궁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본 적이 없는데, 운영이라는 궁녀와 가난한 선비 김 진사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다.


궁녀임에도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운영의 대담함과 이러한 운영을 위하여 김 진사와의 만남을 도와주는 궁녀들의 연대와 우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지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니 결국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천상에서 재회하게 된다.


액자 구조의 형식(전설의 고향에서 처녀귀신이 나와서 억울한 사연을 얘기하는 구조와 비슷)과 이야기 속의 많은 시(운영을 포함한 10명의 궁녀들은 시를 잘 지어 안평대군에게 발탁된 궁녀들이다, 이들이 안평대군 앞에서 읊는 시들, 운영과 김 진사가 주고 받는 시들)를 음미하는 재미도 있다.


안평대군에게 속마음 들킨 위기 상황...


대군은 우리가 쓴 시를 하나하나 읽어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더군요.
"부용이 쓴 시는 임금님 생각하는 마음이 들어 있어 훌륭하고, 비취가 쓴 시는 은근한 멋이 있어 좋고, 소옥이 쓴 시는 술술 읽히다가 끝에 가서 묘한 맛을 내고, 자란이 쓴 시에는 깊은 뜻이 들어 있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고 나서 덧붙였습니다.
"나머지 시도 다 잘되었는데, 운영이 쓴 시만은 뭔가 쓸쓸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들어 있구나. 그게 누구인지 알아내어 벌을 주어야 하겠지만, 글재주를 보아 오늘은 그냥 넘어가겠다."
저는 얼른 엎드려 울면서 아뢰었습니다. - P30


"시를 쓰다 보니 어쩌다 그런 말이 나온 것이지, 결코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대군마마 의심을 받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대군이 저더러 일어나 앉으라 하고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글이란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어서, 억지로 숨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 일에 대해 다시 말하지 마라."
그러고는 우리에게 상으로 비단 한 필씩을 내려 주었습니다. - P31



요 시리즈 옹고집전만 읽었는데, 나머지 시리즈도 찬찬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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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은 우리가 쓴 시를 하나하나 읽어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더군요.
"부용이 쓴 시는 임금님 생각하는 마음이 들어 있어 훌륭하고, 비취가 쓴 시는 은근한 멋이 있어 좋고, 소옥이 쓴 시는 술술 읽히다가 끝에 가서 묘한 맛을 내고, 자란이 쓴 시에는 깊은 뜻이들어 있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고 나서 덧붙였습니다.
"나머지 시도 다 잘되었는데, 운영이 쓴 시만은 뭔가 쓸쓸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들어 있구나. 그게 누구인지 알아내어 벌을 주어야 하겠지만, 글재주를 보아 오늘은 그냥 넘어가겠다."
저는 얼른 엎드려 울면서 아뢰었습니다. - P30

"시를 쓰다 보니 어쩌다 그런 말이 나온 것이지, 결코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대군마마 의심을 받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대군이 저더러 일어나 앉으라 하고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글이란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어서, 억지로 숨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 일에 대해 다시 말하지 마라."
그러고는 우리에게 상으로 비단 한 필씩을 내려 주었습니다. - P31

그날 밤, 평소 저와 가깝게 지내던 자란이 가만히 제게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어. 네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정말로 있는지 모르지만, 네 낯빛이 날로 야위고 핼쑥해져 가니 걱정되어 묻는 거야. 나한테숨기지 말고 말해 줄래?"
저는 눈물을 머금고 말했습니다.
"궁 안에 사람이 많아 누가 엿들을까 두려워 말을 못 했지만, 네가 진심으로 묻는데 어떻게 더 숨기겠니? 다 말해 줄게."
그날 밤, 자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지요. - P34

제 편지가 그리워하는 마음을 덜어 주기는커녕 점점 더 짙어지게 했으니, 제가 진사님께 죄를 지은 셈입니다. 아무튼 진사님은그날 밤 안에 답장을 써서, 제가 그랬던 것처럼 비단조각에 고이싸서 품에 간직하였다지요. 하지만 또한 전해 줄 기회를 얻지 못하여 애만 태울 뿐이었답니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마음속에 사무치면 병이 되나 봅니다. 진사님도 저도 똑같은 병에 걸린 것입니다. 잠도 못자고 음식도 못 먹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보며 속만 태우는 병이요. 그러다 보니 몸은 날로 야위어 가고 얼굴은 핏기 없이해쓱해졌지요. 우리 둘 다 그랬답니다.
어떻습니까, 진사님? 그때 일이 생각나나요? - P47

꿈결처럼 한 번 눈길을 주고받은 뒤로, 마음은 들뜨고 넋은 떠나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날마다 궁궐을 바라보며 수없이 애를 태웠습니다. 어느날 뜻밖에도 벽 틈사이로 전해 준 옥같이 고운 글을 받아 보고는, 잊지 못할 그 목소리 귓가에 맴돌아 펴 보기도전에 먼저 목이 메었습니다. 가슴이 아려 와 절반도 채 못읽고눈물이 글자를 다 적셨습니다.
누워도 잠을 못 이루고 먹어도 음식이 넘어가지 않으니, 뼛속마다 병이 맺혀 백 가지 약도 듣지를 않습니다. 죽어서나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하루빨리 저세상에 가기가 소원입니다. 만약에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신령님이 도우셔서 살아생 - P51

전 한번 만나 맺힌 원을 풀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몸을 가루로만들고 뼈를 갈아서라도 천지신명께 바치겠습니다.
붓을 들고 종이에 글자를 써 내려가는 이 순간에도 자꾸만 목이 메니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예를 갖추지 못하고 서둘러 적습니다. - P52

여태 가만히 있던 보련도 나섰습니다.
"누구든지 말은 함부로 하지 말고 삼가야 한다고 들었는데, 지금까지하는 말을 들어 보니 그게 아닌 것같네. 자란의 말은 속뜻을 숨기고다 드러내지 않은 것 같고, 소옥의말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 같지않고, 부용의 말은 애써 갖다붙인 것 같아서 모두 참되게 들리지 않아. 나는 이번 일에서 빠질 테야." - P62

"오늘 일은 그저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랐는데, 비경이 저렇게 우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괴롭구나."
하자, 비경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지낼 때 나는 운영과 단짝이 되어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맹세했어. 이제 남궁 서궁으로 서로 떨어져 살게 됐지만, 그렇다고 옛 맹세를 저버릴 수 있겠니? 이왕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내 속마음을 숨기지 않고 다 말할게. 전에 운영이 나날이 야위고 핼쑥해질 때만 해도 영문을 몰랐는데, 이제 보니 그게 다 그리움 때문인 것 같아. 이대로 두면 운영은 정말로 죽을지도 몰라. 얘들아, 내가간곡히 빌 테니 우리가 운영을 도와주자. 자란이 이번에 소격서로 가자고 한 뜻을 나는 이미 짐작했단다. 자란이야말로 운영의 진정한 벗이라는 것도알았지. 우리가 다투다가 끝내 궁을못 나가면 운영이 어떻게 되겠니? 운영이 병들어 죽기라도 한다면 모든 원망은 남궁에 있는 우리에게 돌아올 텐데, 그래도 괜찮겠니? 이제 모두 고집을 거두고, 우리가 힘을 모아 줄을 목숨 하나 살려 보자꾸나." - P64

하지만 여자로 태어나 궁녀가 되었으니 그 재주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제가 만약에 남자로 태어났다면, 가진 재주를 마음껏 펼쳐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나라를 위해서도 큰일을 할 수 있었을것입니다. 그런데 기껏 궁녀가 되어 감옥같은 궁궐 안에서 죄인처럼 갇혀 지내다가, 끝내 여기서 말라죽을 운명이니 어찌 슬프지않겠습니까? 이것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한이 맺히고 원망이 머리끝에 차오릅니다.
그래서 방에 앉아 수를 놓다가도 수들을 던져 버리고, 등불 아래 비단을 짜다가도 천을 찢어 버리고, 거울 보며 머리를 매만지다가도 옥비녀를 빼내어 꺾어 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어쩌다 술한잔 마시고 뜰을 거닐다가도 돌 틈에 핀 꽃을 뜯어 버리고, 길섶에 난 풀을 뽑아 버리곤 했지요. 마치 미친 사람처럼요. 제 마음속에 깊이 맺힌 한을 억누르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 P72

그 말을 들은 소옥과 비경이 눈물을 흘리며,
"한 사람 마음이 곧 열 사람 마음이고, 운영 마음이 곧 우리 마음이야.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서로 도우며 살자."
하고는 남궁으로 돌아갔습니다. - P77

그 말을 들은 김 진사가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를 해.
"우리 두 사람은 죽은 뒤 저승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저승 시왕*께서 저희 둘 다 죄 없이 일찍 죽은 것을 불쌍히 여겨 다시 인간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사양했습니다. 또다시 그 한 많은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세상은 아직도 사람을 차별하고 억누르며, 죄 아닌것을 죄로 만듭니다. 또 일삼아 남을 해코지하고 자기 욕심만채우는 나쁜 사람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오늘 밤 여기 와서 슬픔에 잠긴 것은, 그때 겪은 서러운 일이 다시 생각나서일 뿐입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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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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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를 사는 여성들의, 가부장제를 넘어선 삶의 가능성을, ’비극의 자리에 자신을 가져다놓지 않기‘를 다짐하는 그녀들의 연대를, 응원한다. 희망한다. 계속 읽어보고 싶은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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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18 1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작가 좋다고 하는 분들 많던데 아직 못읽어봣네요. 19세기의 구렁에서 빠져나오면 저도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100자평이 책을 읽게 만드네요. ^^

햇살과함께 2022-11-18 21:50   좋아요 1 | URL
아, 제가 도서관 반납일 맞추느라 너무 급하게 읽어서 오롯하게 읽지 못한듯하지만 그래도 좋네요^^ 곧 21세기도 만나보시기를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