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줄 지어 선 차를 지나쳐 산길로 들어섰다. 초입인데도 숲이 울창했다. 우리 일행들 외에는 오가는 사람도차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곳에 묻히고 싶을까? 아무도 없이 적적하게 깊은 산속에 홀로 아버지는 백운산에 가장 오래 있긴 했지만 이산저산 떠돌며 48년 겨울부터 52년 봄까지 빨치산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사년뿐이었다. 고작 사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옭된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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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짓가랑이에 붙은 먼지한톨조차 인간의 시원이라 중히 여겨 함부로 털어내지 않았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마침내 그 시원으로 돌아갔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참으로 아버지답게 마지막까지 유머러스하게. 물론 본인은전봇대에 머리를 박는 그 순간에도 전봇대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민중의 한걸음 한걸음이 쌓여 인류의 역사를 바꾼다는 진지한 마음으로 아버지는 진지하게 한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다만 거기, 전봇대가 서 있었을 뿐이다. 무심하게, 하필이면 거기. 이런 젠장. - P16

"고 선상님을 잘 알그마요."
그제야 어머니의 눈빛에서 경계가 사라졌다. 사회주의자답지 않게 어머니는 낯선 사람, 낯선 것에 대해 경계가심하다. 어머니에게는 익숙한 것 오래된 것이 좋은 것이다. 그중 가장 익숙하고 좋은 것이 사회주의이고 동지들일 뿐이다. 어머니는 몇시간 전 세상 떠난 아버지가 북한을 비판하면 파르르 날을 세우던, 누가보면 천생 사회주의자였다. 그런데 기실 어머니의 사회주의란 첫사랑, 좀더 풀어쓰자면 여자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한 자도 인간 대접받는 세상에 불과했다. 신자유주의 대한민국도 그 정도는 해준다.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사회주의란그저 지나간 첫 남자가, 지나갔음으로 가장 그리운, 뭐 그런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넓게 울던 어머니는 눈 촉촉이 젖은 황사장을 그 이상의 촉촉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아직은 약간의 경계를 품고. - P21

개 이름 같은 아리는 내 이름이다. 아버지가 활동했던 백아산의 아, 어머니가 활동했던 지리산의 리를 딴 이름 덕분에 나는 숱한 홍역을 치렀다(사실 아버지가 주로 활동한 곳은 백아산보다는 백운산이었다. 그런데도 백아산의 아를 따온 것은 백운산의 백이나 운이 여자아이 이름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그러니까 제아무리 남녀평등을 주장했다 한들 반봉건시대에 태어나 가부장제의 그늘을 아주 벗어나지는 못한 반봉건적 사유의 발로였던 것이다). 학교에서나 관공서에서나 고아리, 내 이름을 말하면 아유, 이름이 참 예쁘네, 얼굴도 참・・・・・・ 하면서 나를 쳐다보았고 이내 말줄임표가 뒤따랐다. 나는 아리라는 이름 따위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딱 벌어진 어깨에 소도 때려 - P29

잡을 듯 강건한 육체를 지닌, 그러니까 혁명전사의 딸에참으로 걸맞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흔한 경숙이혜숙이 같은 이름이었다면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당황과 모멸의 순간을, 나는 당신들의 청춘을 기념하고자 했던 부모 덕분에 어쩔 수 없이 감당하며 살아왔고, 살아내는 중이었다. - P30

어찌 됐든 잘되면 자기 덕, 못되면 아버지 탓. 작은아버지가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는 생각이 든 순간 전화기 너머로 흐르는 정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은아버지는 평생 형이라는 고삐에 묶인 소였다. 그 고삐가 풀렸다. 이제 작은아버지는 어떻게 살까? 작은아버지는 지금쯤 빈속에 깡소주를 들이붓고 있을 것이다. 일흔 가까운 나이에 처음으로 마주친 형 없는 세상, 탓할 사람 없 - P41

는 세상이 두려워서 두려움을 이기고 작은아버지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찾아와줄까. 설령 오지 않는다 해도 아버지는, 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동생의 모진 말을 묵묵히견뎌내던 아버지는, 이번에도 타는 속을 소주로 달래며, 나는 모르는 씁쓸한 인생의 무언가를 되새기지 않으려나, 하면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았는데, 아버지는 당연히그거사 니 사정이제, 모르쇠로, 나는 어딘지 모를 어딘가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게, 아버지의 사정은 아버지의 사정이고, 작은아버지의 사정은 작은아버지의 사정이지, 그러나 사람이란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버지는 그렇게 모르쇠로 딴 데만 보고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뭐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오늘 작은아버지가 미국의 유명 아나운서 처벅이 죽은 그날처럼 취해서 차라리 대자로 널브러지기를, 그래서 올 수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 P42

별것 아닌 기억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아버지, 혁명가가 아닌 순간의 아버지, 거기서 어린내가 발견한 것은 뻔한 남자들과 다르지 않은 뻔한 행동이었다. 나이 든 뒤에도 나는 하동집을 지날때마다 고개를 외로 꼰 채 굳이 외면했다. 내가 외면한 것은 하동댁이아니라 위대한 혁명가의 외피 속에 감춰져 있을지 모르는뻔한 남성의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감옥에있었고, 나는 아버지가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위대한 혁명가라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그래야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 P66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아버지는 잘못 참는 사람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가 득세하는것도 참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라는봉건잔재도 참지 못했으며, 가진 자들의 횡포도 참지 못했다. 물론 두시간의 노동도 참지 못했다. 그런데 얼어 죽을 것 같은 고통은, 굶어 죽을 뻔한 고통은, 생사의 고비를함께 넘은 동료들이 바로 곁에서 죽어가는 고통은 어떻게 견뎠을까? 신념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내려와봤자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라는 지극히 절망적인 현실 인식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 P68

진정한 사람은 싸우지 않는다. 가타부타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싸우지 않는다. 똑똑한 아버지가 그건 몰랐다. 그래서 아버지는 분이 머리끝까지 차 싸움에 임하는 사람을 절대 이기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가 총을 들고 백운산과 지리산을 누빈 역전의 용사라는 게 나는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총을 메고 산이나 뛰어다녔겠거니, 발은 빠르니까, 그 시절의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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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 P7

사회주의자로서의 아버지는 제법 근사할 때도 있었으나 농부로서의 아버지는 젬병이었다. 사회주의자답게 의식만 앞선 농부였다. 아버지는 일삼아 『새농민』을 탐독했고 『새농민』의 정보에 따라 파종을 하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농사를 ‘문자농사‘라 일축했다. - P8

아버지의 눈빛은, 누군가 사진으로 그 찰나를 포착했다면, 처형 직전의 독립운동가나 학살당한 동지의 시신을 목도한 혁명가라 해도 믿을 만큼 진지하다못해 비장했다. 내가 풋, 웃음을 터뜨리려는 찰나, 어머니가 꽁무니를 내리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열일곱의 나는, 방물장수하룻밤 재우는 일에 민중을 끌어들이는 아버지나 그 말에냉큼 꼬리를 내리는, 꼬리를 내리다 못해 죄의식에 얼굴을 붉히는 어머니나, 그때 읽고 있던 까뮈의 『이방인』보다 더 낯설었다.
그날 어머니는, 허리가 아파 평소 된장찌개와 김치밖에 내놓지 않던 어머니는, 찬장에 고이 모셔둔 새 접시까지 총동원하여 당신으로서는 최대한의 극진한 식사와 잠자리를 대접했다. 민중에게.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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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입장들 3
정지돈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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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인듯, 에세이인듯 아주 독특한 정지돈 작가의 작품 세계. 2015 젋은작가상 작품집을 읽고 ‘다시 정지돈 작가의 소설을 읽어볼지는 모르겠다‘고 리뷰 남겼는데, 다시 읽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물음표... 건축에 무척 관심이 많다는 것과 나름의 유머를 구사한다는 것은 발견했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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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길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최초의 건물에는 욕망이깃들지 않았는데 이는 욕망이 외부에 투사되는 작동에는 내적 요인 이후의 외적 요인이라는 순서가 존재하는 게아니라 최초 발생 시점부터 함께 엮여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조영무는 말했다. 저는 사람들이 둘을 분리하기 시작한 수다한 증거를 알고 있습니다, 상업의 발달, 근대적 개인이 도시를형성시켰다거나 도시의 형성이 개인의식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식으로 둘을 아무리 오가도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저는 스스로에게 말했고 그러므로 돔에 대한 열망, 만주국 시절 다롄의 중앙광장에 서서 바라보던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돔과조선총독부의 돔과 도쿄 도의회의 돔과 워싱턴 의사당의 돔을 본 박정희의 시선이 투사한 돔에 대한 열정이 체제라는 형태를 넘어 종교적 형상으로 이어지며 이누이트의 돔과 로마네스크와비잔틴 양식의 두오모로 연결되는 순환선을 만들어내는 것아닐까라는 생각, 최초의 돔이었던 장충체육관에 자리를 잡고 설계에 없던 국회의사당의 돔을 올렸던 것의 저변에는 민족주의적 열망이나 권력에 대한 야욕이 아니라 돔이라는 형상, 천상에서 광장의 중심으로 낙하한 돔과 그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주의 중심을 뜻하기에 굳이 다른 것을 할 필요가 없다는 선후가 바뀐 메커니즘이 작동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게 저의 주요 골자였지만 이를 설명하기에는 여러 면에서 역부족이었다고 조영무눈 말했다. - P87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우리는 시작과 끝이 없는 시간을 만들 수 있다. 리나 보바르디는 말했다. 직선적 시간관은 서구의 발명품으로 시간은 즉흥적이고 엉켜 있으며 어떤 순간에도 임의 접속할 수 있다. 과거나 미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그녀는 1914년에 태어나 1992년에 죽었지만 말이다. - P95

언어를 따라 위대한 작품을 쓰겠다고 생각하며 도서관과 집, 카페를 오갔는데, 그 과정들이, 소설을 쓰기 위한 노동이 문학이라는 회사를 유지하기 위한 저임금 노동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판 정신, 몰락, 실패, 소외, 소수자적 의식, 심연, 진리, 윤리, 고통, 불가능. 이 언어들은 작가(지망생)들을 시스템에 봉사하게 만드는 일종의 열정 페이라는 사실, 문학과 이론은 아카데미와 국가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으며 그러한 체제내에서 체제를 견제하는, 행정부를 견제하는 사법부 정도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 그러니까 문학은 현실이나 시스템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사법부는 내부고발이나 비판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볼라뇨는 문학 + 병 = 병이라고 썼다. 바꿔 말하면 문학 + 법 = 법이다. - P104

존재-역사적 소설의 침입 2.1: 평론가 금정연, 시인 황인찬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황인찬은 말했다. 소설가들은 왜 이렇게 자기혐오가 심해요? 나와 금정연은 동의했지만 답하진 못했다. 생각해보면 시인이나 평론가 역시 자기혐오가 심하다. 글을 쓰면 쓸수록 자기혐오 또는 자기 연민이 심해지는데어쩌면 문학/문학 이론이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을 동력으로, 이것에 기생해서 작동하는 게 아닐까, 문학의 토대가 기만과위선이기 때문에 자기혐오/연민이 생길 수밖에 없으며 그런데이걸 다시 동력으로 삼아 작동하는 구조적 역학 관계가 있는 것 아닐까. 문인이라는 종족의 자기 연민, 공감하고 느끼고 소외되고 비주류인 나라는 의식이 성공이나 체제에 종속되는걸 거부하지만 실제로는 교수직이나 편집위원, 상업적 성공없이는 유지될 수 없고 이론이나 작품에서는 다시 플로베르나 프루스트, 카프카를 호출해야 하는 모순(이들의 계급을 생각해보라). 플로베르는 말했다. 마담 보바리는 바로 나다.
금정연은 물었다. 신형철은 나일까요?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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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12-15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형철은 나일까요 ㅋㅋㅋㅋ

햇살과함께 2022-12-16 10:01   좋아요 1 | URL
정지돈 작가님의 은근한 유머를 볼 수 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