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성별이 오로지 둘로 나뉘고 그 구분은 절대적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왜 하필 우리는 여성과 남성의 경계와 차이를 그토록 강조해왔는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공고한 젠더 체계를 의심하고, 그 경계를 넘나들어야 한다. 성별이분법이 우리 아이들의 행복과 고른 성장을 저해할 수 없도록.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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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읽었을 때의 충격이 생각난다. 그땐 첫째가 태어나기 전이었는데, 내 아이라면? 예상치 못한 무서운 소설이었다.

도리스 레싱은 200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집 앞으로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도리스 레싱은 심드렁했다. 노벨상부터 비판했다. 기자들에게도 친절하지 않았다. 도리스 레싱은 행여나 앞으로 글 쓸 시간이 줄어들까 봐 그 걱정만 했다. 88세 생일을 맞이할 즈음이었다. 도리스 레싱은 94세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는 작가로 살았다. 어린 시절의 불행했던 기억이 작가로서의 자산이었다고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자신의 삶을 사랑했다. 런던으로 가기 위해 망망대해를 건너는 순간부터 도리스 레싱은 작가의 길을 걷고 있었다. 글 쓰는 여자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 P31

"매일같이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등대로』를 쓰고 난 다음에, 나는 그들을 내 마음속에 묻어 버렸다." 버지니아 울프는 "나는 이제 누가 칭찬하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선언했다. - P40

콜레트는 누군가를 제대로 격려해 주는 일이 때로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콜레트도 먼저 누군가를 알아보고 응원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 P48

그의 믿음은 확고하다. 시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할 것인가? 작가는 오직 그 질문만을 던진다. "구원은 현재하고 있는 일에, 지금 쓰고 읽는 것에 존재한다." 글 쓰는 여자는 오늘에 집중한다. - P94

"소리 내 싸우는 건/ 아주 용감하다// 하지만 더 용감한 건/ 내면에서 싸우는 슬픔의 기병대/ 이겨도 나라가 알아주지 않고, 쓰러져도 누가 봐 주지 않으며," 결과도 장담할 수 없었다. 에밀리 디킨슨에게 기다림과 희망은 같은말이었다. "나는 가능성 속에서 살아갑니다." - P99

긴스버그에게도 "유대인, 여성, 엄마라서 삼진 아웃"을 당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늘 패배했다면, 내일은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는 법이다." 내일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인재들 가운데 적어도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이"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고, 여성을 지지해야 한다. 내일을 위해 긴스버그는 오늘도 연방 대법원 계단을 올라간다. 글 쓰는 여자는 크게 도약한다. - P111

2003년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에서 독일 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한 수전 손택은 문학을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라고 정의하며, 문학을 선택했기에 "국가적 허영심, 속물근성, 강제적인 편협성, 어리석은 교육, 불완전한 운명, 불안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다행스러워했다. - P148

"백인에 대한 책은 언제 쓰실 건가요?" "어째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쓰지 않습니까?" 토니 모리슨은 이 질문의 의도를 꿰뚫어 보았다. "당신은 글을 잘 씁니다. 그러니까 나에 대해서도 쓰도록 허락하지요." 부당하고 폭력적인 요구였다. 때때로 ‘중심부’에 있는 백인들이 토니 모리슨을 회유하기도 했다. "당신은 글을 꽤 잘 씁니다. 원한다면중심으로 올 수 있을 겁니다. 주변에 머물 필요가 없어요." 토니 모리슨은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아, 그렇군요. 저는 여기 주변부에 머물면서 중심부가 저를 찾도록 할 겁니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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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도서관에 애들 책 빌리러갔다 발견한 책. 반납전에 빨리 읽자!
국립중앙박물관 영국 초상화전에 있는 브론테 자매 그림이 낯익다 했는데 북플에서 이 책 표지를 많이 봐서 그런거였네~

또한, 여성 작가들은 모두 크게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평생에 걸쳐 편견과 차별, 폭력에 맞서야 했다. 찬사만 받은 작가도 없었다. 혹평에 좌절하지 않았다. 근거 없는 소문과 오랫동안 싸워야 했다. 순간순간 닥쳐오는 난관을 직접 돌파하며 꾸준히 성장했다. 살면서 죽을 고비도 숱하게 넘겼다. 어떤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한 문장한 문장에 자신의 전부를 걸었다. - P7

"나는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의 영화화 판권으로 노플르샤토의 이 집을 샀다. 내 소유의, 내 이름으로 된 집이다. 이 집을 사고 나서 미친 듯이 글을 썼다. 마치 화산이 폭발한 것 같았다. 집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이 집은 나의 유년기 아픔들을 달래 주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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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옥, 김명시, 박차정, 이화림

기사를 보고 나는 실소했다. 일제의 검열 때문이라 해도 내가 중국 군대까지 가서 비행사로 활동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꽃 같은 여류비행사" 따위의 말만 가득한 데다, 동지인 이영무를 연인이라 하니 어이가 없었다. 수많은 여성이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건만 여자를 보는 세상의 눈은 변함이 없구나 싶었다. 그래도 신문기사 덕분에 가족 친지들이 내가 조종사가 되어 전장을 두비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리라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 P232

당시 우리 조선 여성은 남존여비의 봉건적 속박에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기본적 인권마저 유린당하는 이중의 구속을 받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고 진정한 해방을 이루려면 여성이 주체가 되어 주도적으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민족혁명당과 별도로 여성 통일전선 조직을 만든 이유였다. 나는 당원 가족을 중심으로 여성들의 단결과 훈련에 힘쓰는 한편, 《앞길》이라는 잡지에 여성문제 해결에 관한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 P271

여러 날이 지난 뒤 마침내 김구 선생을 만났다. 그는 냉담한 얼굴로 불쑥 물었다.
"너의 조국은 어디인가?
"나의 조국은 조선이고 평양에서 자랐습니다."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는 비로소 경계를 풀었다.
나는 여성은 안 된다는 그를 집요하게 설득해 결국 애국단에 가입했다. 1931년 가을의 일이다. - P285

난징에서 나는 조선민족혁명당 부녀국에서 박차정 등과 함께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그 무렵 윤세주 등 간부들의 권유로 독립군 장교인 리집중 동지와 재혼했으나 그 역시 가부장적으로 내 활동을 속박하기에 이내 헤어졌다. 당차원에서는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남자와 평등해야 한다고 선전하고 있었으나 실제론 전혀 그렇지 못한 현실 앞에서 나는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내게는 가야 할 길이 있기에 결코 후퇴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았다. - P290

"이화림의 타고난 결함은 여자다운 데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군복을 입었더라도 여자는 여자다운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그녀는 남성 동지들의 호감을 통 사지못했다. 나도 워낙 속이 깊지 못하고 경박한 편이어서 덩달아 이화림을 비웃고 따돌리고 하였으니 정말 부끄럽고 면목이 없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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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으로 이름을 되뇌어 봅니다. 기억하기 위해.
박자혜, 김옥련, 정칠성, 남자현, 안경신, 김알렉산드라

"당신이 남기고 가신 비참한 잔뼈 몇 개 집어넣은 궤짝을 부둥켜안고 마음 둘 곳 없나이다. 작은 궤짝은 무서움도 괴로움도 모르고 싸늘한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은 뜻을 못 이루고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시더니 왜 이렇게 못난 주제로 내게 오셨습니까. 분하고 원통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의 원통한 고혼은 지금 이국의 광야에서 무엇을 부르짖으며 헤매나이까? .… 당신의 괴로움과 분함과 설움과 원한을 담은 육체는 2월 22일 오전 11시, 남의 나라 좁고 깨끗지 못한 화장터에서 작은 성냥 한 가지로 연기와 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이여! 가신 영혼이나마부디 평안히 잠드소서…" - P114

그래도 견뎠어. 주모자를 불라고 하는데 우리는 아무 말도 안 했어. 자칫하면 우리 선생님들이 고초를 겪을 테니까. 우리한테 선생님들은 부모보다 더한 분이야. 부모는 어디 사상이나 공부에 대해서 얘기해주나? 다들 여자는 공부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분들이 우리를 공부시키고 눈을 뜨게 해줬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참았지. 나중에는일제 경찰들도 우리 해녀들의 강인한 기질과 단결심에 탄복을 하더라고. - P131

해방이 되고 이리 잘사는 나라가 됐지만 가끔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우리가 한 일은 자랑스럽지만 세상이 너무 박하고 빨리 잊는 것 같아서. 하지만 후회는 안 해. 우리가 누구야? 제주 바다를 지키고 나라를 지킨 해녀잖아. 자랑스러운 설문대 할망의 후손인 제주 해녀라고! - P133

그이는 우리처럼 머리로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하고는 달랐습니다. 젊어서는 나도 사회주의 공부하고 여성해방, 민족해방을 부르짖었지만 현실과는 괴리된 관념론, 이상론에 가까웠지요. 한데 정칠성 씨는 일제를 왜 타도해야 하는지, 여성해방이 왜 필요한지, 어떻게 해야 가능한지, 몸으로 마음으로 알았던 것 같아요. 내가 진작 그걸 깨달았으면 삶이 좀 달라졌을까…. - P144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글도 참 잘 썼어요. 1926년에 삼월회 간부 자격으로 《조선일보》에 <신여성이란 무엇>이라는 논설을 발표했는데 어찌나 명쾌하게 잘 썼는지, 장안의 화제가 됐답니다. 신여성 하면 자유연애부터 떠올릴 땐데, "신여성이란 구제도의 불합리한 환경을 부인하는 강렬한 계급의식을 가진 무산여성"이고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려는 정열이 있는 새 여성"이라고 선언했다고. 어떤 작자가 그걸 보고 기생이 이런 글을 쓸 수가 없다고, 누가 대필해준거라고 해서 내가 아주 혼쭐을 내줬어요. - P146

나는 그의 배려로 군정서에 입단하여 다른 여성들과 함께 대원들이 입을 옷을 짓고 음식 준비를 했다. 남의 땅에서 많은 대원을 먹이고 입히는 일은, 그 자체로 작은 나라 하나를 경영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만큼 고되고 큰일이었다. 부인네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는 자랑도 없이 묵묵히 이 힘든 일을 해내고 있었다. 감동적인 헌신이로되, 독립투쟁에서조차 남녀유별이 있는 듯해 속상하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군자금과 식량을 마련하는 등 독립군 지원 활동을 하면서 망명 생활에 적응해갔다. - P163

"독립 청원이나 협상으로는 결코 오늘의 사태를 해결할 수 없소. 협의로 안 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 무엇이겠소? 무력으로 응징하는 것 외에 또 무슨 방법이 있느냐 말이오?"
단호한 대답에 김보원은 낯을 붉혔다. 화가 난다기보다 부끄러운 마음이 더 컸다. 일부 사람들처럼 보원도 처음에는 경신의 작고 못생긴 외모만 접하고 얕잡아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게 얼마나 한심하고 못난 생각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의 작은 몸에 깃든 커다란 내면, 이 내면세계를 관통하는 알차고 강인한 투쟁 정신을 알기 때문이었다. - P187

차르의 전제정치에 신음하는 러시아 민중이나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살길을 잃은 조선 민중이나, 지배계급의 억압 아래 똑같이 고통받고 있음을 알렉산드라는 절감했다. 두 나라 민중이 자유롭고 사람답게 사는 길은 독재와 제국을 무너뜨리는 혁명뿐이었다. - P207

알렉산드라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나는 볼셰비키다. 나는 억압받는 민족과 소비에트 정권을 위해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나는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해야만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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