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메이어는 우울증‘이라는 진단 역시 아주 미국적인, 독특한 형태라고 말한다. 그는 고통스러운 감정과 느낌을 낯선 사람에게 기꺼이 공개하고 마음의 고통을 의료 문제로 보는 성향을 지닌 것은 미국인이 유일하다고 지적한다. 다른 문화에서는 대체로 내적 고통에서 도덕적·사회적 의미를 찾기 때문에 공동체 내의 어른이나 영적 지도자들을 찾아가지 공동체 밖의 의사에게 도움을 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우울증을 호소하는 여성 중에서 연령대가 높을수록 무속신앙 등을 찾는 이들이 많다. 특히 정신과를 찾아가는 일을 어려워하거나, 찾아갔더라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아 실망한 경우 무속신앙에 의지하는 경우가많다. - P55

진단은 해방인 동시에 억압이다. 진단은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병리, 현실과 환각, 진짜 고통과 가짜 고통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 진단은 미스터리했던 증상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나와 같은 사람을 찾게 해준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심지어 나조차도 승인하지 않았던 고통을 인정해 준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멋대로 규정하고 낙인찍는다. 수치심을 준다. 삶을 재단한다. 과거를 멋대로 해석하고 현재의 정체성을 건들며 미래를 예언한다. - P62

이렇게 보면 우울증 환자가 많아졌다는 것은 실제로 병을 앓는 환자가 많아진 것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 우울한 상태를. 병리적인 것으로 인식하면서 의학적 틀을 적용해 우울 증상을 이해하고 치료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기존에는 의학적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증상들이 의학적 문제로 정의되는 과정을 ‘의료화 medicalization’라고 부른다. 우울증은 알코올의존증, ADHD, 출산, 비만과 더불어 대표적인 의료화 사례이다. - P74

당사자에게 진단이란 나의 우울이 병이냐, 병이 아니냐 하는 문제라기보다 누군가 나의 고통을 알아주는가, 알아주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고통을 계속해서 호소하는데도 반응하지 않는 사회에서 오래 홀로 버티던 사람에게 누군가의 ‘알아줌‘은, 그것이 설령 신자유주의 시대 감정 관리의 결과이며 다국적 제약 회사의 자본주의적 책략이라 할지라도 소중한 것이다. 증상만 나아진다면, 고통만 경감된다면 무엇인들 못 할까?
‘알아줌‘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다. 어쩌면 전부이다. 누군가를 죽고 살게 한다. - P78

의사는 약효가 나타나기까지 2주 정도 걸린다고 했다. 혈액는 내의 리튬 농도가 일정 수준 이상 높아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기다리는 2주 동안 죽을 맛이었다.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2주를 버티라는 것인지. 산소도 빛도 부족한 심해에서 무척이나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점차 감정의 진폭이 잦아들었다. 효과가 있었다. 솔직히 그 이상으로 충격이었다. 마치 평생 초고도 근시로 살던 사람이 라식 수술을 하고 처음 눈을 뜬 기분이랄까. 배신감도 느꼈다. 모두가 이렇게 살았다고? 이렇게 인생이 쉬웠다고? 태어나서 처음느껴보는 평온함이었다. - P85

현대인이 겪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 속에서 우울증을 분석하는 연구들도 있다. 이러한 연구들은 20세기 말 정신의학에서 형성된 우울증의 질병 개념은 당시 사회에서 올바르게 받아들여지는 개인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울증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무력한 사람들의 질병이다. 이들은 정신의학에서 정의하는 정상성의 기준이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기관리에 철저한 현대인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 P102

지현은 병원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이제는 ‘관리 잘하는 우울증 환자‘ 이상의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병원에 가면 대부분 저를 다독였던 것 같아요. 무리하지 말라고요. 그러면 저는 제 한계를 정해놓게 돼요. 그럴 때면 먹고 자고 배설이 잘되는 상태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평생을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을 텐데. 내가 가진 불안장애나 우울증이 어떤 면에서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대단한 야심을 부리는 건 아닌데. 어떤 시도를 하고 싶을 때 병원에서는 리스크가 있으니까 그걸 말리죠. 더 안 좋아지면 어떡하려고요, 이렇게요. 임파워링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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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들은 아픈 상태에서도 수천 번 자기 경험을 곱씹고재해석하며 성장했다. 이들은 가정폭력 혹은 성폭력의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피해를 고발하고 뭔가를 바꿔보려 한 생존자이다. 이들은 스스로 이상을 감지하고 제 발로 병원을 찾아간다. 이들은 돌봄이 필요하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돌봄을 제공해 왔다. 이들은 도움받는 위치에만 머무는 것을 불편해한다. 이들은 온전히 자신의 언어로 말한다. 의사와 상담사를 포함한 누구에게도해석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 말이다. 이야기에는 모순과 혼란이 있다. 진공 속 피해자가 아닌 살아 있는 인간이기에 그러하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나였지만, 끝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내가 만난 여자들을 우울증, 불안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같은 딱지를 붙여 구분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 이들이 풀어내는 이야기의 옹호자이고 싶다. 자기 삶의 저자인 여자는 웬만큼 다 미쳐 있다. - P6

정신의학 교과서에서 남성의 우울은 여성의 우울과 달리 성호르몬보다는 사회문화적 요인으로 설명된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 역시 성호르몬을 갖고, 또 특정한 생애 주기를 경험하지만, 테스토스테론은 남성의 정신질환을 진단하는 데에 주요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의학에서 표준이 되는 몸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남성의 몸이 표준이 될 때 아픈 것, 병리적인 것, 비정상적인 것은 남성 몸 바깥에 놓인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우울과 같이 병리적인 상태를 설명할 때 그 원인은 남성의 ‘정상‘적인 몸이 아닌, 그를 힘들게 한 외부적 요인, 곧 사회문화적인 조건에서 찾아진다. 반대로 여성의 우울은 그 원인이 여성의 ‘비정상‘적인 몸 안에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곧 여성이 아픈 것은 ‘원래 그렇게 태어나서이다.
여성이 겪는 질병의 원인은 왜 자꾸만 여성의 몸, 그중에서도 성호르몬 등 생식기와 관련된 것으로 설명될까. 나는 남성을 표준으로 두고 의학 지식을 만들어 온 사람들이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분석할 때, 그들을 둘러싼 온갖 사회·문화·경제적인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생식기 위주로 사유해 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남성 지식인은 여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생식기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 P24

아픈 사람이 호소하는 고통이 몸에서 시작됐는지, 아니면 마음(도대체 거기가 어딘지?)에서 시작됐는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왜 그렇게 의학적으로 판명하기 어려운 질환을 가진 사람은 유독 여성, 노인, 빈곤층 등에 더 많은 것인지 질문할 필요는 있다. 마야 뒤센베리 Maya Ducenbery는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2019, 한문화)에서 "여성과 사회적 빈곤층이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을 더 많이 보인다면 이는 아마도 의학이 이들 계층의 증상을 탐색하는 데 관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 P28

신체형 장애는 특히 여성, 가난한 사람, 시골에 거주하는 사람 등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더 흔하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환자가 여성이다. 신체형 장애는 상당히 문제적인데 우선 환자가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대단히 뿌리 깊은 여성혐오의 역사, 미친년의 역사가 깃든 장애이다.
우선 신체형 장애는 과거 히스테리아hysteria로 불리던 질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가 흔히 ‘히스테리‘를 부린다고 말할 때의 그 히스테리이다. 히스테리아는 자궁을 뜻하는 그리스어 히스테라hystera에서 유래한 말로, 자궁의 이동을 의미한다. 여성이 광기를 보이는 이유를 자궁이 몸속을 돌아다니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 P29

미국의 과학사학자 마크 미칼레Mark s. Micale는 히스테리아를 일컬어 "남성이 그 반대의 성에게서 찾은 불가사의하고 감당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극적인 의학적 은유"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 P30

진단명보다도 마음에 남은 건 다음과 같은 기록이었다.

부적절한 정서, 내면적 우울감에 비해 표정이 밝고 과도한 사회적 미소

떠올려 보았다. 수 개월간 계속된 불면증과 우울, 불안에 지친 마음을 안고 방문한 정신과 진료실 안에서도 본능적으로 얼굴에 웃음을 띠던 때를, 낯선 이 앞에서 내 감정 상태가 그를 불편하게 할까 봐 초조했던 마음을. 그리고 이러한 불일치가 의무기록에 쓰일 만큼 병리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에 놀랐고 어쩐지 수치스러웠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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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미 오래전에 버린 줄 알았던 몸에 대한 낡은 관점이 아직도 내 안에 있음을 확인했다. 여전히 몸을 내 삶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여기며 대상화하고 있었다. 심지어 ‘정상적 몸, 건강한 몸, 표준의 몸‘을 설정하고, 그에 가깝지 못한 내 몸에 낙담했다. 나는 아픈 몸을 최대한 통제해서 어떻게든 건강한 몸으로 만들려 했다. 마치 장애인에게 재활을 통해서 최대한 비장애인과 가까운 몸을 만들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몸을 소외시켰고, 질병은 나를 소외시켰다. 결국 질병과 몸은 분열할 수밖에 없었다. - P187

과거에 장애인 관련 담론이나 정책은 의료인이나 사회복지정책가들이 주도해왔는데, 이들은 주로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의료적 치료를 통해 장애인의 몸을 비장애인의 몸에 가깝게 만들어 차별을 극복해야 한다고 설명해왔다. 이를테면 경사로나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보다는 장애가 있는 몸이 계단을 걸을 수 있도록 치료하는 것을 더 중시해왔다. 반면 장애인 인권운동은 장애가 있는 몸을 교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계단이 있는 곳 어디든 경사로와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평등한 접근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구조와 문화를 ‘교정’함으로써 장애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 P196

아리스토텔레스는 통증이 사람의 본질을 어지럽히며 파괴한다고 했다. 이는 고문과 연결 지어 생각해보면 명확해진다. 고문이란 잠을 못 자게 하거나 몸에 인위적 통증을 가해 정신을 약탈하고 지배하는 행위다. 통증 환자들은 일상에서 잠을 못 자고 종일 통증을 느끼는 ‘고문‘을 겪는다. - P208

이런 죽음을 맞이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죽음의 과정에서 의료와의 긴장이 필요하다. ‘자연의 흐름대로 죽어갈 권리‘를 의료에 뺏기지 않으려면 나도 어쩌면 할머니처럼 투쟁이 필요할지 모른다. 삶에서 자기결정권이 중요하듯 죽음의 과정에서도 자기결정권이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죽음에 대한 주도권을 그 죽음의 주인이 아닌 의료가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료는 죽음을 무조건 지연시켜야 하는 무언가로 만든 듯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죽음은 삶의 완성일 수 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다시 들여와야 하는 이유다. 의료와 죽음의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 - P243

한국 사회가 OECD 가입국 중 산업재해 사망 통계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는 것은 알려져 있다시피 ‘안전장치 값보다 목숨값이 더 싸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일한 사업장에서 비슷한 사고가 반복적으로 발생해도 사업주는 안전장치를 설치하기보다 약간의 벌금을 내고 만다. 정부는 재벌과 대기업의 눈치를 보느라 바빠서인지 문제가 된 기업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다. 특히 갑작스러운 사고사가 아니라, 독성물질이나 과도한 업무로 질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갈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아예 산재로 인정조차 되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 - P267

심지어 기업은 노동자의 산재를 인지하면 은폐하려 드는 경우가 빈번하다. 오죽하면 직장에서 쓰러진 사람을 구급차가 아닌 트럭에 실어 병원으로 이송하는 일이 발생할까. 산재를 은폐하기 위해 생명이 위독한 노동자를 구급차에 탈 수 없게 만들고, 결국 트럭에서 응급치료도 받지 못한 채 골든타임을 놓치고 사망으로 이어지는 현실이 반복된다. 그러니 당장 죽지 않는 질병의 경우는 더더욱 ‘꼼수’를 써서 산재 처리를 하지 않도록 노동자를 종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국가인권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산재가 가장 많은 업종인 조선업계에서 하청 노동자 중 산재보험으로 처리된 노동자는 7.2퍼센트에 불과하다. - P275

하지만 한국은 직장에서 노동자 건강권이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다. 1960~1970년대에는 국가가 빨리 배고픔을 면해야 해서, 1980년대엔 경제가 겨우 제대로 성장하고 있어서, 1990년대에는 IMF 금융위기가 와서, 2000년대에는 실업률이 높아져서…. 그리고 앞으로도 여러 이유가 ‘발명‘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거의 매년 ‘산재 국가 1위‘ 타이틀을 놓치지 않는 데는 이렇듯 이유가 있다! - P281

쉼 없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추구한 결과, 노동환경은 이제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나빠졌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계속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추구하면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죽도록 일하다가 서서히 죽거나(질병), 한 번에 죽거나(사고, 돌연사), 쫓겨나서 생계가 막막해 죽거나(해고), 혹은 그 셋에 속할 ‘기회’도 없이 실업 속에서 빈곤으로 죽게 될 것이다. - P281

질병을 정의하고, 발생 맥락을 규정하며, 치료 과정을 설정하는 것은 매우 정치적인 행위다. 질병을 어떻게 규정하고 질병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다른 몸을 만나게 된다. - P292

국민들의 오랜 염원이던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가 마침내 실현된 것은 1989년이었다. 이는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건강권은 요구에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싸워서 얻어진 인권"이라고 했던 코피 아난Koh Annan 전 유엔사무총장의 말이 떠오른다. 이미 수많은 시민들은 민간보험으로 각자도생하기보다 월 1~2만 원을 더 내고 무상의료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점점 더 드러내고 있다. - P314

음악과 몸의 느낌에 따라 움직이는 막춤을 자주 추다 보니, 언젠가부터 통증과 질병에 갇혀 있던 몸이 조금씩 해방감을 느끼게 되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열려 꿈틀거리는 듯했고, 늘 천근만근 무거워서 싫기만 하던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공기와 섞이며 유쾌한 기분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춤을 출수록 몸을 더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호흡에 따라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허리를 숙일 때 얼마나 많은 뼈와 근육이 협동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춤을 추다 보니, 내 몸에서 통증이나 질병 말고도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매 순간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덕분에내가 생존해나간다는 사실도 새롭게 발견했다. 수많은 근육과 조직의 움직임에 경이롭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 P339

사람은 모두 건강왕국과 질병왕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난다. 아무리 좋은 쪽의 여권만 사용하려 해도 결국 한 명 한 명 차례대로 우리가 다른 영역의 시민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 P341

그런데 옆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이가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아프고 약한 사람들이 왜 돌아다녀, 집에 있어야지." 굳어지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게 본인한테도 안전한 일이고 ..." 라며 말끝을 흐린다. 익숙한 말이다. "휠체어 타고 버 - P347

스는 왜 타, 집에 있지. 네가 고생스러우니까 하는 말이야", "애기 데리고 복잡한 식당에 왜 와, 집에 있지. 애가 힘들어하니까하는 말이야", "노인인데 왜 시내까지 나와, 집에 있지. 어르신이 지칠까 봐 하는 말이야."
무지가 만든 폭력적인 말이 지겹다. 하지만 이럴수록 아픈 몸이 사는 세계를 둘러싼 면밀한 설명이 더욱 절실하다. 아울러 다양한 몸들이 사는 세계에 대한 설명이 나와야 하고, ‘이런 몸‘이지만 당신처럼 우리도 여전히 계속되는 생 위에 놓여 있음을 확인시켜 줘야 한다. - P348

내가 고마움을 표할 때마다 친구들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서로의 집이기로 했잖아", "우리가 서로한테 보험 가입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우리가 서로의 엄마인 거 아니었나?" 친구들이 독립해 1인 가구로 삶을 시작하거나, 비혼주의자로 자신을 정체화正體化했을 때 서로에게 좋은 울타리가 되어주자며 나눈 이야기들이다. 처음에는 다소 진지한 태도로 말했지만, 이후에는 집에 문제가 생겨 잘 곳이 필요하거나, 술값을 내거나, 서로에게 잔소리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할 때 농담처럼 쓰기도 했었다. 이렇게 우리는 여러 상황에서 한 번씩 서로에게 ‘집’, ‘보험’, ‘엄마’ 노릇을 해주고 있다. - P359

몇 년 전부터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 말이 맞다. 비혼은 기존 가족제도를 위협한다.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들어가길 거부했더니 지금과 같은 불평등한 가족제도의 재생산을 위협하게 되었다. 개인의 가치를 수용하지 못하고, 가부장적이며, 이성애 중심적이고, 여성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유지되는 지금의 가족제도가 하루 빨리 균열되길 바란다. 게다가 비혼이면서 1인 가구인 이들은 노동시장의 전형적인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마저 흔들고 있다. - P363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이런 시선과 언어의 차이를 가장 크게 느끼는 곳은 미투 운동일 것이다.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의 주장이 경합하는 모습은 동일한 현실을 서로가 얼마나 다르게 살고 있는지 새삼 확인시켜 준다. 동일한 행위를 놓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는 상황이 자주 벌어진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성폭력은 해석 투쟁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폭력뿐 아니라 ‘존재에 대한 억압을 해방으로 바꿔가는 사회운동‘은 기본적으로 그렇다고 본다. 억압받고 차별받는 존재들이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그 해석을 위한 논리를 ‘개발‘하며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사회가 좀 더 평등해지는 과정이다. - P378

여성운동에서 누가 여성인가는 논쟁적 주제다. 장애인운동에서도 무엇이 장애인가는 지속적으로 논의되는 주제다. 각각은 고정된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게 아니며, 그것을 질문하는 행위 자체가 운동의 좌표를 계속 질문하는 주요 과정이기도 하다. 건강권 운동(보건의료운동)에서도 마찬가지로 건강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논쟁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 싶다. 더 풍부한 논쟁이 다양한 소수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진행되었으면 한다. -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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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무지가 있다. 첫 번째는 성폭력 피해자가 극소수라고 판단한다는 점이다. 즉, 성폭력 현실 자체를 전혀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적 무지다. 두 번째는 성폭력 피해가 직접 발생했을 때만 여성의 건강권이 손상받는다는 인식이다. 이는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여성에게 일상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하는 무지, 그리고 건강권에 대한 협소한 이해에서 발생한다. - P158

말하기는 그 자체로 치유와 회복의 효과가 있다. 심리적 외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객관화하는 데 중요한 과정이며, 심리적 외상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텍사스 대학교의 한 연구에 따르면, 심리적 외상을 말하지 않았을 때 더 높은 수준의 불안증, 우울증, 불면증을 겪게 된다고 한다. 이 연구는 심리적 외상에 대해 털어놓았을 때 자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은 물론 신체건강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 심리적 외상 경험을 털어놓은 집단은 혈압, 심장박동률 등이 더욱 안정되었고 신체의 면역체계도 향상되었다. - P162

성폭력과 건강권 문제를 제기하면, 피해자에 대한 의료적·정서적 지원이 중요하다는 흐름으로 모아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건강 문제에서 치료도 중요하지만, 예방을 빼놓고 논의되는 치료는 무력하다. 성폭력을 발생시키는 구조를 부수는 과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젠더 불평등, 이분법적 성역할, 폭력을 머금은 이성 연애 각본의 해체와 재구성 등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성폭력이 발생시키는 여러 질병에 대한 적극적 예방이다. 성폭력 현실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성평등한 건강권은 없다.
WHO에 따르면 건강 불평등은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서 나타나는 건강 차이 중 불필요하고 피할 수 있으며 부당하고 불공정한 부분이다. 성폭력은 우리 사회가 변화시킬 수 있는 부당하고 불공정한 부분이다. 성폭력이 바로 성별 건강 불평등을 일으키는 가장 강력한 요소다. 자기 몸에 대한 폭력을 통제할 권리가 부족한 상태에서 건강권을 말하기 어렵다. 성폭력을 발생시키는 구조를 해체하지 않는 한, 여성 건강권은 없다. - P167

그런데도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남성의 해고에만 주목하며 ‘고개 숙인 아버지’를 위로하기 바빴다. 일상에서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여성의 몫이었다. 여성들에게는 그 남성들을 위로하라는 사회적 의무가 주어졌다. 수많은 언론은 남편 기죽지 않게 잘 - P173

보살피라고 주문하면서, 남편이 실직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을 아내의 잘못으로 돌리기도 했다. "IMF 한파를 뛰어넘는 데는 아내의 역할이 중요"하고, "남편들이 실직 사실을 알릴 용기를 내지 못하는 데는 아내들의 잘못도 크다"면서 "남편을 왕처럼 최고라고 추어올려주라"고 말했다. 여성들은 취업하면 실업자 남편이 기죽을까 봐 걱정했고, 취업을 못하면 무능한 아내로 취급받기도 했다. 직장을 잃은 남편들은 그 고통을 아내에게 퍼부어, IMF 시기에 남편의 아내 폭력이 급증했다는 보고도 있다.
IMF 구제금융 당시 여성은 우선 해고를 통해 경제적 위험을 흡수하는 안전판으로 동원되었다. 가족 안에서는 남편 기를 살리는 아내 역할, 알뜰한 살림과 취업으로 가정경제에 보탬이 되는 능력 있는 엄마 역할을 할당받았다. 절대적 희생을 통해 가정붕괴의 위험을 막는 에어백 역할을 요구받은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현재에도 계속되는 일상이지만, 당시 상황은 이를 더 극단화했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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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암은 여성스럽지 않잖아요. 그런데 자기한테 나타난 출혈이나 갑상선암 같은 병들은 다 여성스러워. 현기증이나 빈혈도 영화 속 여자 주인공 병이잖아. 나는 병에 걸려도 꼭 폐암 같은 남자병에 걸려. 안 그래도 덩치가 커서 여성스럽기 힘든데 말이야."
질병에도 여성스럽다는 말이 붙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자궁이나 전립선 질환이 아니라 폐암, 간암, 위암 같은 질환을 여성스러운 질병과 남성스러운 질병으로 구분하는 상상력이 당혹스러웠다. - P110

질병보다 위험한 질병 이미지

사실 나도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책 《은유로서의 질병llness as Metaphor》에 따르면 19세기에는 결핵이 ‘천재들의 병‘, ‘예술가들이 걸리는 병’으로 낭만화되었다. 손택은 한 프랑스 시인이 45킬로그램이 넘는 사람에 대해 서정시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을 지적하며, 결핵으로 인한 창백함, 쇠약함, 무기력, 저체중 등이 숭상되었던 문화를 보여준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창백한 혈색과 가냘픈 몸을 여성의 이상적 용모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19세기 결핵 문화의 영향이라고 설명한다. - P113

이미 질병에 대한 낙인과 차별이 넘치는 세상이다. 그런데심지어 병명에 따라 여성스러움을 구분하고 집착하는 현실이라니, 어디서부터 변화를 말해야 할지 아득하다. 알다시피 여성성, 남성성이라는 것은 없다. 여성과 나약함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하는 논리적 필연적 개연성은 없다는 뜻이다. 여성성이라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깊숙이, 그리고 잔인하게 머물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질병 앞에서조차 여성스러움을 고민하게 되는 현실이 먹먹하다. 여성성에 의해 포획된 혹은 조각난 우리 몸들은 어디서부터 복원을 시작할 수 있을까. - P114

‘여성이 몸‘으로 환원되는 현실과 ‘동물이 고기‘로 환원되는 현실의 연결고리를 발견했을 때 마주한 감정, 더 많은 새끼를 생산하기 위해 평생에 걸쳐 임신하고 그 임신한 새끼를 평생 빼앗기는 암소, 암퇘지, 암탉의 현실에 내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여성을 ‘소유‘하는 행위에 대해 ‘먹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의 직접성과,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이 "고기가 된 기분이었다"라고 말할 때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포르노그래피가 여성을 암컷 고기 덩어리로 묘사한다"고 지적한 미국의 페미니스트 안드레아 드워킨Andrea Dworkin의 말도 머리를 맴돌았다. 그 말이 잊힐 때쯤에는 캐럴 애덤스Carol Adams가 《육식의 성정치The Sexual Politics of Meat》에서 "고기는 포르노와 유사하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즐거움이 되기 이전에 그것은 누군가의 삶이었다"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애덤스는 이 책에서 남성 지배와 육식 문화의 상관성을 밝혔다). - P118

우리는 모두 다양한 가치와 신념을 추구하며 산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의 여러 의미 중 하나는 낯선 것에서 오는 어색함이나 불편한 느낌을 섣불리 상대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다. 낯설고 불편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그 실체를 조물락거려보는 일이다. - P121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타인의 돌봄 속에서 살아가고, 돌봄은 감정노동을 동반한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영역이다. 요즘에는 돌봄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덕목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하지만 돌봄노동은 여전히 성별화되어 여성에게만 갇힌 채 순환되지 못하고 있다. - P125

어떤 이들은 생활동반자 관계법이 의미 있지만 시기상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언제가 적합한 시기일까? 1990년대에 호주제 폐지 운동을 하던 때가 떠오른다. 당시 거리로 호주제 폐지서명을 받으러 나갈 때마다, 일부 시민들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심지어 한국의 가족제도를 흔든다며 우리에게 고함을 치고 난동을 부리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호주제 폐지 운동이 열정적으로 진행되고 마침내 폐지되자, 바로 그 시기를 즈음해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친 여아 성 감별 낙태가 한국에서 꾸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가족 내 여성의 지위와 관련한 직간접 변화도 일어났다. 사회 변화가 제도를 바꾸기도 하지만, 제도 변화가 사회변화를 추동하기도 한다. - P137

비혼과 1인 가구의 증가는 기존의 가족 안에 묶어둔 돌봄노동을 사회화하는 좋은 촉진제다. 특히 1인 가구를 전제로 보건의료 관련 제도가 만들어지고 시행될 경우, 이는 1인 가구에게만 유용한 것이 아니다. 1인 가구를 전제로 한 정책은 가족을 1차적 복지 담당자로 놓던 문화를 해체시킨다. 비로소 사회의 구성단위가 가족이 아닌 개인으로 ‘현대화’된다는 의미다. 이로써 혈연가족이나 다인 가구 안에서 ‘복지 담당자’이기만 했던 여성들도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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