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가 가장 잘 읽히지 않았다. 1부는 주로 몸, 통증, 고통, 용서에 대한 책을 얘기하는데, 정희진 선생님 특유의 머리를 마구 찌르는 질문들에 온통 의문투성이로, 계속 혼란을 느끼며 읽었다. 2,3부는 그 혼돈에 익숙해진 것인지, 폐미니즘에 대한 글이 많아서인지 상대적으로 잘 읽혔지만, 여전히 내 머리 속에 고여있는 가부장적, 권위주의적 생각들을 계속 퍼내고 새로운 의문들을 담아내야 했다(그렇지만 그 의문들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기도 힘들다). 정희진 선생님의 책은 그냥 서평 책이 아니다. 계속 나를 파괴하는 힘이 있다.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책에 나온 27권 중에서 이미 읽은 책은 [빨래하는 페미니즘]과 [인 콜드 블러드] 2권이다. [빨래하는 폐미니즘]은 재작년에 읽었는데 다시 읽어보고 싶고, [아내가뭄]과 [페이드 포]가 가장 관심 간다. 물론 계속 언급되는 베티 프리던과 보부아르와 주디스 버틀러 등등을 읽어야 한다는 부채감도(계속 외면 중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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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2-09 17: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이드 포>강추합니다~♡
여성 스스로 가지고있는 가부장적 편견을 깨는게 쉽지 않은듯해요.
저도 이런 책들 읽고 나서야 그런 부분들이 조금씩 보이고 놀라고...
정희진님의 3부작 읽어봤는데 여기 담긴 책들은 계속 차일피일 미루고 있어요.ㅠ 덕분에 재찜해갑니다^^*

햇살과함께 2022-02-09 17:40   좋아요 3 | URL
페이드 포, 이 책 미미님 읽는 거 보고도 관심 있었는데^^ 조만간 이 책 사러 동네서점 가야겠어요 ㅎㅎ
 

탈감정은 직접적인 감정이 아니라 재생된 감정이다. 《탈감정사회》는 감정 없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제조된 가짜 감정들로 충만하고 그러한 감정을 소비하는 사회, 소비재로서 감정, 감정 제조 산업이 제도화된 사회에 대한 고찰이다. - P198

‘군 위안부‘ 역사처럼 여성은 언제나 전쟁 혹은 ‘나라 없는 설움‘의 가장 큰 희생자일까? 인류 역사상 여성이 노동 시장에 가장 적극적으로 진출했던 시기는 여성 운동이 활발했던 때가 아니라 전쟁 때였다. 전쟁에 동원된 남성 노동력을 대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어떤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국가 간) 전쟁이 끝나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자 집에서 전쟁이 시작됐다." 1990년대 초 소말리아 내전에서 여성들이 전쟁에 자원한 이유는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집보다 밥을 주는 군대가 낫기 때문이었다. 유랑 중인 쿠르드족 여성 운동가는 이렇게 외친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독립 국가가 아니라 민주주의입니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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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여자가 자기를 무시할까 봐 두려워하지만, 여자들은 남자가 자기를 죽일까 봐 두려워한다. - 마거릿 애트우드 - P101

경험은 겪은 것이 아니다. 선택적인 기억이다. 경험은 철저히 정치적인 것이다. 무엇을 잊고, 무엇을 의미화하는가, 내가 겪은 일은 어떤 것인가. 경험은 저절로 기억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을 인식할 수 있는 시각이 생길 때 비로소 ‘떠오르고’ 인지되고 해석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자기 경험을 바로 볼 수 있는 렌즈가 주어지지 않는다. 남성의 언어가 여성의 삶을 규정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기 경험을 믿지 못한다. 자기가 겪은 일을 남 이야기하듯 말한다. 나도 그랬다. 가부장제는 모든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한다. 가해 남성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자기가 저지른 일을 남의 얘기처럼 말하며 피 - P102

해 여성을 비웃거나 자신과 같은 가해 남성 ‘동료‘를 비난하기도 한다. 어떤 여성들은 자신이 겪은 폭력이 훨씬 심각한데도 ‘덜 맞은‘ 여성들을 보며 놀라고 걱정한다. 경험, 몸, 인식의 분리 속에서 우리는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 P103

여성이 모르는 남성에게 집 밖에서 죽으면 충격적인 사건이고, 집에서 남편에게 지속적으로 맞으면 사소한 일인가. 모든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의 원인은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통제다. 그 통제의 장소가 집 밖이면 사회적 충격이고, 집 안이면 사소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 P105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다. 자기가 먹은 밥그릇은 자기가 치우는 것이다. 자기가 입은 옷은 자기가 빨래하는 것이다.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개인) 미달‘ 이다. 그러므로 ‘주부‘나 ‘아내‘는 정체성도, 직업도, 지위도 될 수 없다. ‘아내가뭄‘은 모두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반대로 어느 누구도 ‘아내를 가질’ 특권은 없다는 뜻이다. - P113

인간성과 정치 의식의 가장 정확한 바로미터는 ‘집안일‘에 대한 관점과 실천이다. - P114

20세기에 출간된 책 중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과 베티 프리던의 《여성성의 신화》만큼 찬사와 논쟁의 대상이 된 텍스트도 드물 것이다.
특히 《여성성의 신화》는 이론 자체에서 여전히 내파와 여진, 확장과 변태(變態)를 거듭하고 있는 자유주의 사상의 특징을 잘보여준다는 점에서 영원한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의 거의 모든 지식 체계가 자유주의의 자장(磁場)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과 사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 - P115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여성에게 개인화, 시민권을 허용했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성 운동의 ‘대중화‘이다. 현재 한국 여성 운동의 일부가 유례없이 동성애, 트랜스젠더, 난민 혐오적 경향을 보이는 것은 당대 페미니즘이 사회 정의와 연대로서 페미니즘이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이기 때문이다. - P119

차이가 차별을 낳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인간들 간의 의미 있는 혹은 의미 없는) 차이를 생산한다. 저자의 지적과는 반대로 생물학적 성차는 원인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젠더화된 각종 제도적 실천, 법, 감정 노동, 언어, 무의식, 섹슈얼리티 등이 상호 작용하면서 체현된 인간의 몸(social body)의 일부이다. - P129

2권의 부제 ‘왜 인간은 농부가 되었는가?‘는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다. "수렵인들은 호전적이고 농경 민족은 평화롭다."는 상식을 뒤집는다. 농사는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명백한 의도를 품고 환경을 통제하는 것이며(57쪽), 농업 발달은 인구 증가와 생태계 파괴의 악순환을 가져왔다. 게다가 농업은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는 경제 체제다. 인류 역사에서 농업의 발달과 그로 인한 정착 생활은 영토적(territorial)사고를 기반으로 한 정체성, 폭력, 전쟁, 계급 제도의 시작이었다. 이 책은 홍적세(약 258만~1만 년 전)의 대량 멸종 사건과 후기 구석기인들의 원시 농업의 인과 관계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만(92쪽), 농업에 대한 저자의 통찰은 이러한 차원을 넘어선다. 2권은 옮긴이의 지적대로 결국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매우 당대적인 연구로 읽힌다. - P133

내 서평의 목적은 이 책이 널리 읽혀서 성별, 가족, 섹슈얼리티에 대해 한국 사회가 좀 더 ‘상식적이고 과학적인 집단‘이 되는 것이다. 그 결과로 내가 글을 쓸 때 검열에 덜 시달리고, 조금은 소통이 되었으면 하고, 말이 되는 비판을 받았으면 좋겠다. 책 소개를 인용으로 대신하면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내의견이다. 흥미롭기를 바란다.

"성이 본질적으로 상반된 대립 관계라는 것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동물계와 식물계는 두 성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48개의 염색체 중 단 하나만 다른데도, 우리는 48개 전체가 다른 것처럼 행동한다." (29~34쪽, 맞다. 인간은 양성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양성 평등 구호는 자제되어야 한다.) - P141

내가 아는 남성 중에는 훌륭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매우 많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관계‘인 경우지 ‘남녀 관계’일 때는 다르다. - P145

캐럴 길리건과 주디스 버틀러는 자주 오해받는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인데, 이들의 사상을 이렇게 쉽고 분별력 있게 정리한 저자의 지적 역량과 글쓰기 능력이 놀랍다. 길리건은 여성성의 재평가보다는 돌봄 노동의 언어화와 여성적 윤리가 공적영역의 규범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단순한 모성 찬양이 아니다. 길리건은 자신의 논의가 남성다움, 여성다움 운운하는 젠더 문제가 아니라고("This is not gender issue.") 책서두에 못 박았는데도 그녀를 향한 페미니즘 진영 내부의 비판과 남성들의 전유는 여전하다. - P148

내가 생각하는 지식으로서 페미니즘의 가장 큰 매력은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준다는 점이지만, 페미니즘의 정수는 스스로 내파와 파생을 거듭하는 지식이라는 데 있다. 이 변화는 멈출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성의 현실, 그리고 현실의 운동이 끊임없이 언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 P151

전쟁은 상대편을 절멸하거나 항복시키는 행위다. 그러나 성별에 따라 방식은 다르다. 남성도 죽이고 여성도 죽이지만, 여성을 죽이는 방법은 강간하는 것이다. 강간은 패전국 여성에게 사회적 죽음이고, 전승국에게는 전리품 획득이다. 노동력 착취는 물론이고 강간으로 여성이 적국의 아이를 출산하는 것은 승전국의 영토 확장, 국가 건설을 의미한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나 보스니아 내전 같은 형태가 아니었다. 일제의 한국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한반도 현지에서 직접 이루어진 대량 강간 형식보다는 군수품으로 동원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 P168

성매매, 성폭력 제도의 본질적 공통점은 남성의 성은 남성의 몸에서 분리되지 않지만 여성의 성은 여성의 몸에서 분리된다는 점이다. 남성의 성은 남성 개인의 몸에 소속되어 있다. 여성의 성은 여성 자신의 것이 아니라 국가, 가족, 그리고 그녀의소유자인 남성의 자원이거나 상징이다. 남성의 성과 달리 여성의 성은 대상화된다. 유통, 기부, 거래, 순환 등 교환 가치를 지닌다. 남성 간 정치의 매개물이 되거나 강자들의 싸움터(battle - P170

ground)로 제공된다. 우리가 성 상품화, 여성의 대상화라고 부르는 현실이 이것이다. 내가 스스로 팔든 남에게 팔리든, 성매매는 여성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물건(object)이 됨을 의미한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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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과 사회의 ‘질‘은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마음과 지성의 용량(capacity)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 P85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각자의 몸이다. 이 모순, 아니 양면을 잊으면 안 된다. 이것은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데서 영원히 이슈이기 때문이다. - P86

착한 진보이고 싶은 이들은 "나는 소수자가 아니지만(즉 소수자와 소수자 아님은 내가 정하지만) 소수자를 존중하며, 그들은 내게 배움을 준다. 그들에게서 깨닫는 나는 얼마나 훌륭한가." 혹은 "나는 그들을 돕고 있고 그들에 대해 쓰고 있다."며 자기도취와 셀럽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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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용서하기로 했다》는 그런 책이 아니다. 한 페이지를 넘기는 데 10분 이상이 걸릴 만큼 메모할 구절로 가득하다. 인용하기에 좋은 깊은 사유와 무릎을 치게 만드는 미문(美文)으로 그득하다. 진심으로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출판사의 소개대로 용서의 미덕을 무조건 강조하는 책들과 달리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의 역사를 자연스럽게 보여줌으로써 공감을 이끌어내고, 다양한 사례를 통해 용서라는 행위의 유동성과 주관성을 보여준다. 깔끔한 처방을 내리기보다는 개인의 선택에 맡기는 무처방, 불간섭주의적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 이 책의가장 큰 장점이자 핵심이다. 또한 이 책은 용서 담론의 수많은 국면과 요소를 최대한 포괄하고 있다. - P51

이미 용서를 둘러싼 담론에는 분노나 고통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사회는 그러한 상태를 암암리에 ‘극복‘의 대상으로 본다. 용서는 분노보다 우월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다를 뿐이다.
용서에 대한 나의 입장을 굳이 밝힌다면 나는 용서에 관심이 없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용서라는 말이 싫고 용서의 필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들을 의심한다.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용서, 화해, 대화라기보다는 부정의한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가 가능한 사회적 조건이다. - P52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은 용서가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한다. 정작 자신이 용서할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1952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지 불과 7년째 되는 해였는데, 사람들은 만일 루이스 자신이 폴란드인이거나 유대인이라면 게슈타포를 용서하겠냐고 물었다. 그는 즉답을 피했다. 대신 그보다 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오히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사람은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 P55

용서의 또 다른 어려움은 사건은 구조적이되(정치학), 용서는 개인의 몫(심리학)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 P56

우리 사회는 ‘해결 매뉴얼‘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피해란 원래 복잡하고 다양하고 모순적인 환경에 놓여 있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우리의 굳은 몸을 다른 세계로 이동시키고 변환시켰다는 점은 분명하다. - P58

내 생각에 현재 한국 사회의 여성주의는 두 그룹으로 ‘양극화’되어 있다. 온라인의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 여성들과 체제 내화된 일부 여성들로 나뉜 것이다. 여성 운동 단체출신 국회위원 중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에 서명한 여성 의원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양극이라고 하지만 두 그룹의 페미니즘 모두 ‘파이가 중요한’, 평등 지향의 자유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유례없는 "난민 반대, 트랜스젠더의 여대 입학 반대" 주장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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