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간의 경험을 통해 나는 여성의 성을 돈으로 사는 구매자,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는 여성을 알선하는 포주가 없으면 성매매는 줄어들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한국에는 성매매 업소에 다니는 남성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성구매를 하지 않는 남성이 특별한 존재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도 있다. 그러나 성구매를 하지 않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행동이다. 이제는 내가 경험한 구매자들의 추악한 모습을 낱낱이 고발하고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나의 목표이기도 하다. - P333

그렇게 서두르지 않고 나에게 시간을 조금 더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쉬는 것이 그렇게 눈에 가시였을까? 씁쓸하기만 했다. 부러진 팔찌를 판 돈의 일부를 엄마에게 건네자, 마지못해 받는 척했지만 엄마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옅은 미소가 보였다.
함께 저녁을 먹을 때 엄마는 내가 취직을 했다고 자랑했다. 가족들의 눈이 반짝거리는 듯했다. 잘됐다고 말을 건네는 가족들의 인사가 부담스러웠다. 나는 당장 내일부터 시작하는 공장 일을 내가 견뎌낼 수 있을지 어떨지 긴장되는데, 가족들은 오로지 내가 벌어올 돈만 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 P347

버스는 목적지에 가까워져 왔다. 여전히 버스 안에서 여중생들은 재잘거리며 웃는다. 그 모습이 예쁘다.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빗속의 여중생들이 오랫동안 간직했던 나의 기억의 한 조각을 떠올리게 했다. 만일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고 성매매를 하지않았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살아갔을까? 내 인생에 성매매가 없었다면 어떻게 살아갔을까? 여전히 가라앉아 있는 내 기억들은 아프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아픔이 내게 위로가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 P356

탈성매매 이후, 업소를 전전하던 20년 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못했던 ‘성노동론‘과 마주할 때가 있었다. ‘팔려가는 공포’를 느껴보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론에만 매몰된 말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을 소비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뿌리 깊고 공고한 구조하에서, 노동이라는 개념을 성매매 현장의 현실에 적용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있다. 성매매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하려면, 많은 여성들이 성매매에 유입되고 재유입되게 만드는 근본적인 문제들부터 해결되어야 하지 않을까. - P375

어디서도 말하지 못했던 가슴 아픈 경험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내가 살아왔던 지난날을 재해석하는 일이었다. 그 재해석을 통해 아픔은 세상을 향해 말할 수 있는 용기로 재탄생했다.
경험의 재해석은 계속되고 있다. 때로는 고통스럽고 아파서 눈물을 흘리겠지만 나는 이제 조금씩 단단해져가고 있다. - P395

탈성매매 이후 쉽지 않은 새로운 인간관계가 나를 힘들게 하고 낯선 환경들에 적응하기 어려워 자학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날 때마다, 다시 업소로 돌아가고 싶은 일종의 회귀 본능이 일었다. 업소로 돌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힘들고 좌절할 때 다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다잡는 것은 세월이 이렇게흐른 지금에도 어렵다. 나는 어쩌면 더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 계속 흔들리면서 연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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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자신이 장애가 있다고 하며 "장애 등록을 하고 학교에 보낼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럴 형편이 아닙니다." 라며 무안할 정도로 단칼에 거절했다. 담임 교사는 더 이상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했고 내 의사를 물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어떤 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학교를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훗날 이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아버지는 "너도 학교 안 다니겠다고 하지 않았냐."며 내게 책임을 돌렸다. - P23

바닷가 방파제에 앉아 미친 듯이 깡소주를 마셨다. 취하기는커녕 더 또렷해지는 내 감정들을 버리고 바다로 몸을 던지고 싶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내 삶이 원망스럽고, 아픈 내 마음을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외로움이 싫었다. 술집 여자로 늙어가는 내 모습이 저주스러웠다. 이대로 바다로 뛰어들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에 바위 위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시커먼 바다로 차마 몸을 던지지 못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없이 울었다. 죽을 용기도 없는 자신을 미워하고 또 미워했다. 그날 그 조용한 바다는 나의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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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3-26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읽고 있는 케이크와 맥주 다 읽으면 이거 읽으려고요. 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 책인 것 같아서,,, 그런가요??

햇살과함께 2022-03-27 09:2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더 충격적이네요 그래도 알아야죠!
 

나는 왜 말하는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지만, 시작부터 가슴이 답답해지고 울화통이 터진다.

가난이라는 무게 때문에 짊어져야 했던 폭력이 성추행으로, 미성년자 강간으로, 사랑을 빙자한 데이트 폭력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폭력의 완성은 성매매였습니다.
이 책을 쓰게 된 주된 이유는 빈곤하고 자원이 없는 여성인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 폭력이 가해졌는지, 그 폭력이 어떻게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 폭력이 한 여성의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에 관해서도, 그리고 성매매의 굴레를 마침내 떨쳐버리기 위해 살아온 그 이후의 삶도 풀어보았습니다. - P7

커갈수록 아버지의 폭력은 더욱 심해졌다. 그 폭력에는 정말이지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했다. "네 아버지같이 법 없이도 살 사람이 너를 때린다는 것은 네가 잘못했기 때문이야." 라고 말했다. 맞는 것도 억울한데 내 잘못이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밖에선 법 없이도 산다는 아버지는 집에서는 절대 권력의 폭군이었다. 내가 안 맞으면 엄마를 때리는 나쁜 아버지라고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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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의 스케치 - 버지니아 울프 회고록 쏜살 문고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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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가 죽기 2년 전 1939년부터 1940년 사이 영국 침공의 불안감 속에서 로저 프레이의 전기를 쓰던 시기에 간간이 써내려간 미완성 회고록이다. 어린 시절 이부오빠의 성추행(이 책에서는 아주 잠깐 언급된다), 집안의 기둥이자 중심이었던 어머니의 이른 죽음과 그후 어머니 역할을 대신하던 이부언니 스텔라의 갑작스런 죽음. 이들의 죽음 이후 무뚝뚝하고 자기 중심적인, 어찌보면 자라지 못한 어른인 아버지를 직접 대면해야 하는, 이해받지 못하는 언니 바네사와 버지니아의 상황이 반복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적 시대에, 믿고 의지하던 여성가족의 죽음과 자기 중심적인 남성가족들의 폭력과 억압의 과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버지니아가 겪은 심리적 충격와 슬픔이 절절하게 전해진다. 어린시절의 행복하고 아름답던 추억들에 대한 묘사도 있지만, 그 중심인 어머니와 언니가 사라지면서 모든 행복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이 두 죽음이 평생 그녀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그녀의 현재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울프의 책은 3기니와 이 책 밖에 읽지 않았는데, 그녀의 책을 더 부지런히 읽어야겠다(3기니 읽기 어려웠는데 이 책은 3기니보다 잘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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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3-13 09: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햇살과 함께님은 상대적으로 안알려지고 어려운 울프책만 읽으셨군요 ㅋ 이젠 그나마 상대적으로 쉬운 책만 남으신거 같아요 ^^ (다 어렵긴 하겠지만...)

햇살과함께 2022-03-13 10:01   좋아요 3 | URL
그런가요? 새파랑님 얘기에 희망이 생기네요 ㅎㅎ 울프 어렵다고 해서 시도를 잘 못하고 있었는데^^

라로 2022-03-13 16: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올란도, 등대로, 자기만의 방, 댈러웨이 부인,,, 저는 이렇게 읽었는데 이 책도 읽고 싶어요!! 3기니에 대한 글은 대강 읽어봤는데 번역본이 있군요!! 저는 파도를 읽고 싶은데 번역본이 전자책으로 안 나왔더라구요. 원서를 읽기에는 제가 잘 이해 못할까 봐 아직 도전하지 않았고요... 그래서 울프 읽기가 잠정적으로 멈춤 상태에요.^^;; 그런데 이 책에 대해서 몰랐는데 덕분에 좋은 책 소개 받은 것 같아요.^^

햇살과함께 2022-03-13 16:23   좋아요 2 | URL
라로님 읽은 책부터 읽어봐야겠네요! 일단 사둔 자기만의 방부터!

책읽는나무 2022-03-14 09:39   좋아요 2 | URL
오호~~이 책도 울프 책이네요.
3기니 보다는 읽기 쉬운 책이로군요?
울프 읽기 시작해야 하는데 어려울까봐 주저하고 있어요.ㅜㅜ

라로님!
어떤 순서로 읽어야 할까요?
읽기 쉬운 순서대로 나열 좀 해주세요^^

라로 2022-03-13 16: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도 전자책이 안 나왔어요.ㅠㅠ 방금 전자책 신청 했어요. 나오길..^^;;
 

열다섯 살의 내가 늘 불안해서 꺽꺽거리며 견과를 부수거나 내뱉고 껍질을 내던지며 얼굴을 찡그리고 어두운 구석에 뛰어들었다가 미친 듯이 우리 안을 배회하는 원숭이라면, 그는 뚱한 얼굴로 천천히 어슬렁거리는 위험한 사자였다. 분노와 상처로 부루퉁한 그 사자는 갑자기 사납게 굴다가 다음 순간에는 아주 겸손해졌고, 그러다 당당하게 굴고 다음 순간에는 파리에 시달리며 먼지 덮인 구석에 누워 있었다. - P86

어머니의 죽음은 늘 잠재한 슬픔이었다. 열세 살의 나이에는 그 슬픔을 극복할 수도, 직시할 수도, 처리할 수도 없다. 그런데 이 년 후 스텔라의 죽음은 다른 개체에 달려들었다. 특히나 보호받지 못하고, 미숙하고, 방어막이 없고, 불안하고, 감수성이 예민하고, 예감에 사로잡힌 마음과 존재에. 열다섯 살의 마음과 몸은 늘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 특정한 마음과 몸의 표면 밑에는 다른 죽음이 잠겨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이 무슨 의미를 띠는지를 충분히 의식하지 못했더라도 나는 이 년간 무의식적으로 그 의미를 흡수해 왔다. 스텔라의 말없는 비탄을 통해서, 아버지의 노골적인 비탄을 통해서, 달라지고 중단된 모든 것을 통해서. 사교적 모임과 흥겨운 놀이가 중단되었고, 세인트아이브스의 별장을 포기했고, 검은 옷을 입었고, 많은 것이 삼가졌고, 어머니의 침실 문이 잠겼다. 이 모든 것이 내마음을 바꾸어 불안감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스텔라의 행복을 바라고 그 덕분에 그녀와 우리가 음울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지나치게 열망하게 되었으리라. 그러다 또다시, 더욱더 믿을 수 없이, 거짓말처럼, 그 갈망이 난폭하게 기만당한 것 같았다. 아니, 바보처럼 그런 희망을 품지 말라는 폭언을 들은 것 같았다. 스텔라가 죽은 후 내가 중얼거렸던 말이 기억난다. "하지만 이건 있을 수 없어. 세상은 이렇지 않아. 이럴 수는 없어." 그 타격, 두 번째 죽음이 나를 내리쳤다. 아직 접힌 날개로 부서진 번데기 옆에 앉아 떨고 있는 몽롱한 눈의 나를. - P98

나는 이런 말을 끼워 넣으면서 지금도 해묵은 분노를 터뜨리고 있지만, 그렇더라도 세인트아이브스가 우리에게 준 순수한 기쁨은 이순간에도 눈앞에 생생히 떠오른다. 느릅나무의 레몬색 이파리, 과수원의 사과, 속삭이며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떠오르면 나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인간의 힘이 아닌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늘 작용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빛이 은은히 타오르고, 사과는 선명한 초록색으로 변한다. 나는 온몸으로 반응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때 작은 올빼미가 내 창문 밑에서 딱딱거린다. 또다시 나는 반응한다. 비유적으로, 내가 말하려는 바를 어떤 이미지로 포착할 수 있겠다. 나는 감각의 물결에 떠 있는 다공성의 배이고, 보이지않는 광선에 노출된 고감도의 감광판이고…… 등등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 P111

앞선 얘기로 돌아가자면, 그 두 번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사실 토비는 내색은 안 했어도 그토록 진정한 마음으로 우리와 묶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가족의 절단에 좋은 점이 (의심스럽지만) 있다면, 우리를 민감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삶의 불안정성을 의식하고, 사라진 무언가를 기억하고, 아버지가 요구하지 않았을 때 내가 느꼈듯이 어쩌다 열렬하고 어설픈 유대감에 압도된다면, 이 모든 감정을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의 나이에 발작적으로 느끼는 것이 좋은 일이라면, 만일 그렇다면……. 그런데 과연 좋은 일이었을까? 세인트아이브스에서 그랬듯이 분주하고 소란스러운 가정 생활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그것을 판단할 사람도 없고 기준도 있을 수 없는데 좋거나 낫다고 말하는 데 의미가 있다면) 낫지 않았을까? 온 가족이 평범하고 떠들썩한 일상을 영위하는 동안 가족에 둘러싸여 자기만의 은밀한 탐구와 모험을 지속해 간다면, 그 보호막이 벗겨지고 가족이라는 은신처에서 떨어져 나오고 그 은신처가 금이 가고 찢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가족을 비판하고 의심하는 것보다 좋지 않았을까? - P117

두 번의 죽음을 겪지 않고 마땅히 가족을 믿고 가족을 받아들이며 가족 안에 머물렀다면 우리는 더 큰 기회와 더 넓은 다양성과 분명 더 큰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다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두 죽음의 경험은 우리를 망연자실하게 만들고 피폐하게 만들었지만(내가 썼던 표현으로) 신들이 우리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어서 가령 부스 가족이나 밀먼 가족 같은 사람들에게는 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일을 우리에게 주려고 의도한 것이었을까? 나는 늘 그것을 시각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토비가 죽은 후) 나는 (고든 광장 주위를 돌다가) 거대한 맷돌 두 개와 그 사이에 끼인 나를 보곤 했다. 그러고는 나 자신과 그것들과의 충돌을 연출하곤 했다. 만일 인생이 발광한 말처럼 뒷다리로 서서 제멋대로 발길질을 해 대는 것이라면 시달릴 수밖에 없겠다고 나는 추론하곤 했다. 그것들이 내게 삶이라는 그 귀중한 질료의 미약하고 작고 무력한 조각을 하나 주어서 내 입을 막았다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이를 통해 나는 인생을 극한적 실체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물론 나 자신이 중요하다는 의식을 키울 수 있었다. 타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맷돌 사이에서 갈린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줄 만큼 나를 충분히 존중한 그 힘을 통해서. - P118

여러 달이 지나도록 허울만 남은 우리의 일상 이면에는 이파리가 없는 그 나무가 서 있었다. 그러나 나무는 이파리가 없는 채로 그냥 있지 않는다. 작고 붉고 차가운 싹을 내밀기 시작한다. 그 싹의 이미지를 통해 나는 비탄이나 말다툼, 숨겨지기도 분출되기도 한 짜증, 미묘한 영합을 전하고 싶다. 그것은 집안의 일상적인 생활이 다시 시작되자 아버지의 말대로 스텔라의 죽음이 우리를 더욱 결속하지 않고 우리 모두 적응을 못하고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비틀린 관계로 고통스럽게 빠져들었음을 입증했다. - P124

하지만 왠지 몰라도 내게는 장면을 그리는 것이 과거를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자연스러운 방법임을 알게 된다. 어떤 장면이 늘 표면에 떠올라배열되고 상징적 표상이 된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실체(리얼리티)라고 편리하게 부르는 것 위에 떠 있는 밀폐된 배라는 내 본능적 생각(이 생각은 비논리적이라서 논증을 배겨 내지 못한다.)을 확인해 준다. 어떤 순간에, 어떤 이유도 없이, 노력을 전혀 들이지 않아도, 밀폐용 물질에 금이 가고, 실체가 밀려들어 온다. 그것이 장면이다. 장면이 영속적인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파괴적인 숱한 세월을 견디고 온전히 남지못할 것이다. 장면이 실체라는 증거는 이것이다. 이처럼 장면에 빠져드는 내 성향은 글을 쓰려는 충동의 원천일까? 실체에 관한, 장면에 관한, 그리고 장면과 글쓰기의 관련성에 관한 이런 물음에 나는 답을 알지 못하고 그 물음을 세밀하게 제기할 시간도 없다. 의도한 대로 이 글을 수정해서 다시 쓰게 된다면 그 질문을 더 정확하게 제기하고 고심해서 어떤 답을 내놓을 것이다. 지금까지 써 온 모든 글(소설, 비평, 전기)에서 거의 언제나 장면을 찾아야 했으므로 내가 이 능력을 발전시켜온 것은 분명하다. 어떤 인물에 대해 쓸 때는 그들의 인생에서 대표적 장면을 찾고, 어떤 책에 대해 논평할 때는 그 저자의 시나 소설에서 그런 장면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같은 능력이 아닐까? - P126

아버지는 왜 여자들이 필요했을까? 철학자로서 실패했음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 실패가 그를 좀먹었다. 하지만 그의 신조, 말하자면 공적 관계에서 자신이 택한 태도 때문에 그는 칭찬을 받고 싶은 욕구를 숨겼다. 그래서 프레드 메이트랜드와 허버트 피셔의 눈에는 아버지가 순전히 자기 비하적이고 겸손하며 스스로를 터무니없이 변변찮게 평가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우리에게는 탐욕적으로 수치심 없이 찬사를 요구하며 강요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억제와 욕구가 결합되어 있다면, 바네사에게 그토록 야만적으로 굴었던 까닭은 여자들이 자극을 받아 베풀어 주는 공감을 절실히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바네사가 노예이자 천사인 여자의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아버지는 격분했고, 자신에게 필요했던 자기 연민의 흐름이 가로막히자 자기도 알지 못했던 본능이 끓어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수치스러운 본능이었다. "네 생각에는 아버지가.…..." 격렬한 분노를 터뜨린 후에 한번은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어리석어 보이겠지."라고 말했던 것 같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야만적이라고 생각했지. - P131

실은 예순다섯의 나이에 아버지는 고립되고 자신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는 자기 감정을 너무 무시했거나 감추었으므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경악스럽고 소름 끼칠 만큼 난폭한 분노를 드러낸 것이다. 거기에는 맹목적이고 동물적이고 야만적인 구석이 있었다. 로저 프라이는 문명이 자각을 뜻한다고 했다. 극도로 자각이 없었다는 점에서 아버지는 미개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누구도 일깨워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고통스러워했다. 자기감옥의 벽을 통해서 깨닫는 순간은 있었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자기 중심벽만큼 두려운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생각은 집요하게 오래갔다. 그만큼 본인에게 잔인하게 해를 입히는 것도 없고, 어쩔 수 없이 그것에 접촉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주는 것도 없다. - P132

조지가 서른여섯이고 내가 스무 살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에게는 연간 1000파운드의 수입이 있는 반면에 내 수입은50파운드였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우리 관계에 또 다른 요소도 있었다. 그의 나이와 권력 외에도 나는 아웃사이더의 감정이라고 부르게 된 감정을 느꼈다. 서커스 텐트가 약간 벌어진 곳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는 집시나 아이가 느낄 법한 감정이었다. 나는하이드파크 게이트의 응접실에서 한창 무르익는 사교 파티를 바라보았다. 조지는 큰 굴렁쇠를 뛰어넘는 곡예사 같았다. 그를 바라보며 나는 공포와 찬탄을 느꼈을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적 사교 파티가 우리 응접실에서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거기에는 물론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었다. 바네사와 나는 거기 참여하라는 요구를 받지 않았다. 오로지 남성 친지들이 이채로운 지적 게임을 다양하게 펼칠 때 경탄하고 박수치라는 요구를 받았을 뿐이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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