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면부터 어휴 미친 XX… 그러나, 이게 이 책에서 가장 수위가 낮다는 사실.

반대로 남자는 여성인물에 자신을 동일시할 기회가 거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인물에 감정을 이입하지 않는 것에 익숙하다. 이야기 속에서 여성은 항상 주인공이 아닌 보조 역할을 맡는다. 영웅의 엄마나 영웅의 애인, 영웅이 구해야 하는 공주로, 『제2의 성(Le Deuxième Sexe)』에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나, 자신’이자 이야기의 핵심인 남성 옆에서 여성은 언제나 그저 ‘그냥 누구’의 자리에 놓인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런데 『악어 프로젝트」는 남성을 악어로 그림으로써 일반적인 이야기와 차별성을 갖는다. 여성은 사람으로 그려지고 남성만 동물로 표현되었으므로(게다가 내레이션은 경험담을 들려주는 여성의 ‘주관적인‘ 시점이다), 독자는 여성에게 자신을 투영하게 된다. 사실 남성은 자신을 여성과 동일시하는것에 익숙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럴 기회가 거의 없기도 하거니와 공감 능력은 남자답지 않은 영역으로 간주하고, 소년들에게 그것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 만화가 중립적인 관점으로 이야기했다면, 남성 독자는 남성인물과 동일시하고 여성독자는 여성인물과 동일시하려고 하는 경향이 매우 컸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성과 여성 간의 전쟁‘이 일어날 뿐이다. 왜냐하면, 남성 독자는 자신과 동일시한 인물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애를 쓸 것이고, 여성 독자는 희생자에 자기를 투영할 것이기 때문이다(비록 일반적으로 여성은 남성 인물과 동일시하는데 더욱 익숙하지만). - P159

모든 남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범주에서 저 범주로 순식간에 옮겨갈 수 있다. 거리에서 마주친 남성, 남자 친구, 남편, 친오빠……. 얼마나 많은 여성이 주변인에게 강간당해왔는가? 『악어 프로젝트에서 한 여성의 끔찍한 경험담을 보자. 흔히 일어나는 애인의 강간은 악어의 다음과 같은 속삭임으로 끝난다. "고마워. 아까 정말 끝내줬어." 그러나 이 남자가 그저 비열한 놈, 강간범이기만 했다면 여성이 그와 사귀었을까? 모든 악어가 어느 순간에는 좋은 남자로 바뀔 수 있으므로 반대로 모든 좋은 남자는 악어가 될 수 있다. 모든 남성은 잠재적으로 독재자다. 실제로 우리가 어떤 범주의 남성을 상대하는지 모른다는 의미에서 남성은 모두 약탈자로 보일 수 있다. 또한, 특권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하기 바라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 P160

악어 프로젝트의 주제는 남성이 악어의 모습으로 태어났다가 아니라 악어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남성을 악어로 그린 진정한 의미가 있다. 텀블러 『악어 프로젝트』 에서 나를 얼어붙게 한 그림이 하나 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아기가 조금씩 악어로 변해가는 그림이다. 타인을 존중하고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작은 아이가 성적 포식자가 되어가는 일은 충격적이다. 안드레아 드워킨(Andrea Dworkin)의 글이 떠오른다.
"어떻게 태양과 작은 돌에도 자비를 베풀던, 생생한 삶의 애정을 품었던 소년이 여성과 인류애를 공유하며 그것을 허용할 능력마저도 상실해버린 성인이 되어버렸을까?" - P161

게다가 이러한 폭력은 여성에게 특정한 행동과 태도를 강요하고자 한다. 흔히들 폭력의 원인은 항상 우리 여성에게 있다고 한다. 우리가 젊고 예쁠 때, 섹시한 옷을 입을 때, 미소를 띨 때, 늦은 시간 지하철을 탈 때, (혹은 이 모든 경우가 아니더라도) 남성은 우리의 매력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제대로 처신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너무 예쁘다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또한, 반대로 우리가 못생겼다면, 우리를 놀리거나 모욕하더라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이중 제약이다. 여성이 사회의 성차별적 기대에 자신을 맞춘대도 비난받을 것이며, 여성성의 규범에 순응하는 것을 거절한대도 비난받을 것이다. 잘못된 선입견에 따르면 남성이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자기 성기를 보여주고, 성적인 제안을 하는 등등의 행동은 여성의 존재 자체와 어떤 태도에 따른 결과다. 그리하여 여성은 성폭력을 ‘유도’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지만, 성폭력의 책임은 여성이 아니라 전적으로 가해자에게 있다. - P163

상대방에게 환심을 사거나 유혹하기를 그만두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폭력의 수준으로 가지 않게 자신을 제한하라는 것이다. 상대방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것과 성희롱을 구분하는 방법은 상대의 의지를 받아들이느냐 무시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칼럼니스트 가엘르 마리 짐메르만(Gaelle-Marie Zimmermann)이 말한 것처럼 상대방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것은 그저 뻗은 손이며, 성폭력은 덮치는 손이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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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 N번방 추적기와 우리의 이야기
추적단 불꽃 지음 / 이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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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검거에 이런 내막이 있을 줄이야! 언론인의 꿈을 가진 ‘한갓‘ 대학생일 뿐인 그들이, 온라인 현장을 그야말로 발로 뛰어 파헤친 이야기. 얼마나 많은 고통과 무력감과 절망과 두려움을 견뎌냈을지 상상이 안된다. 이제 단과 불은 각자의 길을 가지만, 그들에게 연대와 지지와 용기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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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스쿨 미투‘를 보면서 내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선생님이 하는 행동이 성추행이라고 말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불쾌했지만 국어 선생님과 학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마음속 깊이 응어리로 남아 있다.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스쿨 미투감인데 말이야", 하며 18분간 당시 국어 선생님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동시에 용기 있는 후배들이 고맙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던, 아니 그러지 못했던 일인데 후배들이 대신 해주었다. 우리 사회 전체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 내러 돌아온다."
미국 체조 국가대표팀 주치의로 일하면서 30년 동안 332명이 넘는여자 선수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래리 나사르에게 법정에서 피해자가한 말이다. 지금이라도 국어 선생님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 P96

어느 날, 친구를 만나러 외출했다가 시간이 남아 학교 도서관에 들렀다. 신간 코너를 한 바퀴 둘러보는데, 『탈코르셋: 도래한 상상』이라는책이 눈에 들어왔다. 탈코르셋에 대해 궁금했던 터라 가벼운 마음으로책을 빌렸다. 분명 가볍게 빌린 책이었다. 그날 새벽, 푸르스름한 빛이떠오를 무렵에야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남성들이 출근하기 위해 갖추던 기본값, 즉 ‘사람 꼴‘이 자신이 여태까지 갖추던 그것과는 무척 달랐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여성은 ‘사람 꼴’을 갖추기까지 매일같이 일정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그 기본값에 직접 다가가야 하는 반면, 남성에게는 ‘사람 꼴이 이미 찾아와 있었다.
이민경, 『탈코르셋: 도래한 상상』 중(42쪽) - P141

페미니스트가 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불편함‘이었다. 전에는 그저 기분 좋게 들리던 ‘예쁘다‘는 말도 이제는 거북해졌다. 분명 예전에는 재미있던 미국 드라마조차 거슬렸다. 남자가 여자에게 건네는 말은 반말로 번역되고, 여자가 남자에게 건네는 말은 존댓말로 번역되는 게 자꾸 눈에 들어왔다. 드라마에서 로맨스라는 탈을 쓰고 공공연히 자행하는 데이트 폭력을 볼 때마다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 P155

3월 넷째 주에 겪은 일들은 불과 나의 우정이 단단해지는 아주 중요한 경험이었다. 이 한 주 동안 우리는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는 지하철에서, 길 위에서 서로 격려했고 걱정했다.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 그만두자며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부담을 덜어주고자 애썼다. 힘들다고 우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유머 코드가 있었다. 다름 아닌 ‘눈물‘이었는데, 인터뷰 도중 먼저 눈물을 보인 사람을 놀리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온종일 붙어 있다 집에 돌아가 혼자 침대에 덩그러니 누워 있으면, 불은 잘 있나, 궁금했다. 불에게 고맙다, 사랑한다는 위로를 건네고 싶다. 그때는 서로 ‘사랑해‘ ‘고마워‘란 말을 잠들기 전에 꼭 했더랬다. 추적단 불꽃이 나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다. - P204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연대를 끊고 싶어요. 우리는 꽃이 아닌 불꽃입니다! - P224

피해자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의 삶을 피해 사실 하나로 재단하지 않고 개인의 삶 자체를 존중하는 태도다. 우리는 성범죄 피해자가 증언대에 나설 수 있도록 함께 할 것이다. 우리가 걷는 길에 여러분도 동행해주면 좋겠다. 온라인 공간에서 일어난 가해 형식이 낯설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연령이 점점 어려지고 있는 만큼 디지털 성범죄의 양상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 P249

피해자가 한 행동이 상식에 부합하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성범죄에 한해서는 ‘피해자로서 완벽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보호하겠다는 인식은 틀렸다. 피해자의 말, 글, 행동을 평가하여 합격 조건을 통과하지 못하면 비난하고 의심한다.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는 인식 때문에 성범죄 피해자는 세상에 쉽게 나서지 못한다. 당할 만해서 당하는 피해자는 없다. 이 부분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해하지 못하겠으면(설혹 싫더라도) 그냥 외웠으면 좋겠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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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하기 힘든 순간들을 이겨내며 우리는 1년 넘게 잠입 취재를 수행했다. 텔레그램은 전쟁터였고 우리의 휴대전화 사진첩에는 전쟁의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건 해결은 더뎠고 모니터링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매일 매순간 찾아왔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텔레그램 가해자들은 계속 피해자를 공격하고 있었다. - P35

국회의원들이 N번방 사건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로 느껴질 발언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디지털 성범죄의 개념을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국회의원들의 처참한 인식 수준이 드러나는 현장이었다. 법사위원이라면 적어도 자신들이 심사하고 토의할 사안은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시키겠다던 입법부에 신뢰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이날 회의가 끝나고 ‘N번방 방지법‘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그러나 통과된 법은 ‘딥페이크‘를 이용한 불법행위 처벌강화와 관련된 내용으로, ‘딥페이크 처벌강화법‘으로 정정해야 옳을터였다. - P70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이상하고 신기하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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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 성매매라는 착취와 폭력에서 살아남은 한 여성의 용감한 기록
봄날 지음 / 반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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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이라는 제목을 보고 기억이 떠올랐다. 벌써 20년 전이다. 회사에 처음 입사 면접을 왔던 날이다. 면접이 끝나고 늦은 점심이었는지, 이른 저녁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회사에 계신 학교 선배분께서 밥을 사주신다고 해서 따라갔다. 회사를 나와서, 지금은 없어진 육교를 건너서, 식당으로 향하던 길의 양쪽으로 이상한 천막이 쳐져 있고 빨간 불빛의 유리문들이 즐비하고 여자들이 있었다. 너무 놀랐다. 소위 사창가라고 하는 곳이었다(이 책에서 유리방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반성매매 활동에서는성매매 집결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지하철역에서 겨우 10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 곳은 허름하고 구석진,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어, 남성들이 몰래 몰래 찾아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버젓이 길 한복판에 있다니. 지나가던 아이들도, 학생들도,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있으리라고 상상을 못했다. 길 하나만 건넜을 뿐인데 딴 세상이 있었다.



저자는 한 인간이 여성으로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과 고통을 겪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지속적인 폭력, 옆집 언니 삼촌의 성추행,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중학교를 그만두게 한 부모, 항상 돈 타령을 하고 돈 버느라 힘든 어머니의 푸념, 열 여섯 살 미싱공장에서의 관리자들의 상습적 성추행, 미싱공장 셔틀버스기사에게 당한 여러 차례의 성폭행, 다른 공장에서 만난 동생의 삼촌과의 잠깐 행복했던 연애와 임신, 그 남자의 낙태 요구, 이후 남자의 변심. 겨우 열 일곱 살이었던가.


어느 날 공장이 끝나면 기숙사에서 사라지는 친구를 호기심에 따라갔다. 그냥 술 마시는 남자들 옆에서 술 주면 먹고 노래 부르면 박수만 쳤는데, 남자들이, 아저씨들이 돈을 쥐어준다. 그날 하루에 9만원. 공장에서 잔업까지 하며 한달 힘들게 일해서 받는 월급이 겨우 15만원인데, 하루 밤에 9만원이라는 돈이 손에 쥐어진다. 그 날 집에 가서 엄마에게 돈을 주니 엄마가 함박 웃음을 짓는다. 업주는 친절하고 다정하게, 언제든 놀러오라고, 와서 편하게 밥 먹고 쉬다 가라고, 언니처럼 편하게 생각하라고, 그냥 술만 따라주면 되고, 2차도 없고, 돈 많이 벌어서 집도 사고, 차도 사고... 그 이후 이 레퍼토리는 모든 업주에게서 듣게 된다. 그들은 그런 말로 순진한 여성들을 꼬드기고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자기에게 충성하게 한다.


그날 이후 아픈 친구를 대신해 한번 아르바이트를 가게 되고, 또 하루 밤에 돈을 많이 벌고, 엄마에게 갖다 주고, 엄마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저자는 엄마와 동생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 이후 어떤 일이 닥칠지 알기에는 너무 어리고 순진한 겨우 열 여덝 살.


가라오케와 단란주점, 유리방, 보도방, 티켓다방까지 이름은 다르지만 여성의 몸을 돈으로 쉽게 사는 모든 곳을 옮겨 다니고, 경상도와 전라도와 제주도까지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업주들은 선불금이라는 제도로 여성들을 옮아 매고 탈출하지 못하도록 한다. 지각비, 결근비, 화장품, 옷값, 미용실, 목욕비, 숙소비 라는 온갓 명목으로 선불금을 늘리고, 선불금에 대해 1할이나 2할의 이자를 매기고, 술값을 외상으로 하거나 분란을 일으키고 술값을 내지 않는 남성들의 미수금도 접대한 여성의 선불금으로 올려서 선불금이 점점 늘어난다. 정말 지옥이 따로 없다.


저자는 정말 독하게 마음먹고 돈을 아껴 써가며 적금을 들고 선불금을 갚아나가서 마침내 선불금을 다 갚고 적금으로 조그만 방을 얻어서 정말 꿈 같은 시간을, 1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먹고 자고 하는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결국 돈은 떨어지고 그런데 결국은 그 지긋지긋한 곳을 제 발로 다시 찾아간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 세계 이외의 세계를 모르고, 중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어떻게 먹고 살 수 있는지 몰랐던, 두려웠던 저자는 결국 너무 힘들고 괴롭지만 자기에게 익숙한 세상으로 다시 찾아간 것이다. 도와줄 누군가가 있었다면, 엄마가 좀 더 다정했다면 그때라도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다시 보도방이라는 이름으로 단란주점에, 다시 시골의 티켓다방으로, 결국 저자를 탈출시켜 준 것은 티켓다방에서 만난 남자였고, 그 남자는 이혼남으로 어머니와 아이들과 살고 있었고, 저자의 선불금을 갚아주고 그녀를 탈출 시켰지만 그 집 또한 지옥이었다. 그 어머니의 지독한 구박과 그 남자의 반복되는 폭력에 저자는 결국 도망치게 된다.


저자는 집으로 가지만 집에서는 부모님도 동생도 반기지 않는다. 그녀가 왜 집으로 왔는지, 어디가 아픈지 묻지 않고, 며칠 쉬는 것을 보지 못하고 언제 돈 벌러 갈 거냐는 얘기만너무 척박하게 살고 있어서 저자의 아픔에 일말의 동정도 가지지 못하는 가족. 그녀에게는 의지할 곳이 하나도 없다. 어떤 일이 있었는데 묻지 않는다.


집에서 나와 여성인권지원센터의 도움으로 쉼터에서 기거하며 육체적, 정신적 아픔을 치료한다. 그리고 반성매매활동 상담가라는 새로운 삶을 산다. 자기의 아픔을 보듬으며 성매매 탈출 여성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다. 20년의 그녀의 삶이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겠지만 그녀는 발언하고 책을 쓰고 그녀가 일했던 업소들을 찾아가보며 그때의 삶을 보듬으려 한다.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성을 구매하는 남성들이, 여성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업주들이, 불법을 눈감아주고 허용하고, 성매매 여성만 탓하고 문제의 본질의 보지 않는 국가와 사회가 문제라는 것을.


저자에게 좀 더 다정한 엄마가 있었다면 저자가 그 길로 가지 않았을까. 이 책을 보면 저자의 엄마를 많이 원망했다. 딸에게 너무 무심하고 돈 타령만 하고 다정한 말 한마디나 걱정하는 물음이 없다. 하지만 그 엄마도 아픈 몸으로 폭력적이고 무능력한 남편을 대신해서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그러므로 엄마를 원망하는 것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원망의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임권택 감독의 '노는 계집 창'과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가 계속 생각났다. 그 영화들을 볼 때 엄청난 충격이었는데, 저자의 삶은 그게 과장이 아닌 현실임을 말한다. 나쁜 남자는 그 당시 무지하게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폭력적인 소재의 영화인 것 같다. 그 자극적인 포스터 하며, 그 여배우가 그 영화로 인해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가졌을까.



20년 전 그곳은 지금은 모두 재개발이 되어 사라지고, 높고 번쩍거리는 주상복합 건물들이 즐비하다. 여성들은 또 어디로 갔을까. 장소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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