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했다. 여자들은 왜 이런 고통스런 일을 무수히 반복하며 인류를 존속시켜 왔을까? 왜 이런 역할을 자처해온 것일까? 여자라면 누구나 겪는 일을 단지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 P22

구구절절 옮겨 적기도 민망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나는 남편과 손발을 맞춰가면서, 내 안에 스며있는 ‘아내, 엄마‘라는 이미지와 반사적인 행동, 죄책감과도 싸워야 했다.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내게는 언제나 여러 개의 욕구가 공존했고, 그건 남편과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욕구는 쉽게 합의되거나, 우선순위에 따라 가지런히 정렬되거나, 동시에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 세 식구는 계속 조율해야 했다. 나는 애매하게 굴거나 전부를 욕심내지 않고 그때그때 내가 가장 원하는 한 가지를 선택하려 애썼다. 이것이 내가 비련의 주인공이 되지 않고 남편과 아이를 악역으로 등장시키지 않는 방법이었다. - P32

노선이라고 해서 무슨 거창한 각오나 실천이 수반되는건 아니었다. 나는 ‘어떤 아내 또는 엄마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역할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는 이상 ‘나‘라는 사람과 조화를 이루는 선에서 감당하면 될 일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운다고 해서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되지 않기로 했다. 가족을 유지하는 데 에너지를 다 쓰지 말고 가족 외의 인간관계도 소중히 가꾸고자 했다. 나의 관심사를 추구하고 개인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려고 했다. 남편과 아이를 살피는 마음으로 나의 필요를 살피려고 애썼다. 탯줄을 자르는 순간 아이를 나와 독립된 존재로 여기고자했다. 모성애를 의심받을지언정, 나를 지키고 싶었다. - P33

한동안은 ‘다 이룬 것 같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집안일은 나에게는 일상이었지만 남편에게는 아니다. 나는 집에 있으면 자동으로 집안일을 한다. 하지만 그는 집에 있으면서도 집안일을 깜박 잊곤 한다. 이러한 차이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 절망스럽다. - P39

물론 개인의 성향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 경우는 그렇지 않은데, 그 이유는 남편보다 지저분한 내가 더 많은 가사노동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덜 깔끔한 여자인데 더 깔끔한 남자보다 훨씬 많은 가사노동을 한다. 그리고 그의 기대 수준에 맞추지 못한다고 자책한다.
‘나는 남편보다 더럽다. 그래서 남편이 청소에 더 신경쓴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정리정돈의 신‘이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정리 정돈 능력은 타고난 것이 아닙니다. 방법을 알면 누구든 잘할 수 있어요." - P55

결혼 후 처음 겪어본 남자와의 동거에서는 게으름이 가능하지도, 용서되지도 않았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해주지 않았고, 열심히 한다고 해도 드러나지 않았다. 얼굴에 철판을 깐 남편은 스스로 게으르다고 자신 있게 말했지만, 나는 내가 부지런하지 않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고 완벽한 아내, 완벽한 엄마가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꼈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살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나의 부족함이 결혼생활에서는 신랄하게 들춰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 P63

‘결혼제도‘가 혼자서는 외로운 사람이 누군가와 의지하며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여자끼리 결혼해야만 그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그림자노동에 시달리며 잠깐의 글 쓰는 시간조차 내기 어려운 요즘, 날 도와주고 위로해줄 누군가가 절실하다. 어쩌면, 나의 두 번째 배우자는 여자일 수도 있겠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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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정의를 향한 여정 - RBG가 되기까지 북극곰 그래픽노블 시리즈 6
데비 레비 지음, 휘트니 가드너 그림, 지민 옮김 / 북극곰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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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즈버그는 차별 속에서도 분노를 표출하기보다는 차분히 전략을 짜고,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를 선택하고, 여러 사건을 연계하여 한 단계씩 큰 그림의 발판을 마련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연방대법관이 되고, RBG는 진보의 보통명사가 된다.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 나왔지만 어른들에게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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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김은주 지음 / 봄알람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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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나온 6명의 여성 철학자에 대해서도 좀 더 자세한 책을, 아니 다른 여성 철학자도 포함해서 그냥 시리즈로 계속 써주시면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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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10-16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가워서 댓글 남깁니다 ㅎ 지금 ‘터프 이너프‘ 읽는 중인데 참고하려고 어제밤 이 책 초반을 읽다가 잤거든요 오늘 월요일 잘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햇살과함께 2023-10-16 19:21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김은주 작가님 책 좋아요. 저도 <터프 이너프> 찾아보아야겠네요!
 
벗겨진 베일 (워터프루프북) 쏜살 문고
조지 엘리엇 지음, 정윤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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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미래를 보고 타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화자가 본인의 죽음의 순간을 보는 첫 장면으로 시작하는 짧은 소설. 고딕소설의 우울한 분위기와 불안정한 화자 내면의 섬세한 심리 묘사. 그러나 나는 아직 고딕소설의 매력에 빠지지 못했다. 조지 엘리엇의 대표작 미들마치 무려 1416페이지네.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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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5-25 18: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워터프루프북 엄청 신기하네요 ^^

햇살과함께 2022-05-25 18:27   좋아요 2 | URL
제 책은 워터프루프는 아니고,
민음 특별판이라 검색되는 게 이것밖에 없네요 ㅎㅎ
진짜 물에 젖어도 멀쩡한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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