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여성에게는 왜 남성을 능가하는 힘이 없는지 궁금해진다. 성별 우위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예외 없이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에게 이는 너무나 자명해 보인다. - P22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남성지배는 사회구조에 관한 것이다. 남성지배/가부장적 사회는 법률·정치·종교·경제구조나 제도가 남성을 여성보다 우위에 두는 곳이다. - P23

이처럼 여성과 남성 간의 불평등이 사회구조의 모든 층위에서 재생산된다는 사실은 여성 간의 차이를 논의할 때 종종 간과되는 지점이다. - P26

성별 임금격차는 체제의 맨 꼭대기부터 아래까지 퍼져 있고, 위의 사례는 남성지배가 구조적 문제라는 또 다른 증거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임금격차가 하층 여성에 미치는 영향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마땅히 기울여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체제 전체를 해체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많은 페미니스트가 여성 간의 차이를 인식하고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남성지배 혹은 가부장제라는 보편 개념을 고수하는 이유다. - P27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한 가지 전통적인 방식은 생물학적 결정론에 기대는 것이다. 생물학적 결정론에 따르면, 남성지배는 자연적인 성적 차이로 생긴 피할 수 없는 결과다. - P28

이는 페미니스트 대다수가 지지하지 않는 주장이다. 생물학적 결정론은 남성의 지배와 여성의 종속을 벗어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로 보지만, 페미니즘은 인간의 사회체제란 변할 수 있다고 맏기 때문이다. - P28

이들은 가부장제에도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내보일 수 있다면, 즉 가부장제가 탄생한 시기, 장소, 이유를 알 수 있다면 가부장제를 인간의 필수 조건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전에 다른 무언가가 있었고, 또 다른 무언가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P29

엥겔스의 설명에 따르면 가부장적 가족은 ‘생존수단의 생산양식‘이 변화하면서, 즉 (가축을 번식시키고 기르는) 목축이 발달하면서 출현했다. - P30

역사학자 거다 러너는 1986년에 쓴 『가부장제의 창조』에서 엥겔스와는 조금 다른 주장을 펼친다. 그녀는 가부장제의 출현이 (농업이라는) 새로운 생산양식의 발달과 연관성을 지닌다는 엥겔스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자손에게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남성의 바람 때문에 여성이 예속되게 됐다는 주장에는 반박한다. 대신, 러너는 남성이 여성과 아이 그 자체를 재산으로 바꿔놓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생산양식이 탄생하면서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졌기 때문에 일어났다. 아이를 더 많이 낳으려면 공동체는 더 많은 가임 여성이 필요했고, 때때로 이웃 집단에서 여성을 납치해 노예로 만들어 그 필요를 충족하기도 했다. 러너는 "노예가 된 여성과 아이는 최초의 사유재산이다"라고 말한다. - P31

성평등 사회의 모습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례는 특유의 전통적 삶의 방식을 고수해온 수렵채집사회다 - P32

실비아 월비는 『가부장제 이론』에서 영국과 같은 사회의 가부장제는 지난 세기에 ‘사적‘ 가부장제에서 ‘공적‘ 가부장제로 서서히 그 형태가 바뀌었다고 지적한다. - P33

오히려 여성은 개인 남성과 맺는 사적 관계에서보다 시민이자 피고용인이라는 공적 역할에서 더 많은 예속 경험을 하게 됐다. - P34

그들은 성의 영역도 사적 가부장제에서 공적 가부장제로 전환됐다고 말한다. 즉, 과거에는 여성을 성적 소유물로 여기며 남편이 독점했다면, 오늘날 여성은 어떤 남성에게도 성적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여성에게 금기시되었던 것이 현재는 기대되는 것으로 변했고, 심지어 강요되기까지 한다. - P35

가부장제의 기원을 앞서 살펴보았듯, 가부장제 출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요소는 사실상 여성의 재생산 능력을 착취하고 통제하려는 남성의 욕망이다. - P35

페미니스트 대부분은 남성이라는 계급이 차지하는 지배적 지위에 대한 대가를 남성 개개인이 치른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한편, 남성은 여성과 달리 이러한 체제로 이득을 본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 P39

손태그가 말하길, 가부장제는 모든 이를 동등하게 억압한다는 생각은 "마치 가부장제는 그 누가 만든 것도 아니고, 그 누구에게 편한 것도 아니며, 그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라는 듯, 남성지배라는 날 것의 현실을 어물쩍 넘기려 한다." 남성지배가 유지되는 이유는 다른 불평등한 구조가 유지되는 이유와 같다. 즉, 가부장제는 특정한 누군가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 위해 작동한다. 페미니스트는 가부장제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그것을 바꾸는 데 필요한 행동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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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 여성들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로 부르기 꺼렸던 이유 중 하나는 그에 따라붙는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랫동안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여성들을 까다롭고 여성스럽지 못한 남성 혐오자로 깎아내리는 데 쓰였다. 게다가 세이어스의 글은 영국 여성이 남성과 같은 조건으로 투표할 권리를 얻은 직후에 나온 것이었다. 참정권을 얻은 이후의 세대에게 페미니즘은 구식인 데다 무의미하고 아무런 효용이 없다고 인식되었다. - P8

○ 관념으로서의 페미니즘: 마리 시어가 말했듯, 페미니즘은 "여성도 사람이라는 급진적 개념"이다.
○ 집단적 정치 활동으로서의 페미니즘: 벨 훅스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
○ 지적 체계로서의 페미니즘: 철학자 낸시 하트삭에게 페미니즘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방법이자 (…) 분석 모형"이다. - P9

관념으로서의 페미니즘은 정치적 운동보다 그 역사가 훨씬 길다. 유럽에서 정치적 페미니즘은 보통 18세기 후반에 시작됐다고 본다. 하지만 여성이 부당한 비방에 맞서 자기 성을 변호하는 글쓰기 전통은 그보다 몇 세기나 앞선 시대부터 있었다. 이러한 전통을 열어젖힌 글은 15세기 초, 박학다식한 일반인 프랑스 여성 크리스틴 드피상이 쓴 『여성들의 도시』다. - P9

역사학자들은 페미니즘의 정치적 목적이 다양한 신념이나 관심사와 양립할수 있을 때만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 P11

19세기에 시작해 20세기 초 정점에 달했던 여성참정권 운동이 그 대표 사례다. 당시 활동가들이 내세운 두 가지 핵심적인 주장은 여성의 본성과 사회적 역할에 관한 서로 다르면서 이론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두 관점에 기대고 있었다. 첫 번째 관점은 여성도 남성과 같은 정치적 권리를 마땅히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남녀의 유사성을 강조했고, 두 번째 관점은 여성만의 독특한 관심사는 남성 유권자가 적절히 대표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남녀의 차이점을 강조했다. - P11

‘물결’ 모델은 널리 쓰이지만, 수많은 비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중 하나는 과거의 유산이 현재에 여전히 남아 있는데도 새로 등장하는 각 물결은 이전의 것을 대체한다고 느끼게 하여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비판이다. - P13

서문 앞머리에 열거한 페미니즘의 의미 중, 지적 체계라는 세번째 뜻으로 페미니즘을 이해한다면, 그 역사의 흐름을 그리기란 훨씬 더 복잡해진다. 페미니즘은 철학 사조나 이론 흐름의 전형(‘실존주의’나 ‘후기 구조주의‘ 등)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위대한 사상가의 정전에 만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권의 옹호』(1792)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1949)처럼 현대 페미니스트 사상사의 토대로 널리 알려진 이론적 문헌이 몇 개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이외의 저작으로 모든 페미니스트가 동의할 목록을 만들기란 무척 까다로울 것이다. - P15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양립 불가능한 여러 신념과 관심사 들은 페미니즘이라는 하나의 우산 아래에 한데 모인다(물론 그 신념의 일부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추구하기도 한다). 이 신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원칙, 즉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칭하는 모두가 동의할 만한 기본 원칙 같은 것이 존재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수많은 작가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단수 ‘페미니즘‘이 아니라 복수 ‘페미니즘들‘에 관해 얘기해야 한다고 답했다. - P16

1. 현재 여성은 사회에서 예속 상태에 있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당함을 겪고 체계적 불이익을 받는다.
2. 여성의 예속은 불가피하지도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는 정치적 행동을 통해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만 한다. - P17

비록 여기서 ‘여성‘이라는 포괄적인 용어를 썼지만, 그렇다고 ‘여성‘이 모두 똑같은 불의와 불이익을 겪는 단일하고 동질적인 집단이라고 이해해선 안 된다. - P17

현대 페미니즘의 흐름은 대부분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가 ‘교차성 intersectionality‘이라고 이름붙인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 교차성이란 여성의 경험은 그들의 성별뿐만 아니라 인종, 민족, 섹슈얼리티, 사회 계급 같은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 등 다른 측면의 영향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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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 - 결혼한 여자들의 페미니즘
엄마페미니즘탐구모임 부너미 지음 / 민들레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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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기혼 페미니스트, 엄마 페미니스트의 고군분투 생활 이야기. 책을 읽으면서 머리 속으로는 내 과거를 자꾸 헤집게 된다. 나의 임신 시절, 출산 당시, 첫째 신생아 때, 초등 입학 때, 등등. 맞아 맞아 나도 그때 그랬는데 하며 공감하게 된다. 지금 어린 자녀를 키우며 남편과의 가족업무 균형을 고민 중이라면 엄마 페미니스트로 살아내기 위해 참고할 지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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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만 보면 우린 생계부양자와 돌봄노동자로 엮인, 참으로 모범적인 관계였다. 우리가 이룬 유기체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훌륭한 부품이었고, 빈틈없이 완벽해서 어떤 오류도 나지 않을 듯 보였다. 시곗바늘처럼 찰칵찰칵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나 하나 불만 없이 수긍하면 우리의 일상은 너무나 평온했고, 모든 걸 헝클어버리고 싶은 짓궂은 충동에 휩싸일 때도 창틀을 벅벅 닦으며 떨쳐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말한 ‘우리 돈‘과 ‘내 돈‘이 그동안 눌러두었던 분노를 점화했다. 우리의 허술한 연대는 이렇게 박살났다. - P152

"그럼 네가 돈 벌어와!"
남편은 싸울 때마다 말했다. ‘내가 회사 그만두면 네가 어떻게 살 건데?‘라는 협박과 다름없었다. 남편이 밤늦도록 회사 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 ‘애 아빠‘임에도 불구하고 육아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고, 그건 내가 집에서 그의 몫까지 아이를 돌봤기 때문이라고 정신승리를 해왔지만 ‘돈 버는 유세‘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어쨌든 그가 벌어오는 돈에 우리 가족의 생계가 달려있는 건 사실이었고 언제나 돈 버는 일은 다른 일보다 중요했으니까. - P155

집안일과 육아도 그랬다. 돈 버는 사람은 퇴근 후 손가락 움직일 힘도 없으므로 무조건 쉬어야 한단다. 돈을 얼마를 벌건 집안일과 육아는 공동의 일이다. 돈을 번다는 이유로 집에 있는 사람을 부릴 권력을 가질 순 없다. 그럼에도이 사회는 돈 버는 사람에게 집안일과 육아를 방치해도 되는 면죄부를 부여한다. 그런데 과연 돈 때문일까. 그런 이유라면 돈 버는 여자들도 휴식을 누려야 할 텐데 그런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 P156

신기하게도 내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일인분의 돈을 벌면서 남편과 감정적으로 부대끼는 일이 줄었다. 누가 아이를 보느냐, 왜 배수구를 닦지 않느냐, 분리수거할 때 플라스틱 병뚜껑을 왜 종이상자에 넣느냐며 아옹다옹하긴 해도 남편에 의해 나의 기쁨이 좌우되지 않았다. 확실한 벌이를 가짐으로써 화가 줄어든 것이다. 나의 자존감이 고작 이정도였나 쓴웃음이 배어나오면서도 가족 안의 역할에 매이지 않는 다른 정체성의 위력을 실감했다. - P162

드디어 발표날, 발표 직전까지 나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앞선 발표자의 발표가 끝나고 마이크를 전달받았다. 어깨를 펴고, 허리를 세웠다. 일부러 가슴을 더 내밀어 굽어진몸을 펴지게 만들었다. 아이는 엄마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니 무슨 일인가 싶어 도우미에게 안겨 나를 보고 있었다. 제발 울지 않기를, 5분만 기다려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발표를 마쳤다.
내 인생은 애를 낳았단 이유로 끝나지 않았다. - P176

모든 게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이상하단 느낌이 들었다. 왜 남편은 이 일을 고민하지 않는 걸까? 왜 나만 열심히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걸까? 비록 남편이 나를 도와주지만 그가 주도적으로 육아를 맡지 않는 한, 나는 앞으로도 육아와 일 모두를 잡기 위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해야만 했다. - P182

나는 ‘적당한‘ 관계보다 ‘건강한‘ 관계를 원했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며느리‘가 아닌 한 ‘사람‘으로 당당하게 서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 기분이 나쁜지, 어떤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지, 무엇을 감당할 수 없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남편 가족들과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인연을 이어가면 좋을지를 물은 것이다. - P195

나는 친한 친구나 친정 가족들에게조차 안부전화를 자주하지 않는다. 용건이 있을 때나 전화하고, ‘정말 가끔‘ 누군가가 잘 지내는지 궁금하면 통화버튼을 누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결혼을 하니 시가에 전화하는 일이 ‘의무‘로 주어졌다. 전화를 받는 것도, 하는 것도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거부할 용기가 없었다. 제때 전화를 받지 않거나 하지 않으면마음이 영 찝찝해 깍듯하게 답하곤 했다. 안부전화를 안 하면 ‘도리‘를 다하지 못한 ‘나쁜 며느리‘가 된 기분이 들었다. - P196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여성과 남성의 삶을 구조적으로 바라보니, 친정 엄마와 시어머니 또한 가부장사회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어머니들, 온갖 차별과 폭력을 견디며 혹독한 시대를 지나온 어머니들, 그러면서도 딸보다 아들을 더 소중하게 여긴 어머니들,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구조를 스스로 굳건히 떠받친 어머니들….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그들을 탓할 수 있을까? 그들의 치열했던 삶이 안타깝고, 아프고, 또 존경스럽다. - P204

나와 시가는 ‘남편‘이라는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계속 뭔가를 시도 중이다. 서로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상대의 마음을 살피면서 반걸음씩 물러났다. 부담 없이 편안한 이 거리가 계속 평행선이 될지, 더 멀어질지, 조금씩 가까워지다 결국 만나게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 싶다가도 사소한 말 한마디에 절망적인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남편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니 예의를 지키자는 마음과 언제든 ‘며느리 사표‘를 던질 마음이 공존한다. 개선은 되었지만 여전히 불안한 관계다. 한동안은 이 평행선을 유지하며 변화의 방향을 고민할 생각이다. - P206

스물여섯 출판사에 다닐 때도, 서른넷 결혼을 몇 달 앞두고 여성단체에서 일할 때도, 나는 엄마가 싸준 도시락으로 동료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점심을 먹었다. 그때 나는고마워했던가. 도시락을 싸는 게 내 일이라 생각하고 노력이라도 해봤던가. 그때의 나는, 우리 엄마의 수고와 고마움도 모르고 밥을 받아먹는 지금 내 남편과 다르지 않았다. - P223

오랜만에 엄마가 오셨다. 빨간 장바구니 카트를 밀고 오리털 파카를 껴입은 오한옥 씨가 왔다.
"봄이야, 할머니 몸이 지금 차. 이따가 이리 와."
남편은 일을 나갔고, 나는 글 쓴다고 밤을 샜다.
"엄마, 봄이 좀 봐줘. 나 좀 잘게."
밤새 친정 엄마의 돌봄노동에 대한 글을 써놓고 또다시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찔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하다. - P225

프리랜서인 내게는 단기 일감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남편은 내가 과로사할까 봐 진심으로 걱정했고, 아이는 주말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때마침‘ 정년퇴임한 친정 엄마의 돌봄을 받아야 했다. - P229

부끄럽게도 나는 대학에서 여성 운동을 하면서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결혼한 여자‘의 페미니즘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너무나 당연히 비혼주의자였고, 가부장제도 안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임신이나 출산이 내게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임신 중에도 내가 아들을 낳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서, 임신 16주가 지나의사가 아이 성별을 ‘아들‘이라고 알려주었을 때 잘못 보신 것 같다고, 다시 확인해달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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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이 우리의 역할을 정해줬다. 그동안은 나와 남편의 성별이 다르다고 해서 크게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출산 이후에는 여자와 남자라는 성별이 우리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결혼했고, 똑같이 아이 둘을 원했고, 똑같이 부모가 되었고, 아이가 건강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도 같았지만, 삶은 달라져야만 했다. - P73

돈 버는 남자는 권위를 갖는다. 친정 엄마는 남편이 돈 버느라 고생하니까 맛있는 요리를 해주라고, 퇴근하면 집에서 편안히 쉴 수 있도록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말하지 말라고, 남편이 무언가를 잘하면 크게 칭찬하고 기운을 북돋아주라고 수시로 당부했다. 내가 임금노동을 그만두고 돌봄노동을 선택한 이후, 내 성질은 죽이고 남편 기는 살려야 하는 새로운 과제가 생긴 것이다. - P75

우리 사회에서 힘을 가진 ‘갑‘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고 ‘을’은 참고 듣기만 한다. 남편과 내가 ‘갑을’관계같았다. 남편과 내가 서로의 역할을 바라보는 자세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나는 통장 잔액 부족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남편 기분이 상할까 자존심이 상할까 염려하며 하고싶은 말을 꾹꾹 참았지만, 남편은 내 감정이 상하거나 말거나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서슴없이 뱉었다. 돈을 버는 남편에게는 주체가 되어 말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날 침묵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 P77

나는 스스로 나를 구해야 했다. 남편은 남자들이 하는 흔한말을 하고, 남자들이 받는 흔한 대우를 받고 싶었을 뿐이다. 남성에게 더 많은 권력을 주는 현재의 결혼제도는 그 질서에 순응해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차별을 만들어낸다. 남편은 날 무시하는지도 모른 채 상처를 주었고, 나는 자주 결혼을 후회했다. 스스로 자존감을 되찾지 않고서는 남편눈치나 보며 기죽어 살거나 부부관계가 악화될 위기였다. - P79

남편이 밖에서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든지, 자신이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얼마나 큰 책임감을 갖고 불편한 상황들을 참고 있는지 은근히 내비칠 때는 나도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엄마라는 역할에 짓눌려 사는지 말했다. "당신의 책임감이 내 책임감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지마. 당신과 나는 종류가 다른 부담을 안고 살아갈 뿐이야. 그래도 당신 고생에 대해서는 월급이라는 보상과 사회적인 인정이라도 있지. 내 고생의 대가는 남편이 뼈 빠지게 벌어다 준 돈으로 커피나 마시는 맘충이 된 거잖아. 마음 편하게 커피 사 마실 돈을 벌어다 준 것도 아닌데." - P81

남편이 대단하다는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다.
"남편이 대단하다니요? 남편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성장할 동안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워주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데요! 남편은 스스로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수고를 지우지 마세요!" - P88

무언가가 변하면 그것을 따라 변화하는 것들이 있다. 서재에서 하는 일들이 새로운 일로 이어졌다. 하루 한 시간이라도 책을 고르고 책을 읽는 일이 즐거웠다. 육아를 하며 관리하지 못하던 블로그에 다시 책 후기를 올리고 사람들과 소통했다. 아이를 돌보며 머릿속에 생각을 정리했다가 깊은 밤 서재에 홀로 앉아 글을 썼다. 아이에 대한 글도 쓰고, 세상일에 대한 생각도 기록했다. - P101

집 안에 내 공간을 만들어가면서 나는 전보다 자유로워졌다. ‘여자인 내가, 엄마인 내가, 아내인 내가 이런 걸 가져도 되는 거야?‘라고 속으로 되뇌던 의심이 사라졌다.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것으로 공간을 채운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공간은 지금 내 삶과 내 모습 그 자체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현실이자, 내가 딛고 서서 머무는 곳이다. 나는 서재를 갖게 되면서 이전보다 더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 내 삶을 직시하고 있다. - P104

갓 태어난 아기는 심각하게 무능하다. 신생아는 20시간 넘게 잔다는데, 도대체 어디서 그 20시간을 충당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양육자에게 찰싹 붙어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언제나 아이를 안고 있어야 했다. 아이는 잠이 든 후에도 내게 붙어있었다. 잠시라도 소파나 침대에 걸터앉으면 바로 깨서 울어댔다. 덕분에 종아리가 퉁퉁 붓도록 아이를 안고 집 안을 배회했다. 종일 집에 있어도 쉴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자꾸 안아달라 보채는 아이는 ‘손탔다‘며 욕을 먹었다. 열심히 안아준 엄마의 잘못이라고 했다. - P117

"그 시기에 저도 많이 힘들었어요. ‘엄마기‘잖아요."
누군가 ‘엄마기‘라는 말을 꺼냈다. 처음 듣는 단어였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청소년이 ‘사춘기‘를 겪는 것처럼 엄마는 ‘엄마기‘를 겪는다.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정신적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며, 이때 불안이나 우울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시기의 감정 변화를 대변하는 말은 내가 알기로 ‘산후우울증‘뿐이다. 출산 이후 85퍼센트의 여성이 우울감을 느낀다곤 하지만, 나의 복합적인 감정에 ‘산후우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니 납득도 치유도 되지 않았다. 상태만 악화될 뿐이었다. 그러던 중 만난 ‘엄마기‘라는 말은 ‘환자, 비정상‘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 P121

모성의 후광이 엄마를 가호해서 육아체질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육아는 단순노동이다. 그저 많이 하다 보면 어떻게든 잘하게 된다. 육아체질이란 없다. - P124

고정된 성역할을 가르치지 말자고 남편과 이야기했고 그도 동의했다. 그렇지만 남편은 그 와중에도 얄미운 말을 덧붙였다. "알겠어. 그래도 분홍색으로 된 거 말고!" 분홍색으로 된 간호사 놀이 세트를 아들에게 사주고 싶은 이유는 ‘분홍색‘과 ‘간호사‘를 아들에게 강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남자도 분홍색을 좋아할 수 있고, 간호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 P134

여자에게만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고 생각한 나에게 문제가 있었다. 남자아이에게만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하고 행동하라고 가르치면 충분할까? 남자아이도 자신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군가 자기를 만지려고 할 때 원하지 않는 스킨십을 거부할 수 있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는 나중에 젠더감수성에서 큰 차이를 보일 것이다. - P135

"엄마 고추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아이에게 일격을 당했다. 남성의 생식기를 지칭하는 ‘고추’는 집안에서나 밖에서나 아무렇지 않게 술술 말하면서, 여성의 생식기를 지칭하려니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고추‘가 있냐고 묻기에 ‘다른 것‘이 있다고만 답했다. ‘없다‘고 하면 여성을 무언가 부족한 존재로 인식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문득 어릴 때 엄마가 나에게 어떻게 가르쳐줬는지 떠올랐다. ‘초초‘, 너무 귀여운(?) 단어였다. 그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말았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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