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과정에서 가해자의 사망. 잔인하고 비겁하고 치사한 놈들이다.
조민기도, 박원순도!

그리고 저 어이없는 도표라니! 합의가 성사되든 안되든 가해자의 형량에 유리하게 반영되는 한국 사법 현실…

보복성 고소와 관련해서는 앞으로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문제, 수사 과정에서의 무고 인지 문제, 원 피해 사건 재판 과정에서의 양형 반영 문제 등 풀어가야 할 다양한 숙제들이 쌓여 있다. 피해자의 말을 막고 연대와 지지기반을 무너뜨리며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가해자들의 ‘보복’을, 이 사회는 어떻게든 막고 책임을 지울 것이다. - P74

‘위력에 의한 성폭력’에 대해 불기소 처분이 내려지자 가해자(정신과 의사)는 피해자의 말과 글을 막기 위해 가처분신청까지 했다. 공론화를 무력화하고 법적 절차를 밟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가해자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전략이다. 이 모든 법적 절차를 피해자 혼자서, 그것도 경제적 여유가 없는 피해자가 알아서 대응하기는 어려웠기에 성폭력위기센터를 통한 무료법률구조를 권했고, 피해자와 함께 하나씩 차분하게 대응하려 노력했다. - P80

그러다 2020년 봄, 가해자는 사망했다. 자신의 가해에 대한 그 어떤 인정도, 반성도, 회복을 위한 노력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고통을 감수하고 사법 시스템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던 피해자들의 허탈감은 얼마나 컸을까. 죽음에 관대한 한국 사회의 정서상 오히려 가해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피해자에게 묻는 이들도 있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지 않았냐며 피해자들에게 망각을 강요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해자의 죽음 그 자체가 곧바로 피해자의 회복과 일상의 재구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죽음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려 애썼다. - P84

사람들은 가해자에 대한 법적 단죄가 마무리되면 저절로 피해가 회복되며 일상이 재구성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그때부터 다시 시작이다. 그렇게 시작된 싸움은 지리멸렬하고 이해받지 못하기도 한다. 지원은 끊기고 관심도 사라진 상태에서 피해자 혼자 덩그러니 남는 경우가 태반이다. 다 끝났는데 왜 그러고 있냐는 핀잔을 듣기 쉽다. 왜 아직 못 벗어났냐고, 이제 열심히 회복하고 사회로 복귀해야 하는것 아니냐고. 피해자도 그러고 싶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렵다. - P86

지은 씨는 기록을 시작으로 하나씩 일상을 다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여전히 세상 밖으로 편하게 나오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당시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출판을 권유한 것은 ‘이후의 삶’에서 주도권을 갖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가 외부 평가에 의해 박제된 삶을 살기를 원치 않았다. 내 연대의 지향은 피해자들이 ‘이후의 삶’에서 주체적이고 안정적으로, 안전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것이다. 그래서 찾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기록과 영상이다. 《김지은입니다》는 피해 회복과 일상 재구성을 위해 그가 선택한 첫걸음이자, 개인 연대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연대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피해를 실질적으로 회복하기가 어렵다. - P88

피해자가 숨을 고르고 사회 복귀를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데, 사회는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이 없다. ‘회복적 사법 restorative justice‘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정작 피해자의 실질적 회복에 대한 관심은 적은 것이다. 신변보호, 주거와 생활비 등 경제적 지원, 신체적·정신적 건강과 관련된 각종 의료적 지원, 직업교육 등 사회 복귀를 위한 지원, 안전망 구축 등 아주 기본적인 회복 지원도 여전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긴 ‘응보적 사법 retributive justice‘ 역시 제기능을 못하는 상황에서 아직은 지나치게 큰 기대일 수 있다. 그렇기에 ‘법대로‘ 하는 것은 피해자가 여전히 많은 상실을 각오해야 하는 선택지다. 법적 절차가 종료된 후 피해자가 사회로 복귀하기까지 사법 시스템은, 사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 P89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고통, 충격)"라는 표현을 쉽게 내뱉는다. 이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 대한 시스템의 책임 회피이자, 피해회복을 피해자 개인의 몫으로 돌리는 사회의 비겁한 변명이기도 하다. 시스템에 기반해 정의를 제때 실현하고, 응보적 측면의 책임부터 견고히 해야 한다. 아울러 다양한 사회적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싸움 이후 피해자의 피해 회복과 사회 복귀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 P90

피해자들은 대부분 피고인 퇴정 등 공간 분리를 요구하지만, 재판부는 피고인의 재판 참여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같은 공간에 차폐막만 쳐놓고 피해자 증인신문을 강행하기도 한다.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이윤택(70세, 남) 전 연극연출가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재판에서는 피고인이 차폐막 너머에서 헛기침을 하거나 차폐막을 발로 차며 위압감을 주는 행위를 일삼기도 했다. 당시 피해자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증인신문을 견뎌야 했다. 이런 형태로 피고인이 피해자를 압박하고 신문을 방해하는 행위가 잦기 때문에 피고인 퇴정 등 공간 분리는 매우 중요하다. - P97

피고인 쪽의 부적절한 신문을 재판부가 제지하지 않아 고통을 겪는 일도 다반사다. 실제로 2019년 이후 성폭력 사건 재판의 증인신문과정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자라면 이런 상황을 동의로 받아들일 수있지 않겠어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클럽에 가거나 모텔에 남성과 - P98

투숙하는 것은 성관계 동의로 볼 수 있지 않겠어요?", "본인이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남성 혐오감을 갖고 있어 예민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이는 모두 2016년 사법정책연구표시의원 연구보고서에서 부적절한 신문 유형으로 지적된 것들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과도하게 괴롭히거나 겁을 주거나 공격적인 질문", "빈정거리거나 모욕하거나 폄하하는 질문", "집요하고 반복적인 질문", "성관계 행위 내지 신체적 특징을 불필요하고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묘사하도록 하는 질문", "피해자의 사생활 내지 성적 행위 이력에 관한 질문" 등은 모두 부적절한 신문 유형이다. - P99

이처럼 피고인(가해자)이 범죄 혐의를 인정한다는 조건을 걸어 피해자로부터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합의서를 받아낸 후, 재판 결과가 유리하게 나오면 돌변해 무죄를 주장하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그런데도 수사기관이나 재판부는 합의에 이르는 과정, 합의내용, 합의 이후(공소제기 이전일 경우) 피의자 또는 공소제기 이후일 경우) 피고인의 태도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합의‘는 가해자의 족쇄를 풀어주는 장치로 활용된다. - P105

가해자들이 수사와 재판의 과정에서 ‘합의‘를 이용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수사 과정에서는 소의 취하를 유도하기 위해 합의를 요구하지만, 실상 합의에 실패해도 불리할 것이 없다. 합의 과정에서 피해자가 금전적 요구를 했거나 금전적 보상 제안에 응했다면, 그 사실을 내세워 피해자가 돈을 노리고 접근한 것으로 몰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재판 과정에서는 합의해야 공소사실(범행 내용)을 인정하겠다고 버티거나, 합의를 해야 법정 싸움이 길어지는 걸 막고 피해의 일부라도 회복할 수 있는 것처럼 피해자를 밀어붙인다.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도, 합의에 실패한 피고인은 불리하지 않다. ‘진지한 노력‘을 한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한국 법원은 합의에 성공해도, 합의에 실패해도 피고인에게 유리하도록 판단한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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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 피해자에서 생존자, 그리고 감시자가 된 마녀 D의 사법연대기
D 지음, 김수정 외 감수 / 동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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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세상에 살지 않아 이런 대단한 분이 있는지 몰랐다. ‘주제 파악과 거리 유지라는 원칙에 입각해 연대자로서의 정체성의 선‘을 넘지 않으려는 작가님의 냉철함이 처절하게 느껴진다. 예상을 깨는 냉철한 현실 감각에 더 신뢰가 간다. 이건 감정이 아니라 법의 문제이므로. 끝까지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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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죽여버릴 걸.
그렇지만 죽이지 않아 다행이다.

문득 2011년 1심 재판 이후 내 모습이 떠올라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때 나도 ‘생존자‘라는 말이 싫었다. 살아내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 무채색으로 둘러싸인 세상을 부유하듯 떠다니는 내가 잘못이라고 질책하는 것 같아서, 분노와 절망에 휩싸여 옹졸해진 내가 부족하고 모난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냥 사는 건데, 삶에 무슨 크고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생존자라고 하는지. 한때는 그 말이 부담스러웠다. 힘을 내라는 말이, 괜찮냐고 묻는 안부가 더 힘들고 더 괜찮지 않았다. - P5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했다. 살아 있기를 잘했다고,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길은 있다고, 그러니 살라고. - P7

‘법대로‘ 하면 피해를 인정받고 내 삶을 찾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싸워야 했다. 왜 끝나지 않는 것일까. 끝은 있는 걸까. 싸움에서 이겼는데 왜 난 여전히 말과 시간, 그리고 자리를 찾지 못하는 걸까. 왜 난 아득바득 ‘예민하고 끈질긴 미친년‘이 되어 이 싸움을 하는 걸까. 이 싸움이 가치가 있나.
차라리 죽여버릴 걸. - P19

출소한 가해자로부터 보복범죄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고 호소하자 경찰은 ‘당하면‘ 오라고 했다. 내가 ‘당하면 여기 이 자리로 와서 말할 수 있겠냐고 했지만, 자기들도 지금은 어쩔 수 없다더라. - P20

연대자는 어떤 존재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연대자로서의 나를 피해자의 그림자로 표현한다. 그림자는 본체에 가려져 있다. 따라서 내가 하는 연대의 기본은 본체인 피해자의 의사를 중심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림자는 그 길이와 방향을 통해 본체가 시간과 위치를 파악하도록 돕는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피해자를 위해 때로는 전략을 수립하고, 특정 방향을 선택하도록 권하며, 앞으로 나서기도 한다. - P24

연대자로서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2014년 이후 내가 설정한 원칙을 철저히 지키지 않았다면 번아웃에 빠져 이미 연대를 중단했을 거다. 그 원칙은 바로 주제 파악과 거리 유지다. - P26

그러나 내가 아무리 경험을 통해, 그리고 개인적인 공부를 통해 앎을 확장한다고 하더라도 전문 분야에 대한 이해도는 전공자나 관련 자격증이 있는 이들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운 원칙이 바로
‘주제 파악‘이다. 내가 할 몫은 형사사법 시스템을 피해자의 시각과 입장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며, 전문가와 협업하는 것이다. 그 경계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구분해야 피해자에게 도움이 된다. - P27

사법 시스템에서의 연대는 피해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되, 가해자의 입장과 전략 등 상황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내게 있어 피해자를 신뢰한다는 것은, 피해자의 불완전성과 (혹시 있을 수도 있는) 흠결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피해자의 기억은 왜곡되기 쉽고 주장이 편향될 수도 있는데, 이는 피해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피해자도 인간이며, 인간은 무결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는 뜻이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가해자가 취할 가능성이 큰 입장과 전략을 분석하며, 결과적으로 사법 시스템에서 어떻게 연대하는 것이 피해자에게 유용할지 고민한다. 건조하고 냉혹한 사법 시스템을 선택한 피해자가 헛된 희망을 품는 대신 현실을 파악하도록 돕고, 승소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조력을 하는 것이 내 역량에 맞는 연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P29

첫 만남 이후 나는 H씨와 J씨에게 건네받은 각종 자료를 분석했다. 피해자가 직접 공판검사를 만나 설명하고 입장을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검사와 면담하도록 제안했다. 대다수 피해자들은 본인이 검사와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피해 회복에만 힘쓰면서 가만히 있으면 검사가 ‘어련히 알아서‘ 최선을 다해 피해 사실을 입증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사건 파악도 제대로 하지 않는 공판검사도 많다. 그래서 검사와 직접 면담해 설명하도록 권한 것이다. - P33

가해자 지인들의 2차 가해는 허위비방, 사생활 유포, 모욕, 신상정보 공개 등 다양하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는 1차 피해인 성폭력 사건의 고통에 더해 추가 피해의 고통까지 떠안게 되며, 그 추가 피해 때문에 자해와 자살을 시도한 사례도 있다. 2차 가해가 피해자들이 피해를 회복하고 일상을 다시 구성하는 데 또 다른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성폭력 2차 가해를 별도로 다루는 법률은 없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형법상 혹은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사실적시/허위사실적시), 모욕, 성폭력처벌법상 비밀준수 위반 등으로 고소·고발한다. 그러나 성폭력 2차 가해를 다루는 법률이 따로 없는 상황에서 수사기관은 그 죄질을 과소평가하고, 신상공개와 같은 2차 가해가 이루어져도 성폭력처벌법 등을 적극적으로 적용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항의하면 이미 공론화를 선택하지 않았느냐며, 형사사법 시스템을 거치려면 외부의 의문이나 비판을 수용해야 하지 않느냐고 한다. - P43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고발과 고소 후 이어지는 2차 가해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다. 그럼에도 현행 수사·재판 과정에서 제대로 된 사법적 판단이 이루어진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2차 가해 사건은 많은 경우 기소까지 가지 않으며, 수사관들은 2차 가해가 피해자의 인격과 삶을 얼마나 갉는지 이해하지 않는다. 일부 변화가 감지되긴 하지만 법원도 여전하다. 입법적 보완은 필요하지만 그와 별개로, 싸움을 진행중인 피해자들을 위한 수사기관과 법원의 적극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 P47

피해자는 《디스패치》가 내세웠던 영상분석 전문가를 찾아가 정식으로 영상분석을 의뢰했다. 다른 전문가를 찾아가봐야 구설에 오를 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 전문가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영상을 다시 분석했으며,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며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 모든 과정을 거쳐 《디스패치>는 1년 뒤인 2018년에야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기사를 삭제하면서 정정보도를 내보냈다. 이렇듯 진실을 알리려고 피해자가 애를 썼음에도 언론과 대중은 외면했다. 언론은 조회 수만 높이면 되기 때문에 이후 진실이 드러나도 스스로 정정하려 들지 않으며, 강제로 정정하게 되어도 그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는다. 의심하기를 선택한 대중들은 추후 사실관계가 밝혀지고 진실이 드러나도 본인들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극적인 허위 기사를 두고 피해자와 사건에 대해 말을 얹으며 추가 가해를 한 이들 또한, 이후 정정보도 등이 나와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 P52

연대를 하기로 결정한 후, 그에게 폭로 글과는 별개로 그가 오랜시간 당했던 교제폭력에 대해 시간순으로 일람표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그가 만들어도 어차피 다시 작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사건과 관련해 정리하도록 권하는 것은, 결국 진술을 해야 하는 사람은 피해자 자신이고, 이런 정리 과정을 통해 피해자가 자신의 기억이 왜곡될 가능성을 인정하며, 진술의 신빙성을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통스럽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난 기다린다. 연대자에게 요구되는 덕목 중 하나가 바로 기다림, 인내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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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 완벽한 페미니즘이라는 환상
이라영 지음 / 동녘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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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흔적과 과정을 숨겨야 마땅한 존재이기에 '공공장소에서 화장하는 여자'에 대한 혐오가 표출되기도 한다. "여성들 '길거리 화장' 자제하길"이라는 기사까지 나올 지영이다. 냄새를 비롯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요소가 있다는 주장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단속하려는 태도는 단지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 아니다. 가리고 수줍어하는 것이 '여자다움'에 맞는 행동이므로 화장하는 과정을 공공장소에서 뻔뻔스럽게 노출하는 여성을 거북하게 바라본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여자의 태도에 당혹스러워한다. - P105


'공공장소에서 화장하는 여자' 이야기에 뜨끔하다. 나도 아침 출근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여자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볼 때마다 불편하고 민망하다. 왜 불편할까? 왜 민망할까? 여자들이 꾸밈에 너무 신경쓰는 게 맘에 들지 않아서? 밖에서 화장하는 여자들이 천박해 보여서? 이건 에티켓의 문제라서? 저렇게까지 화장이라는 걸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이건 내가 화장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일 거다. 설령 내가 화장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라는 사람은 절대 남들이 보는 자리에서 화장하는 과정을 노출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지하철에서는 심지어 전화도 잘 받지 못한다. 급한 일이면 지하철에서 잠시 내려 전화를 받고 다시 탄다. 업무 통화이든 개인적인 통화이든 남들이 내 통화를 듣는 것이 불편하다). 그래도, 내가 화장하는 사람이라면 지금보다는 화장하는 여자들을 더 잘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지만 이 불편한 마음을 다스리기가 어렵다.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이 느끼는 것의 차이가 또 생긴다. 더 많이 봐서 익숙해지면 괜찮을까. 그래, 그럴지도, 10년 전에는 강아지를 아기처럼 유아차에 태우고 다는 것도 뜨악하게 생각했는데, 이제 아주 익숙하고 귀엽게 바라보기까지 한다. 그건 내가 강아지를 무서움, 두려움, 인간 아님의 대상에서 반려, 애정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또 깨어져야 하겠다.


이 책에는 처녀막, 자궁, 월경, 성폭행, 강간, 낙태 등 도발적인 이야기들이 마구 나온다. 다 공감할 수는 없지만, 현실에서 당장 도발하지 못하더라도 이런 도발하는 이야기들을 계속 읽고 도발하는 마음을 키워야지. 그럼 현실에서도 언제가 도발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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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그녀의 비극적인 건강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녀가 안고 살았던 삶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비극적인 건강이 평등, 상호성 등에 대한 한탄을 가라앉히는 한 말이지." - P49

에리스 탈진……..
"길고 길었던 노력과 긴장은 모든 소망을 날려 버렸다. 오직 안식을 향한 소망만 남겨 놓고! 창조의 시기는 다 지나고, 이제 한계상황에 굴복하고 거기에 자기를 꿰맞추는 시기가 왔도다." - P55

해리 지금 날 위로하는 거니?

앨리스 난 여자거든. 남자들을 위로하고, 남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여자의 임무지. 심지어 침대에서, 병상에서, 죽음의 자리에서, 출산의 자리에서도 일어나서, 남자가 까치발로 왔건, 방문차 왔건, 위로차 왔건 간에 말이지. 안그래? - P59

에밀리 마가렛. 일어나지 말고 그냥 앉아 있어.
마가렛 우리가 너무 이른가?
에밀리 다정한 마음씨는 언제라도 늦거나 빠른 법이 없지

마가렛 난 너무 일찍 온 거 같아.
넌 제시간에 왔는데 말이야.
에밀리 기다림이란 긴 인사야. - P65

앨리스 미안해. 그렇게 서슴지 않고 너한테 상기시키려고 한 건 아니었어. 난 죽음에 대해서 참 열심히 생각하곤 해. 그러다 보니 죽음이란 게 너무 익숙한 생각이 되고 위로가 되어 버렸지. 덕분에 바깥세상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게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잊어버리곤 해. (잠깐 쉬었다가) 난 너무 가볍게 살고 있어. 누군가 날 좀 자제시켜야 해. - P70

마가렛 사람이 살아가는 데 천재성 같은 건 필요 없는 거같아.
앨리스 (여전히 흥분하여) 나는 나 자신을 속이고 있어.
마가렛 (무미건조하게) 두 사람으로 사는 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무섭지만, 바로 이럴 때 진실이 사라질 수 있는 거야. - P74

마가렛 내 생각은 이런 거야. 넌 원해야 해. 네가 원하는 바로 그것을 요구해야 해.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깨끗해지는 거야. 그런 삶을 지향하면서 사는 거지.
앨리스 인생은 용기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아.
마가렛 아니야, 그래.
에밀리 (앨리스에게) 난 네가 상당히 용감하다고 생각해.
미르타 너, 어떻게 그 속에서 참을 수 있니? 한 방에서. - P90

튼튼한 대나무 말 같은 두 다리로 자유롭게 걸어서 다리를 건너는 거야. 강물은 아주 부드럽게 흘러. 다리 위에 서서 석양 속에서 날개를 파닥거리며 낮게 나는 검은 새를 바라보니, 천사는 천사의 언덕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고 있네. 나는어떤 날씨에나 잘 어울리는 차림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겨. 사람이란 자주 시험대에 서지는 않지만 어쨌든 나 자신이 작아졌다고 느끼지는 않아. 왜냐하면 정신은 자기 나름으로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데 어느 누가 어떤 게 옳은 크기라고 말할 수 있겠어? 또 몇 살 정도가 옳은 나다, 하는 사람은 또 누구겠냐고. 내 나이가 몇이더라? 내가 몇 살인지 말하고 싶지 않아. 로마는 아주 나이를 많은 먹은 걸로 유명하지. 난 어떤 것이 얼마나 큰지 혹은 얼마나 작은지 말하지 않을 테야. 내 정신은 어떤 크기도 가지고 있지 않아. 하나의 크기는 모든 것에 다맞다고. - P111

앨리스 세상에는 끔찍하고 이상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요. 그리고 난 끈질긴 자아 속에 갇혀 있죠. 나로 하여금 고통 받게 하고 날 둘러싸고, 날 왜소하게 느끼게 만드는 이 자신 속에.
젊은 남자 내가 사는 곳에서라면 당신은 아마 하루도 못견딜 거예요.

앨리스 내가 제일 많이 하는 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거예요. 난 이번에도 그렇게 할 거예요. 당신은 여기에 없었어. (웃는다.) 그리고 이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일이고, 당신은 나같이 단순한 희생자를 다시는 못 볼 거예요. 나처럼 사후의 삶에 그렇게 욕심이 많고, 그렇게참을성 많고, 또 그렇게 호기심 많은 사람 말이에요. - P132

앨리스 난 전에는 진짜 존재, 어쩌면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어요. 그럴려고 했다고요. 난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간호사 내가 잡아 줄게요.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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