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적용된 것이 바로 ‘공동가공의 의사‘와 ‘기능적 행위지배‘를 요건으로 하는 ‘공동정범‘(형법 제30조)이다. 1심과 2심의 재판부는 피고인 김ㅌㅇ이 성착취 범행에 대한 고의가 있었고, 범행을 위해 다른 공범들과 지속적으로 연락했으며, 성착취 등 범죄를 실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었던 피싱·열람 사이트의 보완·유지·보수 작업을 담당함으로써 성착취 등 범행에 본질적으로 기여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각 성착취 범행을 ‘직접‘ 실행하지 않았더라도 공범임이 인정된다고 판단해 중형을 선고한 것이다(141쪽 참조). 이는 ‘범죄단체‘ 혹은 ‘범죄집단‘으로 기소되지 않더라도, 조직적·계획적 디지털 성착취·성폭력 범죄에 가담할 경우 중형 선고가 가능하다는 선례를 남겼다. - P446

항소심 재판부는 특정된 피해자 두 명에게 지급했다는 합의금 액수도 확인했다. 나는 합의금 액수를 듣고 맥이 빠졌다. 그 정도 금액이면 반 년치 영상 삭제 비용도 되지 않는다. 그런 수준의 금전합의가 과연 피해 회복에 기여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형사 판결문 속에서 본, 액수가 적히지 않은 "상당한 금원을 주고 한 합의"라는 대목이 떠올랐다. 과연 ‘상당한 금원‘의 기준은 무엇인가? 금전합의가 실질적으로 감형의필수 요건처럼 되어 있는 한국의 사법 시스템에서, 합의금 액수는 어떻산정되고 있으며, 그 적절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한국 형사법 체계에서 금전합의가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금전합의를 양형에 직접 반영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의가 다양한 측면에서 진행될 필요성도 여기에 있다. - P458

더구나 재판부가 반영한 ‘합의‘에는, 합의에 응한 일부 피해자를제외한 특정되지 않은 다른 피해자들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가해자들이 다수의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성착취·성폭력을 저지르고도, 일부와 합의에 성공해 처벌불원서를 받아낸 뒤 이를 근거로 감형해달라고 읍소하는 전략은 이런 식으로 먹혀든다. 합의하지도 않았고(혹은 할 수도 없었고, 엄벌을 요구하는 피해자들의 의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수사단계에서 피해자를 특정하기 위한 노력을 수사관들이 게을리할 때가 많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다수인 사건에서 합의를 반영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는 하나하나 절절히 살폈지만, 과거에 묶인 피해자의 시간은 외면했다. 검찰의 불성실하고 소극적인 입증 과정도 문제다. 피해자는 법정에서 도대체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 P460

스토킹은 강력범죄의 전조 범죄라고 한다. 단일범죄에 그치지 않 - P461

고 다수의 범죄와 결합하는 형태를 보이며, 강력범죄로 연결되는 비중이높기 때문이다. 성폭력과 신체 폭력뿐만 아니라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스토킹은 특히 여성 대상 살인·살인미수 사건의 30퍼센트 정도와 연관되어 있을 정도로 위험한 신호다. 나 역시 스토킹 피해자이며, 연대 과정에서도 스토킹이 동반된 강력 사건의 피해자들과 연대해왔다. 그러나 이제까지 한국 사회는 스토킹을 구애, 애정, 짝사랑 등 개인의 다소 미성숙한 혹은 적극적인 감정 표현 형태로 보고 독려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스토킹 피해자들의 고통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거나 무시당했고, 관련 법 조항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분리해 처벌하면서 상당수 가해자가 중한 형을 피할 수 있었다. - P462

2021년 10월부터 시행된 ‘스토킹 처벌법‘은 처음 법안이 발의되었던 1999년 이후 22년 만에 생긴 스토킹 관련 법이다. 드디어 스토킹범죄에 공권력이 개입할 근거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법안은 여러 한계 때문에 개정 등 보완 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반의사불벌죄’로 규정되었기에 가해자가 신고를 막거나 고소 취하와 합의 등을 강요할 가능성이 크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100미터 이내로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는 ‘긴급응급조치‘도 100미터라는 물리적 거리가 피해자를 안전하게 보호할 만한 거리인지 의문이다. 게다가 최대 6개월의 기한도 너무 짧고, 가해자가 이를 어기더라도 과태료 처분에 그쳐 실효성이 없다는지적도 나온다. 또한 피해자보호명령*이나 신변안전조치 규정이 없고, - P463

직장생활을 하는 피해자의 경우 고용 상태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하는 불이익처분금지 등의 조치도 미흡하다. - P464

‘n번방‘은 디지털 매체의 발달과 한국 사회의 강간문화가 결합되어 나타난 대표적인 디지털 성폭력 범죄다. 한국은 디지털 인프라가 비교적 잘 갖추어진 국가이며, 현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로 불릴 만큼 삶 자체가 디지털과 밀착되어 있다. 문제는 올바른 인터넷 문화를 만드는 데 한국 사회가 제대로 신경 쓰지 않았다는 데 있다. 현세대는 합성을 이용한 ‘지인능욕‘ 등의 디지털 성폭력을 범죄가 아니라 놀이의 하나로 받아들일 만큼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매우 희박하다. 여성혐오와 성차별을 기반 삼아 여성을 인격체가 아니라 통제 가능한 객체로 파악하며, 그 통제를 위한 효과적 수단으로 디지털 성폭력을 적극 활용한다. 디지털 성폭력을 여성에 대한 ‘징벌‘로 보며, 이를 통해 피해자들을 억압하고, 그것을 다른 남성들과 공유하며 인정받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 P479

한 시간 정도 이어진 선고 과정을 기록하다가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표현이 판사 입을 통해 나왔을 때, 순간 멈칫했다. 원래 해당 판사가 판결문을 쓰는 데 공을 들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디지털 네이티브‘는 2020년에 DSO 전 활동가들, 리셋현 활동가들과 함께했던 젠더법연구회 판사들과의 인터뷰나 사법연수원 강연 등에서 언급한 용어였지만, 바로 그해 성착취·성폭력 사건의 판결문에 등장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재판부(울산지법 형사11부: 박주영, 김도영, 정의철)는 ‘디지털 네이티브’와 이 세대의 여성 아동·청소년·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왜 그들이 온라인 랜덤채팅을 하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조건만남’으로 이어지는지, 그 과정에서 ‘자발성‘의 외피를 둘러쓴 성매매가 어떻게 ‘성착취‘로 연결되는지 상세히 언급했다. ‘합의‘와 관련해서도 합의 과정·내용·금액 등을 구체적으로 살폈을 때 피해자의 진의에 의한 것인지 - P487

그 배경이 의심된다고 했다. ‘자발성‘을 앞세운 피고인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순수한 자발적인 성매매란 없고, 특히 청소년 성매매는 성착취다"라고 규정하며, 피고인 측이 주장하는 ‘자발성‘이란 자발성을 가장하거나 길들여진 것(그루밍)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 P488

반성폭력 운동은 늘 성공하지도, 바로 변화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시간에 파묻힐 경우 변화를 체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활동에 회의감을 느끼고 체념하며 냉소적인 태도를 취한다. 변화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운동은 생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활동을 하면서 그 활동이 시스템 변화로 이어지는 사례들을 많이 전하려 노력 중이다. 당장은 보이지 않아도 바뀐다. 우리가 바꾸고 있고, 바꿀 수 있다. - P490

형사사법 절차는, 사법 시스템은 성폭력 피해 이후 피해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길 중 하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길은 험로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길을 따라 걸어도 목표한 곳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도 그 길에서 말, 시간, 자리를 되찾지 못하고 도착 지점에서 승소했다는 판결문 하나만을 받았다. 이렇게 ‘법대로‘는 최선의 선택지가 되기엔 아직 불안하고 거칠며 좁은 길이다. - P5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월 6일 재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재판부(수원지법 형사9단독: 박민)의 ‘성착취‘라는 표현이었다. 피해자들과 반디지털성폭력 활동가들은 줄곧 ‘음란물‘ 용어의 부적절함을 지적하면서 ‘성착취물’로의명명을 요구해온 터였다. 판사의 입에서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어려운성착취 범죄"라는 말이 나왔을 때, 머릿속에 지난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자신이 ‘음란물‘이냐며 고통스러워하던 피해자들의 모습, 우리부터 용어를 적확히 사용하자며 서로 독려하던 활동가들, 사법 시스템 속 용어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이를 수용하며 변화의 필요성에 공감하던 법조인들이 떠올랐다. - P414

"너 여기만 광산인 것 같지? 나한테 50원, 100원내고 다운로드받아가는 그 개새끼들이 다 내 광산이야!"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와닿았던 대목이다. 현실에서 ‘산‘은 어디든 존재한다. 디지털 환경의 특성상 디지털 성착취·성폭력 영상물의 원본과 복사본은 차이가 없고, 언제든 저장과 변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양진호는 수감되었지만 여전히 그는 이 광산들을 통해 수익을 얻고 있다. 구속되지 않은 양진호의 주변인들이 그 광산에서 채굴 작업을 진행 중이며, 그렇게 얻은 이익은 또다시 피고인 양진호를 방어하는데 쓰이고 있다. - P4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대 초기, 난 배타적이고 폐쇄적이었다. 몇 달 주기로 유서를 고쳐 고정된 장소에 두고 다닐 정도로 ‘끝‘을 생각하며 살았다. 출소한 가해자와 언제 어디서든 마주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복범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말해도 수사기관은 "당하면 오라"고 했다. 혼자서 나를 지켜야 했고, 혼자서 죽음을 대비해야 했다. 언제든 내 의지와 무관하게 삶이 끝날 수도 있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이유를 찾지도 못하는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서, 그저 외부 요인으로 삶이 끊기는 상황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활동했다. ‘성범죄자알림e‘에 올라와 있는 가해자의 출소 후 주소지는 서울 강남이었는데, 본업도 연대도 초기에는 모두 서울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이동할 때 언제나 예민한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등 피해 회복의 과정을 밟지 않은 채 바로 일을 시작하고 연대 활동을 이어나갔으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던 거다. - P312

한국은 판사의 재량에 대한 인정 범위가 매우 넓다. 그러니 판사의 판단에 대한 외부 평가도 그만큼 감수할 필요가 있다. 책임은 외부로 돌리면서 권위는 유지하던 시대는 지났다. 법원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우선 판사들부터 정확하고 설득력 있는 말하기를 해야 한다. 청중을 고려하지 않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시민들도 정보 공개의 범위가 넓어지는 만큼 판사의 ‘말‘을 왜곡하지 않고 경청하면서 해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법감시운동으로서 방청연대, 재판 모니터링과 연계해 판결문 분석을 강조하는 이유 중 하나도 잘 듣기 위한 것에 있다. - P366

활동가들의 번아웃(소진) 현상은 기존의 반성폭력 활동에서도 지적되어왔다. 전업 활동가의 경우 불완전한 고용 상태와 낮은 임금, 공사 구분이 불명확한 일처리 등에서 오는 여러 문제뿐 아니라,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여러 심리적인 문제, 외부 공격에 대응하면서 발생하는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어떤 형태의 연대든 신념만으로, 그저 버티는 것만으로 활동을 지속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 P379

연대 초기에는 ‘잊히기 위해‘ 연대한다고 했다. 물론 이는 내가 연대한 피해자들이 나와의 연대마저 잊고 일상을 만들어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연대 활동의 중단을 염두에 둔 발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연대자로서 내가 수행해야 할 공적 활동과 책임을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 피해자가 편하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다른 피해자들과의 연대를 위해, 그리고 시스템 감시와 변화를 위해 연대 경험을 활용해야 한다. 동시에 내가 없어도 이런 활동이 이어질 수 있도록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연대자로서의 나는 잊혀도, 내가 한 활동이 피해자를 위해 남아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대체 가능한 연대자가 되기를 원한다. - P384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자신들은 의뢰인의 요구에 따랐을 뿐이며,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위해 피해자가 마땅히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태도를 보인다. 윤리와 공적 책임을 팽개치는 것이다. 천씨의 변호인 역시 그런 ‘나쁜 변호사‘로 평가받을 수 있는 조건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결심 공판에서 사람들에게 왜 나쁜 사람을 변호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며 고뇌하는 척했다. 피해자의 정보유출은 피고인의 방어권과 관련이 없다. 사람들은 실수와 고의를 구분할 수 있다. 욕먹을 짓을 해놓고 욕먹는 것을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 - P3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선 연대자로서 내 욕망을 직시하기로 했다. ‘할 수 있는 일’에 이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한 거다. ‘할 수 있는 일’의범위를 확장하기, 내 자신을 드러내고 그만큼 커진 사회적 책임을 수용하기, 일을 크게 만들고 그 크기만큼 내 그릇도 넓혀가기, 내 역량이 미치지 못할 경우 주변에 조언을 구하고 조력을 받기. 그렇게 내 자신의 가능성에 제약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기획했다. 그러다 보니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넓어졌고, 결국 다양한 간접 연대를 해내고 있다. 없으면 만들고, 부족하면 채우고, 넘치면 덜어내면 된다. - P316

성폭력 피해로 생긴 부수적인 상실로는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일이 어려워진 것,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기 힘들어진 것 등이있다.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다 보니, 타인을 신뢰하고 고민을 털어놓으며 책임을 분담하는 일을 꺼리게 되었다. 또한 감각과 감정을 인지하고조절하는 일 모두 엉망이 되었고, 문화와 예술 등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일상에 부재하거나 결핍되면서 삶이 상당히 단순해졌다. 모난 인간, 재미없는 일상, 사라지지 않는 상흔, 홀로 멈춘 것 같은 기분. 피해 이후 일상이 무너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내 주변에는 누가 있었는지, 무엇에 흥미를 갖고 재미를 느꼈는지, 도통 모르는 것 일색이었다. - P334

전국 세미나는 2018년을 끝으로 그만두려고 했다. 시간과 비용등의 문제보다는 건강이 매우 나빠졌기 때문이다. 2018년 말에는 서울서부지법에서 재판 모니터링을 끝내고 이동하다 교통사고가 났는데, 독감도 겹치면서 휴식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그러나 연이어 터지는 사건들 때문에 결국 2019년에도 휴식을 포기했고, 전국 세미나도이어갔다. 6월에는 서울에서 12시간짜리 <마녀의 필리버스터〉를, 8월에 <마녀의 매뉴얼>을, 12월에는 <마녀의 사법 시스템 가이드>를 기획했다. 전국 세미나는 다시 2019년을 마지막으로 그만두려고 했기에,
특히 마지막 세미나 <마녀의 사법시스템 가이드>는 한 달 동안 12차례 열면서 그동안 방문하지 못했던 강릉 등도 포함해 전국을 돌았다.
2020년은 정말 쉬려고 했다. 건강이 많이 악화되어 더 이상 버티듣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개인 활동의 한계를 절감했기에 한 해쉬면서 수사·재판 절차별 매뉴얼과 체크리스트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2019년 말, 현직 판사들의 인터뷰에 응하면서 2020년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나는 시대 흐름을 읽어내는 것도 연대자의 자질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2019년 현직 판사들을 만나면서 이 기회를 살려보기로 결심했다. 내부에서 변화를 갈망하는 이들을 어렵게 만난 이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마녀‘라는 계정을 없애며 대대적으로작별인사를 해놓고, 2020년 다시 ‘연대자 D‘라는 계정을 만들어 연대활동을 지속했다. 계획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게 내 연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 P344

하지만 아무리 공개재판이고, 자신과 관련된 사건이더라도 피해자가 방청을 위해 평일에 매번 법원으로 가는 것은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증인지원 절차가 따로 없는 공판 단계를 단순 방청하는 경우, 피고인과의 대면을 감수해야 한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방청석에 앉아 재판을 지켜보기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대개 피해자는증인으로 출석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법원에 찾아가지 않고, 피해자 변호사도 사선으로 선임된 것이 아닌 이상 재판에 출석하는 경우가 드물다. 비어 있는 방청석을 앞에 두고 ‘판사-검사-피고인 측‘이 재판을 진행하는 구도에서 피해자는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게 연대자의 재판 방청이다. 2010년의 내게 현재의 내가 연대자로 있었다면 방청은 내가 할 테니 좀 쉬면서 회복하라고 했을 것이다. 막연한 불안과 공포 속에 혼자 내던져졌던 나 같은 피해자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 그게 연대를 이어나가는 이유이다. - P349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선고 전 재판 과정에서 판사가 본인의 예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침묵을 택하는 것, 담당 사건에 대해 설득력 있는 판결로 그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 판결문 외의 설명이나 부연은 무의미하다는 것, 판사는 외부 세상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 등 다양한 해석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이 법에 대한 해석들은 대개 법관의 독립과 재량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이를 시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적용하려 한다.
나는 방청연대/재판 모니터링 교육을 할 때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라는 말을 꼭 언급하는데, 사법 시스템에 대한 감시·기록· 목격을 위해서는 판결문을 독해하고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 과정에 판결문을 검색하고 열람복사하는 방법,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판결서 열람제한을 신청하는 방법, 일반인의 입장에서 판결문을 분석하는 방법 등을 넣고 있다. 비전문가인일반인들이 분석하면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는 말도 듣지만, 최소한 형 - P356

량을 정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반영된 각종 양형이유에 대해 검토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일반인들의 상식 수준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 P3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해자(고소인)는 피해자를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뒤 대대적으로 떠든다. 그러나 실제 고소장에는 ‘사실적시‘로 판명 나더라도 처벌 의사가 있다고 적거나, 수사기관에서 가해자에게 ‘사실적시‘로도 처벌할 것이냐고 물을 때 그렇게 하겠다고 답한다. 그러면 피해자는 고소 내용이 사실임을 입증해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 처벌을 피하더라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는 처벌받는 상황에 내몰릴 수 있다. 다시 말해,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해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가해자들은 이를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기소된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다니는데, 피해자(피고소인)들은 이에 대해 대응할 여력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죄가 되는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반박하는 식의 대응조차 빌미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247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보복성 고소를 당한 피해자의 고통은 어떠할까? 나는 2010년 성폭력 피해를 고소한 뒤 수년간 가해자로부터 여덟 가지 정도 보복성 고소를 당했다. 당시만 해도 성폭력 피해를 고소한 뒤 보복성 고소를 당하면, 성폭력 사건의 수사 중에도 피의자로 나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피해자인 내가 가해자의 왜곡·과장된 주장이 담긴 고소장을 앞에 두고 조사받아야 하는 상황 자체가 너무 모멸적이었고 고통스러웠다. 이렇게 대다수 피해자는 보복성 고소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면 큰 충격을 받는다. 피해를 떠올리는 것 자체도 고통스러운데, 수사관 앞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언급하며 심지어 자신이 가해자가 아님을 입증해야 하는 과정은 견디기 어렵다. - P250

물론 2015년 이후 SNS 등을 통한 피해 폭로와 신고·고소가 활발해지면서 가해자 쪽의 보복성 고소와 관련해 피의자/피고인(피해자) 조사 시기를 늦추거나, 보복성 고소를 무고로 인지하고 양형 등에 반영하는 사례도 생겼다. 이처럼.사법 시스템이 어느 정도 달라졌음에도여전히 가해자들은 보복성 고소를 멈추지 않는다. 고소 목적 중 하나는 말 그대로 피해자를 괴롭히기 위한 ‘보복’에 있으며, 그 방법은 여전히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고 김기덕 사건만 하더라도 2017년 시작된 폭로와 관련된 재판이 2021년까지 이어지지 않았는가. 보복성 고소는 이 모든 것을 계산하고 진행하는 가해자의 악질적인 전략이다. - P251

사법 시스템은 냉혹하고 건조하다. 시간과 비용, 일상과 건강 모두를 갈아 넣어야 한다. 보복성 고소 자체를 막을 수 없다면 이러한 고소와 관련해 피해자가 추가로 받을 고통을 헤아리고, 적극적으로 무고로인지하며, 판결에서 엄벌 이유로도 더 많이 반영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현 시스템에서 보복성 고소는 원천적으로 막을 수 없는 상황임을 피해자가 이해하고 대비하도록 더 많은 정보가 제공되어야 하며, 전문가의 조력도 필요하다. 사법시스템에서 가해자의 전략은 늘 한발 앞서기 마련이지만, 피해자도 충분한 정보와 조력이 뒷받침된다면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 싸울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피해자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 물론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폐지 등 입법적 변화도 뒤따르면 좋을 것이다. - P251

성폭력 가해자들은 가해 수법도 공유하고 학습한다. 이를 통해 가해행위를 정당화하고 죄책감을 덜어낸다. 온전한 판단능력이 있는 수평적 관계의 상대에게 성관계에 대한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동의를구하기보다는, 억울하게 성범죄자로 몰리지 않는 팁을 공유하는 것이 그들의 문화다. 강력하고 명확한 거부의사를 표명하지 않은 여성이 문제라고 생각하며, 여성이 거부의사를 전달해도 내심은 다를 것이라고 판단한다. 아니,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거래 가능한 대상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애초 여성의 의사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거부 의사를 표명하는 여성들을 짓밟는 쾌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 P254

무혐의·무죄 전략에서는, ‘위법수집증거‘를 유죄의 증거로 사용할없다는 형사사법 절차의 원칙도 적극 활용한다. 게다가 2022년부터는 검찰에서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이하 ‘피신조서)도 경찰의 피신조서와 마찬가지로 피고인이 부인하면 증거능력이 없다는 점도 한 발 앞서 적극적으로 악용하고 있다. 그래서 수사 과정에서 일부 혐의를 자백해 부실수사를 끌어낸 후 재판에 들어가면 피신조서 내용을 부인해 다시 유무죄 다투기, 강압수사를 들먹여 피신조서 내용을 부인해(예: "수사관이 강압적으로 수사해서 자백 취지의 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유무죄 다투기, 수사 과정에서 증거수집이 위법했다는 절차적 문제를 짚어 다시 유무죄 다투기 등의 전략을 공유한다. 실제 재판에서도 이러한 전략이 관철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더욱이 2021년 검경수사권 조정, 2022년 형사소송법·검찰청법 개정 등으로 검찰의 보완수사 등에 제한이 생기면서 수사 단계부터 가해자들이 빠져나갈 구멍이더 생겼다. 물적 증거가 없거나 불충분한 성범죄 재판에서는 특히 유죄 입증을 위한 공판의 중요성이 더 커질텐데, 경찰이나 공판검사, 그리고 재판부는 기존의 관행을 벗어나 충실한 심리를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 P257

성범죄자들의 자살 소식이 언론을 타고 퍼진다. 성범죄 혐의를 받는 정도도 견디지 못해서, 살아서 자신의 행위에 책임지는 것이 두려워 생을 마감하는 가해자들을 보면 안간힘을 써서 버티고 있거나, 버티다 못해 죽음으로 몰려간 피해자들의 고통이 떠오른다. 가해자들은그 정도로도 삶을 포기할 수 있구나. 그렇다면 성폭력 피해를 입고 시간, 말, 자리를 박탈당한 피해자들은 어땠을까. 게다가 가해자가 자살하면 이 사회는 피해자에게 문제 해결을 포기하고 피해 사실을 망각하라고 강요한다. 사람이 죽었는데 뭘 더 바라냐는 거다. 심지어 가해자자살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면서 추가 가해를 이어나간다. 죽음에 관대한 문화이기 때문일까? 아니, 죽음조차 피해자와 가해자는 불공평하다. 피해자의 죽음은 보이지 않는다. 혹은 다른 이유로 포장되거나, 다른 가해자들에게 유희거리로 소비된다. 반면 성폭력 가해자들은 죽어서도 피해자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용서를 받고 추앙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피해자‘로 명명되기도 한다. - P260

‘지적장애녀‘, ‘성폭행 주장녀‘, ‘미투녀’, ‘몰카’, ‘음란물’.
2021년 1월, 성폭력 사건을 다룬 한 기사의 제목에 들어간 단어들이다. 성폭력 사건의 보도에서 이제 ‘ㅇㅇ녀‘ 표현 지양하기와 ‘몰카’ 대신 ‘불법촬영’으로 지칭하기, ‘음란물‘ 대신 ‘성착취물’로 표현하기는 합의된 원칙으로 생각했으나, 기대가 너무 컸다. 이렇게 퇴행하는 모습을 볼 때면 ‘기레기‘(‘기자‘와 ‘쓰레기‘를 합친 말)라는 멸칭을 언론이기꺼이 뒤집어쓰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 P262

연대를 내세워 피해자에게 사적 만남을 강요하는 행태 역시 많이 목격했다. 연대 과정에서 피해 경험과 관련된 자료를 얻은 연대자가 이를 이용해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내 연대 원칙 중 하나는 피해자와 사적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 것이지만, 일부 연대자는 오히려 자신의 위치를 악용한다. 스토킹을 하면서도 피해자의 안전을 위한 연대활동의 일환인 것처럼 우기기도 하고, 자신이 요구하는 사적 만남 또는 관심에 대해 피해자가 거부하거나 자제를 요청하면 연대하지 않을 것처럼 말한다. 단 한 명의 힘이라도 더 필요한 피해자의 입장에서는연대자의 이런 요구에 적극적인 거부 의사를 표명하기 어려워진다. 실제로 피해자가 자신의 관심을 거부했다는 이유를 들어 연대 활동을 중단한 연대자도 있었다. 그는 연대 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피해자의 사생활과 관련된 허위사실도 유포했는데, 나는 피해자가 그를 고소해 형사처벌을 받도록 하는 과정에 연대한 경험도 있다. - P279

마지막으로, 비상연락망을 구축해 위급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 긴 시간 싸움을 하는 피해자들은 순간적으로 약해질 때가 있으며, 그때 자살·자해 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비상연락망을 통해 피해자의 상태·상황을 살피고, 위급 상황인 경우 외부기관의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자. 피해자의 삶과 생명을 연대자가 전적으로 책임질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최대한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법대로‘가 만능의, 최선의 선택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사법 시스템을 이용해 싸우길 선택한다면, 그럼에도 당신이 피해자와 함께 싸우길 선택한다면,
혼자 싸우지 말자.
혼자 싸우게 두지 말자. - P292

군 바깥 가해자들의 전략이 되다
이런 사례들이 쌓이면서 성범죄 가해자들 사이에서는 군인 신분으로 재판을 받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인식이 퍼졌다. 이에 민간인 신분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20~30대 남성 피고인들은 전략적으로 입대를 선택하기도 한다.
수사와 재판을 군에서 받으면 민간인 신분일 때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은 실제 통계로 뒷받침된다. 게다가 입대하면 피고인에 대한 외부의 관심이 줄어드는 효과까지 있어, 어차피 가야 할 군대를 십분 활용하려는 것이다. 2023년 2월 출소를 앞둔 아이돌 그룹 빅뱅의 전 멤버 승리(본명 이승현, 32세, 남)의 경우, 민간에서 수사를 받던 도중에 입대했고, 결국 군사법원에서 아홉 가지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1심에서 군검찰은 징역 5년을 구형했지만 보통군사법원은 징역3년을 선고했고, 1심에서 공소사실을 부인하다가 2심에서 전면 인정한점을 고려해 고등군사법원은 징역 1년 6개월로 감형했으며, 2022년5월 26일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 P3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