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체념의 미학
크리스티나 로세티 <고블린 도깨비 시장> <모드>(단편소설)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오로라 리>
에밀리 디킨슨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쓴 해는 1928년이었다. 그때는 이미 많은 여성 시인들, 또는 적어도 시를 썼던 많은 여성이 있었다. 울프 자신은 앤 핀치와 마거릿 캐번디시의 생애를 추적했고, 브론테 자매들의 ‘야생적인 시‘를 찬양했으며, 엘리자베스 배럿브라우닝의 이야기 『오로라 리』에는 어떤 산문과도 견줄 수없는 시적 덕목이 있음을 관찰했다. 나아가 울프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복잡한 노래」에 대해 거의 경외심에 가까운 찬사를 보냈다. 그렇다면 울프는 왜 여성의 시가 본질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까? 왜 울프는 주디스 셰익스피어가 ‘사로잡혀 엉켜 있고 거부되며‘ 숨이 막혀 스스로 매장되거나 아직 태어나지않았다고 느끼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닉 그린에서 존 크로랜섬과 R. P. 블랙머에 이르는) 남성 독자들과 비평가들이 배럿브라우닝, 로세티, 에밀리 디킨슨 (울프가 디킨슨의 시를 읽었기를 바라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같은 여자들의 시에 반응한 방식을 매우 간략하게 살펴봄으로써 찾아나갈 수 있다. - P920

여성 시인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 - P921

글쓰기에 외로움과 고통이 부여하는 동기를 어떤 동기가 대체할 수 있을까? - P923

여성의 시를 찬미할 때는 일반적으로 그 시가 ‘여성적‘이기 때문이고, 반대로 비난받을 때는 그 시에 ‘여성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놀랍지도 않다. - P924

그때마다 ‘나는 재능이 주는 고통 때문에 미쳐서 황무지에 머리를 부딪쳐 부수어버렸거나, 도로 근처에서 비참히 흐느끼는 […] 억압된 시인을 […] 추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P925

울프는 마거릿 캐번디시와 동시대인인 한 사람의 말을 인용했다. ‘이 불쌍한 여자가 약간 혼란에 빠졌음이 분명하다. 감히 책을, 그것도 운문으로 쓰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설사 내가 2주 동안이나 잠을못 잤더라도 그런 생각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여성 소설가는 미친 여자의 분신이나 다른 악마적인 분신에 대해 쓰면서 작가가 되는 일에 대한 불안을 피하거나 쫓아내는 반면, 여성 시인은 문자 그대로 미친 여자가 되거나 악마적인 역할을 맡아야 하고, 전통과 장르, 사회와 예술의 교차로에서 한없이 극적으로 죽어야 하는 것이다. - P926

우리는 모든 비평의 유파들이 부유하며 둘러싸고 있는 이 논쟁적 주제를 남김없이 규명하는 척해서는 안 되며, 소설 쓰기와시 쓰기 사이에는 많은 장르적 차이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 P926

따라서 샬럿 브론테가 보낸 시를 받고 로버트 사우디가 했던 다음과 같은 유명한답변은 의미심장하다. ‘문학이란 여자가 할 일이 될 수 없으며되어서도 안 됩니다. - P927

소설 쓰기가 생계 수단이 되는 일이었다는(그리고 직업이었다는) 사실은 소설 쓰기를 시 쓰기보다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치가 낮은 작업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모든 가능한 문학 작업중 19세기가 최고의 지위를 부여한 것은 시 쓰기였기 때문이다. - P927

울프가 보여주었듯 소설 쓰기는 단지 ‘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미학적이기보다 상업적이고, 성스럽다기보다 실용적이기 때문에 여성의 직업으로 더 적절하다고 여겨졌다. 20세기까지 물질적 사회적 ‘리얼리티‘를 추종하는 장르였던 소설은 귀족주의적 교육 대신에 있는 그대로 기록할 것을 빈번하게 요구한다. - P928

시인과 비평가가 대대로 생각해왔듯 소설 쓰기는 시 쓰기만큼 엄격한 고전 교육을 요구하지 않고, 산문-소설 쓰기에서는 서정시를 창작하는 것만큼 자아를 주장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이 아마도 여성 문인들이 시보다 소설을 택하게 만든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여자는 대개 자신을 버리도록 교육받아왔기 때문에 울프가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었듯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개인적 관계‘를 의식했다. 울프의 말마따나 사실상 ‘19세기 초에 여자가 거친 모든 문학적 훈련은 인물 관찰과 감정 분석이었다. 따라서 재능 있는 여자는 시보다 소설을 쓰는 것에 더 편안함을 느꼈을 것이고, 말하자면 죄책감을 덜 느 - P930

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소설가는 ‘그들‘이다. 그녀는 일인칭 서사를 쓸 때도 삼인칭으로 작업한다. 그러나 시인은 삼인칭으로 쓸 때조차 ‘나‘를 말한다. - P931

서정시인이 자신을 주체로 계속 인식해야 한다면, 소설가는 자신을 행위의 참여자로 투사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자신을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 더욱이 서사적 목소리를 구축할 때 여성 소설가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가장하거나 억압해야 한다. 엘런 모어스가 제시하듯, 제인 오스틴은 자신의 작품에서 강력한 서술적 주체일 수도 있지만, 장막 뒤에서나 압지 밑에서 전형적으로 ‘여성적인‘ 방식으로 사건을 우회적으로 조정하는, 비교적 눈에 띄지 않는 존재다. - P931

몇몇 논평가가 주시했듯이 이야기의 교훈은 크리스티나 로세티 안의 모드가(야심만만하고 경쟁적이고 자기 생각에 몰입해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시인은) 죽어야 한다는 것, 또는 아내나 수녀, 그럴듯하게 친절하고 유용한 독신녀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세티는 모드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 P937

지나가는 모든 것은
여자의 거울이다.
거울은 여자에게 보여주나니,
그녀의 꽃이 어떻게 시들어가며, 자신이 어떻게 매장되는지
그늘에 시든 장미 다발과 함께
지나가버린 여름의 기쁨이
닿지도 않고, 사랑스럽지도 않은 모습으로 - P938

키츠가 자신의 소네트에서 시가 모든 곳, 즉 자연의 모든 것에 있듯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건강함과 기쁨을 표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적어도자신이 창조의 주인이라는 남성적 확신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모드/로세티는 자신을 연약하고 허영심만가득한 여자로 보았고,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고통받은 하인으로 여겼다. - P939

이런 설명은 여성, 특히 여성 시인이 ‘자신의‘ 이름에 대해 느끼는 근원적 소외감을 강조한다. - P942

더욱이 휘트먼의 과대망상적인 시행들은 계속해서 거들먹대며 자신의 우주적 예언적 힘의 거대함을 선언한다. 그의 시는 ‘나는 나를 찬양하고 나를 노래하노라‘고 오만하게 시작하고, ‘내가 취하는 것을 당신도 취하리라‘라고 말하며 만일 당신이 ‘오늘 낮과 밤을 나와 함께 머문다면 [・・・] 당신은 모든 시의원천을 얻을 것이다‘라고 음유시인다운 자신감으로 약속한다. ‘집에서 가장 사소한 존재인 디킨슨은 자신을 아무도 아닌 존재와 일치시키는 반면, 휘트먼은 상냥하게 묻는다. ‘내가 모순된말을 하는가? / 좋다, 나는 모순된 말을 한다. / (나는 거대하고 나는 군중을 품는다.)‘ 디킨슨은 자기 방에서 문을 살짝만 열어놓은 채 떨고 있는 반면, 휘트먼은 ‘문의 자물쇠를 풀어라! / 문 - P944

설주에 달린 문의 나사를 풀어라!‘고 외친다. 디킨슨이 상징적인 흰옷으로 자신을 감싼 채, ‘나는 큰 소리를 내며ㅡ사는것을 견딜 수 없다 / 큰 소리가 나는 너무나 부끄러웠다―’고쓴 반면, 휘트먼은 ‘나를 통해 금지된 목소리들,/ 성과 욕정의목소리들, 베일로 가려진 목소리들, 나는 베일을 걷는다 / 외설적인 목소리들은 나에 의해 명료해지고 변화된다‘고 외친다. 디킨슨은 늙어갈수록 자기 안으로 침잠해가지만 (마치 말 그대로자신을 보이지 않게 하려는 듯, 그녀 시의 길이와 너비도 줄어들지만), 휘트먼의 걸작은 살을 찌우며 고통스러운 거부와 공격에도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을 광고하고 융성해간다. 휘트먼 자신은 ‘미국의 비공식 계관시인‘, 뉴저지주 캠던의 ‘훌륭한 백발’ 예언자가 되어, 그의 오두막으로 수많은 찬양자들이 순례를 떠난다. 실제로 레슬리 피들러가 말하듯, 풀잎』의 권두에 있는작가의 초상화는 작가와 그의 책과 함께 늙어가고, 휘트먼이 이시집의 나중 판본에서 선택한 화자의 가면이나 페르소나와 함께 성격도 변해갔다.‘ 하지만 그 20년 동안 디킨슨은 사진 찍히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침모가 몸의 치수를 재거나 의사가 그녀를 검진할 때도 안전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자기가 그들 앞을 재전체빨리 지나갈 때 해달라고 요구했다. - P945

사실상 19세기 미국(그리고 영국)에서 여자들은 (울프가 보았던)17세기와 18세기의 여자들이 저지당한 방식으로 시를 쓰지 못하도록 종용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시 쓰기는 빅토리아 시대의 교양으로서 스케치나 피아노 연주나 레이스 뜨기처럼 우아한 취미가 되었다. 그러나 책 캡스가 우리에게 알려주듯54 디킨슨은 『오로라 리』의 특정한 행에 표시를 했다. 디킨슨은 이를 통해 자신과 우상 파괴적인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사이의 반항적인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 같다. - P949

그러나 디킨슨은 외모에 취한 자이면서 (또는 아마도 노래에 취한 자이기 때문에)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욕심 많고 분노에 차 있으며 은밀하게 혹은 공개적으로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는 사람이다. ‘화려한 빈곤‘이라는 문구는 그녀가 빈곤 속에서도 충족시키려고 결심한 양가적인 관능을 표현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크리스티나 로세티와 (정도는 덜하지만)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은 자신들의 예술에서 열정적이거나 차분한 빈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빈곤이 선사하는 가장 높고도 고귀한 미덕으로 체념을 노래했던 위대한 19세기 여성 시인은 디킨슨이 아니라 이들 두 시인이었다. - P956

에밀리 디킨슨은 ‘육화된 단어는 전율하며 함께 먹을 수도 / 전해질 수도 없다‘고 썼다. 이는 아마 도깨비 시장」의 핵심 상징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다. - P963

그러나 배럿 브라우닝은 로세티의 기질과 환경이 키웠을 철저한 금욕주의를 천성적으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젊은 여자 특유의 고통의 미학을 좀 더 친숙한 빅토리아 시대의 섬김의 미학으로 결국 대체했다.

요컨대 『오로라 리』는 여성 시인이 성장과 긍지, 공감, 사랑, 고통을 통해 배우는 정신교육에 대해 무운시로 엮은 교양소설이라 할 수 있다. - P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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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12-23 2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아 대단한 밑줄긋기 잘 읽었습니다 휘트먼과 디킨슨 비교 흥미롭고요 버지니아 울프가 쓴 캐번디쉬에 대한 글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내일 크리스마스 이브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햇살과함께 2022-12-24 08:32   좋아요 1 | URL
실제 밑줄은 더 많지만 찍다 지쳐서 ㅎㅎ 저도 키츠와 로세티, 휘트먼과 디킨슨, 남성과 여성 시인의 시적 관점의 차이 흥미로웠어요. 서곡님도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당신은 추운 거야. 병들었어. 게다가 바보야."
"그걸 증명해 주세요." 내가 대답했다.
"간단히 몇 마디로 짧게 말해 주지. 당신은 추운 거요. 그건 외로우니까 그런 거야. 누구와도 친밀하게 지내고 있지 않으니까. 모처럼 당신 마음속에 불이 타고 있더라도 그것을 밖으로내뿜을 만한 기회가 없단 말이야. 병들어 있소. 왜냐하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훌륭하고 고상하고 즐거운 감정이 언제나 당신과는 먼 거리에 있으니까 말이오. 바보인 까닭은 그처럼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감정을 당신이 손짓해서 불러들이지 않거니와 그것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데도 그것을 만나기 위해단 한 발짝도 내디디려 들지도 않으니까 말이오."
노파는 또 그 짧고 검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힘 있게 뻐끔뻐끔 빨기 시작했다.
"당신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말하겠지요. 웅장한 저택에서 고용인으로 일하며 홀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만하면 말이에요." - P354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작별의 격식을 어떻게 차리는지 가르쳐 주겠소, 제인? 난 전혀 모르겠는데."
"안녕……… 하든지, 멋대로들 하죠."
"그럼 어디 해 봐요."
"안녕히 계세요, 로체스터님.당분간."
"나는 어떻게 해야지?"
"마찬가지죠."
"안녕히 가세요, 미스 에어. 당분간 됐나?"
"네."
"거, 내 생각엔 너무 야박하군. 거기다 멋없고 친절미도 없고, 좀 다르게 했으면 좋겠는데. 이 격식에 좀 덧붙여서 말이야. 예를 들어 악수를 한다면………. 아니야, 그것도 신통치 않아. 그래 ‘안녕‘ 하는 인사밖에는 더 해 줄 수 없소, 제인?"
"그거면 충분해요. 진정에서 나오는 한마디라면 수천 마디의 말에 담을 수 있는 것과 똑같은 호의를 담을 수 있어요."
"그것도 그럴 법하군. 그러나 너무 공허하고 너무 썰렁해……… 안녕이라니"
‘도대체 이분은 언제까지나 이렇게 문에 기대어 서 있을 참인가?‘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어서 짐을 꾸리기 시작하고 싶은데, 만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러자 돌연히 그는 사라졌다. 말 한마디 더 하지 않고, 그 후로 나는 그날 종일 그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이튿날은 그가 일어나기 전에 떠나와 버리고 말았다. -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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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 재주가 뛰어난 미인 아가씨는 아직 결혼을 안 했나요?"
"안 한 것 같아요. 그 아가씨도 동생도 재산은 별로 못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잉그램 경의 영지는 대부분 한정 상속(限定相續)으로 되어 있고 맏아들이 거의 독차지한 것 같아요."
"하지만 부유한 귀족이나 신사가 구혼을 안 했던가요? 가령 로체스터 님 같은 분이. 로체스터 님은 부유하지 않습니까." - P286

무슨 노예적인 자격지심으로 자기를 비하해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에게 이렇게 타이른 것이었다.
‘주인의 피보호자를 가르쳐 줌으로써 봉급을 받고 또 의무를 다했을 때 당연히 받을 권리가 있는 정중하고 호의 어린대우에 감사를 하기만 하면 그뿐이다. 그 이상 너와 손필드 저택의 주인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주인이 너와의 사이에 진지하게 인정하고 있는 인연은 그것뿐이라는 것을잊어서는 안 돼. 따라서 그를 너의 사모나 기쁨이나 괴로움 등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는 너와 같은 계층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의 분수와 지체를 지켜라. 너 자신을 아껴서 온통 마음과 영혼과 기력을 바치는 사랑을 함부로 주지마라. 그런 사랑의 선물을 원하지도 않거니와 업신여기는 사람에게.‘ - P292

메리는 블랑슈보다 유순하고 보다 펑퍼짐한 얼굴이었다. 이목구비도 부드럽고 살색도 희었다.(블랑슈는 스페인인들처럼 가무잡잡했다.) 그러나 메리는 생기가 없고 얼굴의 표정도 없고 눈에는 영롱한 빛이 없었다. 화제도 없어서 일단 걸터앉더니 벽람에 장식된 조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매는 둘 다순백색의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 P310

그는 나를 잠시 살펴보았다.
"조금 우울한 것 같소. 무슨 일이오? 얘기를 해 봐요."
"안 그래요. 우울하지 않아요."
"아니오. 분명 그렇소. 몇 마디만 더 하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소. 정말로 벌써 괴어서 반짝이는걸. 속눈썹에서 한 방울 떨어져 바닥으로 흐르는걸 시간 여유가 있고 수다스러운하인이 지나갈 염려 없다면 자세한 얘기를 꼭 들을 터인데. 자, 오늘은 이만 실례하오. 그러나 손님들이 묵는 동안 매일저녁 응접실로 나오시오. 나의 소망이오. 잊지 마시오. 자, 그럼. 가 보오. 아델러를 데려가도록 소피를 보내오. 그럼 안녕. 나의………."
그는 여기서 말을 그치더니 입술을 깨물고는 황급히 내 곁을 떠났다. - P325

만약 그녀가 즉각적인 승리를 거두고 로체스터 씨가 굴복하여 진정 그녀의 발밑에 마음을 내던졌다면 나는 내 얼굴을 가리고 벽을 향했을 터이고 그들에게 있어 나는 (비유적으로 말해 본다면) 죽은 것이나 진배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잉그램 양이 기운과 열의와 친절과 양식(良識)을 두루 갖추고 있는 마음씨 곱고 고결한 여성이었다면 나는 두 마리의 호랑이, 즉 질투와 절망을 상대로 죽자사자 힘을 겨루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가슴을 뜯기고 집어삼켜지는 몸이 되면서도 그녀를칭송하고 그녀의 탁월함을 인정하며 여생을 조용히 보냈을 것이다. 그녀의 탁월함이 절대적이면 절대적일수록 나의 탄복도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또 내 마음의 평온도 그만큼 컸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로체스터 씨를 매혹시키려는 잉그램 양의 노력을 지켜보고 그 노력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마는 것을 목격하는 것, 본인은 실패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고 그녀의 오만과 자기 만족이 매혹시키려는 대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있음에도 불구하고 쏜 화살이 모두 과녁을 맞혔다고 터무 - P335

니없는 생각을 하면서 성공에 도취되어 으쓱해진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끊임없는 흥분과 무자비한 억제를 동시에 맛보는 셈이었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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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술이란 것은 참 유용한 것이군. 산술의 도움이 없다면 선생의 나이는 짐작도 못 했을 거요. 선생의 경우처럼 얼굴 생김과 표정이 딴판인 경우엔 나이를 맞히기가 어렵단 말이오. 그럼 로우드에서는 무엇을 배웠소? 피아노는 칠 수 있소?" - P221

"어디에서 베껴 낸 거요?"
"머리로 생각해 낸 것입니다."
"지금 그 어깨 위에 얹혀 있는 그 머리에서?"
"네."
"그럼 그 머릿속엔 지금도 이 비슷한 딴것이 들어 있단 말이오?"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더 나은 것이 있다고나 할까요." - P223

이 파리한 초승달은 ‘왕관의 형국‘이었고 그것을 얹어 놓고 있는 것은 ‘자태 없는 자태‘13)였다.
"이 그림들을 그릴 때에는 행복했소?" 한참 만에 로체스터씨가 물었다.
"열중해 있었어요. 네, 행복했습니다. 요컨대 이 그림을 그릴 때는 제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중에서는 제일 큰 즐거움을느꼈습니다."
"그랬겠지. 자신의 얘기를 들어 보면 즐거움이라는 것을 거의 모르고 지냈다니까. 아마 이렇게 기묘한 빛깔을 섞고 칠하고 할 때엔 일종의 예술가의 꿈나라에서 지낸 셈이었겠지요.

13) 밀턴의 실낙원』에서 인용했다. - P225

그러나 부지중에 대답이 나오고 말았다.
"아니요."
"어이구, 한 대 맞았는데. 아무래도 보통 사람과 다른 데가 있어요." 그가 말했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늘 양탄자 위로 내리깔고 (지금의 경우처럼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그걸 뺀다면) 앉아 있을 때엔 꼭 조용하고 엄숙하고 별스러운 어린 수녀 같아. 그러나 누가 질문을 한다든가, 꼭 대답을 해야 할 말을 건넨다든가 할 적엔 숨김없이 단호한 대답을 한단 말이오. 퉁명스럽지는 않지만 매정한 대답을 어떻게된 거요?"
"죄송해요. 너무 생각나는 대로 얘기했어요. 용모에 관한 질문에 즉석에서 대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든가, 기호란 사람마다 다르다든가, 잘생기고 못생기고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든가, 이런 식으로 대답을 했어야 하는 것인데요." . - P235

"자, 어때요? 내가 바보처럼 생겼소?"
"천만에요. 대신 인정이란 것을 아시느냐 되묻는다면 제가 무례하다고 말씀하시겠지요?"
"또!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체하고 또 칼을 대는군. 어린이나 노부인과 같이 어울리기가 싫다고 했더니(가만있어, 들릴라!) 이렇게 들이대는군. 아가씨, 나는 흔히 말하는 박애주의자가 아니지만 양심은 가지고 있소."라고 하면서 그는 양심적인 성격을 나타낸다고 하는 이마의 불쑥 나온 곳을 가리켰다. - P236

‘술이 확실히 과하셨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기묘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내가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아주 난처해진 모양이군. 내가 미남이 아닌 것처럼 아가씨도 미인은 아니지만 그 난처한 표정은 아주 어울리는군요. 게다가 그러는 게 내게도 편리하단 말이오. 꿰뚫어 보는 듯한 눈길이 내 얼굴을 떠나 양탄자의 꽃무늬를 관찰하느라고 바빠지니까 계속 그러고 있어요. 아가씨, 오늘 밤에는 나도 사람이 그립고 얘기가 하고 싶으니까." - P237

"조심하세요. 그건 참다운 천사가 아니에요."
"다시 물어보는 거지만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오? 대체 어떤 직관을 근거로 해서 지옥의 구렁으로 떨어진 천사와 신의 옥좌로부터의 사자(使者)를 구별할 수 있는 거요? 길잡이와 유혹자를 말이오?" - P245

귀염을 받으면 버릇없이 굴면서 마구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여 대기가 일쑤였지만 나는 그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아마 어머니에게서 이어받은 것이겠지만 영국 기질과는 맞지 않는 천박한 성격이 그 점에 나타나 있었다. - P261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방을 나서면서 내가 말했다.
그는 놀란 표정이었다. 나보고 방으로 가 보라고 이르고서는 놀란 표정이니 정말 앞뒤가 맞지 않는 노릇이었다.
"뭐요! 벌써 나를 두고 간단 말이오? 그렇게 거침없이?"
"가도 좋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지만 인사를 하기도 전에 가보라고는 하지 않았소. 나에게서 한두 마디 호의나 감사의 말은 듣고 가야 할 것 아니오! 그렇게 냉랭하게 가는 수가 있소! 아가씨는 내 생명을 구해 주었소! 끔찍하고 괴로운 죽음에서 나를 건져 내 준 것이오. 그런데도 우리가 전혀 생면부지의 사이인 것처럼 그렇게허술하게 나가는 수가 어디 있소? 최소한 악수라도 합시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도 손을 내밀었다. 처음엔 내 손을 한 손으로 잡더니 나중에는 두 손으로 잡는 것이었다. - P271

여기까지 나의 추측이 다다랐을 때에 그레이스 풀의 펑퍼짐하고 납작한 몸매와 단정치 못하고 꺼칠하며 약하기까지 한 얼굴 모양이 선연하게 내 눈에 떠올랐다. 부지중에 ‘아니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서 은밀하게 속삭이는 비밀의 목소리는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너도 예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로체스터씨는 네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어쨌든 너는 그가 너를 좋아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간밤에는 어땠는가? 그의 말을 상기해 보라. 그리고 표정을 상기해 보라. 그리고 그의 목소리를!‘ - P281

나는 번갈아 가며 그를 노엽게 하고 달래는 즐거움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가장 주된 즐거움의 하나였고 과오를 모르는 직관력이 도를 넘는 것을 막고 있었다. 한 발짝 더 가면 그를 노엽게 한다는 선에서 한 걸음도 더 나가질 않았다. 아슬아슬한 고비에서 내 솜씨를 시험해 보는 것이 좋았다. 온갖 사소한 존경의형식을 지키면서 또 나의 지위에 걸맞은 예의를 지키면서 나는 불안한 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와 토론을 나눌 수가 있었다. 그것이 내 성미에도 로체스터 씨의 성미에도 맞았던 것이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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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체스터씨를 만났다! 첫 만남 장면은 뭔가 로맨스의 전형 같은? 보통 로맨스에서는 첫 만남에서 원수가 되는 경우가 많지만..

페어팩스 부인으로부터 부인과 나의 고용주에 대해 얻어들은 얘기는 이것이 전부였다. 세상에는 인물이든 사물이든 성격을 묘사하거나 특징을 관찰하여 말로 표현하는 일을 전혀못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마음씨 좋은 페어팩스 부인은 바로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질문은 부인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을 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부인의 눈에 로체스터 씨는 바로 로체스터 씨였고 신사이며 지주였을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부인은 필요 이상 캐묻는 법도 더 알려고 하는 법도 없었고, 그의 인품을 좀 더 분명하게 알고 싶어 하는 나의 의도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 P189

웃음소리는 낮고 똑똑한 가락으로 되풀이되더니 야릇하게 중얼거리는 소리로 멎어 버렸다.
"그레이스, 그만!" 부인이 소리쳤다.
그레이스와 같은 위인이 대답을 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처럼 비극적이고 그처럼 괴이한 웃음소리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때마침 시각이 한낮이요, 괴이한 홍소와 함께 귀신이 나옴 직한 분위기도 아니었고 장면이나 시기가 공포를 자아내게 하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않았다면 나는 미신적인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놀란 것만 하더라도 어리석은 일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제일 가까운 쪽의 문이 열리고 하인 하나가 나타났던 것이다. 서른에서 마흔 사이로 보이는 빨간 머리의 여인으로 몸이 딱 바라진 것이 험상궂고 못생긴 얼굴이었다. 이처럼 산문적이고 유령답지 않은 유령은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 P190

사람이란 안온한 생활에 만족해야 하는 법이라고 말해 보았자 그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사람이란 활동을 해야 하 - P194

는 것이고 그것을 찾아내지 못하는 경우엔 필경 만들어 내고야 만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나보다도 평온한 생활에 얽매여 있고 또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운명에 말없이 항거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반란을 제외하고서도 얼마나 많은 반란이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격동하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성은 대체로 평온한 존재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고그들의 오빠나 동생들과 똑같이 자기의 능력과 노력을 발휘할 터전을 필요로 하고 있다. 너무도 가혹한 속박, 너무나 완전한 침체에 괴로워한다는 점에선 여성도 남성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여성들이란 집 안에 처박혀서 푸딩이나 만들고 양말이나 짜고 피아노나 치고 가방에 수나 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보다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는 남성들의 소견 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관습에 의해서 여성에게 필요하다고 선고된 일 이상의 것을 하고 또 배우려고 하는 여성을 탓하거나 비웃는것은 소갈머리 없는 짓이다. - P195

"에어 선생에게 앉으라고 하시오." 그가 말했다. 억지로 숙인 듯한 딱딱한 고갯짓, 격식은 갖추었으면서도 성마른 듯한 그의 말씨는 이렇게라도 말하는 것 같았다. ‘에어 선생이 와있든 말든 내게 무슨 아랑곳이란 말인가. 지금은 얘기를 걸고싶은 기분이 아니야‘
나는 마음을 놓고 자리에 앉았다. 나무랄 데 없이 정중하게 나를 맞아 주었다면 나는 곤혹을 느꼈을 것이다. 내 편에서 거기 어울리는 세련되고 우아한 대답이나 반응을 나타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렇게나 마구 대접받게 되면 내 편에서도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되는대로의 상대방의 거동에 이쪽에서 침착하게 다소곳이 굴면입장이 유리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별난 태도가 나의 흥미를 끌었다. 어떻게 나올는지가 두고 볼 만했기 때문이다. - P215

"이리로 온 지가 이제 석 달 되었지요?"
"네."
"그러면 그 전에는..….…."
"OO주의 로우드 학교에 있었습니다."
"아, 그 자선 학교 말이오. 거기선 몇 해나 있었습니까?"
"팔 년입니다."
"팔 년이나! 정말 놀라운 강단입니다. 그런 곳에서 그 반쯤만 있어도 보통 사람이면 녹초가 되기 마련인데! 선생의 혈색이 저세상 사람 같은 것도 딴은 놀라운 일이 아니군요. 도대체 어디서 저런 혈색을 얻어 갖게 된 것일까 하고 궁금히 여겼어요. 어제 저녁, 헤이 소로에서 만났을 때는 어쩐지 옛 요정 얘기가 생각납니다. 내 말에 마술을 건 것이나 아닌지 물어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던걸요. 아직도 홀려 있는 것 같은 기분이오. 부모님은?"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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