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강간, 인종주의, 흑인 강간범 신화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가 생각나는 장

12장. 인종주의, 출산통제, 재생산권
마거릿 생어

13장. 가사노동의 다가오는 종말: 노동계급의 관점
시시포스의 불굴의 힘. 나도 집안일 하며 항상 시시포스의 형벌을 생각하는데 이런 표현 반갑네.

다 읽었다!!

미국에서 강간에 대한 대중들의 우려가 커지면서 여기에 자극을 받은 여러 여성들이 성폭력 가해자 또는 미수범과 맞닥뜨렸던 과거를 털어놓았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성폭력 피해를 당하거나 피해를 당할 뻔한 적이 인생에서 한 번도 없는 여성이 소름 끼칠 정도로 적다는 것이다. - P265

미국 역사에서 허위 강간 고발은 인종주의가 발명한 가장 가공할 만한 책략 중 하나로 두드러진다. - P266

현대 강간 반대 운동의 초기 단계에서는 강간 피해자로서의 흑인 여성을 둘러싼 이런 특수한 환경을 진지하게 분석한페미니스트 이론가가 거의 없었다. 백인 남성에 의해 시스템차원에서 학대와 멸시를 당하던 흑인 여성들과, 강간 기소라는 인종주의적 조작 때문에 불구가 되고 목숨을 잃는 흑인 남성들을 묶고 있는 역사적인 매듭은 이제 막 의미 있는 수준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상태였다. 흑인 여성들이 강간에 저항할때면 그것이 흑인 남성을 상대로 강간 기소를 날조하기 위한치명적인 인종주의적 무기로 사용될 위험이 거의 동시에 제기된다. 극한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한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백인 여성을 범한 흑인 강간범 신화는 못된 흑인 여자 신화의 쌍생아다. 둘 다 흑인 남성과 여성을 계속 착취하는 데에 대한 변명으로, 또한 그 착취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고안된 것이다. 흑인 여성들은 이 관계를 아주 명료하게 인지했고 그래서 일찍부터 린치에 반대하는 투쟁의 선두에 섰다. - P267

( 글을 쓴 거다 러너(Gerda Lerner)는 1970년대 초에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흑인 여성에게 복합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깊이 있게 연구하며 강간을 주제로 글을 쓴 몇 안 되는 백인 여성 중 하나다. - P268

흑인 여성들을 문란하고 정조 관념이 없다고 묘사하곤 하는 문학가들도 빼놓을 수 없다. 걸출한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Stein)조차도 자신의 작품에 나오는 흑인 여성 등장인물 중 한 명이 ‘흑인의 단순하고 난잡한 문란함‘을 지니고 있다고 묘사했다. 이러한 편견을 노동계급 백인 남성에게 뒤집어씌운 것은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의 발전에서 승전보를 울린 순간이었다. - P271

브라운밀러의 책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Against Our Will: Men, Women and Rape)』이 출간되었을 때 일각에서는 칭찬이 자자했다. 브라운밀러를 1976년 올해의 여성 중 한 명으로 선정한 「타임(Time)」은 그 책을 "페미니즘운동에서 출현한 학술서 가운데 가장 엄밀하고 도발적인 책"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다른 진영에서는 흑인 강간범이라는 낡은 인종주의 신화를 부활시켰다며 혹독하게 비판했다. - P273

콜린스는 생물학으로 위장한 주장에 의지했고 브라운밀러, 러셀, 맥켈러는 환경중심적인 설명을 하고 있지만, 최종분석에서 이들은 모두 흑인 남자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저지를 동기가 충분히 강하다고 단정짓는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의 성의 변증법: 페미니스트 혁명을 위하여(The Dialectic of Sex: The Case For Feminist Revolution)는 강간과 인종이라는 주제를 다룬 가장 초기의 이론적 저작으로 오늘날의 페미니즘운동과 관련이 깊다. 파이어스톤의 주장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인종주의는 사실상 성차별주의의 연장이다. 파이어스톤은 "인종은 남자 가문의 여러 부모와 형제자매일 뿐"이라고 하는 성서속 개념을 끌고 와서 백인 남자를 아버지, 백인 여자를 아내이자 어머니, 흑인들을 그 자녀로 규정하는 사고를 진전시킨다. 파이어스톤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을 인종주의적으로 변형하여 흑인 남자들은 백인 여성과의 성관계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지 못한다고 암시한다. 이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자고 싶어 한다. - P277

브라운밀러나 맥켈러, 러셀처럼 파이어스톤은 피해자를 탓하는 낡은 인종주의적 궤변에 굴복한다.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이들의 선언은 흑인 강간범이라는 해묵은 신화의 부활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역사적 근시안 때문에 흑인 남자들을 강간범으로 그리는 것이 백인 남자들에게 흑인 여성의 몸을 성적으로 이용해도 된다는 인종주의적 구실을 더 강화해준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다. 강간범 흑인 남자라는 가상의 이미지는 항상 대책 없이 난잡한 흑인 여자의 이미지를 강화했다. 흑인 남자들이 통제 불가능한 동물적인 성욕을 품고 있다는 개념을 받아들이면 그 인종 전체가 동물 수준으로격하되기 때문이다. 흑인 남자들이 백인 여자들을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흑인 여자들은 분명 백인 남자들의 성적관심을 반길 수밖에 없다. ‘헤픈 여자‘이자 매춘부로 인식되는 흑인 여자들은 강간의 순간에 비명을 질러도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할 수밖에 없다. - P278

남북전쟁 직후에도 흑인 강간범이라는 위협적인 신화는아직 역사적 현장에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예제 시기에백인 노예제 폐지론자들을 향했던 린치는 귀중한 정치적 무기로서 서서히 입증되어갔다. 그래도 린치가 대중적 관습으로 용인되려면 그것의 야만성과 참상이 확실하게 정당화되어야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흑인 강간범 신화가 퍼져나갔다. 흑인에 대한 린치를 정당화하려는 여러 시도 가운데 강간 고발이 가장 위력적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결국 흑인 여성에 대한 지속적인 강간이 가미된 린치는 남북전쟁 이후 인종주의 테러의 전략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흑인 노동에 대한 야만적인 착취가 승인되었고, 재건의 배신 이후 흑인 전체에 대한 정치적 지배가 확실해졌다. - P282

노예제 폐지 이후 인종주의가 그 꼴을 갖추는 데에 가상의 흑인 강간범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흑인 남성을 가장 빈번한 성폭행범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무책임한 주장이다. 나쁘게 말하면 이는 흑인 전체에 대한 공격이다. 가상의 강간범은 가상의 매춘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흑인 여성들은 조작된 강간 고발을 흑인공동체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린치 반대 운동의 선봉에 발빠르게 섰다. - P291

오늘날 강간의 사회적 맥락이 복잡함을 감안했을 때 이를 고립된 현상으로 다루려는 일체의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 P303

없다. 강간에 맞서는 실효성 있는 전략은 강간의, 심지어는 성차별주의의 박멸 이상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인종주의에 맞서는 투쟁이 강간 반대 운동의 지속적인 주제가 되어야 한다. 강간 반대 운동은 유색인종 여성뿐만 아니라 인종주의에 의해 조작된 강간 고발의 많은 피해자들 역시 방어해야 하기때문이다. 성폭력의 위기적 측면들은 자본주의의 깊고 지속적인 위기의 여러 양상들 중 하나를 구성한다. 여성에 대한 전반적인 억압이 자본주의에 없어서는 안 되는 버팀목으로 남는 한, 성차별주의의 폭력적인 얼굴인 강간의 위협은 꾸준히 존재할 것이다. 강간 반대 운동, 그리고 이 운동의 주요 활동들―정서적, 법적 지원에서부터 자기방어와 교육 캠페인에 이르기까지―은 독점자본주의의 궁극적 혁파를 염두에 둔전략적 맥락 안에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 P304

출산통제-개인의 선택, 안전한 피임 방법, 필요할 때는 임신중지-는 여성해방의 핵심 선결 조건이다. - P305

출산통제의 진보적인 잠재력은 여전히 반박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운동의 역사적 기록을 보면 인종주의와 계급 착취에 대한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다. - P306

하지만 임신중지권 캠페인이 거의 백합처럼 희디흰 사람들로만 이루어졌던 상황의 진짜 의미는 유색인종 여성의 미성숙하고 근시안적인 의식에서 찾을 수 없었다. 진실은 출산통제운동 자체의 이데올로기적 토대 안에 묻혀 있었다. - P307

유색인종 여성들은 임신중지권에 찬성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임신중지를 지지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수많은 흑인과 라틴계 여성이 임신중지에 의지하면서도, 임신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보다는 새 생명을 이 세상에 내놓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비참한 사회적 환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 P308

이 최초의 출산통제 요구는 물질적 부를 보유한 여성들만 달성할 수 있는 목표들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가난한 노동계급 여성들은 맹아적 단계의 출산통제운동을 자기 일로 여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 P313

하지만 신흥독점자본주의 이론가들은 이 현상을 공개적으로 인종주의적이고 반노동계급적인 방식으로 해석했다. 본토 태생의 백인 여성들이 아이를 적게 낳으면서‘인종자살(race suicide)‘이라는 망령이 공무원계에 등장하게된 것이었다. - P314

이렇게 출산통제운동의 초기에는 계급편향과 인종주의가 스며들었다. 출산통제 찬성 집단 내에서는 가난한 여성, 흑인 여성, 이민자 여성 모두가 ‘가족의 규모를 제한할 도덕적 의무‘를 가진다는 생각이 점점 퍼져나갔다. 특권층은 ‘권리‘로 요구했던 것이 빈민에게는 ‘의무‘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 P316

20세기 초 몇십 년간 우생학 운동이 날로 인기를 얻게 된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 우생학의 사고는 신흥독점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적 필요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남부에서흑인 노동자들에 대한, 북부와 서부에서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의 강도가 심해지는 데 대해서도, 라틴아메리카와 태평양에서 벌어진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해서도 정당화할 논리가 필요했다. 우생학 캠페인과 관련된 유사과학에 기반한 인종 이론들은 신흥독점기업들의 행태를 극적으로 변호해주었다. 그 결과 이 운동은 카네기, 해리먼, 켈로그 같은 유수의 자본가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 P320

출산통제운동에서 이 일화는 우생학적 사고와 연계된 인종주의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승리했음을 확인시켜준다. 출산통제운동은 그 진보적인 잠재력을 탈취당하고서 유색인종들개별적인 출산통제 권리가 아니라 인종주의적인 인구통제전략을 옹호했다. 심지어 미국 정부의 제국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인구정책을 실행하는 데 운동의 핵심역량을 쏟아달라는 요청까지 받게 된다. - P322

물어쨌든 가사노동은 사실상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것을하지 않을 때까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는 닦아서반짝반짝한 바닥은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침대는 알아차린다." 가사노동은 본성상 눈에 띄지 않고, 반복적이고, 진 빠지고, 비생산적이고, 창조적이지 않다. - P331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자신의 고전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 - P333

에서 주장하듯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성불평등은 사유재산이 등장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류 역사의 초기에는 경제적 생산시스템 내에서의 성별분업이 위계적이지 않고보완적이었다. 남자들이 야생동물 사냥을, 여자들은 야채와과일 채집을 책임지던 사회에서는 두 성 모두 공동체의 생존에똑같이 필수적인 경제행위를 수행했다. 이런 시기에는 공동체가 본질적으로 대가족이었기 때문에 집안일에서 여성이 중심적인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공동체의 생산적인 구성원으로서그에 맞게 평가받고 존중받는다는 의미였다. - P334

반면 선진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의 실물 증거를 거의 만들어내지 못하는 주부의 서비스 중심의 가사노동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 일반을 축소시킨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결국 주부는 남편의 종신 하인이다. - P335

산업화가 진행되고 경제 생산이 가정에서 공장으로 넘어 - P337

가면서 여성이 가정에서 수행하던 노동의 의미는 시스템 차원에서 쇠락을 면치 못했다. 여성은 이중의 의미에서 패자였다. 급부상하는 공장들이 이들의 전통적인 업무를 빼앗으면서 경제 전반이 가정과는 멀어졌고, 많은 여성들이 중요한 경제적 역할을 대체로 박탈당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공장은 직물, 양초, 비누를 제공했다. 버터, 빵, 그 외 식료품마저도 대량생산되기 시작했다. - P338

이런 급진적인 경제적 변화의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산물이 바로 ‘가정주부‘의 탄생이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여성들은 평가절하된 가정생활의 수호자로 재규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동부 노동계급 가운데 넘쳐나는 숱한 이주 여성들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데올로기로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이재규정은 터무니없었다. 이 백인 이주 여성들은 일차적으로임금소득자였고 오직 이차적으로만 가정주부였다. 그리고 남부에는 집에서 떨어져 노예경제의 본의 아닌 생산자로서 노역에 시달리는 수백만 여성들도 있었다. 19세기 미국 사회에서 여성의 현실적인 자리는 얼마 안 되는 임금을 위해 공장 기계를 돌리는 백인 여성들과, 억압적인 노예제하에서 뼈 빠지게 일하는 흑인 여성들과 관련이 있었다. ‘가정주부‘는 사실상 신흥중간계급이 만끽하는 경제적 번영의 상징이었으므로 반쪽짜리 현실이었다. - P339

하지만 흑인 여성들은 강인함과 상대적인 독립성을 획득하고 만끽하기 위해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흑인 여성이 ‘그냥 가정주부‘였던 적은 거의 없었지만 이들은 항상 가사노동을 해왔다. 그러므로 이들은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이라는 이중부담을, 늘 시시포스의 불굴의 힘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이중부담을 짊어져왔다. - P342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운동의 이론적 기원은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Mariarosa Dalla Costa)의 에세이 [여성과 공동 - P344

체의 전복(Women and the Subversion of the Community)」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글에서 달라 코스타는 가사서비스가 사적이라는 생각이 사실은 환상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근거로 가사노동을 재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달라 코스타는 가정주부가 남편과 아이들의 사적인 요구를 보살피는 것처럼 보여도 가사서비스의 진정한 수혜자는 남편의 현 고용주와 자식들의 미래의 고용주들이라고 주장한다. - P345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운동은 "조립라인의 노예가 되는 것은 주방 싱크대로부터 해방되는 게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여성이 집 밖에서의 일자리를 구하려는 의지를 꺾는다.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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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세기 전환기의 여성참정권: 인종주의의 영향이 고개를 들다

8장. 흑인 여성과 클럽 운동
아이다 B. 웰스
수전 B. 앤서니
메리 처치 테럴

9장. 여성 노동자, 흑인 여성, 참정권 운동의 역사

10장. 공산주의자 여성들
루시 파슨스
엘라 리브 블로어
아니타 휘트니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
클라우디아 존스

* 이쯤에서 연표 정리,

1861-1865 남북전쟁
1863 링컨의 노예해방선언
1865 수정헌법 13조 노예제도 폐지
1870 수정헌법 15조 흑인 남성 참정권 부여
1920 수정헌법 19조 여성 참정권 부여

테러와 폭력 때문에 남부의 흑인 노동자들은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의 임금과, 노예제보다 더 못할 때가 많은 노동조건을 감수해야 했다. 이것이 남부에서 새롭게 일렁이고 있는 린치의 물결과 법적인 참정권 박탈의 패턴 이면의 논리였다. 전미여성참정권협회의 치명적인 결의안이 통과된 해인 1893년에는 대법원이 1875년의 민권법을 뒤엎었다. 이 결정으로 짐크로법과 린치-인종주의적 노예화의 새로운 양상―가 법적인 승인을 받았다. 실제로 3년 뒤 플레시 대 퍼거슨(Plessy v. Ferguson) 재판은 남부의 인종분리정책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강화하는 ‘분리 평등(separate but equal)‘ 방침을 선언했다. - P186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면서 중대한 이데올로기적 결합을 통해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되었다. 항상 손쉽게 어울리던 백인우월주의와 남성우월주의가 공개적으로 그 결합을 받아들이고 강화됐다. 20세기 첫 몇 해 동안 인종주의적 사고의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다. 지적 풍토-심지어 진보적인 집단 내에서조차ㅡ는 앵글로색슨 인종의 우월성에 대한 비합리적인 관념에 치명적으로 오염된 듯했다. 인종주의 프로파간다가 이렇듯 갈수록 심하게 확산되면서 여성의 열등함을 시사하는 사고 역시 이와 비 - P192

슷하게 날로 확산됐다. 국내외의 유색인종이 무능한 야만인으로 묘사되었다면 여성-그러니까 백인 여성―은 근본적인 존재 이유가 수컷 종의 양육에 있는 어머니로서 전보다 더경직되게 그려졌다. 백인 여성들은 어머니로서 자신들이 백인의 우월성을 지키는 투쟁에서 아주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다고 배우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종의 어머니’였다. 종이라는 단어는 ‘인간 종’을 일컫는 것이어야 했음에도 현실에서는―특히 우생학 운동이 인기를 얻으면서―‘종’과 ‘앵글로색슨 인종’이 거의 구분되지 않았다. - P193

벨 키어니가 전미여성참정권협회 대회에 참석한 회원들에게 연설한 내용에는 아이러니한 비틀기가 있었다. 수년간 선도적인 참정권 운동가들은 편의성이라는 만능 주장으로 인종평등에 대한 협회의 무심함을 정당화했다. 이제 여성참정권은 인종적 우위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편의적인 수단을 대변했다. 여성참정권협회는 부지불식간에 자기 함정에ㅡ투표권을 손에 넣을 생각으로 내세운 편의성이라는 함정에ㅡ빠지게 되었다. 인종주의에 대한 투항의 패턴이 자리를 잡고 나서-그리고 특히 피도 눈물도 없는 신흥 독점 자본의 확장을 위해서는 더 강력한 형태의 인종주의가 필요했던 그 역사적인 시점에 참정권 운동가들이 결국 그 부메랑에 상처받게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 P198

아이다 B. 웰스는 린치를 상대로 지난한 전쟁을 벌이면서 선동과 대치 전술의 전문가가 되었다. 하지만 말과 글을 가지고 흑인해방을 부르짖는 데서는 메리 처치 테럴만 한 인물 - P213

이 없었다. 테럴은 논리와 설득을 통해 흑인의 자유를 추구했다. 거침없는 저술가이자 강력한 웅변가, 논쟁술의 대가였던 테럴은 꾸준히 원칙을 지키며 노동계급의 권리뿐만 아니라흑인 평등과 여성참정권을 옹호했다. 아이다 B. 웰스처럼 테럴은 세상을 떠나던 해, 그러니까 90세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인종주의에 대한 마지막 반항의 몸짓으로 메리 처치 테럴은 89세의 나이에 피켓을 들고 워싱턴 D.C.에서 행진에 참여했다.
아이다 B. 웰스와 메리 처치 테럴이 당대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두 흑인 여성이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수십 년간 이어진 이들의 사적인 반목은 흑인 여성 클럽 운동의 역사에서 비극이었다. 이들의 개별적인 업적이 기념비적이긴 했지만, 만일 이들이 합심해서 힘을 썼더라면 흑인 자매들을 위해, 그리고 흑인 전체를 위해 진짜로 산을 움직였을 수도 있었으리라. - P214

수전 B. 앤서니,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 그리고 다른 신문사 동료들이 여성 노동자들의 대의에 중요한 기여를 하긴했지만 사실 이들은 단 한 번도 노동조합주의의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앞서 흑인해방이 백인 여성들의 이해보다 일시적으로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이들은, 노동운동이 힘을 얻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단결과 계급 연대라는 근본적인 원칙들을 전적으로 포용하지 못했다. 참정권 운동가들이 보기에 ‘여성‘은 궁극의 시험대였다. 만일 여성의 대의를 더 발전시킬 수만 있다면 남성 노조원들의 파업에서 여성들이 배신자 노릇을 해도 잘못이 아니었다. 수전B. 앤서니는 여성 인쇄공들에게 작업장에서 배신자 노릇을 하라고 촉구했다는 이유로 1869년 전미노동조합 대회에서 배제되었다. - P218

이 사건에서의 앤서니와 스탠턴의 태도는 평등권협회에서 참정권 운동가들이 흑인을 배척하던 태도와 충격적일 정도로 비슷했다. - P219

앤서니의 완고한 페미니즘적 태도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완고한 반영이기도 했다. 그리고 앤서니가 노동계급 여성이나 흑인 여성이 근본적으로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계급착취와 인종주의적 억압에 의해 동류의 남성들과 연결되어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부르주아 이데올로 - P221

기 때문에 시야가 좁아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계급과 흑인 남성들의 성차별적 행동에는 분명 맞서야 했지만, 진짜적―이들 공통의 적―은 사장, 자본가, 또는 비참한 임금과 견디기 힘든 노동조건에, 그리고 직장에서의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책임이 있는 그 누군가였다. - P222

흑인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은 백인 자매들과는 달리 많은 흑인 남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19세기에는 흑인 남성 프레더릭 더글러스가 여성의 평등을 부르짖은 가장 눈에 띄는 남성운동가였듯, 20세기에는 W. E. B. 듀보이스가 여성참정권을 지지하는 주도적인 남성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 P225

흑인 여성들은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다인종운동을 구성하는 데 그 ‘관찰과 판단이라는 분명한 권력’을 보탤 의지가 누구보다 더 컸다. 하지만 이들은 백합처럼 환한 백인 여성참정권 운동의 지도자들에게 번번이 배반당하고퇴짜맞고 거부당했다. 참정권 운동가들에게도 여성 클럽 회원들에게도 흑인 여성들은 남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하얀 피부색으로 아양을 떨어야 할 때가 되면 바로 갖다 버릴 수 있는대상에 불과했다. 여성참정권 운동의 경우, 남부의 여성들을위해 한 온갖 양보는 결국에 별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정헌법 제19조*에 대한 투표 결과를 분석해보니 남부의 주들은 여전히 반대 진영에 도열해 있었고 사실 이 수정안을 거의 부결시킬 뻔했다. - P230

1848년 혁명에 참여했던 포병장교이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절친한 동료 요제프 바이데마이어(Joseph Wey-demeyer)는 미국으로 이주해서 미국 역사상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을 창설했다. - P233

사회당과 세계산업노동자연맹 모두 여성을 회원으로 받고 이들이 지도자와 선동가로 나서도록 격려하긴 했지만 직접적인 인종주의 반대투쟁을 보완적인 방침으로 포용한 곳은 세계산업노동자연맹뿐이었다. - P235

심지어 남편이 처형당할 때마저도 루시 파슨스와 두 아이들은 시카고 경찰에게 체포당한 상태였다. 파슨스를 체포한 경찰 중 한 명은 "저 여자가 천 명의 폭도보다 더 두렵다"라고 논평했다. - P239

아니타 휘트니는 이어서 백인 클럽의 여성들로 이루어진청중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떤 유색인종 남자가 "만약 자기가지옥과 텍사스를 소유하게 된다면 텍사스는 다른 사람에게 - P248

임대하고 자신은 지옥에서 살겠다"라고 말한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휘트니는 그의 말에는 텍사스가 남부에서 인종주의 폭도에 의한 살인이 세 번째로 많이 일어나는 주라는 사실이 배경에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그보다 더 많은 주는 조지아와미시시피뿐이었다.) - P249

플린은 참전용사 내 남녀불평등을 비난하면서 독자들에게 흑인 여성 참전용사들이 백인 자매들보다 훨씬 더 어려운처지임을 상기시켰다. 실제로 흑인 여성들은 보통 삼중의 억압에 시달렸다.

미국 백인 여성들을 괴롭히는 모든 불평등과 장애가 니그로여성들에게서는 천 배 악화된다. 이들은 삼중으로 착취당한다. 니그로로서, 노동자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 P255

클라우디아 존스는 진보주의자들, 그리고 특히 노조원들이 조직을 꾸리고자 하는 흑인 가사 노동자들의 노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며 꾸짖었다. 흑인 여성 노동자 대다수는 아직도 가사서비스에 고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녀에 대한 가부장적 태도가 집단으로서의 흑인 여성에 대한 지배적인 사회적 정의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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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02-12 0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떼 예쁩니다 ㅎ 일요일 굿모닝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햇살과함께 2023-02-12 10:15   좋아요 1 | URL
카푸치노인데 예쁜데,, 맛이 생각보다 약했어요 ㅎㅎ 주말 잘 보내세요!!
 

6장. 교육과 해방

미르틸라 마이너

교육은 흑인들의 발등을 비추는 등불이자 자유에 이르는 길을 밝히는 빛이었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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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여성참정권 운동 내부의 인종주의

5장. 흑인 여성에게 해방의 의미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대들보를 보지 못한다는 말이 생각나는 장이다.

해방이 흑인들을 백인 여성과 ‘동등하게’ 만들었으므로 투표권이 주어지면 흑인 남성이 더 우월해진다고 믿는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과 그 외 여성들은 흑인 남성의 참정권에 절대적으로 반대했다. 하지만 노예제 폐지만으로는 흑인의 경제적 억압이 철폐되지 않고, 그러므로 흑인에게는 정치권력이 특히 긴박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한 이들도 있었다. - P125

물론 공화당은 북부군이 승리를 거머쥐고 난 뒤 여성참정권을 지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남성이라서가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당시의 지배적인 경제적 이익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 간의 군사적 경합이 남부의 노예 소유계급을 전복시키는 전쟁이라는 점에서, 이는 기본적으로 북부의 부르주아지, 그러니까 공화당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발견한 젊고 열정 가득한 산업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수행된 전쟁이었다. 북부의 자본가들은 국가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경제적 통제력을 손에 넣고자 했다. 그러므로 남부의 노예정치를 상대로 이들이 벌인 투쟁은 흑인 남성이나 여성의 해방을 인간으로서 지지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 P127

수정헌법 제14조와 제15조에 대한 여성 권익 운동 지도자들의 비난이 정당했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백인 중간계급 여성으로서의 자기 이익에 대한 방어―자기중심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방식으로 표출될 때가 많은—는 남북전쟁 이후 흑인 평등 운동과 이들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위태롭고 피상적이었음을 드러냈다. - P130

프레더릭 더글러스가 생각하기에 노예제 폐지는 명목상으로만 완수되었다. 남부에 사는 흑인의 일상에는 여전히노예제의 악취가 진동했다. 그래서 더글러스는 남부 흑인들이 새로 손에 넣은 ‘자유로운’ 지위를 단단하고 확실하게 굳힐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주장했다. "흑인 남성들이 투표권을 갖기 전까지 노예제는 철폐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더글러스가 그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 여성 투표권 투쟁보다 흑인 투표권 투쟁을 전략적 우위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 근거가 바로 이것이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참정권을 노예제 청산을 위한 미완의 과정을 완수할 수 있는 필수불가결한 무기로 바라보았다. 이 순간만큼은 여성참정권이 흑인남성의 참정권보다 덜 시급하다는 주장을 펼칠 때 더글러스는 흑인 남성의 우월성을 엄호한 게 전혀 아니었다. - P131

옛 노예 소유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던 민주당은 남부에서 흑인 남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을 방법을 강구했다. 그래서 많은 민주당 지도자들이 공화당의 적수들에게 맞서는 계산된 조치로 여성참정권을 엄호했다. - P135

평등권협회의 해체로 막강한 힘이 잠재되어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보잘것없었던 흑인해방과 여성해방의 동맹이 막을 내렸다. - P140

수정헌법 제14조와 제15조를 둘러싼 논란에서의 행동으로 어떤 진지한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더글러스가 흑인 남성 참정권을 지지해서라기보다는 공화당 안에서의 투표권의 힘을 너무 의심 없이 신봉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 P141

남부에서 가사서비스의 가장 굴욕적인 측면 중 하나ㅡ가사서비스와 노예제의 친연을 확인해주는 또 다른 측면—는흑인 하인이 백인과 같이 있는 한 짐크로법*을 일시적으로유예했던 부분이었다.

나는 백인 아이들과 전차나 기차를 타러가곤 했고 (…) 앞자리든 뒷자리든 내가 원하는 데는 어디든 앉을 수 있었다. 백적인 남자가 다른 백인 남자에게 "저 검둥이가 여기서 뭐하는거죠?" 하고 물었는데 "아, 저 여자는 그 앞에 있는 백인 아이들의 보모예요"라는 대답이 나오면 순식간에 평화의 침묵이 찾아왔다. 내가 하인-노예-으로서 백인 남자의 객차에 오르거나 전차의 백인 남자 구역에 있는 한 만사형통이지만 옆에 백인 아이가 없어서 내가 하녀임을 증명할 수 없으면 단박에 ‘검둥이‘ 자리나 ‘유색인종 객차’를 할당받곤 한다. - P148

역사적으로 페미니스트를 포함한 백인 여성들은 가사 노동자들의 투쟁을 인정하기를 꺼렸다. 이들은 가사서비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시시포스적 과업에 관여한 적이 거의 없었다. 작금의 ‘중간계급‘ 페미니스트 프로그램에서 가사 노동자 문제가 편의적으로 누락된 것은, 그들이 부리는 가정부에 대한 착취적인 처사를―최소한 부유층 여성들의 입장에서-감추고 정당화하는 방편인 것으로 드러날 때가 심심찮게 있었다. 1902년 ‘가사 노동자의 하루 9시간 노동(ANine-Hour Day for Domestic Servants)’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쓴 저자는 고용주에게 여성 점원을 위한 의자를 비치할 것을 촉구하는 서명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한 페미니스트 친구와의 대화를 이렇게 묘사했다.

친구가 말했다. "가게 점원들은 하루에 열 시간씩은 서 있어야 하잖아. 그 아가씨들 지친 얼굴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존스 부인." 내가 말했다. "네 가정부는 하루에 몇 시간 서 있지?" - P155

"왜? 모르겠는데." 친구가 놀라며 말했다. "대여섯 시간 정도 아닐까?"
"가정부가 몇 시에 일어나?"
"여섯 시."
"그리고 밤 몇 시에 일을 마무리하니?"
"아, 여덟 시 정도, 일 거야, 보통."
"그럼 열네 시간이잖아.…."
"… 우리 가정부는 앉아서 일할 때도 많아."
"무슨 일을 할 때? 빨래? 다림질? 걸레질? 침대 정돈? 요리? 설거지? (…) 아마 너희 집 가정부는 밥 먹을 때랑 채소 다듬을 때 두 시간 정도 앉아 있을 거야. 그리고 한 주에 나흘은 오후에 한 시간 휴게 시간도 있겠지. 그러면 너희 가정부는 하루에 최소한 열한 시간을 서 있고 그동안 계단도 숱하게 오르내려야 하지. 내가 보기엔 너희 집 가정부가 그가게 점원보다 더 딱한 거 같은데."
나를 찾아온 친구는 눈이 번들대고 뺨이 붉어져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집 가정부는 일요일엔 저녁 식사가 끝나면 맨날 쉰다고." 친구가 말했다.
"그래, 그치만 점원은 일요일엔 종일 쉬잖니. 제발 내가 서명하기 전엔 떠나지 마. 점원들이 앉을 수 있게 되는 걸 나보다 더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이 페미니스트 운동가는 자신이 반대하는 억압의 수명을 자기 손으로 연장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여성의 모순적인 - P156

행동과 지나친 둔감함에는 이유가 있다. 하인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철학자 헤겔(Hegel)에 따르면 주인-하인(또는 주인마님-가정부) 관계의 역학 속에는 하인의 의식을 지워버리려는 부단한 노력이 내재한다. 이 대화에서 언급된 점원은 임금노동자, 즉 최소한 자신의 고용주와 자신의 노동에서 일말의 독립성을 보유한 인간이었다. 반면 하인은 오직 주인마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노동했다. 어쩌면 그 페미니스트는 자기 하녀를 자기 자아의 단순한 연장으로 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억압자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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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노예제 반대 운동과 여성 권익의 탄생

3장. 초기 여성 권익 운동에서의 계급과 인종

프루던스 크랜들
루크리셔 모트
사라 & 안젤리나 그림케 자매
앨리자베스 캐디 스탠턴
소저너 트루스
프레데릭 더글러스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
이 멋진 여성들과 남성들!

그녀들의 이야기에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아이러니해 보일 수도 있지만 당대에 가장 인기있던 노예제 반대 소설은, 노예제와의 전투가 치러지던 정치영역에서 여성의 배제를 정당화하는 성차별주의적 관념과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인종주의적 사고를 고착화시켰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보수적인 내용과 진보적인 호소력 간의 확연한 모순은 저자 개인의 관점에 있는 결함 때문이라기보다는 19세기 여성의 지위에 내재한 모순적인 성질이 반영된 것이었다. - P69

실제로 산업화의 영향으로 가정에서의 여성의 의무가 줄어들수록, ‘여성의 자리는 집’이라는 주장이 더 강경해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여성의 자리는 언제나 집이었지만, 산업화 이전 시기에는 경제 그 자체가 가정과 그 주변 농토 위주로 꾸려졌다. - P69

그러나 생필품의 제조가 집에서 공장으로 옮겨가면서 여성성 이데올로기가 아내와 어머니를 이상형으로 떠받들기 시작했다. 노동자로서의 여성은 최소한 경제적 평등을 만끽했지만, 아내로서의 여성은 남성의 부속물, 남편의 시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인간을 보충하기 위한 수동적인 도구로 규정되었다. 백인 주부의 상황은 모순으로 가득했다. 저항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P70

노예제 반대 운동은 중간계급 여성들에게 아내와 어머니라는 역할과는 무관한 기준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할 기회를 선사했다. 이런 의미에서 노예제 폐지 운동은 여성들이자신의 구체적인 일(works)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보금자리였다. 실제로 노예제 폐지를 위한 전투에서 여성들의정치 참여가 그만큼 강렬하고 열정적이고 전면적일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가정생활의 짜릿한 대안을 경험하고 있었기때문일 수 있다. 여성들은 자신이 겪는 억압과 어느 정도 닮은데가 있는 억압에 저항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노예제 반대 운동에서 남성우월주의에 맞서는 법을 배웠다. 여성들은 정치 투쟁의 영역에서는, 결혼생활 내부에서는 꿈쩍도 하지않을 것 같았던 성차별주의에 문제를 제기하고 싸움을 걸 수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백인 여성들은 흑인해방투쟁을 하려면 여성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열렬히 지켜야 한다는인식에 눈을 뜨게 된다.
여성운동에 관한 엘리너 플렉스너(Eleanor Flexner)의 출중한 연구가 보여주듯, 여성들은 노예제 폐지 운동을 통해 값진 정치적 경험을 축적했고, 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10여 년뒤 여성 권익 운동을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없었을 것이다. - P79

1838년에 완결된 사라 그림케의 「성평등에 대한 서한(Letters on the Equality of the Sexes)」에는 미국에서 여성이 저술한, 여성의 지위에 대한 최초의 포괄적인 분석이 담겼다. 여성에 대한 마거릿 풀러(Margaret Fuller)의 유명한 논문이 출간되기 6년 전에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사라는 성불평등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가정을 논박했다. - P83

이 두 출중한 자매의 글쓰기와 강의는 여성 노예제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다른 많은 여성들에게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노예제 폐지 운동의 일부 지도층 남성들은 여성 권익이라는 주제가 노예제 타파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혼란과 소외를 초래할 거라고 주장했다. 앤젤리나 - P83

의 초기 대응은 여성의 권익과 노예제 폐지의 튼튼한 연결 고리에 대한 자매의 이해를 보여준다.

도로에서 걸림돌을 뽑아버리기 전에는 온 힘을 다해 노예제 폐지를 밀어붙일 수 없다. (…)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도로를 우회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지금 당장. (…) 나의 친애하는형제들이여, 어째서 당신들은 강연자인 우리를 상대로 성직자들이 감쪽같이 꾸민 계략을 알아보지 못하는가? (…)우리가 올해 공개적으로 발언할 권리를 내려놓고 항복한다면내년에는 청원을 할 권리를, 그다음 해에는 글을 쓸 권리를 넘겨줘야 한다. 남성의 발밑에서 수치심 때문에 침묵하게를 되면 여성은 노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P84

그림케 자매는 흑인해방투쟁과 여성해방투쟁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임을 깊게 인식했기 때문에 한쪽의 투쟁이 다른 한쪽보다 절대적으로 더 중요하다는 이데올로기적 함정에 결코 빠지지 않았다. 이들은 이 두 대의의 관계가 변증법적임을 알고 있었다.
그림케 자매는 노예제 반대 운동에 몸담았던 다른 어떤 여성보다도, 여성 권익 문제를 흑인 문제에 지속적으로 포함시킬 것을 촉구했다. 동시에 이들은 여성은 절대 흑인들과 별개로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앤젤리나는 1863년 남북전쟁을 지지하는 애국여성대회에서 "나는 니그로와 동일시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니그로가 자신의 권리를 얻기 전까지 여성은 결코 여성의 권리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2장 - P86

세니커폴스 선언은 19세기 중반에 여성의 권리를 분명하게 자각했다는 데 더없이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부르주 - P98

아 및 신흥중간계급 여성에게 모순과 좌절과 터무니없는 억압을 가하는 정치, 사회, 가정, 종교의 상황을 겨냥하여 수년간 엉성하게, 때로는 말없이 전개된 도전들이 누적되어 빚어낸 이론이었다. 하지만 백인 중간계급 여성의 딜레마에 대한자각으로 철두철미하게 응집된 세니커폴스 선언은 남부와 북부 모두에 있는 흑인 여성들의 처지를 무시했을 뿐 아니라 백인 노동계급 여성의 곤경 역시 거의 외면했다. 그러니까 세니커폴스 선언은 이 문서의 성안자들이 속한 사회계급 밖에 있는 여성들의 상황은 도외시한 채 여성들의 여건을 분석했던 것이다. - P99

샬럿 우드워드가 세니커폴스 선언에 서명하게 된 동기는더 잘사는 다른 여성들과는 달랐다. 우드워드가 그 대회에 참석했던 건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개선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구하기 위해서였다. 장갑제조공인 우드워드가 하고 있던 노동은 아직 산업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우드워드는 집에서 일하며 가정 내 남성들이 합법적으로 통제하는 임금을 받았다. 자신의 노동조건을 설명하면서 우드워드는 자신을 세니커폴스에 오게 만든 반항심을 아래와 같이 드러냈다.

우리 여성들은 침실에 고립된 채로 비밀리에 일을 한다. 돈을 버는 것은 여성이 아닌 남성이며, 남성만이 가족을 부양한다는 이론 위에 온 사회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 나는 어떤 공동체든 얼마만큼의 여성은 반역의 날개를 퍼덕였다고 믿는다. 미천한 나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번도내 것일 수 없었던 비참한 푼돈을 위해 앉아서 장갑을 꿰맸던 그 모든 시간 동안 내 존재의 모든 섬유들이 침묵 속에서나마 반역에 가담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노동하고 싶다. 하지만 내 일을 내가 선택하고 싶고, 내 임금을 내가 받고 싶다. 그것이 내가 태어나면서 내던져진 삶에 저항하는, 내 나름의 반역이었다. - P102

노예제 반대 운동에 가담하는 백인 여성이 북부에서 흑인 소녀에게 인종주의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노예제 반대 운동에 내재한 큰 약점을 보여준다. 운동이 반인종주의 의식을 폭넓게 고취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림케 자매 등이 아주 분명하게 비판한 이 심각한 약점은 불행하게도 여성의 권익을 위한 조직적인 운동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 P106

"나는 여자가 아닌가요?(Ain‘t I aWoman?)" —소저너 트루스가 1851년 오하이오 애크런에서 열린 여성대회에서 했던 연설의 후렴ㅡ는 19세기 여성운동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슬로건 중 하나다.
소저너 트루스는 분열을 조장하는 남성들이 쏟아내는 적개심 가득한 야유로부터 애크런의 여성 모임을 혈혈단신으로 구해냈다. 모임에 참석했던 여성 가운데 거친 선동가들의 남성우월주의적 주장에 공세적으로 대거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은 트루스뿐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강력한 연설능력의 보유자였던 소저너 트루스는 여성의 나약함과 참정권은 양립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논박 불가능한 논리로 타파했다. 선동가들의 앞잡이는 여자는 남자의 도움이 없으면 물웅덩이도 못 건너고 마차도 못 타는데 투표권을 바라다니 같잖다고 주장했다. 소저너 트루스는 빨려들 정도로 천진난만하게 자신은 진창 웅덩이를 건너거나 마차에 탈 때 단 한 번도도움을 받아본 적 없다고 지적했다. "나는 여자가 아닌가요?" ‘우르릉대는 천둥’ 같은 목소리로 트루스는 말했다. "나를 보라고요! 내 팔뚝을 보라고요!" 그러고는 옷소매를 걷어올려 자기 팔뚝의 ‘엄청난 근력‘을 드러내 보였다. - P108

나는 쟁기질을 하고 심고 수확해서 헛간에 모아둬요. 어떤남자도 나보다 잘하지 못해요! 그럼 나는 여자가 아닌가요? 나는 남자만큼이나 많이 일하고 많이 먹을 수 있어요. 나한테 주기만 한다면 말이에요. 그리고 똑같이 채찍질도 견딜수 있죠! 그럼 나는 여자가 아니냐고요? 나는 자식을 열셋 낳았고 걔들이 거의 전부 노예로 팔려가는 걸 봤어요. 내가 어머니로서 비탄으로 울부짖을 때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내 소리를 듣지 못했죠! 그럼 난 여자가 아닌가요? - P109

도덕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근거로 노예제에 반대하던 가장 급진적인 백인 폐지론자들조차도 급성장중인 북부의 자본주의 역시 억압적인 시스템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은 노예제를 구태의연하게 정의를 거역한, 혐오스럽고 비인도적인제도로 여겼지만 북부의 백인 노동자들이 누리는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신분 역시 남부의 노예화된 ‘노동자’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두 집단 모두 경제적 착취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처럼 전투적인 인물도 임금노동자의 조직결성권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리버레이터」 창간호에는 정당을 결성하려는 보스턴 노동자들을 규탄하는 기사가 실렸다. - P114

여성 권익 운동의 지도자들은 남부 흑인들의 노예화와, 북부 노동자들에 대한 경제적 착취,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시스템을 통해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 초기 여성운동에는 백인 노동자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백인 여성 노동자에 대해서조차도. 많은 여성들이 노예제 폐지 운동을 지지했지만 노예제 반대 의식을 여성 억압에대한 분석 속에 통합하지는 못했다. - P115

앤젤리나 그림케의 눈부신 「우리의 두 번째 혁명의 장병들을 향한 연설 (Address to the Soldiers of Our Second Rev-olution)」은 앤젤리나의 정치의식이 대다수 당대인보다 훨씬앞서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앤젤리나는 연설에서 노동자, 흑인, 여성을 품어 안는 동맹을 통해 실현할 수 있는 급진 이론과실천을 제안했다. 카를 마르크스의 말처럼 "검은 피부의 노동자가 낙인이 찍혀 있는 한 흰 피부의 노동자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면, 앤젤리나 그림케의 명료한 주장처럼 이 시대의 민주적 투쟁―특히 여성 평등을 위한 투쟁-은 흑인해방투쟁과 손을 잡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치를 수 있을 것이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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