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제프가 나섰다. "우리는 고기는 물론이고 우유를 얻기 위해 소를 키우지요. 소에서 얻는 우유는 식단의 필수 식품이에요. 우유를 짜고 유통하는 산업 규모도 굉장히 크지요."
그들의 표정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것 같았다. 나는 내가 그린 소를 가리켰다. "농부가 소의 젖을 짭니다." 나는 우유 통과 의자를 그린 다음남자가 젖을 짜는 모습을 몸으로 흉내냈다. "짠 우유는 도시로 보내지고 배달원이 각 집으로 운반합니다. 아침이 되면 모두의 집 앞으로 우유가 배달되지요."
"소는 새끼가 없어요?" 소멜이 진지하게 물었다.
"물론 있지요. 송아지라고 불러요."
"사람들과 송아지가 다 먹을 만큼 우유가 충분한가요?"
달콤한 얼굴의 세 여인에게 어미 소로부터 송아지를 떼어놓고, 송아 - P85

지가 먹을 젖을 훔치는 과정을 이해시키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우리의 대화는 육류 산업으로 이어졌고, 이 이야기를 들은 여자들은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내 자리를 떴다. - P86

우리가 부활을 믿기 때문이라고 말했더니 여자들은 만약 신이 오랫동안 부패한 몸을 부활시킬 수 있다면 재가 된 사람도 부활시킬 수 있지않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에 태우는 걸 혐오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더니,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땅속에서 썩게 두는건 덜 혐오스럽냐고 되물었다. 여자들은 불편하리만큼 논리적이었다. - P98

테리의 비판은 사실 맞는 말이었다. 이들의 전반적인 문화를 지배하는 모성애가 두드러진 특징인 이 여자들에게 이른바 ‘여성성’은 눈에 띄게 부족했다. 이 점 때문에 오히려 나는 남자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여성스러운 매력‘이 여자들의 타고난 성품이 아닌 남성성이 반영된 결과물이라는 사실에, ‘여성스러운 매력‘은 여자들이 남자들을 기쁘게 해줄 의무 때문에 발달했을 뿐 여자들의 위대한 성취의 과정에 전혀 중요하지않다는 사실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테리의 결론은 나와 달랐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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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가 생각에 잠긴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전히 이상한 점이 있어. 남자들이 전혀 눈에 안 띌 뿐 아니라 흔적도 전혀 없어. 그리고 이 여자들의 반응은 지금까지 내가 본 여자들과 전혀 달라."
내가 동의했다. "제프, 네 말에 일리가 있어. 뭔가 분위기가 달라."
제프가 계속했다. "여자들은 우리가 남자라는 사실에 별로 주목하지않는 것 같아. 서로를 대하듯 우리를 대하고 있어. 우리가 남자인 게 별 일 아니라는 듯 말이야." - P54

"일부 고등 곤충들 중에 그런 예가 있어요. 우리는 단위생식이라고하죠. 처녀생식이라는 뜻이에요."
자바는 제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생식이라는 말은 물론 알아요. 그런데 처녀가 뭐지요?"
테리는 불편한 표정을 지은 반면 제프는 차분하게 질문을 받았다.
"처녀는 짝짓기를 하는 동물 중에 한 번도 짝짓기를 하지 않은 암컷을 뜻해요."
"오, 알겠어요. 그럼 짝짓기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수컷도 그렇게 부르나요? 아니면 수컷을 부르는 다른 용어가 있나요?"
제프는 같은 용어를 쓰긴 하지만 수컷에게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급히 대답을 마무리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짝이 없으면 짝짓기를 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 짝짓기 전에는 다들 처녀가 아닌가요? 그리고 수컷 혼자 생식할 수 있는 생물은 없나요?"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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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슨 논의나 예상을 할 때면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여자들이 어릴 거라고 가정했다. 아마 모든 남자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추상적으로 ‘여자‘는 젊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여자들은 그 단계를 지나고 대부분 한 남자의 소유가 되거나 남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 멋진 여자들은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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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트벨트의 밤과 낮 - 여성 철강 노동자가 경험한 두 개의 미국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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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질병, 성폭행, 실연, 차별, 트럼프의 당선. 이 모든 고통에도 엘리스는 절망할지언정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고, 죽음에 한 발짝 가까이 있는 ‘뜨거운’ 제철소의 불안정한 노동환경과 안정적인 삶의 기반인 월급명세서 사이에서 내면의 소리를 쫓아 길을 찾아갔다. 이 책이 그 멋진 발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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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5-25 16: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햇살과함께 님. 백자평도 정말 근사하네요!!

햇살과함께 2023-05-25 20:04   좋아요 2 | URL
이번 책은 고생 안하고 재밌게 술술 잘 읽었어요~ 백자평은 책나무님에게 많이 배우는 걸로요^^

레삭매냐 2023-05-25 16: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사서 단박에 백 몇쪽
까지 읽다가, 캐런 헤스의 소설
에 빠져 잠시 멈춤이네요.

가방에 들어 있으니 열심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햇살과함께 2023-05-25 20:06   좋아요 1 | URL
소설처럼 재밌게 잘 읽히죠~
그래도 읽는 동안 소설 읽고 싶어지는 맘은 계속 ㅎㅎ

미미 2023-05-26 1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독 수고하셨습니다 햇살님^^*

햇살과함께 2023-05-26 11:29   좋아요 2 | URL
이번달 책은 잘 읽혀서 다행이었어요~
다음달 책은 저도 일찍 시작해야겠어요^^
미미님도 수고하셨고 감사해요!

건수하 2023-05-26 14: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햇살과함께님, 제가 어제 안 달았네요?;; 왼독 축하드려요~
가부장제의 창조도 읽으시고 5월에도 고생하셨어요! ^^

Duedate는 지킨다! 태그 좋아요 ㅎㅎ

햇살과함께 2023-05-26 15:21   좋아요 0 | URL
ㅋㅋ 감사해요
이번 달 책은 수월해서 다행이었지 정말 가부장제의 창조 힘들어서…(재밌었지만)…
다음 달엔 희진 샘 책으로 쉬어가기(?)로요~
항상 퀄리티는 못지켜도 마감은 지킨다는 심정으로 ㅋㅋ

책읽는나무 2023-05-26 1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햇살 님의 백자평 넘 멋집니다.^^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이 안나 들어왔다가 오호...햇살 님의 백자평에 빠져버렸습니다^^

햇살과함께 2023-05-27 11:56   좋아요 1 | URL
백자평 달인 나무님 따라배우기^^ 나무님 페이퍼 읽어보겠습니다
 

어느 한 부분이 움직이면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의 힘과, 방파제에 부서지는 물결의 힘과, 무거운 하늘 아래 수평선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조증의 결과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느낌에는 어딘지 초월적인게 있었다. 손을 뻗으면 세상을 쥐고 있는 영혼과 접속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갑자기 명료한 자각의 순간과 마주했다. 내가 자살하려고 하는 것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란 걸 일순간 깨달았다. 내가 자살하려고 하는 것은 살아가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 P343

그를 보고 재빨리 웃어 보였지만 목울대가 울컥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울지 않으려고 커피를 들고 수선을 떨었다. 크림을 더 섞고 설탕도 더 섞었다. 블랙커피 색이 점차 밝아지는 걸 지켜보면서 며칠 전에 간호사가 한 말을 생각했다. 적어도 저 남자 같지는 않잖아요. 어쩌면 간호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이 아저씨같지는 않을 것이다. 몇 달 동안 하는 일마다 엉망으로 꼬이는 바람에 나는 상황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의지마저 잃었다. 이 나라가 끔찍하다고ㅡ갇힌 기분이라고 정신과 의사에게 말했을 때 나는 몇 년 동안 마음속에서 조금씩 자란 생각을 말로 표현한 것이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고 무기력함을 느꼈다. 변화를 향한 나의 꿈은 헛되고 무익해 보였다. 미국은 약한 것들을 무자비하게 뭉개버리는 기어였지만, 나를 꾸짖은 정신과 의사는 옳았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미국을 전연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에게 미국은 이민자가 의사 자리까지 오를 수 있는 나라였다. 이곳은 망명과 기회의 나라 - P356

였다. 거대한 실험. 세계 제일의 나라. 그곳에는 자체의 결점이 있고 그것도 치명적인 결점이 대부분이지만, 절망은 그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말을 더듬는 아저씨가 그 증거였다.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키울 수 있었지만 지독한 패배감에 젖거나 자기감정에 몰입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안고 있지만 노래를 불렀다. 자신이 기댈 수 없었던 아버지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말을 앗아간 폭력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고통은 냉소를 키우는 변명이 되지 않았다. 그는 분노를 방패처럼 들지 않았고 그 압력 아래에서 무너지지도 않았다. 삶은 그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목소리를 주었으므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해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은 것이다. - P357

"아주 간단해요." 여자가 또 한 번 설명했다. "논문의 승인 페이지를 새 서식으로 작성하고 논문 심사위원회의 서명을 받으면 돼요."
그게 끝이었다. 종이 한 장과 세 명의 서명. 4년 동안 이 문제는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보였다. 무슨 의례인 양 행정실의 이 여직원을 찾아올 때마다 서명을 받지 못한 채 돌아섰다. 매번 어깨를 으쓱하면서 관심을 꺼버리고는 학위가 뭐 중요하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물론 학위는 매우 중요했다. 학위를 받는 게 그저 두려웠을 뿐이었다. 성공이 두려웠고, 실패가 두려웠고, 내 병이 두려웠고, 내 잠재력이 두려웠고, 나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게 두려웠다. 젊은 시절 아빠도 학위를 따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재능과 실력이 있었지만 음대 학사 학위까지 몇 학점을 남겨놓고 그만두었다. 엄마가 내게 했던 말을 결코 잊지 못한다. 아빠는 학위 받는 게 두려웠던 거야. 아빠는 나를 빚고 만들었다. 나를 세상으로 인도했다. - P386

오랜 시간 우리는 한패인 동시에 동료-한 거푸집에서 만든 두 개의 형상—였지만 나는 아빠가 아니었다. 내가 아빠의 길을 따라갈 필요는 없었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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