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인형 옷 입히기

1987년에 주름 장식이 폭증한 것은 그저 오해가 아니었다. 이는 현대 여성 쇼핑객들의 습관이 점점 독립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묵은 좌절과 분노가 표출된 것이었다. - P280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여성해방운동때문에 여성들의 패션 감각이 떨어졌"고 워낙 많은 부유층 여성 고객들이 고급 여성복을 저버리는 바람에 "아랍 공주들과 고풍스러운 노부인들만 고객으로 남았다." 고결한 여성성은 해방된 여성들의 관심을 뒤엎으려는 역공이었다. 고결한 여성성을 주도적으로 기획하는데 참여한 패션 디자이너 아널드 스카시 Arnold Scaasi의 설명에 따르면이 새로운 패션 칙령은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대응이고, 일종의 전쟁이었다." - P281

패션업계는 반격의 나팔을 울릴 때마다 가혹하게 몸을 구속하는 옷을 토해 냈고 패션계 언론은 여성들에게 이런 걸 입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후기 빅토리아시대 언론에 실린 코르셋에 대한 많은 남성들의 추천사 중 하나는 "소녀가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자태와 감정으로 성숙하기를 원한다면 그녀를 꽉 묶어 주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 P282

패션계 상인들은 현대 여성은 여성성을 고갈시킨 과잉 평등 때문에 고통받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에 집착했다. 패션의 측면에서 반격의 주장은 여성해방은 여성들이 여성적인 옷을 차려입을 ‘권리’를 부정했고 1970년대의 출근복은 여성의 정신에 족쇄를 채웠다. - P283

그 위기란 여성의 전문성과 독립이 여성들에서 여성성을 앗아 가고 있다는 걱정이 아니라 그것이 남성들의 남성성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공포였다. 퇴색된 남성성에 대한 우려는 특히 패션계에서 심했다. 패션계 내 광범위한 게이 문화에 대한 인식이 1980년대에 증가하고 있던 동성애 혐오와 에이즈에 대한 우려와 충돌했던 것이다. - P293

의류 제작자들은 여성들이 푸프 스커트를 입으려 하지 않으면또 다른 비하성 패션을 강요하곤 했다. 중요한 건 스타일의 내용이아니라 그걸 강제로 입힌다는 사실이었다. 여성 소비자층의 고령화에 대한 시장 보고서가 넘쳐나는데도 이들의 디자인이 여성의 영아성嬰兒性으로 자꾸 퇴행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여성의 형태를 최소화하는 것이 여성에 대한 디자이너의 권위를 극대화하는 방법일 수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1980년대 말 런웨이에서 많은 이들이 그랬듯 테디베어를 안고서 아장아장 걷는 여성은 지시를 따르는 어린애였다. (1988년에 가장 인기 있는 런웨이 배경음악이었던)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의 "파더 피겨Father Figure"에 맞춰 통로를 걸어다니는여성은 어른들의 눈치를 보는 딸이다.121) 어떤 여성복 디자이너는 몰로이에게 현대 미국 여성들은 "이제 시키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어쩌면 이들이 아빠의 사랑스러운 딸이라고 생각하도록 설득할 수만 있다면 이들은 다시 고분고분해질지 몰랐다. - P302

첫 매키에게 이런 인상을 준 건 여성 소비자들이 아니라 ‘속옷의 폭증’이 한창이라고 주장하는 1980년대 말 란제리 산업이었다. 항상 그렇듯 이건 사회적 트렌드가 아니라 마케팅 슬로건이었다. 판매 부진에 좌절한 속옷협회(남성 일색의 란제리 제조업체 위원회)는 1987년특별홍보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의 사명은 ‘흥분‘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 P303

패션지들은 속옷의 판매 폭증을 현대 여성이 누리게 된 새로운성적 자유의 상징으로 선전했다. 《보디패션》은 1987년 10월 호 커버스토리에서 "섹시한‘ 혁명이 속옷에 불을 붙이다"라고 선언했다.134)하지만 이 잡지가 "섹시한"에 인용 부호를 넣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표지 모델이 전신 거들을 입고 있었고, 안에 실린 란제리는 대체로 빅토리아시대의 산물들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의 란제리는 여성 섹슈얼리티의 만개가 아니라 억압을 예찬했다. 디자인에서 원래대상으로 삼았던 이상적인 빅토리아시대의 숙녀는 그 어떤 성욕도가져서는 안 되었다. - P305

어쩌면 빅토리아시대가 여성들에게 최고의 시대는 아니었을지모른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을 내놓았다. 여성들은 이제 남자들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코르셋을 선택할 정도로 충분히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우린 여성들이 이 대단히 로맨틱하고 섹시한 란제리를 구매하는 건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고, 그게 남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부차적이라는 주장을 전면에 내세웠어요. 덕분에 우린 성차별주의자로 보이지 않고도 이런 옷들을 팔 수 있었죠." 하지만 그게 진실이었을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우리가 사용했던 철학이 그랬다는 거죠. 미디어가 그걸 선택했고 ‘트렌드‘라고 불렀지만모르겠어요. 통계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 P307

그러면 레이스 장식이 달린 빅토리아풍의 속옷은 누가 사는 걸까? 존슨이 말했다. "남자들이요." - P309

1980년대 말 패션 광고에서는 구타당하고 묶여 있거나 시체 운반용 가방에 들어간 여성이 주 메뉴였다. 주요 백화점 창문에 서 있는 여성 마네킹들은 난데없이 가죽옷을 입은 남성에게 구타당한 피정복자로, 쓰레기통에 쑤셔 박힌 시체로 연출되고 있었다. 《보그》에 실린 "숨은 기쁨"이라는 제목의 패션 지면에는 코르셋 끈으로 눈가리개를 질끈 동여맨 모델과, 다리가 묶인 또 한 명의 여성, 그리고 옷을 입지 않은 몸통과 팔을 끈으로 결박시킨 또 다른 여성이 크게 실렸다. 다른 주류 패션 잡지들도 목에 개 목걸이를 한 채 구속복을 입은 여성이나 벌거벗은 채 비닐 쓰레기 봉지에 담긴 여성들로 패션 기사란을 채웠다. 동일한 맥락의 패션 광고들도 확산되었다. 한 여성이 다리미판에 누워 있는데 어떤 남자가 이 여성의 가랑이에다리미를 대고 있거나(에스프리 Esprit), 여성이 구속복을 입고 있거나(세루치Seruchi), 어떤 여성이 닭처럼 어떤 남자의 주먹에 거꾸로 매달려 있거나(코틀러 Cotler‘s, 이 광고의 제목은 "올바른 태도를 위하여"다), 한 여성이 셔츠가 찢어진 채 바닥에 때려눕혀져 있거나(폭시레이디 Foxy Lady), 아니면 어떤 여성이 아예 관에 들어가 있는 식이다(마이클 Michael Mann). - P312

1980년대 말에도 엉덩이 광고가 얼마나 넘쳐났던지 사설에서 별도로 논평을 할 정도였다. 한 칼럼니스트는 심지어 1987년을 "뒤태의 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에 빠졌을 정도였다. - P312

8장 미용 산업과 생명을 얻른 마네킹

1980년대에 미의 트렌드를 결정하는 건 마네킹들이었고, 실제 여성들은 거기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인체 모형이 ‘생명을 얻은’ 반면 숙녀들은 마취를 하고 수술을 받았다. 미용 산업은 마치 그것이 자연스러운 여성성의 부활이기라도 한듯 ‘여성성으로의복귀‘를 홍보했다. 페미니즘이 득세하던 1970년대에 억눌렸던 모든선천적인 여성적 속성들을 다시 꽃피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용 산업이 가장 예찬한 여성적 특성들은 지독하게 부자연스러웠다. 갈수록 무자비하고 건강에 좋지 않은 가혹한 수단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323

1982년 돌연 레블론은 오래된 찰리 광고를 내리고 그 대신 결혼과 가정을 추구하는 여성을 내세웠다. 판매고 하락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었다. 레블론의 경영자들은 그저 찰리의 시대가 지나갔다고‘감지’했다. "우린 전체 여성의 해방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조금 무리했던 거죠." 웩슬러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건 어쨌든 더 이상중요하지 않았어요. 이젠 더 중요한 일들이 생겼어요. 마약 같은 것말이에요. 그리고 생물학적 시계도 있고요. 이젠 여성들이 노력을 적게 하며 살 필요도 있어요." 하지만 그는 찰리 광고의 중단은 사실 여성 ‘진보’의 상징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여성들은 이제 충분히 진보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은 그렇게 적극적일 필요가 없어요. 좀 더 여성스러워져도 된다고요." - P328

향수 광고 속의 여성들은 아기를 가진 어머니가 아니라 본인이점점 아기가 되어 갔다. 향수 회사들이 너도나도 새로운 여성성의 상징으로 사춘기 소녀들을 택했던 것이다. 짙은 화장을 하고 금발의 곱슬머리가 통통한 볼에 도발적으로 흘러내리는 어린 소녀 롤리타의사진을 내세운 《보그》 광고에는 "향수는 여성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즐거움 중 하나"라는 설명이 딸려 있었다. 로드앤테일러 Lord & Taylor의 향수 크리지아 Krizia 는 1989년 광고 슬로건이 "여성을 찬미하며‘ 였지만 이 광고에서 찬미의 대상이 된 여성은 빅토리아시대의 옷을 입고 눈을 얌전하게 내리깐 미취학 아동이 전부였다. 또 다른 향수 광고는 "당신은 날 때부터 천생 여자"라고 속삭였다. 이 광고에 나온숙녀스러운 아이는 다섯 살이었다. 레블론의 새로운 "대단히 찰리스러운" 여성 중 한 명은 열 살도 되지 않았다. - P330

부와 결혼, 어린 아이로 아무리 유혹해도 충분치 않자 향수 광고캠페인은 약하고 순종적인 여성의 이상화를 극도로 밀어붙였고 급기야 여성 시체를 다시 끄집어 냈다. 입생로랑의 오피움 광고에 나오는여성은 마치 관에 놓인 듯 반듯하게 누워 있고 눈은 꼭 감겨 있으며핏기 없는 발 옆은 장례식용 꽃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조반 Jovan의 플로랄Florals 광고에서는 현대판 오필리아가 궁극의 휴식 상태에빠져들었고, 그녀의 벗은 몸은 흑백의 난으로 뒤덮혀 있었다. 이 소름끼치는 장면에는 "약간의 탐닉에 도취할 모든 여성의 권리"라는 설명이 달려 있었다. - P331

물론 부분적으로 이런 새로운 아름다움의 법칙은 유행을 뒤집어서 간단하게 수요를 만들어 내는, 오래전부터 애용된 대단히 미국적인 판매 전략의 부산물이기도 했다. - P332

화장품 회사들은 판매를 위해 여성해방의 어휘를 사용하면서도 이런 해방의 결실이 여성의 외모를 잠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용업계는 직장 스트레스가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파괴한다고 주장했다. 울티마II의 광고는 사무실 형광등과 심지어 매일 하는 통근이 집중적인 태닝보다 여성의 피부에 더 큰 위협이라고 주장했다. "피부과전문의들은 여러분이 2주간 집중적인 일광욕을 하는 것보다 한 해 동안 출퇴근을 하면서 훨씬 더 많은 피부 손상을 누적시킨다는 데 동의합니다." - P334

가슴 확대 시술을 원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자체적인 동기"가 있다고 그는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들이 가슴을 확대하는 건 남자를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들은 ‘미 제너레이션*이에요. 수술도 자기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대부분의 경우 이들의 남편이나 남자 친구는 이들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요." 하지만 이상하게도그의 일정은 여전히 남성 전용 클럽의 연설 약속으로 빈틈이 없다.
* Me Generation, 1970년대의 자기중심적인 세대 - P3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화 <위험한 정사>
메이 웨스트
1980년대에 미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드라마 <캐그니 앤 레이시> 페미니즘 드라마가 아니라고 단언..

5장 치명적이고 치기 어린 상상

20세기폭스 20th Century-Fox 의 부회장 달린 챈Darlene Chan 의 표현처럼 "〈위험한 정사〉는 《뉴스위크》의 결혼 연구를 정신병으로 표현한 것"이다. - P198

반격은 1980년대 할리우드의 많은 여성 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형적인 테마에서 여성은 여성과 각을 세웠다. 자신의 사회적 환경에 대한 여성의 분노에서는 정치색이 빠져 버렸고 그 대신 이런 분노는 개인적인 우울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여성의 삶은 ‘좋은 엄마‘는 이기고 독립적인 여성은 벌을 받는다는 도덕 이야기의 틀에 갇혀 버렸다. 할리우드는 반격의 주장들을 반복하고 강화했다. 그러니까 미국 여성들이 불행한 것은 이들이 너무 자유롭기 때문이고, 여성해방은 여성들에게 결혼과 모성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P198

미국 영화에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노력은 반격의 시기에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 특징이었다. 1934년 거침없이 말하는 독립적인 여성 메이 웨스트*의 언행은 반동적인 ‘제작윤리강령Production Code of Ethics‘을 마련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1950년대 말까지 영화상에서 혼전 성관계를 금지하고 결혼을 강요한 (하지만 강간 장면은 허용한)이 검열 규정을 촉발한 것은 웨스트의 성적인 행동이 아니라 신랄한 혀였다. 웨스트는 자신의 영화에서, 그리고 그보다 더 나쁘게는 자신이 직접 쓴 대사에서 남자들에게 말대꾸를 함으로써 미국에 있는 도덕의 수호자들을 화나게 만들었다5) (출판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는 그녀를 "미국 가정이라는신성한 제도를 위협하는 존재"라고 불렀다). 그녀는 자신의 대사를직접 썼다. - P199

영화사학자 마저리 로젠Marjorie Rosen의 관찰에 따로면 "1940년대 여성 제물들의 목록은 병원 환자 명부 같다." 영화상의 싱글 직장 여성들, 인정머리 없고 비쩍 마른 이 집단의 사람들 역시 정신 질환 치료를 위해 진료실로 향했다. <다크 미러Dark Mirror〉(1946), 〈레이디 인 더 다크 Lady in the Dark〉(1944), 그리고 좀 더 나중에 나온 <더 스타The Star>(1952) 같은 영화에서 이들은 모두 일을 그만두고 결혼하라는 동일한 의학적 처방을 받았다. - P201

할리우드에서 1987년은 여성의 독립을 상대로 반격을 감행하기 위한 주홍글씨의 해였다. 그해에 개봉되어 최고의 수익을 거둔 영화 네 편 모두에서 여성은 두 집단으로 양분되어 보상을 받거나 벌을 받는다. 좋은 여성은 모두 비굴하고 밋밋한 가정주부(〈위험한 정사〉, 〈언터처블The Untouchables〉(1987))거나, 아기이거나 말없는 아가씨(〈세 남자와 아기>, <비버리힐스 캅 2〉)다. 여성 악당은 모두 〈세남자와 아기〉의 남자 같고 아기를 혐오하는 성질 더러운 여자나 〈비버리힐스 캅 2>의 허리까지 오는 장화를 신은 총잡이 여성, <위험한정사〉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직장 여성 같은 자신의 독립심을 버리지않는 여성들이다. 이 네 영화 모두 파라마운트 Paramount가 제작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반세기 전에 이 영화사를 파산에서 구해 준 것은 메이 웨스트였다. - P203

미국적인 가정의 귀환에 대한 그 모든 감상적인 헌사에도 불구하고(〈문스트럭>에서 아들은 "가족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라며 건배를 하고, <언터처블>의 남자들은 서로에게 "결혼하니까 좋지 않아?" 하고 말한다) 1980년대 말의 가족 친화적 영화에는 여성의 요구에 대한 남성들의 분노와, 여성 진보에 대한 남성들의 우려가 가득하다. - P232

남성들이 꿈을 꾸듯 남성성이 과장되게 흘러넘치는 환상의 나라로 떠나는 동안 아직 죽지 않은 여성 캐릭터들은 훨씬 폭력적인 시련에 혹사당했다. 1988년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 후보에 오른 여성 중 한 명을 제외한 전부가 피해자 역을 맡았다 (단 한 명의 예외는 기가 막히게도 멜라니 그리피스가 연기한 일하는 ‘소녀’였다). 그해 수상자였던 조디 포스터Jodie Foster는 <피고인The Accused〉(1988)에서 강간 피해자 역을 맡았는데, 이 영화의 제작자는 셰리 랜싱이었다. - P234

랜싱은 <피고인〉이 미국 사회에 여성에게는 강간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돌파구와 같은 영화로 환영해 마땅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성들이 이미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를 이야기할 뿐이라는 점에서 이 시대의 우울한 초상으로 애도하는 게 더 말이 되는 것 같다. 1980년대 말에 이르자 영화가 그저 젊은 여성을 난폭하게 다루는 데 반대하기만 해도 대담한 페미니즘적 선언처럼 행세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P235

6장 10대 천사와 결혼하지 않은 마녀

《뉴욕우먼》의 보도에 따르면 "이번 시즌에는 텔레비전 작가들이 일하는 엄마라는 개념을 불편하게 여기는 게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잡지는 이런 불편을 담담하게 기록한 퀴즈를 냈다. "일하는 엄마들"이라는 퍼즐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황금시간대 드라마와, 거기에 나오던 일하는 엄마 캐릭터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연결시켰다. 정답은 다음과 같다.

〈인생의 1년A Year in the Life〉-사망. 이〈풀 하우스〉-사망.
〈나는 도라와 결혼했다 I Married Dora〉-사망.
<아빠가 둘〉-사망.
<발레리네 가족 Valerie‘s Family> 사망.
〈서른 몇 살〉―직장을 그만두고 주부가 됨.
〈모든 게 상대적〉-드라마가 취소됨.
〈마마보이Mama‘s Boy〉-드라마가 취소됨. - P241

텔레비전 프로그래머들에게 아무리 근육질의 남성을 불러들일이유가 있었다 해도 대중들의 요구는 달랐다. 여론조사를 해 보면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경찰 드라마와 서부극에 가장 관심이 적다.15) 그런데도 NBC의 오락 부문 사장인 브랜든 타티코프Brandon Tartikoff는《뉴욕타임스》에서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남자들이 짐승으로 변하고있는 건 "시청자들"이 "셔츠 소매에 감수성을 뚝뚝 흘리고 다니는 앨런 알다Alan Alda 식의 주인공들"과 남자 "약골들"에게 신물났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16) 그러면서 그는 그 증거로 실제 사람이 아니라마초 영화들의 범람을 지목했다. 이는 어떤 문화적 수단의 제작자들이 반격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또 다른 문화적 수단의 제작물을 들먹이는 여러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 - P243

하지만 여성해방에 대한 텔레비전의 공세는 필연적으로 할리우드보다는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성들의 영향력은 극장에서보다는 텔레비전 앞에서 더 크다. 그러니까 여성들은 시청자의 다수를 점할 뿐만 아니라 광고주들이 가장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시청자들이다. 1987~1988년 시즌에 텔레비전 프로그래머들이 꼴사나운 남자들과 시든 여자들의 모습을 억지로 보려 주려 하자 큰 충격을 줄 정도로 많은 여성 시청자들이 텔레비전을 그냥 꺼버렸다. - P244

독립적인 여성들을 상대로 한 텔레비전의 반격이 오락가락하는것은 텔레비전 산업 자체가 여성 시청자들에게 대단히 양가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황금 시간대의 텔레비전 프로그래머들은 영화 제작자들보다는 여성들의 인정에 더 많이 매달리지만, 바로 이런 의존성 때문에 더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방송국 종사자남성들이 할리우드가 있는 서쪽으로 옮겨 온 것은 흔쾌히 여성을 주인을 받들어 모시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리고 종사자 대부분은 남성이다. 가령 텔레비전 작가의 90퍼센트 이상이 백인 남성이다). 이들은 시청자가 많이 보는 드라마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드라마가자율적인 여성들을 내세우면 이런 드라마를 없애려고 한다. <디자이닝 우먼>과 <케이트 앤 앨리 > 모두 엄청난 인기를 얻은 시리즈물이었음에도 이를 폐지하려는 방송국의 반복된 시도에 맞서야 했다. - P247

독립적인 여성을 상대로 한 1980년대 텔레비전의 반격은 시즌에 따라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이에 일부 드라마들은 주기적인 부침속에서도 간신히 살아남았다. 〈L.A. 로L.A. Law〉, 〈디자이닝 우먼〉,
〈골든 걸스The Golden Girls〉가 이런 예에 속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1980년대의 반격은 텔레비전에서 건강하고 독립적인 여성들을 축소시키고 그 자리에 향수로 범벅된 비정치적인 ‘가족’ 여성의 초상을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은 두 단계를 거쳐 텔레비전 오락물 속으로 침투했다. 먼저 1980년대 초에는 페미니즘 사안들을 지워 버렸다. 그러고 난 뒤 1980년대 중반에는 교외의 주부가 최상층에 있고직장 여성이 그 아래 단계에 있고 싱글 여성들이 맨 밑바닥에 있는‘전통적인’ 여성 위계를 재구축했다. - P249

텔레비전 네트워크는 실제로 페미니즘 주제에 초점을 맞춘 에피소드를 단속했다. 남녀평등헌법수정안을 다룬 에피소드에서 로젠즈위그는 페미니즘 지도자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에게 단역으로 출연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기준과 관행 부서의 임원들은 마치 악명 높은 연쇄 살인자에게 카메오를 맡기기라도 했다는 듯 질겁하면서 스타이넘의 출연을 금지시켰다. 그러고 난 뒤에도 일곱 곳의 가맹방송국들이 여성의 권리라는 주제가 여성 시청자들을 불쾌하게 만들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방영 시간 몇 시간 전에 이 에피소드 전체의 방영을 취소해 버렸다. - P253

텔레비전 네트워크의 임원들은 자신들이 이 프로그램의 내용에 간섭하는 것은 오직 캐그니와 레이시 같은 직장 여성들에게 위협을 느낄 여성 시청자들을 걱정해서라고 말했다. 로젠즈위그는 이들에게 말했다. "내 책상에는 전혀 위협을 느낀 것으로 보이지 않는 여성들에게서 온 팬레터 4,000장이 쌓여 있습니다. 조사를 어떤 식으로 한겁니까? 한 번도 해 본 적도 없으면서."(사실 베커의 집안에 있는 근거는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켰다. 35세의 주부인 베커의 아내는 이 드라마의 "왕팬"이었다고 그는 인정한다.) 캐그니와 레이시라는 강인한 두 여성에게 불편해한 건 여성 시청자들이 아니라 바로 CBS의 남성 프로그래머들이었다. 베커는 당시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여성들이 "지나치게 거칠고 목소리가 크며 따스함이 없다"고 불평했다. 또 다른 CBS 임원은 《티비가이드》에서 이 여성 주인공들이 "지나치게 여성해방에 경도되어 있고 〈캐그니 앤 레이시>에 나오는 이 여성들은 경찰 일을 하는 것보다 시스템에 맞서 싸우는 데 더 혈안인 것 같다. 우리가 보기에 이들은 동성애자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 P254

다른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은 애써 직장 여성에 대한 이런 얄팍한인정조차 하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의 일부 프로그램에는 병아리처럼 자식들을 줄줄이 낳아 돌보는 교외의 엄마들이 워낙 많이 나와서예전 드라마를 재방송해 주는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게 한다. <풀 하우스>에 출연한 한 여성은 "난 준 클리버가 되어 가는 중"이라며 한숨을 쉬었는데, 정확한 지적이었다. <케빈은 열두 살 The Wonder Years〉같은 어떤 프로그램들은 아예 과거를 배경으로 했다. 페미니즘이 태동하기 전인 1960년대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뜨거운 스토브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엄마를 보여 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 P257

아무리 계몽된 사명감을 가진 프로그램이라 해도 직장에 다니는엄마를 비난하고픈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텔레비전 제작자 게리 데이비드 골드버그Gary David Goldberg 는 가족 중심의 어린이집에 대한 시리즈물인 〈데이 바이 데이Day by Day〉를 공개하면서 이 프로그램은 황금 시간대에 어린이집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주는 보기 드문 볼거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서도 일하는 엄마들에 대한 경멸적인 어조는 여전했다. 프로그램에 나오는 일하는 엄마들은 노이로제 환자처럼 전전긍긍하는 데다 미숙해서 매일 아침 갈팡질팡하면서 어린이집을 찾아와서는 고상한 척하는 관리자들(이 태만한 엄마들의 자식들을 돌보기 위해 월스트리트에 있던 직장을 희생한 것에대해 5분에 한 번씩 서로 자랑스러워하는 부부로 구성된 팀)의 품 안에 아이들을 밀어 넣는다. - P259

출세 지향적인 싱글들은 여성 중에서 가장 낮은 계급에 속했다. 이들은 인간성과 월급을 맞바꿨고, 남자뿐만 아니라 아이까지 거부했기 때문이다. 아기의 모습만 살짝비쳐도 안 그래도 차가웠던 그녀의 체온은 북극 수준으로 얼어붙을 수 있었다. - P264

전일제로 둥지를 지키는 여성을 떠들썩하게 반기는 건 이 드라마의 여성 배우와 시청자들이 아니라 남성 제작자들이었다. 이들은여성운동과, 이 운동이 자신들에게 미친 영향 때문에 괴로움에 빠졌다. 〈서른 몇 살〉의 공동 제작자 마셜 헤르스코비츠는 한 남성지에서 "남자로 산다는 게 끔찍한 시대라고, 어쩌면 역사상 최악인 시대라고 생각한다"고 투덜거렸다. 그는 "남성들은 일종의 생물학적 지상 과제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했지만 이젠 더 이상 이런 필요를 표출할 "용납 가능한 경로"가 없다. "최근 몇 년간 남성성은 평가절하되었고 더 이상 별 의미가 없다." - P2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정희진의 글쓰기 4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희진 선생님의 책을 읽을 때마다 항상 감탄하지만, 머리말이 너무 좋다(물론, 본문도 좋다). 내가 쓴 것이 나다. 내가 본 것이 나고, 내가 읽은 것이 나고, 내가 말한 것이 나다. 영화가 아닌 영화를 보는 나를 보는 것, 책이 아닌 책을 읽는 나를 보는 것. 정신 차리고 나를 보고 읽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바이어던> 토머스 홉스, 영화 [작전명 발키리] 브라이언 싱어

<전쟁의 슬픔> 바오 닌, 다큐멘터리 [기억의 전쟁] 이길보라

3장 타자의 목소리, 나의 목소리

설국열차, 부산행, 스테이션 에이전트
이것이 서구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적 진보(progress)의 개념이다(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진보‘와는 다르다). 단수(單數)의 시간. 과거-현재-미래라는 직선적 시간관과 단수의 주체가 시간의 기준을 제시한다. 개별적 인간의 상황마다 ‘10분‘의 의미가 다를수 있는데, 백인 남성 비장애인의 시간을 중심으로 삼아 객관적 시간 개념이 설정된 것이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것처럼 행복한 시간과 지루한 시간은 그 길이가 다르다. 고문당하는 10분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10분이 어떻게 같겠는가. 시간은척도가 아니라 경험이다. 농촌의 시간과 도시의 시간은 다르다. 장애인의 시간과 비장애인의 시간은 다르다. 이런 차이가 무시되고 누군가의 시간이 기계적으로 표준으로 설정되고, 사람들은 속도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발전, 추격, 100미터 달리기, 문명과 야만, 최연소의 성취……. - P211

녹색당에서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구호에 대해 고등학생 당원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어른‘ 당원들은 그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고등학생들은 왜 자신들을 현재의 동반자가 아니라 어른의 관점에서 ‘미래‘로 정의하느냐며 항의했다. 그들이 말하는 올바른 구호는 "우리 모두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었다. 자신들을 타자화하지 말라는 얘기다. <설국열차>나 녹색당의 ‘어른‘(성인 남성)은타자를 정의하고 보호하는 주체의 역할을 자임한다. 그들은 재현의 주체이지, 재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10대들은 말한다. - P214

"우리는 당신의 미래가 아니야. 당신의 관점에서 우리를 정의하지마." - P215

내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감독 자신이, 예술가 자신이스스로 타자가 될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그들은 왜 항상 주체이고, 주체를 구원할 수 있는 대상조차 지정할 수 있는 조물주인가. 여성이고 아이들이라고 해서 ‘착하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새로운 주체는 기차 밖에 있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주체는 스스로 ‘꺼지면‘ 안 되는가 자리에서 내려오라. 인류와 지구를 해방하려 하지 말고 그냥 하방하라. 팬데믹 시대의 구원은 우리 모두 ‘섬싱(something)‘이 되고자 했던의지를 버리고, 자연의 일부인 ‘낫싱(nothing)‘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갈팡질팡하는 삶의 한가운데서, 글쓰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나의 의지가 부끄러울 뿐이다. - P221

미스터 션샤인, 청연
개인의 삶도 복잡한데, 국제정세가 얽혀 있는 나라를 되찾는 일은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탈식민주의 이론의 원인 프란츠 파농은 민족 해방 투쟁(독립운동)은 빼앗기기 이전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탈식민주의, 즉 포스트콜로니얼(post colonial)은 과거에 식민지배를 겪은 국가들이 형식상의 주권은 되찾았지만 여전히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문화적, 사회적으로 가해국에 대한 피해 의식, 동일시 욕망, 경쟁심, 원한 등에 시달리고있는 상태를 말한다.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나는 가장 ‘웃긴‘ 사례가 ‘코먼웰스 게임(Commonwealth Games)‘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예전에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이 무슨 정체성인가? 같은 주인을 모신 나라들의 운동 경기?
물론 아일랜드처럼 8백 년이나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끝까지 싸워 독립을 쟁취한 국가도 있다. 당연히 ‘코먼웰스‘ 회원국도 아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인도나 말레이시아를 비롯해 영국의 지배를 받은 국가들도 내부 구성원의 생각이 같지않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도 친미(親美), 반미(反美), 숭미(崇美), 용미(用美)·····… 다양한 입장을 지닌 이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 P230

기억의 전쟁
이 글 서두에 인용한 이야기는 나의 고통을 대변한다. 내가생각하는 페미니즘은 기존의 정치적 대립 구도가 누구의 경험을 기준으로 한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진상 규명이나 진실보다는 누가 협상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은지, 누구의 관심사가 명확히 표현되지 않는지, 누구의 이득이 표명되지 않는지, 누구의 진실이 발언되거나 인정되지 않는지, 우리가 놓치고있는 진실을 찾아내려 한다. - P244

탈식민주의 이론가 호미 바바의 말을 빌리면 기억(re/member)은 사지(四肢)가 재조합되는 환골탈태의 과정이다. 기억은 기억하는 자에게 몸의 변태를 요구할 만큼의 고통스러운일이다. 베트남에 대한 사과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다른 사회로 변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는가.
서두의 인용문처럼, 문이 열리고 내면의 모순이 드러나면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충돌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을 하기는커녕 나 자신에게조차 말이 되게 설명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이랬다저랬다 하고 뭉개버리고 만다. 상황에 개입된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 보호하고자 진심을 말하지 않는 한편, 누가 자기 진심을 읽으려고 하면 상대가 마음에 드는 가장 위쪽 상태만 드러내고 진짜 생각이 무엇인지 의식의 수풀 안에 감춘다. - P2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장 통증의 위치

그래비티
어떤 의사는 자기 환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으세요. 나도당신이 그토록 원하는 죽음을 바랍니다. 단, 내일 죽으세요. 내일 이후에는 또 그 내일…………." 견디고 버티라는 의미다. - P120

우리가 우울할 때 혹은 우울증을 앓는 환자(정말 죽을 만큼 아프다는 의미에서 ‘환자‘다)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은 모두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집에서, 침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일이죽을 만큼 힘들지만 이동과 운동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우울증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견해가 다른데, 움직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우주, 가장 먼 이동이다. ‘우울과 중력‘이라는주제에 대해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만 한 통찰은 당분간 나오기 힘들 것 같다. - P121

밀히언 달러 베이비
사랑은 상대(대상)와의 관계가 아니다.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나의‘ 사건이다. 흔히 말하는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행위, 자기 자신과의 관계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결혼, 이성애주의, 로맨스 문화, 헌신, 희생 따위를 포함하는 제도와 문화적 각본(cultural script, 이데올로기)이 있다. 인간은 사람이든 절대자든 물화된 대상이든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존재다. 인간의 조건은 사회적 삶과 생명체로서 유한성 두 가지인데, 생명체로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사는 의미를 찾아야 하고 사랑은 가장 절실한 방도다. 사랑이 없다면 삶도 없다. 사랑 자체가 소중해서가 아니라 사는의미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특정한 개인/파트너와의 애정을 추구하는 이들이나 사회적 권력, 돈, 명예를 성취하려는 노력 역시 모두 사랑받기 위한 몸부림이다. - P125

가부장제 사회에서 출산은 여성의 자유가 아니라 성역할로 간주된다. 한국 여성들은 출산이라는 성역할을 거부함으로써(출산 파업), 기후 위기와 식량 문제에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공사 영역에 걸친 여성의 이중 노동, ‘독박 육아‘, 강제적 모성을 강요해 왔던 가부장제 사회 자신의 부메랑이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 방법-전쟁과 같은 남성 문화ㅡ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인구를 조절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행위자가 되었다.
낮은 출생률에 대한 남성 사회의 공포는 16~18세기 유럽의절대 왕정에 대한 저항으로서 근대 국가를 염원하는 이들이, 국가의 개념을 정립할 때 나온 국가의 3대 요소(주권, 영토, 국민)가 있다는 신화의 산물이다. 세 가지가 일치하지 않는 국가도많고, 인구가 적다고 무조건 ‘후진국‘도 아니다. 국민을 ‘총알받이‘, 병사, 소비자, 생산적인 노동자로 동원하지 않고 인간으로 존중하는 공동체에서 출생률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인구는 근대에 이르러 급격히 증가한 것으로 자연적 현상이 아니다. - P169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본성이 아니라 사회적 ‘세뇌‘ 때문이다. 에고가 공포를 가져온다. 가볍고 조용한 죽음. 인간의 존엄, 죽음의 철학에 관한 최고의 영화다. 역대 칸에서 상을 받은 영화 중에서도 최고로 평가하는 이가 나뿐만은 아닐것이다. - P1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