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전부터 일기예보를
계속 들여다보았다. 일요일 오전에 비가 온다네. 오전 기온이 5도로 뚝 떨어진다네. 며칠이 지나니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오후에는
비가 오고 일요일 오전엔 비는 오지 않지만 태풍급 바람이 분다네. 풍량 8~10이라고? 첫 마라톤 대회를 태풍급 바람을 맞서서 달려야 하는
건가.
토요일은 5시 이후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2시에 시작하는 야구를 보러
갔지만(비 오면 집에 가야지 하고) 웬걸 1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경기는 3시 10분경에 지연 시작하였고, 비는
계속 내려서 우산을 쓰고 경기를 관람했고, 경기 중반 이후 바람이 불면서 기온이 내려가 너무 추워서
집에 가고 싶었지만 같이 간 둘째가 끝까지 보겠단다. 평소에는 중간에 잘도 가더니만. 추위에 떨다 도저히 안되서 8회에 실내로 내려가 있었다. 아, 나 내일 첫 마라톤을 위해 컨디션 관리해야 하는데. 망했네.

일요일엔 5시에 일어나서 늘 먹던 대로 식빵과 과일과 커피를 먹고 지하철을 타고 종각역 젊음의 거리로 향했다. 6시 20분쯤 지하철역에 도착하여 역사를 나가기 전에 화장실에 한번
들르고, 물품보관소에 짐을 맡겼다. 너무 추워서 입고 있던
패딩을 맡기고 싶지 않았지만 ㅠㅠ. 광화문 집결지로 가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고 너무 추웠다(블로그나 유투브를 보면 출발 1시간 반 전에 여유롭게 오라고 해서
일찍 왔더니 ㅠㅠ) 다행히 광화문으로 가는 길에 YMCA 빌딩이
있고, 대회 주최 측이라 건물을 개방해 두어서 YMCA 빌딩으로
들어갔다. 화장실에 한번 들르고 건물 안에 아직 짐을 맡기지 않은 참가자들이 많길래 우리도 건물 안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에너지젤을 하나 먹고 대기하고 있다가 또 화장실에 들르고 7시 10분쯤 광화문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단상에서 진행하는 스트레칭을
따라하거나 웜업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평소에도 스트레칭이나 웜업을 많이 하지 않으니 평소대로
하던 대로 하자 안하던 웜업 많이 하면 달리기 전에 힘 빠진다 하고 출발선까지 걸어가서 사진 좀 찍고 광화문 광장 지하에 있는 화장실에 또 갔다! 집 나와서 2시간 동안 4번을
다녀왔다 ㅎㅎ 아침에 커피를 많이 마신 탓인지, 긴장해서 인지 계속 소변이 마려운 거다. 화장실 줄이 겁나 길었지만 술술 빠져서 70시 50분경에 출발 대기줄에 설 수 있었다.

대기선에서 기다리는
동안 너무 추워서 빨리 출발했으면 하는 생각 밖에 없었다. A그룹,
B그룹이 출발하고 드디어 C그룹 출발. 출발하자
사람들이 빨리 뛰어가는데 초반 페이스에 말리지 않으려고 런저씨가 항상 강조하는 페이스 유지! 페이스
유지!를 되뇌며 최대한 천천히 뛰었다. 1키로가 지나고 보니
페이스가 7분이 넘었네. 너무 천천히 뛰었구나. 다시 페이스를 조금 올리고 6분 중반으로 일정하게 맞추어 뛰려고
했다. 다들 나를 앞질러 갔지만 나는 내 페이스를 유지하겠다 생각하며. 사실
페이스 유지나 다리 상태보다 호흡에 더 신경을 썼다. 장거리 연습할 때 가끔 호흡이 잘 되지 않거나
컨디션이 안 좋을 날은 오른쪽 갈비뼈 아래가 콕콕 쑤시는 상황이 발생해서 달리다가 멈추고 물을 마시고 1분
정도 크게 심호흡을 한 적도 있고 그렇게 몇 번 멈춰도 계속 아파서 15키로 정도에서 달리기를 중단한
적도 한번 있었기 때문에. 갈비뼈 통증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대한 호흡을 크게 천천히 하고 심박수가 최대 구간으로
높아지지 않도록 애썼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처음 뛰어보는 코스를 달리니 정신이 없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몸과
정신이 분리된 것 같은? 다리는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 심박
구간을 수시로 체크하고 1키로마다 페이스가 유지되는지 체크하면서 나랑 비슷한 페이스로 가는 앞 사람의
등만 보고 달렸다.
8키로가 되어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제치고 달리길래 아 사람들 정말 잘 달리는구나. 난 역시 초보구나 했는데 8키로를 조금 지나니 10키로와 하프의 갈림길이 있었다. 하프는 계속 직진, 10키로는 왼쪽 반환점을 돌아 얼마 남지 않은
피니쉬라인으로. 나를 앞서가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환점을 돌고 있었다.
아, 저 사람들은 10키로 A그룹 주자였구나. 그래서 8키로에도
저렇게 잘 달리는 거였구나.
그랬다. 그 떠들썩하던 구간이
지나고 하프 주자들만 남은 구간에 들어서니 갑자기 공기가 달라졌다. 느린 페이스, 차분한 분위기, 듬성듬성한 주자들.
아직 채 절반도 지나지 않은 지점. 살짝 지치기 시작한 상태. 다들 조용하게 혼자 또는 둘이서 달리고 있었다. 이 구간에서 느린
페이스에 말려서 페이스가 6분 후반으로 좀 떨어졌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때부터 초반에 페이스에 말리지 않으며 비축해둔 에너지를 쓰기 시작했다. 초반 페이스
수준을 유지하면서 사람들을 한 명씩 따라 집았다. 5키로마다 있는 급수대에서 물을 마셨고, 12키로쯤에서 에너지젤을 하나 먹었다. 청계천 반환점을 돌아가니
15키로쯤부터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날도 흐려졌다. 모자가 벗겨질 것 같아서 모자를 한 손으로 누르고 머리를 숙여서 바람을 머리로 밀면서 달렸다. 17키로가 지나면서 다리가 좀 묵직해지고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대로 갈까 생각도 했지만 이대로 가면 도착 전에 힘이 빠져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질 것 같아서 꿀스틱을 하나 먹고 비상용으로 챙겨간
물을 마셨다. 다시 남은 2~3키로를 바람에 맞서서 달렸다. 사람들을 제치고 달렸다. 20키로를 지나는 시점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날이 더 흐려지고 바람이 더 강해지고 빗방울이 떨어지고. 그렇지만
피니쉬가 멀지 않았다. 평소만큼 마지막 1키로에서 전력질주를
하진 못했지만 도착했다! 내가 피니쉬라인에 도착하자마자 우박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메달과 간식만 받고 비를 피할 곳이 없어서 완주의 여운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채 급하게 지하철역으로 가서
집으로 향했다. 집 근처 국수집에서 따끈한 수제비와 김치만두로 몸을 녹이고.
받자 마자 가방에 넣고 지하철 역에 들어가서 살펴본 메달.

YMCA
대회는
경사가 거의 없는 무난한 코스다. 그런데, 급수대에 물 외에
간식이 없다. 17키로쯤에서 바나나가 있다고 안내되어 있는데 나보다 먼저 간 사람들이 가 먹었는지 보지
못했다. 완주하고 주는 간식도 달랑 에너지바 하나와 캔사이다 하나, 물
한병이다.
1월초에 생애 첫 10키로를 달려보고, 마라톤 대회를 알아보았다. 달리기에 흥미가 생기고 있었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목표가 있어야 열심히 달리고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처음에는 당연히 10키로 대회에 나가려고 했고 아직 10키로를 한 번 밖에 달려보지 않았으니 2~3개월 더 달리고 겨울이 지나면 대회에 나가자 했는데. 4월 YMCA 대회를 신청하기로 하면서 3개월 더 달리면 하프도 달릴 수 있지 않을까하는 무모한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2시간 30분 컷오프는 들어오지 않을까 하고 덜컥 하프로 신청했다. 사실 신청하고 1월까지는 이게 잘하는 걸까 달릴 수 있을까 취소해야 하나 걱정이 앞섰지만, 매주 3~4일 이상 꾸준히 달리면서 자신감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달리기가 즐거웠다. 조금씩 길게 달리고 조금씩 빨리 달리는 기록을 보는 게 재밌었다. 덤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살도 빠졌다. 특히, 장거리 달리기를 하니 체중 감량이 된다. 달리기 너무 좋다!!
이렇게 생애 첫 마라톤. 하프 코스를 완주했다. 내 뒤에 500명 있다! ㅎ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