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일본의 전국시대를 완전히 종식시키고 약 300년간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온 막부시대를 연 사람의 일대기.  나이 세살에 벌써 볼모로 남의 나라에 끌려가서 수많은 음모와 역경, 실패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얻어진 철학을 다시 한번 볼 때가 된 것 같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는 그의 말을 떠올리며 오다 노부나가 혹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매우 다른 여정을 거쳐 권력의 정점에 오른 그의 노하우를 엿보고 배울 점을 찾아보면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검도를 시작하려는 2013년이다.  그간 발바닥 부상으로 약 6년을 쉬었지만, 그래도 지난 4년간 꾸준히 근력과 지구력을 단련해 왔기에, 당시의 나보다 훨씬 강한 힘과 심폐력을 자신하는 지금이다.  하지만, 역시 다시 죽도를 잡고 누군가를 마주하려면 상당 기간 고련이 필요할 것 같다.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는 시바 료타로의 버전은 아직 못 봤고,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만 봤는데, 상당히 많은 작가들이 다룬 인물이다.  대대로 내려오는 가전의 병법인 짓테술 (십자로 생긴 병기인데, 포박이나 체포를 전문으로 하는 관리들이 애용했다고 한다. 검을 trap하여 빼앗는 것이 기술의 큰 부분이라고 알고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이천일류를 창안해낸 역사적인 인물의 이야기는 검도뿐만 아니라 무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 정도는 접해 봤음직한 이야기이다.  교쿠신 가라테를 창시한 대산배달도 무사시를 본따 도장깨기에 나선 적이 있을 정도로 무인들에게는 큰 영향을 끼친 이야기/인물이라고 하겠다.  

 

그 외에 7월에 있을 타주 변호사 시험에 응시하려고 생각 중인데, 장기적으로 그 곳에서의 business나 이주를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직 입안단계의 계획일 뿐.  

 

영화 '바람의 검, 신선조 (원제: 미부키시덴)'의 원작인 아사다 지로 - 감히 일본 최고의 이야기꾼이라 하는 - 의 작품인데, 밝고 명랑한 활극이 아닌, 격변기를 살아가는 가난한 한 무사의 처절한 이야기와 가족사랑이 주된 테마이다.

 

지금까지 두 번은 읽은 것 같은데, 읽을 때마다의 감동이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또한 검도를 다시 시작하는데 있어 좋은 motivation이 되기를.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나 같은 일반인이 매일 '바람의 검심'같을 수는 없을 테니까.  이런 현실적인 이야기를 읽는 것도 좋겠다.  안 읽어본 들께는 강력하게 일독을 권한다.

 

새해부터 말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페이퍼와 리뷰를 24시간만에 이렇게 많이 올리기는 처음이라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과유불급이라 하였으니, 오늘은 이것으로 그만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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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3-01-02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도하시려는구나. 쉬는 동안 그리웠던 만큼 검도에 더 애정을 쏟으실 거 같애요. 검도는 운동도 되면서 마음 수양도 되는 거 같애서 참 멋진 종목이다. 싶어요. 타주 변호사 시험도 생각하시고..올해는 트란님께 변화가 있는 해로군요. 새해부터 멋진 계획들을 내놓으시네요. 신년의 계획들..뭔가 새롭고 신선합니다.

저도 올해는 미뤄왔던 그 무엇을 (이제는) 도전해야지..라고 결심 먹기 직전이에요. ^^

transient-guest 2013-01-03 00:51   좋아요 0 | URL
일단 한 해의 첫 날이니까요, 그리고 무엇인가 정체되어 있는 것 같은 지금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해요. 그저 열심히, 한 걸음씩 가다보면,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3-01-03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기카와 에이지,야마오카 소하치,시바 료타로...한 시대를 풍미한 대작가들이죠.이젠 모두 저세상 사람들...시바타 렌자부로도 갔고...아무래도 요즘은 이런 시대물은 아사다 지로 시대죠.

transient-guest 2013-01-04 01:54   좋아요 0 | URL
오래된 작가들인 것은 알았지만, 그렇군요. 하기야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아주 어릴 때 어른들이 읽고 이야기하던 기억이 납니다. 아사다 지로의 다른 작품들도 story telling이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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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국에 있지를 않아서, 알라딘의 어떤 혜택이나 기능은 잘 모르고 지나갑니다.  우연히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영화예매 할인쿠폰이라고 해서 봤는데요 아래와 같은 번호를 주네요.

 

ZEIJ-0F22-62CF

 

잘은 모르지만 한번 사용하는 것이려니 합니다.  가져가실 분 있으시면 가져다 쓰시고 어떤 것인지, 어떤 혜택인지 조금만 댓글로 남겨주세요 (가져가셨다는 확인과 함께).  그러면 다음에 또 이런 것을 받으면 지금처럼 누군가에게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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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3-01-02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이 되면 매달 저 쿠폰번호를 주는 거 같애요. 저 번호로는 미국에선 사용불가로군요. 아깝당.

transient-guest 2013-01-03 00:5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래도, 매달 한 분씩 드리면 다른 분이 쓰실 수 있으니까요.

Luz 2013-01-02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ㅋㅋ저 필요했는데 감사히 사용햇어요^_^ 한국에서 영화보실 때 사용할 수 있구요,
맥스무비 홈페이지가서 예매-할인권등록에 번호입력하시면 4000원 할인된 가격으로 영화 예매하실 수 있어요~(예를들어 7000원짜리영화면 4000원이 차감되서 3000원에 보시는거에요~) 상영관,영화 지정가능하구요 좌석도 지정가능해요!
감사하게 잘쓰겠습니다.!!!

transient-guest 2013-01-03 00:52   좋아요 0 | URL
네! 즐겁게 사용하시면 저도 좋습니다. 이제 매달 한 개씩 이렇게 올릴 수 있겠네요.

gyeuddl 2013-01-13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왓 신기해요~ 염치 없는데ㅋㅋㅋ 담달껀 제가 찜~하고파요~ㅎ;

transient-guest 2013-01-13 01:03   좋아요 0 | URL
담달에 올라오면 포스팅 예정인데요, 아마도 또 선착순이 될 듯..^^ 자주 들려서 글 나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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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에 구매해 놓고, 이제서야, 그것도 우연한 기회에 책장에서 꺼내어 읽고 있는 책이다.  찾아보니 이렇게 한글로도 번역이 되어있다.

 

이 책은 예수회 수도사인 제임스 마틴이 쓴, 자기의 수도생활과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용기가 되었던 성인/성녀들의 일화를, 그때 그때의 본인의 삶, 경험의 에피소드와 함께 엮어내고 있다.  나도 이제 경우 성녀 소화 데레사의 챕터를 읽고 있는 중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소개를 하고 싶어 이렇게 간략한 페이퍼를 쓰고 있다.  간결하고 쉬운 필체와 단어, 눈에 쏙쏙 들어오는 문장이 이 책의 장점이라 하겠는데, 역시 좋아보이는 책은 주머니가 허락한다면 일단은 사놓고 볼 일이다.  신중하게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여 읽어보고 정말 좋은 내용의 책만 골라 산다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책은 빌려보는 것(!)이라고 배웠다는 사람도 있지만, 내 입장에보면 책은 역시 사서 보는 것이 맞다. 

 

내가 만약, 신중하게 골라서 보려고 도서관 대출로 이 책을 미루어 두었더라면, 단언하건데 난 이 책과 인연을 맺지 못하였을 것이다.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것의 한계도 있거니와 - 노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좋아보이는 책의 이름을 적고, 이를 다시 도서관에 가서 찾는 것은 시간도 그렇고, 너무 번거롭다 - 책이라는 것도 한번 눈에서 멀어지면, 다시 찾는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생각된다.  

 

개신교에서는 역시 성경의 어느 구절을 인용하여 죽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없는데, 왜 죽은이들에게 기도하냐고 말하는데, 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의 입장과 배움, 그리고 믿음이 있을테니 그렇게 살면 되겠다. 아직 이론적으로 이를 반박할 성서구절이나 가르침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그 이상 말하기는 조금 어렵다, 적어도 지금은.  다만, 좋은 사람들, 우리 삶에, 또는 신앙에 귀감이 되는 사람들을 기념하고 기리며, 그들의 업적을 배워 도움을 받고, 나아가 중재를 구하는 것 (신앙적으로)이 왜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다.  내 마음이 그들을 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데, 무엇이 문제일까?  예언자 엘리사가 치료한 이교도 문둥병자 장군의 에피소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anyway...

 

막힌 글빨이 터졌는지, 아니면 마구잡이로 쓰니까, 일종의 brain storming이 되는 것인지, 신년 벽두부터 페이퍼와 리뷰가 마구 쏟아졌다.  뭐 2013년. 이런 시작도 나쁘지 않다.  이렇게 책읽기도, 글도, 일도 바쁘고 보람차게 돌아가는 한 해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2013년을 위대한 성인전과 함께 하는 것 역시 우연치고는 참 마음에 드는 우연이다.  다시 한번.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곳은 이제 1/1/2013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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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주교인이다. 굳이 크게 분류하자면 Christian인셈인데, 일부 - 한국에서는 주류 - 복음주의/근본주의 교파/교회에서 보면 그냥 천주교인이고, 무엇인가 잘못 믿고 있는 사람인 셈이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잘 듣는 말이, '천주교인 치고' 또는 '천주교인이지만' 성경을 참 알고 있다는 말, 내지는, 자신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말빨과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물론, 결론은 언제나 같다, '역시 변호사답게 말을 잘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내가 자기들 이상 성경을 읽고, 아니, 오히려 더욱 말씀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고민을 하고,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다른 책들과 성현들의 말씀, 그리고 자기성찰 - 이라고 하면 좀 무리가 있지만 넘어가자 - 의 결과로 지금의 신앙관을 가진 것은 인정하기 싫고, 나아가서, 내 말 때문에 자기들의 신앙관 - 주입된, 세뇌의 결과, 자기 최면의 극치, 최음제 같은 - 이 흔들리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ergo, 나는 '변호사답게 말을 잘'할 뿐인게다. 

 

그런데, 나는 일반적인 litigator가 아닌 서류/서식 및 상담을 주로하게 되는 분야의 전문가이기에, 위의 말은 순 억지에 가깝지만, 어쩌랴, 그렇게 해서라도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을. 

 

많은, 배울만큼 배우고, 독실한 신앙을 가진, 그러나 자기만의 것이 아닌, 주입된 신앙관을 가졌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분들을 보면서, 많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 높은 학력과 배움에도 불구하고 창조'과학'을 믿으며 지구의 나이는 약 6,000년에 불과하다고 굳게 믿고, 다른 헌금들과 함께, 십일조, 아니 십이조를 꼬박 바치는 것은 성경적인 신자의 의무라고 믿는 그들을 보면서, 답답함을 넘어, 그를 그렇게 만든, 그릇된 지도자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인생의 모든 이유를 신과 성경에서 찾고 풀어내려는 시도는 자칫하면 독선과 독단, 자기최면, 자학, 가학, 그리고 자기 정당화로 이어짐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그릇된 신앙관을 주입시킨 그자들은 공공의 적과도 같다.  아마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형교회 - 라고 쓰고 사업체라고 읽는다 - 들의 대표목사들이 그 분들 되시겠다.  비판하는 소장파 목사들을 '근본'도 없는 자들로 치부하겠지만, 솔직히 말해보자.  그 대단한 큰목사님들의 학위는 어디서 받으셨는지 말이다.  그런 무식하고 몰지각한 논리로 성경을 아전인수하니 Richard Dawkins같은 사람의 좋은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우리 종교와 종교인들은. 

 

성경을 보면 없는 것을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신과 사람의 영역을 섞는 것 역시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짜집기 하여 자신에게 유불리한 부분을 떼어 인용하는 것 또한 신의 뜻인지, 나는 모르겠다.  나의 신앙은 굳이 표현하면 자기류 할 수 있는데, 이는 나의 개인적인 고민과 사상적인 융화, 즉 신앙과 세상의 화해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 더 넓어진 경험에 기대어, 그 만큼 너그러워진 나의 잣대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과도 같이 신앙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신과의 합일, 그리고 이를 통한 자유로움, 즉 구속됨이 없는 형태라고 보는데, '말씀'only의 신앙관은 여기서 한참 멀어 보인다.  '말씀'에 하느님이 계신 것은 분명하지만, '말씀'만이 하느님이라고 믿는다면, 우리에게는 '마음'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는 예수가 오기 전 율법학자/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고, 예수가 온 이후 '회칠한 무덤의 벽'같은, '독사의 족속'들로 불린 그들의 system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런 아전인수와 우민화 신앙교육은 목사들을 배를 불리고, 그들의 가족을 살찌우는데 적격일지는 모르겠으나, 하느님의 나라로 가는 길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다.  신의 자비와 사랑을 선포하는 대신,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죄의식을 주입하는 자들이 흔히 쓰는 방법은 매일매일을 무슨 전쟁주간처럼 포장하고 관리하여, 이런 '싸움'을 조장하는 것인데, 이로써, 세상은 완벽한 선악, 흑백의 이분법으로 갈리고, 나와 같은 편이 아니면 모두 사탄이 되고, 죄가 되며, 유혹의 세력이 되는 편리한 곳이 되어버린다. 

 

일반 신자들은 열심히 이를 믿으며 꼬박꼬박 십일조에 십 수가지나 되는 헌금에 허리가 휘는데, 정작 지도자들 자신은 everything and anything BUT GOD에 정열을 쏟으며 마치 똥이 있는 곳에 모이는 금파리, 음식물에 모여드는 쉬파리 같이 세속의 권력과 돈의 맛에 취해 사는 것이다.  truly, 그들은 '독사의 족속' 아니, 비엘지법의 충실한 제자들인 셈 (비엘지법 또는 페르제바브라고 하는 악마왕은 파리로 상징된다. 절묘하지 않은가?)이다. 

 

소경이 소경을 쫓아가면 어떻게 될까? 예수가 말했듯이, 함께 구렁텅이로 빠지는 일만 남은 것이다.  또한 옛결에 이르기를 그릇되이 사람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의 죄는 매우 크지만, 그들을 따라가는 사람들 또한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중요한 것은 영의 분별이고, 자신의 정신줄을 놓지 않는 것이다.  꼿꼿한 자세로 모든 것을 묻고, 탐구하고, 성찰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할 것이다.  또한 누가 말해주어 믿는 것이 아니라, 정말이지 선종에서 이른 것처럼, 스승이 나오면 스승을, 조사가 나오면 조사를, 나중에는 부처라도 베어버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 궁극의 길이라고 믿는다.  나 역시 지금에서 수십 수백번도 더 의심하고 찾고, 구하고, 다시 의심하고 찾을 것이다.  도의 완성은 가는 길, 그 자체에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겸손하고 또 겸손하며, 다른 이들의 종교와 신념 - 광기와 배타적인 신앙 말고 - 을 존중하여야 한다. 

 

예수도 그랬다.  대접받고 싶으면 남을 대접하라고.  대형사찰이 무너지기를 기도하는 자들이여! 그 사찰이 무너지기전에, 그대들의 성전이 무너질 것이다.  하느님의 원리란 그런 것임을 구약/신약 통털어 여러 번 이야기 하는 것을 외면하지 말았으면 한다.

 

긴 이야기를 했는데. 적과의 싸움을 위해, 그들의 문제점을 파헤친 책들, 그리고 그들을 옹호하는 책들을 골고루 읽어볼 예정임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언제고 필요하다고 느끼는, 또는 그런 사람들 - 답이 없고, 치료가 불가능할지언정 - 을 만나면, 최소한 씨앗 한알을 그 마음에 뿌려줄 것이다.  그 씨앗이 열매를 맺을지 아닐지는 개개인에 달려 있지만, 최소한의 의문을 자아내어, 그들이 구도의 길에 들어서는데 아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다음번의 구매때 살 책을 그래서 미리 골라놓았다.

 

 

 

 

 

 

 

 

 

 

 

 

 

 

 

 

이들이 시작이다.  그리고 물론 반대의 관점에서 나온 책들도 보게 될 것이다 - 예전의 장군처럼 여자를 밝히고 앞머리가 빛나는 그 분의 책은 읽을 가치가 없다만 - 그래서 깊이 이해하고 따져볼 것이다.  그나저나 창조'과학'을 설파하는 이들 중에 현직 교수들이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충격스러운 일이다.  정신병력도 아닌, 현재 정신병을 가진 사람들이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지 참으로 의문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주류의 - 교파를 막론하고 - 성서학자들이 수많은 증거를 제시하며 이를 오류로 보고 있는 현실에서 말이다.  이렇게 신학의 영역에서 바라볼 것을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억지가 바로 내가 말하는 독단/독선과 세뇌, 그리고 자기최면과 정당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는데, 이런 것들은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니까, 역시 자기 자신의 정신줄을 꼭 붙들고 앉아, 영의 분별을 갖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특정종교를 비하할 의도는 전혀 없으나, 이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특정교회나 지도자를 내세우는 세상에 속한 - 하느님이 아닌 - 단체들과 지도자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다만, 비판에서 그치지 않고, 생산적이고 발전적일 수 있도록 꾸준히 학습할 것이다.  이는 소위 대형교회로 대표되는 개신교의 문제만이 아님을 거듭 밝힌다.  종교계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끝으로 한 마디 덧붙이면, 우리는 우리가 아는만큼이 아닌, 모르는 만큼, 딱 그 만큼만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쓴 글 역시 내가 잘 모르는 만큼만 이야기 한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저 읽는 분들이 참고하시고,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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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7key 2023-05-14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직 증거만을 쫓는 앤터니 플루가 생각이 나는군요.. 창조과학과 지적설계 이론을 접하고 이들이 비주류로 매도를 당한다는 결론이 들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주류들이 좋아라 하는 학위적 측면은 더 우수한 지성인이라 판명됩니다 여러 연구들을 교차검증 하시면 정신병자 보다는 창조주께서 주신 지적 기능을 올바로이 사용하는 지극히 치밀하고 성실해 보이기 까지 한 분들로 사료됩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시작은 인간의 마음과 감정이 아니죠.. 성경입니다
부분적 받아드림과 인간 전통의 합체는 이교와 다를바가 없죠.. 자리세파의 커다란 실책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성경의 설명 그대로이죠

성경의 문자를 다 알레고리로 적용하면 각각의 인간 종교가 탄생할겁니다

두 신을 섬기지 말라는 메세지는 성경 네러티브 전체적 강조 내용이죠. 성경의 가르침은 신앙입니다 종교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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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하녀 마리사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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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아픔과, 유쾌함, 그리고 쓸쓸함과 씁쓸함이 세대반영과 함께 묻어나는 여러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역시, 천명관의 책은 재미있다.  그래.  나에게는 고전문학에 속하는, 그러니까 세월의 인정과 인증을 받은 작품들이 아니라면 일단 책은 재미있어야 한다, 즉 easy reading이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배우기위해 읽는 책일 경우는 물론 제외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심지어는 고전문학조차도, 재미있게, 쉽게 읽혀야 책 읽는 맛이 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벼운 에세이집만 고집하는 사람은 아니다 - 그런 사람이 아님은 내 서재를 들어오는 분들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라고 생각한다 (하루키는 제외하기로 하자. 전작을 하려면 가리지 않고 모두 읽어야 하니까 말이다).  

 

이번의 책으로써, 천명관 작가의 작품 세 편을 보았다.  내공이 부족한 작가라면, 이 정도에서 슬슬 진부함과 지겨움이 살짝 느껴질 수도 있다. 특히 나처럼 내리 몇 작품을 읽어버리면 더욱 더 그럴 확률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천명관 작가의 책은 비슷한 패턴과 형식을 보여주면서도, 하나도 진부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읽는 내내, 너무도 맛있어서 질리지도 않고 먹게 되는 그 무엇을 닮았다 - 떡볶이나 (떡볶음라는 표현, 아주 싫어한다. 자장면이라는 표현만큼이나 - 짬뽕은 그럼 잠봉이고, 쫄면은 졸면인가?  내친김에 노태우때부터 익히 보아온 역대 수장들의 legacy 늘리기의 일환인 한글 맞춤법 개정은 정말 가관이다.  가카는 돈벌기에 워낙 바쁜지라 그걸 할 여유가 있었는지, 개정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했다면 모국어인 일어개정을 하셨을 듯.  이는 바꾸네 역시 마찬가지가 될게다) 라면, 또는 치킨과도 같은.  

 

특히 이십대 - 로 추정된다, 이와 십을 나타내는 한문은 확실히 알겠는데, 그 다음은 좀 모르겠다 -에서 나오는 그 안쓰러운 청춘과 사랑은 시대에 따라 형태와 내용이 다를 뿐, 많은 젊은이들이 경험하는 사랑의 시작, 그리고 이별인것이다.  그것이 82년으로 옮겨져 있을 뿐, 험한 시대인 것은 머리 벗어진 그 인간의 시절이나, 그 인간이 모시던 - 기르던 충복에게 총을 맞고 뒈져버린 그 - 이의 '영애'께서 빛나는 OECD 최고 - 의 자살률과 청소년 자살률을 보여주는 - 국가의 수장이 되어버린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작품 '이십대'의 이야기는 심지어 82년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지금의 나에게도 문득 지난 20대를, 아니 지금마저도, 돌아보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다음에 책을 구매할 때가 되면 '고령화 가족' 또한 구해서 보고 싶어진다.  살짝 기다리는 것이 힘들만큼, 이 영화같은 - 천명관 작가의 background때문일까 - 작품들을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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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하 2013-01-01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유쾌한 하녀 마리사>, 이것도 읽어봐야 하는 작품이죠.
천명관의 작품은 장편(그것도 긴 축에 속하는)위주인데 요건 중단편이라 특히 눈길이 가고, 트란님께서 시대와 세대의 아픔이 반영된 책이라 하시니 더 궁금해요. 젊은 작가에 속하는 그가 쓰는 시대라면 저게도 익숙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요.

떡볶음은 저도 싫어요.ㅠ.ㅠ
이미 친숙하고 딱히 어감이 나쁜 것도 아닌데 왜 먹히지도 않을 만행을..!

transient-guest 2013-01-01 16:19   좋아요 0 | URL
이런 저런 시대와 세태를 잘 반영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영화처럼 엮어내고 공감대를 이끌어 내는 것이 제가 지금까지 본 천명관 작품의 특징이라고 생각됩니다. 일견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들, 인물들을 가지고 특이한 이야기를 빚어내는 것 같아요.

2013-01-01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1 1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댈러웨이 2013-01-01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천명관 작가의 저런 작품도 있었네요! 그런데 '떡볶음'으로 표준어가 바뀌었나요?

이 페이퍼의 하일라이트는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벼운 에세이집만 고집하는 사람은 아니다.'라는 트란님의 강변요. ㅎㅎㅎ

transient-guest 2013-01-01 23:29   좋아요 0 | URL
맞춤법이 자주 바뀌죠. 바로쓰기라고들 하는데, 좀 억지스럽습니다. 저는 진짜 에세이는 별로 안 읽는 편입니다만, 하루키는 워낙 다작이라서 어쩔 수가 없네요. 주어까지 넣었는데요, 저는 이라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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