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기중심의 입시교육과 시험, 그리고 다시 이에 특화되어 변질되는 교과교육체제까지 전방위적으로 비판하는 다카시의 글에 일본만의 문제같지 않다는 생각은 나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한국의 제도는 좋든 싫든 식민지시대에 교육을 받은 친일 엘리트 계층에 의해 일본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 베낀 것임을 볼 때, 일본의 정치-사회-교육-경제의 문제는 필경 십 년 정도면 한국에서도 발생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더욱 타산지석 이상의 심경으로 이 책을 읽게 하였다.
높은 수준의 제너럴리스트는 내가 언제나 그 필요성과 중요성을 주장하고 나 스스로도 그렇게 되고자 원해왔던 바,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로 이를 확인하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스페셜리스트의 시대라는 말에 현혹되어 한 가지만 할 줄 아는 전문가 바보집단을 계속 양성해온 결과 이제는 소위 되는 분야에만 인재와 자본이 편중되는 현상이 시대의 norm이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 시절 다치바나 다카시의 일침이 한국에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인문사회교육을 심화한다는 취지하에 도입된 주관식 입시는 다시 분석되어 그야말로 시험을 위한 독서를 부추기는 근원이 되고 있으니 이건 도대체 또 무엇인지 궁금하다.
더욱 큰 이슈는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하고 행동하는 힘을 젊은 세대의 머리에서 빼버린 것인데, 일견 놀이문화 또는 문화행사화한 촛불집회도 그런 면에서는 아쉽기가 그지 없다. 거부감을 줄이고 참여를 늘린 반면에, 실제로 촛불집회를 통해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하면서, 이를 타개할 힘의 원동력이 20대의 의식화 부재 - 라고까지 하면 무리가 있겠지만 - 는 정말 아쉽다.
모두 열심히 공부해서 전문직 아니면 대기업 사원을 지향하는 사회, 아니 국민의 상당수가 연예인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어떤 희망을 볼 수 있을런지 의문이다. 교육이 지향하는 바도, 그 수준도 너무도 떨어지고, 이제는 대학조차 기업입시를 위한 학원의 장이 되어버린 지금, 한국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읽는 내내 내가 한 생각을 정리하면 대략 이렇다고 기억한다.
고이즈미 수상 시절의 일본의 정치와 미래를 평가한 다치바나 다카시의 글을 모아놓은 책. 아베체제와 재무장을 향한 일본의 우경화를 보면서, 새삼 다치바나 다카시의 혜안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헌법은 법제의 근본 그 자체이지만, 이에 대한 해석을 이용하여 법을 교묘히 변질시키는 당시 일본 정계 우익의 책동은 우리의 현실에 그 다름아니다.
일본의 군국지향과 우경화, 야스쿠니 문제, 전후 일본의 시대적 대처에 대한 전반적인 날선 비판은 역시 현 한국의 정치 사회를 바라보는데 있어 하나의 perspective를 마련해 준다.
끝으로 수 많은 명언과 정세분석들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정부의 성급하고도 무계획한 민영화라고 생각하는데, 그의 표현에 따르면 가장 큰 사업체인 '정부'가 관리하는 사업체는 말 그대로 소중하게 관리되어야 하고, 이를 토막쳐서 팔아버리는 것은 '주변에서...입맛을 다시며 기다리고 있는 국내외의 금융자본에게 던져'버리는 것이다. 가카시절에 가장 심하게 일어났지만, 한국경제의 총체적인 이슈들과 그 원인은 바로 '좋은 것만 취해 민간에게 팔아넘기'는 관행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일본의 헌법개정을 통한 재무장이 미국의 입김과 지지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당시 다치바나 다카시의 분석과 의심은 최근 아베정권의 재무장 계획발표와 이를 지지하는 미국의 발언으로 확인된 상태이다. 늘어나는 군사비용의 상당부분을 일본이 떠맡게 하는 이 계획에 따라 동아시아에는 미국의 대중국 계획에 의한 전운이 감돌게 될 것이고, 일본과 한국은 여기서 큰 부분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상한 동맹형태로 미국의 중국견제에 이용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이 이와 같은 이유로 멸망하는 국가라면, 한국의 운명 또한 현재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이미 민주주의의 근본인 선거와 자유민주주의 정제가 사실상 사라진 나라의 운명은 어둡다. 이 판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것은 깨어있는 민중의 행동밖에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도 박근혜씨는 퇴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스페인, 프랑스, 유럽, 이스라엘과 뉴욕을 떠돌았던 젊은 다치바나 다카시의 이야기. 평범한 나로써는 부럽기 그지없는 젊은 시절의 무규칙/무작정 여행. 그리고 냉전시절이 주던 일종의 제한된 안전, 그 치하에서의 여행까지 그리 politically correct하지는 않겠지만, 야릇한 시대에 대한 향수까지 주는 여행기록물이다.
당사자는 물론 여행 당시에는 여행에만 충실했고, 이런 저런 감성적인 기록은 추억의 형태로 나중에 기억속에서 재구성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세계를 정말로 인식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육체의 여행'이 필요하고,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커다란 기로마다 여행을 떠났던' 그의 젊은 시절은 지금의 지의 거장이라는 찬사가 그리 아깝지 않은 다치바나 다카시라는 한 인물을 규정하는데 있어 크나큰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여행이란 것을 많이 해보지 못한 나라는 사람, 주로 사유와 상상속에 인생경험의 상당부분이 근거하는 나는 세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생각으로 시작하여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너무도 많은 아쉬운 인생을 사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여행을 계획할 때, 한번 정도 생각해 볼만한 말: 여행의 패턴화는 여행의 자살이다. 여행의 본질은 발견에 있다. 일상성이라는 패턴을 벗어났을 때 내가 무엇을 발견하는지, 뭔가 전혀 새로운 것을 접했을 때 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데 있다.
몰입을 유도하고 이를 경영과 사업에 도입하라는 취지의 이 책은 정말이지 스티븐 코비, 톰 피터스, 그리고 피터 드러커 만큼이나 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인용되는 것 같다. 그 만큼, 이제는 조금 시들하기도 하고, 이 관점에서 벗어난 눈으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하게 된다.
진정으로 산만하거나 조금 더 나은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데 있어, 물론 이런 proven classic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 개개인에 있어 다양한 장단점을 하나로 분석하여 효과적인 단 하나의 개조론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 적용만큼이나 무리 투성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으로는 다양한 이론을 참고하여 자기자신의 장단점을 확인하고 자기한테 잘 맞는 방법을 찾는 것이 몰입의 비밀이 아닌가 싶다. 목표와 목적은 모두가 지향하는 한 가지일 수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이것이 정답이다 라고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요컨데, 평탄하게 근무하면서 정해진 월급 안에서의 삶과 그런 삶이 주는 만족이 일에서 바라는 최고의 목표가 될 수도 있는데, 그게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모든 사람이 리더가 될 수도 없겠지만, 되어서도 않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몰입하고 이를 관리하는 것 또한 그럴 수가 없는 것 같다.
다시 읽어본 결과, 여전히 난해하다. '쥐'와 주인공은 각자의 길에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J's Bar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있다. 물론 '쥐'는 J's Bar을 떠남에 있어 주인공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지체하겠지만, 그 역시 무엇인가 다른 시간과 삶으로 떠나려고 한다.
어느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주인공을 찾아와 함께 머물게 되는 쌍둥이 자매는 핀볼머신의 양쪽을 닮았다. 공이 새는 것을 막아주고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힘을 가하면 공을 다시 포인트로 튕겨주는 그 양쪽의 귀 말이다. 그들이 주인공의 삶에 들어오는 시점에서 주인공은 그가 옛날에 수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여섯 자리 숫자의 점수를 올린 단 하나의 절대머쉰을 향한 추억을 떠올리는데, 단 한번, 마주한 과거와의 조우를 끝으로 이 쌍둥이는 핀볼머쉰처럼 주인공의 시공간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래서 무엇이 어쨌다는 거야 라고 생각한다면 하루키의 소설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잘 알겠는데, 정리하기조차 싫어지는 것은 내 게으름 이상 심한 작가의 무질서한 문장들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한 문장이, 그것도 말장난 같은 걸로 반 페이지를 넘어간다면 아무리 liberal한 approach를 취한다고 해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야구 창단과 함께 찾아온 말뿐인 '프로의식'과 이를 향한 고취, 그리고 어느새 이 말에 사로잡힌 대한민국. 이에 반해 순수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추억되는 만년꼴찌 삼미 슈퍼스타즈의 순결한 야구.
그러니까 우리는 프로가 될 필요도, 모두 성공할 필요도 없고, 행함 그 자체, 그러니까 인생 그 자체, 우리 삶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취지의 말 같은데, 영 머리가 아픈 작가의 문장력은 내 독서의 발목을 잡는다. 박완규를 빼닮은 작가의 사진과 학력을 보면서 주인공 - '나'로 동일시되는 - 의 학력은 왜 'S'대로 설정한 것일까? 이 부분은 나의 오해일 수도 있지만, 서울사범학교를 나온 이문열씨가 자전적 주인공 캐릭터는 항상 '서울대학교' 입학으로, 즉 '한국 최고의 대학'의 입학을 통해 자아실현을 꿈꾸는 것으로 설정하는 유치함과 닮았다. 자유로운 영혼이라면 차라리 좀더 다른 설정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이유다.
그냥 심심파적삼아 집에서 한가할 때 다시 읽은 책이다. 예전에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줄거리가 생각나지 않는 현상이 부쩍 빈번해진 지금에는 이렇게 틈틈히 재독을 해주어야 한다. 사실 어릴 때의 기억력은 물론 지금보다 훨씬 좋았겠지만, 그 이상 재독, 삼독, 아닌 열독까지도 불사하던 당시 독서방식과 지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던 보유서적의 숫자와 내용을 기억하는 것에는 큰 상관관계가 있다.
이 책은 특이하게 책이 아니라, 책이 보관되고 전시되었던 방식의 편천사를 고증을 통해 다루고 있다.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현재의 책꽂이 사용방식과 모양은 사실 그리 오래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새삼 새롭게 느껴진다. 책의 모양과 출판성의 변화에 따라 책꽂이도 변해온 것을 볼 수 있는데, 대단한 지식은 아니지만 소소한 책에 대한 잡식을 늘릴 수 있는 흥미로운 독서였다고 결론낸다.
이번 '황금가지'에서 나온 크리스티 전집의 구성이 원 구성인지, 아니면 나름대로 재구성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굉장히 마음에 든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렇게 2-3권의 진지한 이야기를 읽으면 나오는 단편모음형식의 다음 권은 자칫하면 마라톤 같이 느껴질 수도 있는 전집독파의 페이스를 적절하게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중거리 달리기를 하고 살짝 지칠 무렵에는 경보로 가볍게 단거리를 주파하면서 체력을 끌어올리고 다음 구간에 대한 흥미를 끌어내는 이 방식은 참으로 탁월하다.
애거서 크리스티 하면 으례 에르큘 포와로를 떠올리겠지만, 70여권이 넘는 단행본으로 나타나는 방대함에 걸맞게 작가는 많은 주요 캐릭터를 창조해냈는데, 이를 하나씩 보는 재미는 참 쏠솔하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다. 내가 가진 판본은 Easton Press에서 나온 가죽제본 장정본인데, Logos에서 35불에 구입했다. 어쩌면 내 유일한 지적 허영의 증거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Hard Cover와 가죽제본 장정본의 선호를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하겠다. 이 책과 다른 경험을 바탕으로 샤이러는 제 3 제국의 흥망이라는 걸작을 창조해냈으니, 그 대작의 근간이 되는 raw story를 조금씩 읽는 재미는 각별하다.
일년간의 안식년을 스페인에서 보낸 샤이러 부부는 돈문제로 부득이하게 다시 일자리를 찾게 되는데, 그게 하필 1934-41년 사이, 해럴드의 베를린 주재원의 자리가 된다. 이 역사의 한복판에서 그가 쓴 생생한 일기는 평범하고 소박한 문체로, 긴박했던 당시의 유럽정세와 샤이러 개인의 정세판단이 녹아있는 그 자체로써도 매우 중요한 일차사료라고 할 수 있다. 다 읽고 나면 주요 포인트를 정리해 볼 생각이다.
이 외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다음의 책들을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