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난 술이 센 편이다.  특별히 비위에 맞지 않거나 역해서 못 먹는 술이 아니라면 큰 부담이 없이 즐길 수 있다.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고, 특히 남자들은 술에 관련한 무용담이 한 두가지는 있게 마련이다.  대학교를 합격해 놓은 시점에서는 고등학교 반 년을 남겨두고 참 신나게도 놀러 다녔더랬다.  운전도 하고, 공부는 현상유지만 해도 학교가는데 지장이 없고, 게다가 학점은 많이 벌어놔서 2학기부터는 오전 수업만 들어도 졸업에는 문제가 없었던 터라, 그 전학기부터 근처의 칼리지에서 대학과목을 이수하면서 알게 된 한국형들이랑도 많이 어울려 다녔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도 참 귀찮았을 것이다.  그때 알던 형의 자취방에서 밤을 새워 맥주를 마시고 집에 가서 씻고 미사를 드리러 갔던 기억이 나는데, 정말이지 마신 술이 다 어디로 갔는지 술기운도 못 느끼고 멀쩡했던게 생각이 난다.  


같은 해 여름에 한국에서 몇 달 지낼 때 우연하게도 국민학교 동창들과 연락이 닿아서 한창 새내기 짓을 하고 다녔다.  그때나 지금이나 먹자골목으로 유명한 인하대학교 후문.  내가 중학생때만 해도 후문에서 먹자골목으로 들어가는 좁은 통로의 양 옆에는 오락실이 꽉 차있었는데, 당시 유행한 영화제목을 따너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라는, 지금 생각하면 촌스럽기 그지없는 이름으로 불렸던 그 길을 지나서 먹자골목으로 들어서면 또다른 세상이 펼쳐졌었다.  대학생이라는 새로운 '신분'에 부여된 해방감을 만끽한답시고 열심히 술만 마셨다.  연애나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때 한 친구와 자주 만나서 마셨는데, 5시 정도에 호프집 영업을 시작할 때 개시를 하고, 배가 불러지면 노래방을 달리고, 다시 나와서 또 마시고, 이러다 보니 지금까지도 3차를 간 술집이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성대법대를 다니던 그 친구는 사시 일차를 보고 떨어지면 곱게 군대를 갔다와서 은행취업을 준비할 것이라고 했는데, 취업 즈음에는 IMF여파가 남아있던 때였기에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이름도 생각이 나는데 연락처도 남아있지 않고 메일도 그리 활발하지 않던 시절이라서 소식이 닿지 않는다. 


97년인가, 내가 정말 좋아했던 형과 함께 한 술자리도 잊을 수 없다.  2005년 이후 누워만 있는 형의 의식이 돌아오면 다시 한번 그런 자리를 가질 수 있을까?  그때 정말 속상한 일이 있어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을 때 마침 연락이 닿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형은 오랫만에 만나는 여자친구를 제쳐놓고 달려와 주었다.  그때 저녁 7시 무렵에 시작된 술자리는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졌고, 난 취하지 않았었다.  


그 뒤로도 이런 저런 유쾌한 술자리도 많았고, 술 때문에 괴로운 다음 날 "never again"을 외치기를 반복하고, 이런 저런 실수도 있었지만, 딱 저 세 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요즘은 분위기 때문에 한 잔하는걸 좋아하는데, 점점 그걸 즐기는 것이 힘들어짐을 느낀다.  맛도 그렇지만, 다음 날이 너무 힘든 것이다.  와인 한 병 정도는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양인데, 이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내가 즐기는 된장질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이른 아침에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카페나 서점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을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볍게 한 잔 하면서 책을 읽는 것이다.  그런데 후자를 즐기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격한 운동은 안 한지 오래라서 모르지만 그래도 꾸준히 주간 5일 이상은 하루에 1-2시간씩 운동을  즐길 수 있는 정도의 건강은 갖고 있고, 젊을 때보다 힘도 더 세졌지만, 술을 마실때면 유독 나이가 들어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속은 아이로 남아있으면서 겉은 갱년기를 향해 달려가는 것도 인생의 일부이긴 할 터.  그냥 좀더 재미있게 살고싶다.  예전에 하던 것들에서 조금씩 재미가 사라져가는 걸 보면 늙어가는 것이 확실하다만...어떻게 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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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6 05: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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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6 05: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06 06: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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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6 0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주간에는 간만에 영화를 몇 편 보았다.  내가 크게 관심이 없었던 녀석들은 빼고, 재미있게 보았거나 희안한 생각을 하게 만든 영화들만 몇 개 모아 남긴다.

일본의 전대괴수물로 유명한 '고지라'는 한국의 '용가리'나 괴수대백과를 통해 접했고, 이후 일본의 원판보다는 헐리우드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거의 퇴물배우가 되어가던 매튜 브로데릭이 주연한 그닥 기억나지 않는 영화였는데, 이번에 본 '고지라'는 그에 비해 훨씬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기는 한다.  여전히 오리무중의 모티브이고 사실 '퍼시픽 림'에서 이미 완성도가 높은 괴수물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기대는 없이 봤지만, 그런대로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의 세계정세와 묘하게 맞물리는 부분이 떠오르게 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철지난 음모론으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Argo'나 'Wag the Dog'에서도 볼 수 있듯이 헐리우드, 아니 매스 미디어를 통한 정부의 프로파간다는 subtle하지만 치밀하게 진행되는 것은 기정사실이 아닐까 싶다. 

 

난데없이 1945-55년에 거쳐 조사되고 무려 '원폭'을 맞고 사라진 '일본'의 괴수 '고지라'가 21세기에 부활한 암컷과 수컷 괴수를 잡기 위해 다시 나타나서 '미군'을 도와 이들과 싸운다.  여기서 무엇인가 떠올릴 수 있다면 당신은 나름 상상력이 좋은 사람이다.  현실의 역사에서 '원폭'을 맞은 유일한 나라는 '일본'이다.  그런 일본이, 미국의 태평양전쟁 시절 주적이었던 국가가 냉전을 거치면서 동아시아에서는 미국이 거의 유일하게 인정해주는 '동맹국'으로 부상했고,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쳐 신냉전이 가속화 되어가는 지금에는 미국의 군비부담을 덜어주고 대중국-러시아 정책의 든든한 파트너로 격상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영화속의 적대괴수가 암수 한쌍인 것이 우연일까?  덩치 큰 수컷=중국, 작은 암컷=러시아라고 대입하고 여기에 미군과 고지라를 합치면, 너무도 쉬운 현실에서의 대비가 이루어진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어쩌면 아주 subtle한 방법으로 우리의 무의식을 '일본 = 고지라로, 괴수군단 = 중국/러시아'로 몰고, 미국을 돕는 고지라 = 일본이라는 쪽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닐까?  영화를 본 후, 그리 어렵게 고민하지도 않고 그런 생각이 떠오른 내가 이상한 것일까? 

 

예전에 9-11이 터지고 아프간 파병이 제대로 결정되기도 전에, 그러니까 9-11에서 약 한 달 정도가 지난 시점에 갑자기 아프간 지역에서 작전중에 추락한 미공군기 조종사가 귀환하는 내용의 전쟁영화가 나온 적이 있다.  이 영화가 한 달만에 찍혀 나왔을리는 없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도 교묘하게 적절한 시기를 맞출 수 있었을까 궁금해했던 적이 있다.  그렇게 전부는 아니지만, 분명히 영화는 정부, 그러니까 특정정권이 아닌, 넓은 의미에서의 정부의 아젠다를 전파하는데 쓰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 나올 때만해도 X-Men이 영화화되었다는 점에 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 영화가 어느덧 7번째 installment를 맞이했다.  X-Men 1, 2, 3, X-Men Origins 1, 2 그리고 X-Men First Class를 모두 아루르고 리셋을 한 영화라고 평가되는데, 이로써 X-Men franchise는 다시 과거와 현재 모든 부분을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이는 Marvel의 one source multiuse의 성공을 보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인데, 당장 DC의 간판스타인 수퍼맨과 배트맨을 합치는 다음 번 Man of Steel예고 포스터를 보면 DC버전의 어벤져스인 Hall of Justice영화를 기대해봄직 하다. 

 

여기서도 적대적인 진영이 과거에서 힘을 모아 미래의 역사를 바꾼다는 셋팅인데, '고지라'만큼은 아니지만 묘하게 요즘의 상황에 대입이 되었었다.  다만 그 강도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굳이 더 이야기하지는 않기로 한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긴장이 늦춰지지 않고, 적절한 액션과 드라마가 배합되었는데, 가장 맘에 들었던 장면은 1973년 당시 과거로 돌아가서 이루어지는 액션신에서의 배경음악이다.  1973년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답게 음악은 현대의 rock이나 업비트의 기계음이 아닌 당시 유행한 스타일이 사용됐는데, 영화를 한층 더 시간에 맞춰 authentic하게 해주었다.  매우 세심한 배려와 터치가 아니었나 싶다.

 

이 녀석들 외에도 '헝거게임 1, 2'와 'Book Thief'를 보았는데, 헝거게임은 아무리 봐도 배틀로얄의 노작같았고 Book Thief에서는 무엇인가 잔잔한 감동을 받았는데, 특히 레몬빛 머리카락의 어린 소년의 모습 그대로 시간이 멈춘 주인공의 옆집아이 Rudy가 너무 착하게 생겨서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I Love You를 하려다가 죽는 부분이 너무 슬펐다.  이미 갖고 있는 헝거게임의 원작과 함께 원작을 구해서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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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4-06-03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맞아요. 이 영화 좋았던게 음악이 정말 좋았어요. 로건 과거에서 잠 깰 때 진짜 70년대 분위기 물씬! >_<

어느 포스팅에서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완전 세월호랑 엮어서 그것은 SF가 아니다, 라고 해놨던데 흥미롭더라구요. 사실 모든 히어로물들은 사실반영이 그 어떤 다큐보다도 절묘하게 되어있는 듯 해요.

transient-guest 2014-06-04 03:06   좋아요 0 | URL
우습기도 하고 묘하게 향수같은게 느껴지더라구요.ㅎ 괴물/세월호 이야기는 못봤지만, 고지라의 경우에는 그런 풍자나 세태반영보다는 프로파간다의 느낌이 확 오는 것을 느꼈어요. 두고 볼 일이지요?ㅎㅎ
 

주간에 이틀에 걸쳐 Dresden Files 15를 읽으면서 Wicked City 첫 권을 다 읽었다.  그 덕분에 다치바나 다카시의 '천황과 도쿄대 1'은 약 200여 페이지를 두고 밀려 있고, 운동을 하면서 읽어나가는 크리스티 전집을 제외하면 다른 책은 거의 읽지 못했다. 

 

늘 서점에 꽂혀있는 것을 보다가 우연한 기회에 구해서 읽은 옴니버스 버전 side story격인 Side Jobs를 본 후 처음부터 한 권씩 구해서 읽어온 Dresden Files.  처음으로 접한 것은 첫 시즌으로 종영된 비운의 TV버전인데, 언제나처럼 원작소설이 훨씬 더 재미있다.  이제 15권째 이야기인데, 여전히 재미나 힘에서 빠짐이 없다. 

 

같은 시리즈 치고는 굉장히 오래 이어져가는 소설인데, 작가의 말에 의하면 그 비결은 언제가 결말이 있음을 인지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즉 어떤 이야기를 하여도 언젠가 어떤 끝을 향해 이야기가 나아가고 있음을 알면 모든 것은 복선이 되고, 진부하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인데, 무슨 뜻인지는 그만이 알 일이다. 

 

Winter Knight가 된 Harry Dresden이 겨울 정령의 여왕의 빚을 갚기 위해 그의 숙적이자 타락천사의 화신인 니코데무스를 도와 하데스의 금고를 터는 일을 맞게 되는 것이 이번 스토리의 시작이다.  언제나처럼 odd는 stacked up against Harry인데, 어떻게 상대방의 뒷통수를 치고 빠져나오느냐는 늘상 전개되는 모티브이지만 늘상 새롭기만 하다.  단, 지난편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그는 Winter Knight로써의 한계를 넘을 수 없고, 상대방은 타락천사와 공존하는 30인의 데나리안 (그렇다 유다의 은화 30전에서 온 그 데나리안이다)의 두목이며 Harry의 arch-enemy인 니코데무스이다.  게다가 금고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하데스, 그러니까 명왕 하데스이다.  결말은 뻔하지만, 그 전개의 기술이 Jim Butcher의 훌륭함인데, 왜 이런 책이 한국에서는 번역되어 나오지 못했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아니메 '요수도시'의 원작소설 첫 번째를 읽었다.  작가는 다름아닌 히데유키 키쿠치.  한국에 번역되었던 작품으로는 '요마록' 과 '뱀파이어 헌터 D'일부 정도. 

 

뱀파이어 헌터 D의 기괴함은 없지만, '마계도시 신주쿠'나 '야샤키덴'에서 보여지는 익숙한 인간계와 마계의 공준 또는 갈등이야기를 매우 폭력적이고 야하게 그렸다.

 

단순한 재미를 위해 읽는 책은 쉽게 보는데, '로쟈의 러시아 문학강의'를 읽은 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보려는 러시아 문학은 왜 시작하지 못할까?  푸쉬킨으로 시작하기 위한, 그리고 '우리들의 마지막 영웅'을 거쳐 다시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고골, 체호프를 읽기 위한 시작은 왜 이리 어려울까?

 

그래도 두 권다 영어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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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바로 구입해서 열심히 읽고 있는 Dresden Files 15 "Skin Game".  책을 읽다가 잠깐 뒷면에 나와있는 작가소개를 보았는데, 재미있는 글이라서 옮겨본다.

 

A martial art enthusiast whose resume includes a long list of skills rendered obsolete at least two hundred years ago, #1 New York Times bestselling author JIM BUTCHER turned to writing as a career because anything else probably would have driven him insane.  He lives mostly inside his own head so that he can write down the conversation of his imaginery friends, but his head can generally be found in Independence, Missouri.

 

글쓰는 사람에 대한 기찬 묘사가 아닌가 싶다.  한참 웃다가 다시 책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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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월요일은 어김없이 돌아오는 미국의 Memorial Day로써, 나도 간만에 하루를 쉬었다.  이는 2차세계대전, 유럽에서의 승리를 축하하고 스러져간 군인들을 기리는 하루인데, History 체널에서 마침 흥미있는 3부작을 방영해서 재미있게 보고 있다.  미국이 참전한 전쟁들 중 다수는 상당히 논란거리가 있는 것들이고, 특히 냉전시대 이후의 이런 저런 일들은 욕을 먹어야 마땅하겠지만, 적어도 2차대전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하여 토를 다는 경우는 많이 없는 것 같다.  자기들도 그걸 아는지, 가끔 영화에서도 미국이 참전한 전쟁들 중 마지막으로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는 투의 표현도 하는것을 보는데, 그만큼 나찌는 철저하게 죄악시하면서 정작 같은 기간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상대적인 과대함을 보이는 것을 보면 나찌독일 = 악이라는 등식의 성립에는 역시 유태인들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 바쁘지 않은 5월을 보냈지만, 그래도 일인지라 평일에는 거의 책을 읽지 못하고 주말에 몇 권 싸들고가서 겨우 읽어내는 것이 전부이다.  가뜩이나 문학은 어려운데, 이렇게 집중하는 것이 쉽지 않다보니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게 되는 것이 다반사다.  장르를 굳이 차별하지는 않지만, 문학 만큼의 깊이는 없기 때문에 역시 문학작품을 한 권씩 읽어나가는 것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모자란 것을 채울 수 있기를...

 

난해하다.  내용 그 자체는 flow가 워낙 좋아서 술술 읽어내려갔지만, 그리고 장면마다 차분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그림을 보는 것처럼 느꼈지만, 결과적으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를 전혀 종잡을 수가 없다. 

 

'현대'자가 붙은 모든 것은 난해하다라고 누군가 말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쉽게 속을 보여주는 책은 아닌 것 같다.  게다가 하필이면 프랑스 작가의 책이다.  너무 심한 일반화가 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같은 서구권이라도 영미권의 작가들보다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은 보다 더 추상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마치 한 편의 독립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  가뜩이나 'Detachment'라는 영화를 본 후라서 그런지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중간에 삽입된 그림은 상당히 맘에 드는데, 이보다는 더 정돈이 되어야겠지만, 난 이렇게 책으로 꽉찬 공간이 너무도 좋다.

 

제목만 보고 사들인 댓가를 톡톡히 치루게 한 책.  마치 클리프노트 와도 같은 책인데, '중학생' 어쩌고, '논술' 어쩌고 하는, 제목 때문에 첫 눈에 알아보기 어려운 것들을 미리 보았더라면 절대로 구매하지 않았을 책이다.  

 

켄터베리 이야기를 원본으로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운문체를 읽어나가는 건 애교수준인데, 중세영어를 읽어가면서 해석과 함께 음미를 하는 것은 정말 어렵기 때문에, 영문판도 대부분 영어는 현대의 방식으로 편집하는 걸 본다.  몇 년전에 영문판을 구해놓고서는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 못하고 있는데, 한국어판도 하나 있어야할 것 같아서 샀다가 이런 '피해'를 보고 말았다.

 

편저자의 이름이 붙은 문학 요점정리 및 주안점정리까지 친절한 책이니, 해당 작품을 읽는 것보다는 당장 내일의 독후감 숙제가 급한 학생들에게 꽤나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하겠다.  물론 어려운 책을 당장 마구 읽을 수 없는 사람이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런 참고서가 '책'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것은 매우 기분나쁜 일이다.  책의 반 정도가 '켄터베리'의 이야기가 되고, 나머지는 말 그대로 '참고서'로써, 읽는 학생의 숙제를 도울 수 있는 내용으로 꽉 차있고, 심지어는 토론해볼 문제까지 제공하는걸 보면, 한숨만 나올 뿐이다.  결국 난 다른 국역판을 찾아야 한다. 

 

일본인들의 '희생자' 코스프레는 언제쯤에나 끝이 날까? 

 

2차대전 말기, 항복을 앞두고 최고위층의 명령에 의해 국가재건을 위한 금을 은닉했다는 이야기.  끔찍한 것은 이 금을 지키기 위해 결국 자살하는 학생들의 묘사가 '용감한' 그들의 희생으로 미군정은 이 금을 포기했다는 식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숭고한 희생이 아닌, 사의 찬미와 국체론에 길들여진 이들의 모습은, 특히 일제에게 희생당한 당시 한국인들의 기억을 공유하는 우리에게는 심한 거부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아사다 지로의 작품을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지만, 나의 호감과는 별개로 이 책에서 보이는 그들의 전쟁관이나 국가관에 대한 구역질은 어쩔수가 없다.  세월호 참사라는 끔찍한 대재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주님 최고를 외치는 그들과도 오버랩되기에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다.  소설적인 재미는 물론 있다.  하지만...

 

푸닥거리를 통해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이런 '간접'살인은 과연 기소할 수 있을까? 라는 명제에 눈이 멀면,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되는데, 이는 작가가 원하는 그대로 트릭에 빠지는 길이다. 

 

운동을 하면서 읽는 책인 관계로, 무지하게 오래 걸려서 다 끝냈다.  그만큼 요즘 운동에서는 마무리로 하던 자전거 타기에 게을렀다는 이야기. 

 

독자의 눈을 다른 곳으로 고정시켜버리는 트릭도 멋졌지만, 더욱 각별한 재미는 결국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부분이다.  오컴의 면도날이라고나 할까, 합리적인 추론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다면, 반대의 의견이나 가능성을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다.

 

깊이 있는 책을 더 많이 읽기 위해 노력하고, 영어책을 더 많이 읽으려고도 노력하지만, 맘처럼 쉽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그득 쌓인 나의 친구들은 그렇게 내 손길을 기다리는데...계속 읽다보면 한 권씩 흡수하리라는 희망으로 살자. 

 

PS 지난 주중에 읽은 책 한 권은 까먹고 넣지 않았다.

<Greylancer>라는 책인데, 히데유키 키쿠치의 작품이다.  Vampire Hunter D 시리즈의 스핀오프로 만든 단권작품인 듯 한데, Vampire들이 귀족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에 있었던 3000년 간의 UFO문명과의 전쟁 당시 활약한 Greylancer라는 귀족 최강의 전사에 대한 짧은 이야기다.  속편이 나올 것 같지는 않고, 난 그저 이 작가의 책은 다 재미있게 보는 편이라서 구해 읽었다.  지금은 Wicked City 첫 권을 읽고 있는데, 역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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