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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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이덕일 소장의 새로운 해석과 시도는 주류학계와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들여다보게 해준다. 같은 저자의 책을 꾸준히 읽다보면 면면히 흐르는 정신에 더욱 그의 책을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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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션 -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
앤디 위어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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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매우 잘 쓴 책이다. 아직 완독하지는 못했고, 영화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연초에 구매한 영문판으로 조금씩 읽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은 주인공이 드디어 자신을 구조하기 위해 돌아오고 있는 동료들을 만나기 위한 랑데부 포인트로 떠나는 부분이다. 엔딩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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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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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김탁환 작가의 정도전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예전에 다른 작가의 정도전 소설을 읽고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어떻게 역사가 현재의 사회상이나 특정한 세력의 필요에 따라 포장되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어떻게 하다보니 비슷한 시기에 읽은 책이 이덕일 소장의 책이라서 또다시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드라마나 책에서 나온 수양대군의 반정에 대한 묘사 또한 과거 군사정권 시절과 지금의 차이가 꽤나 뚜렷하게 보이는 부분이 있다.  다만, 다른 케이스들에 비해 단종의 과실이 없다는 점, 세종-문종을 이었다는 정통성, 그리고 수양대군 자신의 포악함이나 초기의 실정을 감출 수가 없기 때문에 찬양 일변도의 이야기는 아니었던 기억이 있고, 여기에 너무도 명명백백히 그 충정을 드러내는 사육신 이야기 등과 함께  모호함을 완전히 피해가지는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수양대군을 옹호하는 묘사는, 김종서-황보인 등이 어린 단종을 등에 없고 소위 '황표정사'라는 것으로 권력을 농단했고, 이에 수양대군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정변을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단종은 요즘 말로 collateral damage가 되었다는 것이 그 골자가 된다.  특히 여기서 주안점을 두는 것은, 수양대군이 왕이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다보니 거기까지 갔다는 듯한 뉘앙스의 묘사였는데, 이를 위해 김종서로 권력이 집중되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려는 시도는, 지금와서 생각하면 억지스럽기 그지없다.   


그렇게해서 전 시대에는 조선조 초기의 드문 명장이요 명신으로 묘사되는 김종서를 바로 그 다음 시대에는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전권을 휘두른 권신으로 만들었고, 이를 통해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정당화한 것이다.  이놈의 쿠데타.  대한민국 현대사의 군사정변세력들은 이렇게 쿠데타의 뿌리를 저 멀리 조선조의 창업, 왕자의 난, 수양대군의 반역에서 가져오는 시도를 통해 그 정당함과 정통성을 강요했고, 덕분에 교과서에 그 시조가 실릴 정도로 조선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김종서의 역사적 지위를 함부로 가지고 놀았던 것이다.   


이런 억지스러움은, 그러나 역사적 사실로써, 충의와 절개의 상징과도 같은 사육신 때문에 더욱 궁색해진다.  수양대군이 나쁜건 아니고, 사육신은 좋고...이걸 어떻게 조화를 시킬 수 있었을까?  결과적으로 이 부분은 definite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것은 단종을 생각하면 쬐끔 나쁘지만, 왕자였으니까 권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고, 특히 권신들이 왕권을 쥐락펴락하고 있던 것을 바로 잡고 왕권을 강화한 것이라서 결과적으로는 잘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결말을 짓고, 사육신은 별도로 충절을 기리는 이상한 형태였던 것.  


이덕일 소장의 해석으로는 수양대군이 일부 대소관료들과 불만세력을 모아 반란으로 왕권을 빼앗은 결과 그 전까지 배제되었던 공신우대문화가 다시 살아났고, 이는 두고두고 조선 초기의 참신한 개혁정신을 흐리고, 부와 권력이 특정계층에 편중되는 구조가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혹자는 명나라 연왕 주태의 회천에 비춰 수양대군의 정난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있는데, 기실 연왕 주태 역시 조카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기 때문에 정당화할 수가 없는 행위라고 보기 때문에 수양대군의 정난을 이에 빗대어 정당화할 수가 없다.  같은 의미로 사실 이방원의 왕자의 난 또한 정당화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이덕일 소장이 굳이 이 부분을 수양대군의 정난과 차별화할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방원이 공신을 척결한 행위는 새로운 왕조가 열린 후 왕권의 입장에서는 필요한 일이었을지 모르겠으나 그가 형제들과 창업공신들을 죽인 이유는 자신이 왕이 되고자 했음 가장 큰 이유지 왕권강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왕이 된 이방원은 사병제를 혁파했는데, 이 역시 공신세력을 배제하는 목적보다는 군사력을 중앙화하여 병권을 왕에 귀속시키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기 때문에 더더욱 수양대군의 행위와 이방원의 그것을 차별화하는 것은 좀 억지스럽다.  이런 면에서 가끔 바른 역사를 세우기 위한 저술과 학술활동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끔씩은 이덕일 소장의 글에서 피로를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족: 김종서를 백두산 호랑이라고 하는데, 문관으로서 유능한 무관의 도움을 받아 북진을 개척한 공과 그 그개를 볼 때 그 이상 어울리는 별명을 찾기 어렵겠다.  그런데 이 별명을 일본군 하사관출신으로 양민학살에는 능했지만, 전투에는 무능했던 김종원이라는 살인귀가 같다쓴 것을 알면 김종서 장군은 무슨 생각을 할까?  혹자는 이 살인귀가 731부대와 난징학살을 재현했다고 할만큼 잔인하고 변태적인 자였던 것 같은데...


여러 날을 쓰다 말다를 반복하면서 예전의 기억을 떠올려가면서 겨우 나온 리뷰답게 지지부진한 글이다.  이야기하고 싶었던 바를 전달하는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면서 확실히 느낀 결론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점이다.


수양대군의 반정으로 벼락출세한 인간들의 면면을 보면 일부는 기존의 권력구조에 포함되어 있었던 자들 (정창손, 신숙주 등)이지만, 상당수가 별볼일이 없는 자들 (한명회를 비롯하여)이었다.  이들이 정변 이후 일등공신이 되어 훈구세력의 시조가 되어 조선조, 온갖 비리와 부조리를 양산하고 고착화시켰음이다.  약 500년 후,  박정희의 쿠데타로 급부상한 한국군부의 찌끄러기 같은 자들과 거기에 빌붙은 일본/만군출신 잔당들의 출세,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국군부의 기형적인 세력화, 토착화, 파벌화, 문벌화, 그리고 이에서 파생되는 부정부패의 시조가 되었다.  그래.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지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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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5-12-04 0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좋은데요~^^
역사는 반복될 뿐 아니라 숨기거나 왜곡한 사실도 후대에 전해지는 지엄함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transient-guest 2015-12-04 08: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말씀처럼 아무리 숨기고 지우려 했어도 후대엔 모두 전해진 것을 또한 이 책을 통해서 봤습니다만, 쓰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ㅎ 이는 자연스러운 이치인데, 이것을 거스르기 위해 교과서를 자꾸 고치는 사람들은 김종원 같은 자가 후대에는 타이거 킴으로 알려지길 원하고 있겠죠?
 

연휴주간.  계속 놀면서 책을 보고 자고 먹고 마시고 했더니 확 불어버린 느낌이다.  그래도 운동은 계속 했건만 역시 먹으면 불어난다.  그런 나이라서 이젠 먹는양 대비 운동양을 훨씬 높게 잡아야 한다.  


작년까지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는데, 금년의 겨울은 유난히 춥게 겪고 있다.  이것이 그간 가뭄으로 인해 겨울온도가 높지 않았다가 이번의 엘니뇨 때문에 그나마 비오는 날이 늘어난 덕분인지, 몸이 늙어가기 때문인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몸에 열이 많은 편이라서 역설적으로 겨울에는 감기를 달고 사는데, 이번에는 추워진 날씨에 좀더 따뜻하게 입고 다님에도 불구하고 감기기운이 떨어지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그러니까 너무 추워서 새벽에 일어나는게 여름에 비해서 훨씬 더 힘들다.  개운한 아침, 그리고 넉넉한 저녁시간을 위해서는 새벽운동이 최고다.  오전 5시 정도에 일어나주면 집 앞에 있는 gym에 가서 넉넉히 그날의 weight training을 마치고 40-50분 정도 뛰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fat burn이 가능하기 때문에 새벽 스케줄을 좋아하는데, 그걸 못하니 다른데서 시간을 끌어다 써야한다.  업무중에는 부담스럽고, 점심에는 만족스럽지 않을 뿐더러 시간도 부족하기 일쑤다.  결과적으로 겨울에는 밤운동을 하게 되는데, 8-9시 사이에 가면 넉넉하게 2시간 정도를 쓸 수 있지만, 밤에 늦도록 잠이 오지 않는 각성효과를 경험하게 만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늦잠을 자게 된다.  


일주일 만에 페이퍼에 글을 적어보려니 이렇게 토막친 단편적인 이야기만 나온다.  12월에는 넉넉히 책을 읽으면서 업무를 보려고 했으나 기존의 케이스도 그렇고 얼마전에 다녀온 solo practitioner 세미나에서 느낀 바에 따라 website개편과 회사 블로그를 열어보려는 생각에 공연히 마음만 바쁜 첫 날을 보내고 있다.  어떤 변호사는 SSN할 시간은 모두 회사의 SSN관리에 쓴다는데, 난 아직 많이 게으른 편이다.


시대에 따라 참으로 다른 평가를 받아온 정도전.  단순한 개국공신으로 보다는 어린 왕자를 세자로 세워 질서를 어지럽힌 권력을 지향하던 역신으로 특히 군사정권시대 그 이미지가 퍼진 정도전은 요즘의 해석을 보면 그리 단순한 인물이 아닌 것 같다.   이성계-이방원으로 이어지는 군사쿠데타-개국의 시나리오에 충실하던 시절의 정도전은 항상 그렇게 그려졌던 것 같다.  TV에서 해주던 역사드라마에서도 그랬고, 어린 내가 읽던 만화한국사 시리즈에서도 늘 그는 늙은 이성계와 어린 세자를 조종하면서 창업 직후의 조선을 좌지우지하다가 이방원의 칼에 죽는 악역(?)이었다.  자신은 없지만 그 증거라면 그간 위인전기에서 정도전의 부재가 아닌가 생각되는데, 분명히 그 시절의 뻔한 살림의 집에서 자란 아이치고는 상당히 많은 책이 있었던 나의 '위인전기'시리즈나 부속물에서도 정도전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최후는 항상 남은을 비롯한 자파의 권신들과 술을 마시다가 이방원에게 죽는 것으로 나왔고, 이는 묘하게 정도전 = 술마시다 혁명에 죽는 난신 이라는 이미지를 나에게 남긴 것 같다.  


그러다가 대중적으로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강의를 시작으로 정도전은 다른 시각으로 비춰지게 되었고, 이후의 드라마나 책에서는 단순한 권신이나 책사 또는 이방원의 라이벌이 아닌 사실상 조선을 사상적으로 만들어낸 사람으로 서서히 그 위치가 바뀌어진 것 같다.  특히 요즘의 글을 보면 그는 왕권이 아닌 신권을 법치에 근간에 두어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바탕을 닦던 중 이에 반발한 이방원에게 죽은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요즘의 재해석에서 얼마만큼이 지난 시절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도전에 대한 소설을 읽으면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런 궁금증을 가졌었는데, 조선왕조실록과 그간의 자료들이라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할지 결정하지 못하겠다.  역시 역사는 과거와의 꾸준한 대화, 그리고 현실사회가 그 해석에 반영될 수 밖에 없는 학문일까?  박근혜씨와 그 일당이 주도하는 강력한 독재정치에 대한 반발로도 이번 김탁환 작가의 '정도전'을 읽는건 너무 멀리 나간걸까?  아직은 쉽게 답을 낼 수가 없다.


다만 지금까지의 읽음과 생각을 섞어보면 정도전은 그저 대낮부터 추종자들과 술을 마시다가 이방원에 의해 일소된 악적인 존재가 아님은 분명해보인다.  이성계라는 군벌을 통해 그가 공부한 사상과 귀양생활에서 느낀 바를 구현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음이다.  적어도 이것이 요즘의 해석인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만, 역시 이성계 말년 왕자의 난을 잉태한 세자책봉, 그리고 이에 따른 몰락은 다시 공부되어야 한다.  찬란하던 중장년시절 이후의 삶까지도 제대로 조명되어야 그에 대한 판단이 좀더 객관적이고 포괄적일 수 있다.  


혁명가의 면모와 권신의 일면이 함께 존재했다고 생각하면 비교적 공평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과거 '쿠데타'를 높이기 위한 설정에서 벗어나되, 요즘의 사회상이 너무 많이 반영되지 않을 수 있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걸 강하게 주장하기에는 내가 모르는 점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


좀더 사서의 관점에서 정도전을 다룬 글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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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정신 - 로봇시대 개막, 신 인류의 조건
한재권 지음 / 월간로봇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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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약 10년 후에는 정말 재미있는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세계유수기업의 top 공학자인 고객이 즐겨 쓰던 말이다.  엄청난 스피드와 에너지효율, 그리고 저비용을 자랑하는 차세대 반도체, 알루미늄을 강철만큼 단단하게 만드는 기술, 수소전지, 태양광 발전기, 등등.  그간 내 사무실을 거쳐간 한국계 공학자들이 주도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분야다.


현재 한국과 일본, 중국, 유럽과 미국의 유수기관에서는 로봇공학,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거나 연관된 분야의 연구개발이 한창이다.  기술적인 수준, 그리고 양적인 투자와 노하우를 볼 때 아직까지는 미국이 선두에 있는데, 기술개발이나 리서치 면에서 아무리 다른 나라들이 뛰어나더라도 이를 아우르는 마켓과 정책, 그리고 투자, 나아가서 유수의 학자, 연구원, 개발자나 공학도가 미국에 와서 살게 만드는 국가사회적인 인프라는 중국조차도 아직은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게 되는 날이 오기는 할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누어본 top 10%급의 공학자나 과학자들, 토니 세바 같은 사람들,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한재권 박사에 따르면 그렇다.  이들은 이미 향후 10년이면 무인자동차의 시대가 온다는 굳건한 믿음을 갖고 있으며 효율성 때문에라도 기존의 화석연료는 에너지산업에서 그 주도권을 재생에너지에 물려줄 것이라고 한다.  실리콘 밸리 한 가운데 살면서 보면 확실히 그럴것만 같다.  하지만, 이것이 중서부나 동부의 한적한 옛 도시에 살면서도 그렇게 받아들여질까?  


한재권 박사가 유학생활을 하면서 버지니아 공대의 로봇팀을 세계 유수대회의 top을 끌어올렸듯이 미국의 유수기관과 학교에서 한국계 학생들은 상당히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로봇공학의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한국 카이스트나 서울대학교의 실력도 수준급이지만, 범국가 또는 범학계나 업계수준의 대규모 funding이나 인식을 보면 미국이 역시 이 분야를 주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로봇이 실생활에 도입되면 과연 우리는 더 행복해질까?  일단 엄청난 숫자의 일자리가 사라져버릴 것이다.  많은 대체 일자리가 나오겠지만, 없어진 직종과 숫자에 대비하면 미미한 정도라고 본다.  그리고 빅데이터를 활용한 인공지능 로봇이 활성화되면 전문직도 거의 다 사라질 수 있다.  그 어느 외과의사보다도 더 정확한 집도, 그 어느 인간과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엄청난 정보를 취합하여 분석하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  변호사도 마찬가지.  엄청난 법률과 판례와 용례를 분석하여 가장 적합한 해결책을 적용가능한 수준의 통계치로 뽑아내는 로봇 변호사를 인간 변호사가 당해낼 수 있을까?  운전도, 수리도, 생산도 모두 로봇이 담당하고 이 로봇의 관리조차도 로봇이 담당하게 되는 시대가 되면, 어쩌면 그 시대는 인간 이후 다른 종으로 넘어가는 진화학적 과도기가 될 수도 있겠다.  이미 그 훨씬 전에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은 쓸모가 없어지고 어떤 일도 할 수 없고, 그러나 수익분배에 인색한 극소수, 전 세계적으로 1%로 채 안될, 자본가에 의해 목숨만 부지할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게 되거나 그 상태에서 서서히 수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퇴보할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기술문명의 발전에 비례한 나눔의 패러다임의 세계화가 시급하다.  아무리 좋은 것을 많이 만들고, 아무리 일을 적게해도 된다한들, 절대다수가 그 결과로 가난해지고 쓸모없어진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물론 한재권 박사에게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공학자로서 그의 본분에 충실하게 사람을 위한 원대한 로봇개발의 꿈을 하루씩 이루어가고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니까.  보다 더 현실적이기도 하고, 철학적일 로봇개발에서 파생되는 사회현상을 분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우리들 모두의 몫이다.  


로봇이 생활의 모든 노동을, 그리고 생산까지 책임져준다면 그때야말로 우리는 진정한 사민주의와 나눔을 통한 공생으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가난해지는 과거의 실패한 공산주의가 아닌 모든 사람이 부유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소유나 재산의 개념이 큰 의미가 없는 그런 시대가 오기를 간절히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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