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가 거의 모든 작품을 읽은 몇 안되는 작가들 중 하나이다. 물론 김용의 모든 작품은 독파한지 오래지만, 그건 좀 안 넣어줄 것 같으니까 패쓰. 같은 의미로 이런 저런 소설들은 논외로 치고, 소위 '문학' 내지는 그 근처라도 가있다고 봐줄만한 작가들 중에서는 유일한 것 같다. 물론 문학의 대가들의 책은 언젠가는 모두 재독/삼독씩 하리라 마음을 먹고는 있지만, 그나마 근처에라도 가고 있는 작가들은 도스토옙스키나 카잔차키스 정도라고 하겠다 (책을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 운이 좋으면 한 두권씩 꾸준히 읽어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하루키의 작품은 모두 번역되어 있고, 에세이들도 절판이나 품절을 거쳐 재발간 또는 재편집된 것들이 많아서 기실 이분의 작품을 모두 읽는 것은 한국인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게다. 다만, 이런 저런 과정에서, 시간을 거치며 에세이에 주력하는 듯한, 또는 계속 같은 글모음에 신간 한 두개씩을 섞어서 다시 출판되는 등, 구매자로써는 다소 실망스러운 모습에, 또는 작가로서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하는 모습에 그의 책을 읽지 않게 되는 사람은 많이 있는 듯 하다.
나는 쉽게 실망하는 편이 아닌 것 같다. 거기에 워낙 얕은 reading을 하는터라 정치적으로 너무 엉뚱한 짓을 하거나 하지만 않는다면 예전부터 읽어온 작가를 밀어내지는 않는다. 호모엑세쿠탄스 이후의 이문열 작품은 없지만, 그 이전까지 갖고 있는 책을 굳이 가져다 버리는 수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하루키가 어느 날 자고 일어나서 '나는 아베의 개로 살겠다'던가, 갑자기 '대동아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미친 소리를 하지 않는 이상에야 그의 책을 읽지 않을 이유는 없다. 더구나 그 책이 그간 구하기 어렵던 초기작품들 중 하나라면 말이다 (그래도 '6.25가 하나님의 뜻'이라거나 '게으른 조센징'운운한다면 그의 책을 다 가져다 버리고 만나면 한번 시원하게 두들겨 팰 것 같다. 잘 뛰는 그는 아마도 장거리 달리기로 멀리 달아나겠지만).
이번에 재발간된 '중국행 슬로보트'는 그렇게 비교적 초기에 구입해서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큰 감동이나 새로운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고 하겠다. 이미 하루키의 책을 많이 여러 번 읽었기 때문인지, 신선함보다는 역시 훗날 장편으로 발전한 여러 습작노트 같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이다. 이럴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하루키는 참 운이 좋은 작가, 아니면 최소한 특이한 작가, 또는 팬층이 두터운 작가이다. 습작까지 팔 수 있으니까. 보통은 한 작품으로 유명해지고 나서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작가의 문학인생을 기념하는 의미로 이런 습작모음이 출판되는 형태가 더 일반적일텐데, 하루키는 뒷날 보면 습작이 분명해 보이는 책을 먼저 발표해서 팔고, 이들에서 다룬 모티브를 장편화해서 다시 팔고, 그 사이사이에 마라톤을 뛰고, 고양이와 놀고, 파스타를 만들어 먹으며, 재즈를 듣고, 맥주와 위스키를 마시면서 에세이를 써 판다. What a wonderful life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중국행 슬로보트'를 보는 틈틈히 '천황과 도쿄대 2'를 읽으면서 (이건 2권짜리 책이지만 두께로만 보면 어지간한 책 10권도 될 분량이다), 엘러리 퀸의 'Z의 비극'을 읽었다. 이로써 'X, Y, Z'의 비극을 모두 읽은 셈인데, 전작 두 편은 4년 정도 전에 읽었기 때문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이와 스트레스 그리고 알콜이 선사한 망각일게다.
영국풍의 이야기만 보다가 오랫만에 미국풍의 이야기를 본 셈인데, 이 또한 참 좋다. 흑백차별이나 전반적인 백인대세의 시절이라는 점, 그리고 여권이나 사회평등의 관점에서 보면 별볼일 없는 시절이 (1930년대) 주무대가 되지만, 우리 시대에는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담론이나 사회상이 무척 재미있다.
얼마 전부터 다른 출판사에서 엘러리 퀸 전집이 나오는데, 하드커버풍의 양장이 맘에 쏙 들어 몇 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읽은건 동서DMB, 그러니까 동서미스터리문고의 일반판인데, 이상하게 이 문고의 책이 맘에 든다. 일단 책에서 풍기는 종이냄새가 요즘의 그것과는 다르게, 내가 어릴 때 맡았던 책냄새와 같은 점에서 좋고, 오래된 책들이라서 그런지 값도 좋다. 한 200권인가 하는데, 다른 시리즈와 겹치기는 하지만, 한 권씩 다 사들일 생각이다.
전집류가 나오기 전, 이렇게 명작을 엄선하여 모아놓은 기획은 그 자체로도 참신할 뿐만 아니라 여러 작가들을 두루 소개해주는 등 매우 큰 역할을 했기에 동서 DMB는 잊을 수 없는 문고라고 하겠다. 여기에 같은 출판사에서 기획한 동서동판의 고전 시리즈도 좋은 가격으로 하드커버 책을 구하려는 사람에게 알맞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