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밀리다 못해서 이제는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을 지경으로 읽고나서 방치한 책이 쌓였다. 그렇다고 책읽기를 멈춘 것은 아니다. 하다못해 한번 읽고 말 책이라도 읽어야 사는 나 같은 문자중독자라면 이렇게 후기를 주기적으로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듯 싶다. 생업과 운동, 가정, 잠...이런 것들에서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서 무엇인가를 남기자는 것인데, 재주도 없으면서 욕심은 있어서 그래도 잘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몇 번이나 쓰다가 지워버린 리뷰가 여러 편 있다. 선을 볼 때마다 점점 덜 맘에 드는 상대가 나오는 것처럼 리뷰로 여러 번 쓰면, 그때마다 점점 더 조악해지는 글이 나온다. 그렇게 버티고 미루다가 결국에는 이렇게 한꺼번에 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여러 번 그렇게 했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그나마 읽은 책들이 대부분 마중물처럼 더 좋은 독서나 깊은 독서를 위해 퍼부은 일종의 양적 독서였다고 하면 위안이 될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말 전혀 쓸데없는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래도 좀 잘 남겨보고 싶은 맘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작년 초반의 일이다. 알라딘 US가 직영체제로 넘어가면서 잠시 한국의 가격을 그대로 적용해준다는 꼼수에 넘어가서 한창 엄청나게 많은 책을 지르고 있었다. 물론 금방 배송료의 압박 때문에 결국 이전의 현지값과 다른 점이 없다는 생각에 신간구매는 줄였지만 2-3불 대에 나오는 중고책의 유혹은 엄청 강했다. 이때 아마 민음사의 문학전집도 많이 구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마침 또 딴지일보에서 나왔던 한국형 판타지 소설의 계보를 보면서 쓸데없이 후끈 달아올라서 이리 저리 책더미를 뒤지면서 구한 책이 이 시리즈이다. 룬의 아이들로 유명한 전민희 작가의 작품을 더 구한 것과 함께 약간의 수확이라면 수확인데, 지금 보니 또 다시 나오고 있는 책인 듯 싶다. 그만큼 꾸준한 작품이라는 점이 새삼 반갑다.
아직 전권을 다 읽은 것이 아니라서 구체적으로 어떤 얼개를 가졌는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3-4권에서 한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야기의 중심은 세계나 공주가 아닌 말 그대로 'God's Knight"들이다. 특정한 성향을 부여받은 불사의 존재들인 이들은 신의 뜻에 따라 시공간을 초월하여 세상의 일에 관여하고 떄로는 파괴를 통해, 때로는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세계의 질서를 잡기 위한 모험을 한다. 분명히 톨킨과 D&D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은 것 같지만, 나름대로 여기서 좀더 발전한 구성을 모색한 점이 돋보인다. 하지만, 글 자체는 역시 PC통신시절의 글을 읽는 것처럼 가벼운 것이 구어체와 현대어체를 섞어 놓았기 때문에 치밀한 맛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알라딘의 database가 가끔 아쉬울 때가 있는데, 이렇게 내가 영문번역으로 읽은 책을 따로 찾을 수 없어 번거롭지만 사진을 찍어서 올려야 하는 경우다. 어쨌든 지난 Lake Tahoe여행 이후로 다시 Vampire Hunter D에 대한 재미가 터져나와 바로 지난 주간에 두 권의 후속작들을 읽을 수 있었다. "Fortress of the Elder God"에서는 벰파이어 일족과 일전을 벌인 잊혀진 그들의 고신을 멸하기 위한 여정에서 얽힌 D의 이야기를 "Mercenary Road"에서는 마찬가지로 5천년만에 다시 살아나 전쟁을 벌이는 아버지와 아들 벰파이어를 은행강도를 잡으러 가면서 마주치는 에피소드를 그렸다. 시리즈의 초기만 해도 주인공 D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는 것이 쉽지가 않았는데, 19권에서는 말도 좀 많이 하고 중간 중간에 비짚고 나오는 그의 emotion을 보는 것이 이채로우면서도 몰입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이제 20권을 읽을 시점인데, 곧 21권이 나온다고 하니 Jim Butcher의 Dresden Files의 새로운 이야기와 함께 큰 기대를 하고 있다.
아시모프라는 대가의 책을 읽은 것은, 아니 구하는 것만해도 매우 즐거운 일이다. 희대의 괴짜같은 이 천재작가는 어떻게 보면 아더 클락크 같이 진지한 철학을 던지지는 않지만, 생각해보면 가능한 모든 상상을 동원하여 거의 모든 대상과 주제를 모티브로 하여 희안한 이야기를 써낸다. 운 좋게 주말의 logos방문에서 아더 클락크의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와 아시모프의 Robots of Dawn을 구했는데, 하인라인, 섀클리와 함께 내가 열심히 찾는 작가들이다.
시간여행이 가능해진 먼 미래에는 역사를 일정한 방향으로, 정확하게는 관리자들의 시대에서 볼 때 바람직한 방향으로 조작한다. 여기에 따라 몇 몇의 사건이나 인물들을 사라지거나 다른 삶을 살게 되지만 대국적인 관점에서 큰 전쟁이나 학살을 막으면서도 자신들의 시대가 사라지지 않을 수준의 과학기술의 발전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관리되는 것에 대한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주인공이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다 무너지는데, 이야기의 끝에 던지는 (1) 관리조작된 평화 vs (2) 자연스러운 진화라는 화두는 끝끝내 풀어지지 못했다.
원제를 직역하면 '여명'이 아닌 '황혼'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실제로 이야기를 보면 켈트의 지난 시절, 요정과 난쟁이, 영혼과 정령이 사람과 함께 살던, 사람의 의식속에 살아있었기에, 그들의 존재를 느끼고 살았던 이야기를 하면서, 이제는 점점 사라져가는 이들, 그리고 이들을 인식하고 함께하던, 그러니까 이교도로써 박멸의 대상이 아닌 생활속에서 켈트인들과 함께 한 존재에 대한 추억을 다루고 있다. 이런 것들이 지난 800년 간의 식민통치와 정복자가 강제한 외래문화와 인종 - 그러니까 스코틀랜드계 장로교의 이주 - 때문에 이제는 아련한 기억속에서만 남을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이야기라면 '황혼'이 아닐까? 역자의 후기에 나온 "여명"으로 번역된 이유는 정치적으로는 분명 맞아보인다. 그러니까, 아일랜드가 가장 어둡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위대한 아일랜드의 문필가들은 민족중흥의 새벽을 꿈꾸었다는 이야기인데, 너무도 현대에 와서 돌아보는 정치/역사적인 관점이 아닌가 싶다. 내가 읽고 받은 느낌은 '황혼'이 분명하다.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요정과 정령들, 사람들의 의식변화와 함께 우리 곁을 떠난 이들 '도깨비'와 '성황신'은 우리의 세계관에서는 그들의 황혼을 맞이한 것일테고, 이들의 황혼과 함께 우리의 의식세계도 보다 더 기계화 되고 현대화 된 것일테니까.
유일신교 - 천주교/유대교/개신교, 이슬람 같은 - 의 도래와 세계정복은 분명히 인류역사에 있어 어떤 한 phase를 보여주는데, 이들은 기존의 local신앙을 대체하거나 흡수하는 방식으로 우리 머릿속에서 오래된 존재들을 떠나보냈다. 많은 숫자의 종교건축물이 위치한 자리가 그 전 시대 신앙의 대상이 숭배되던 자리를 그대로 덮고 만들어졌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너무 깊게 들어갈 수 없는 이야기지만, 이런 것들의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한밤의 술자리는 흥겨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