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를 보는 남자'라는 영화가 있다. 같은 이름의 원작은 임영태라는 작가가 썼고, 1995년 무렵에 출판되었다가 현재는 헌책방에서도 찾기 어려운, 절판된지 한참이 지난 것 같다. 그간 몇 주 갑자기 바쁘게 지내다가 간만에 조금은 한가한 오후가 되어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조차도 나온지 십 년은 더 넘은지라, 주연으로 나온 배우의 얼굴이 지금보다는 더 젊다.
주인공, 장현성은 40대의 이혼남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돌연 회사에 취직해서, 승진을 하고 안정이 되어갈 무렵, 퇴사하고 비디오 가게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영화의 시작과 책의 그것이 같을지는 비교할 수가 없지만, 영화는 잔잔하게 그가 보내는 비디오 가게를 중심으로 챗바퀴 같아 보이는 일상을 보여준다. 일견 지겹게 느껴지거나, 잉여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장면들이 나에게는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데, 무엇인가 큰 짐을 내려놓은듯한, 마치 니어링 부부나, 쏘로우의 하루를 보는듯한 기분이 나기 때문이다.
부유하기는 커녕, 예나지금이나 비디오 가게로 큰 돈을 벌기보다는 소상인스럽게 하루를 벌어, 하루를 먹고사는 정도의 삶이지만, 크게 무엇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장현성은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존재를 유지시킨다. 그런 그의 일상에 로맨스 비스무리한 것이 매우 이상한 경로로 찾아오고, 그 경로를 역추적하는 것이 중후반부 스토리의 큰 부분을 이룬다. 그런데, 난 사실 이 부분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그저 주인공과 단골손님들이 보여주는 그 시절 소시민들의 일상에 애틋한 그리움 비슷한 것을 느끼는 것이다.
지금의 내 삶과, 장현성의 삶이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이혼을 하지 않았고, 사시를 포기하지도 않았으며, 삶의 궤적을 그렇게 극단적으로 바꾸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 역시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장현성의 그것처럼 나 또한 상당히 제한적인 human interaction을 경험하면서 내 시간에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다른점이 있다면 그의 업무의 상당부분은 머리의 스위치를 끄고서도 진행할 수 있다면, 나의 업무는 그렇게 할 수 없고, 업무진척과 관련이슈에 따라 오히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을때가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비디오 가게를 보면 예전에 한국에 살 적에 다니던 동네의 작은 비디오 가게가 떠오른다. 주인 아저씨는 항상 카운터 책상 앞에 앉아있고, 손님은 그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운 비디오를 고르던 90년대, 황금기의 그 모습. 미국에 와서는 Blockbuster라는 전국구 체인망을 가진 대형 비디오가게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지만, 90년대에는 그래도 비디오 가게를 가는 것은 주말에서 가능하던 큰 treat이었음은 분명하다. 금요일 저녁, 그렇게 고이 빌려온 비디오 테입으로 영화를 보다가, 못내 여러 번 보고 싶은 영화는 용돈을 모아서 하나씩 사 모으거나, 카피를 뜨던 기억이 난다. 책이나 영화나 귀하던 시절에는 하나를 가지고 참 여러 번을 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기억하는, 미국에 온 첫 해에 생일선물로 받은 이소룡 영화 4부작 - 당산대형, 맹룡과강, 정무문, 그리고 사망유희 - 그 이듬해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터미네이터 1-2 합본. 그래서인지 DVD와 BR DVD를 넘어 이제는 거의 실시간으로 다운으로 rent를 하여 영화를 보는 시대가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이때 모은 비디오 테잎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요즘은 비디오는 커녕 DVD로도 무엇을 보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가끔씩 턴테이블을 돌려 LP를 듣는 것처럼, 투박하고 둔탁한 VCR을 켜고, 찰칵 소리가 나도록 깊숙히 비디오 테잎을 밀어넣고 영화를 보는 것도 좋지않나 싶다. 요컨데, 나이가 들면서, 어릴 때의 내 모습, 그 시절의 그 기분이 그리워지는 것 같다. 사무실에 자꾸 장난감을 채워놓으면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오래전 그 물건들, 이제는 버리는 것이 당연시되는 그때의 그 물건들이 그나마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은 나만의 공간인 내 사무실 밖에 없을 것 같다. 조금 더 넓은 곳으로 가면 그렇게 오래된 브라운관 TV와 함께, VCR과 테잎들을 한켠에 가져다 놓아야 할 것 같다.
빠른 인터넷을 이용하여 streamline하여 영화를 보는 것은 참으로 편한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MP3로 수백개의 곡을 한꺼번에 저장하여 듣는 것 역시 예전의 방식은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편리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예전에 느꼈던 설레임이라는, 작지만 가장 중요한 감정의 요소가 빠져있다. 무엇인가를 꺼내어 다른 기계에 넣고 틀어주는 그 간단한 형식이 주는 잠깐의 기다림, 그 기다림이 주는 곧 나올 무엇인가에 대한 설레임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게 그저 심드렁할때가 있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면, 역시 아날로그가 정신건강에는 훨씬 더 좋다는 방향으로 가게 되는데, 불변의 진리까지는 아니라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 같다. 하다못해 귀가 예민한 분들은 디지털로 음악을 들으면 현기증이 난다고 하지 않는가?
모든 것이 빠르게 소비되는 도시보다는, 덜 소비하고, 더 많이 생산하는 조금은 slow한 근교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 푸성귀 정도는 뜯어 먹을 수 있게 뒷뜰을 가꾸면서 말이다. 그런 삶이 오기는 올 것이다.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