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열심히 읽는 것은 삶에 있어, 어떤 구체적인 도움이 될까?  요즘의 내 생활, 그런대로 만족하면서, 조금 더 나은 내일을 꿈꾸고, 비교적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하는 이곳의 삶이 싫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열정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할때가 있다.  아직 대단한 것을 이룬 것도 아니고,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미 열정보다는 있는 삶을 조금씩 개선하면서 사는 정도를 바라보는, 그야말로 완전한 중년의 삶으로 녹아드는 내 자신이 맘에 들지 않는다.  예전에, 아주 어릴 때, 앞으로 다가올 미래와 꿈을 이룬다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숨막힐 듯 즐거웠던 그 시절의 내 모습을 찾는 것은 앞으로의 삶에 있어 중요한 화두가 된다. 

 

중간결산을 해보니, 이번 해에는 벌써 책값으로만 필경 400만원 가까이 쓴 것 같다.  알라딘의 구매기록조회와 그간 사들인 영어책을 대충 가늠한 액수인데, 뿌듯함보다는 살짝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고 모으는 것은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취미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과연 그들을 깊이 읽고 이를 내 삶에 견주어 성찰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인가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삶을 찾는데 길이 되어주는가에 대해 쉽게 답할 수 없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도 읽기를 멈출 수는 없다.  가보지 않고서,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가늠하는 것은 진실되지 못한 자세라고 한다.  가봐야, 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한국어 발음으로 옮기면 촌상춘수.  예전에 알던 형 이름이 '춘수'였는데, 아마도 영자, 미자, 순자처럼 일본어에서 온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그리스-이탈리아-영국을 오가며 '노르웨이의 숲'을 쓰던 30대 후반을 마무리하고 40대에 들어서던 하루키의 여행 같지 않은 현지인처럼 살면서 지역 일대를 떠돈 일년간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겨져있다.  이 시절 우리나라는 해외여행도 함부로 못하던 때였는데, 이렇게 자유롭게, 그것도 꽤 성공한 작가로서, 시간과 비용에 덜 구애를 받으며 한 시절을 보낸 그가 늘 부럽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늘 펼치게 되는 책이라서 완독만도 여러 번이고, 가볍게 펼쳐본건 더 많다.  요즘 필력이 딸린다는 평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꾸준히 오랫동안 좋은 글을 쓰는 일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비유를 차용하자면 이제는 환갑을 넘은 나이에 달리는 마라톤이 중장년때와 같을 수는 없는 것처럼, 그의 글도 힘보다는 그저 오래, 그리고 안전하게 달리는 것이 더 큰 feature가 되어가는 것일수도 있다.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책을 구했다.  다른 이들의 서평이나 독서론에 대한 책에서 늘 그에 대한 이야기를 보아왔기에, 이번의 독서는 큰 의미가 있다.  새로운 작가를 소개받고 알아가는 과정은 또한 늘 새로운 독서의 지평을 펼쳐낸다. 

 

창작의 부분에서는 아직까지 보르헤스를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모습에서는 확실히 이제까지 읽어온 서구문학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조금 더 거칠고, 덜 정형화된, tough한 느낌이라고 하면 어떨까?  

 

최소한 보르헤스 전집 시리즈 1-5까지는 다 읽어야 무엇인가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더 소개가 필요없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들 중 잘 알려진, 그리고 한국에 번역된 작품이다.  공부한다는 것, 학습, 내지는 research의 방편으로써의 독서와 자료수집행위에 대해 간결하고 명쾌하게, 그리고 매우 논리적으로 쓰고 있다.  무엇인가 조사할 테제를 잡은 후, 참고할 만하다.  특히 수단이 목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는 두고두고 기억하고 상기할만하다.  

 

독서와 글쓰기를 input과 output으로 볼 때, 좋은 글은 output에 비해 input이 월등히 많을 수 밖에 없음에 공감한다.  여러모로 시대에 뒤처진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리고 보편성을 함부로 부여할 수는 없는 이슈들을 다루고 있지만, technology의 발전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다치바나 다카시의 research론의 정수가 담겨져 있다. 

 

또한 이 책은 매우 열정적으로 한 호흡에 쓰여진 것을 느낀다.  그렇게, 한번에 앉은 자리에서 책을 읽어내려가는 것은, 적어도 요즘의 책들에 비교하면 자주 경험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굳이 이야기하면, 이 책은 사회인문보다는 자기계발에 가까운데, 굉장히 좋은 research-study의 예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참고할 만한 좋은 내용이 많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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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기 의원를 비롯한 진보의사들이 전격적으로 검거대상이 되어, 국정원과 공안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현직 국회의원임을 감안할 때, 이례적일 뿐만 아니라, 누가 보아도 현 정국을 타개하거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지지층을 결집하고, 국민을 겁주려는 의도가 보인다.  이석기 의원은 지난 총선과 분당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을 볼 때 문제가 많은 사람이고, 지지할 가치도 없다고 본다만, 이 사건으로 상징되는 군사독재 3기의 시작을 보는 것은 심히 공포스럽다.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옛날처럼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끓는 물에 갑자기 던져진 개구리가 아닌, 서서히 끓어오르는 솥안의 개구리처럼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조직적이고 꾸준하게 이루어지는 정치폭력의 경우 알아차릴 때에는 이미 늦는 것이다. 

 

이석기 의원의 혐의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다.  저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일으켜서 국정원 선거개입, 부정선거, 박근혜씨의 부족한 머리, 그리고 4대강까지 모든 주요사안을 덮는 것일 것이다.  이미 많이 보아왔다.  사건 자체의 결과는 번번히 정부기관의 패배로 끝나지만,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의 호도와 당사자가 입는 피해는 그를 재기불능으로 만든 것을 말이다. 

 

뉴스에 알려진 구체적인 혐의들 중 가장 황당한 총기탈취모의 및 남침 후 파출소 습격이다.  이석기가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이런 여순사건같은, 성공할 가능성이 0%인 일을 모의했을까?  혹자는 달아난 것으로 그의 혐의가 입증되었다고도 한다.  잡혀간 자는 말이 없다.  그러니 그로써는 우선 숨고 보는 것이 답일게다.  이상득이나 최시중 같은 놈들도 이렇게 전격적으로 잡아가지는 못한 놈들이다.  도대체 '공안'이라는, 중국이나 북한을 떠올리게 하는 이 단어는 언제쯤 사라지게 될까?  그놈의 공안검사들.  출세에 눈이 먼, 다카기 마사오의 피조물...

 

이석기 의원은 어쩌면 시작이다.  그가 정말 공산주의를 꿈꾸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독재정권이 종식된 이래, 처음으로 현직 의원까지 체포하려는 그들의 공작정치는 살기어린 눈빛으로 모든 이를 내려다보는 박근혜식 공포정치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7인회니, 16인 장성회니 회자되는 실세들의 구성으로 보면 너무도 뻔한 군부독재 3기의 시작이다.  마틴 니뮐러 목사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 . 그들이 내게 왔을 때 . . .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 줄 이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적은 푸른 기와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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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은 어떤 무협지에서 보면 사람과 동물을 구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상행위라고 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대맥'이라는, 용대운의 '비도탈명'과 그 밖에도 알려지지 않은 다른 작품들을 상당한 부분 표절한, 그러나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다.  상행위라.  요즘의 연구에 의하며 간혹 원숭이나 다른 포유류과의 동물들 중 물물교환 비슷한 것을 하는 녀석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개미와 진딧물의 관계도 일정부분 교환이라는 형태를 보여준다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역시 본격적인 의미의 상행위는 인간류만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오늘, 늦잠을 잔 덕분에 급하게 출근해서 예정된 스케줄과 분량에 맞춘 일을 겨우 마치고, 점심 운동 후, Jack in the Box에서 오더를 기다리면서 문득 그럼 가장 오래된 상행위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생각을 trigger한 것은 최근에 본, 잊을만하면 나오는 종교인의 성폭력 혐의에 대한 뉴스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fly JANG, 조두순, 유수대형교회 마몬사제들, 이런 사람들을 떠올리다가 가장 오래된 상행위는 결국 종교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대의 종교시설을 생각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1) 공인된 매매춘, (2) 현물거래, (3) 제사, (4) 점성술, 그리고 (5) 이런 서비스의 댓가로 신에게 바쳐지는 십일조 같은 것으로 연명하는 신관계급 등이 그것들이다.  매매춘의 경우 다산과 다복, 그리고 풍작을 기원하는 형태로써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그 규모도 상당했다고 한다.  여기에 제사와 점성술, 그리고 치성에 동반되는 예물의 현물거래를 위한 환전소가 따로 있었음은 성서시대, 그리고 예수시대를 지나서, 지금까지도 사실상 이름과 형태를 바꾸어 유지되고 있다고 본다.  그 목적과 범주가 물론 다른 경우도 있겠지만, 성당, 교회, 그리고 절집에서 늘 볼 수 있는 성물판매소, 헌금접수처, etc.를 떠올리면 대략 모양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이를 대행하는 신관계급은 일종의 서비스업에 종사했다고 생각되는데, 이들의 신성한 의무를 위해 결혼을 포기하거나, 상속에서 제외되거나, 또는 농사와 목축을 포함하여 일체의 사적인 영리활동을 금지하는 댓가로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예물의 일정부분에 그들의 지분이 인정되었던 것으로 보면, 이 역시 교환의 한 형태가 아니었나 싶다. 

 

이런 일련의 활동이 상행위였음은 현대종교의 feature를 보면 더욱 자명하다.  여기에 공인된 매매춘은 현대의 법적인 제재와 성서의 가르침을 도입하는 시점에서 근절되었다고 보이지만, 종교라는 시스템의 상위 카스트에 위치한 분들을 보면 꼭 그런건만도 아닌 듯 하다. 

 

그리고 그 상행위를 지탱하는 것은 브라만이 아닌, 우리들, 평신도들이다.  간통/추락사건을 격무/과로사로 바꾼 fly JANG사건, 9세 여아를 폭력강간하여 평생 치료가 불가능한 육체, 정신, 그리고 영혼의 상처를 입힌 조두순을 선처해달라던 그 교회신도들, 큰목사님들의 이런 저런 여성편력을 조직적으로 덮어주는 대형유사종교시설.  불교와 카톨릭은 뭐 다를까?  상대적으로 권력과 금력의 집중이 덜 한 편이고, 덜 알려지고, 덜 일어나는 경향이 있지만, 식구감싸기는 보편적으로 이루어지는 종교의 추악한 면이라고 생각된다. 

 

종교의 신성함과 이 경우 천박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종교상행위를 가르는 것은 종이 한 장만큼이나 얇은 자정력인 듯 싶다. 

 

최근에 큰 이슈가 되고있는 인도의 그 사건의 목사를 떠올리며 분노보다는 부끄러움과 아픔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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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3-08-27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내장산 국립공원에 갔다가 상행위 금지를 성행위 금지로 잘못보고 혼자 깜. 짝. 놀랐었는데,, 또 그렇게 봤네요. 눈에 음란마귀라도 씐건가.. 뭐 관련 없는 댓글이긴 하지만 뭐라도 말하고싶어서요. ^^;

transient-guest 2013-08-28 08:35   좋아요 0 | URL
저도 글을 쓰는 내내 헛갈려했답니다.ㅎㅎㅎ
 
심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58
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현성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소송'이라고 번역하기도 그렇고, '심판'이라고 보기도 그렇다.  영문으로는 Trial이라고 번역하면 - 독일어가 원문일테니까 - 딱 좋을 주인공의 passion을 보면, '소송'은 분명히 아니다.  물론, 주인공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소송'의 대상이 되어 온갖 잡스러운 인물을 거쳐, 종국에는 자기 자신이 자신을 '소송'에 일체화하여 구속시키게 되지만, 역시 'trial'이라고 할 때, 느껴지는 원인모를 고통스러운 궤적이 '소송'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심판'은 더더욱 부적절하다.  어떤 작가는 '소송'보다는 '심판'이 더 어울린다고 했지만, 주인공의 고통스럽고, 쓸모없는 시도들을 보면 '심판'은 영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심판'이라는 번역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느날 갑자기 누군가 찾아와서, 주인공이 '소송'의 대상이 되었고, 재판을 거쳐 구형될 것이라고 하는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부지점장이라는 지위에 있는 주인공은 당시로 보면 전형적인 화이트 칼라인데, 원인을 전혀 알 수 없는 구속에 휘말리면서 그의 일상은 이 '사건'에 주도되어 버리고, 매사, 이를 떠올리지 않고서는 하루의 생활이 불가능하다.  더우기 매우 mysterious하게도,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이 시점부터는, 직간접적으로 그의 사건에 모종의 관련이 있다. 

 

이 작품에 삶과 죽음을 투영하는 해석도 있고, 사회정치적인 분석도 있는데, 어느 하나도 정확하지는 않다.  굳이 철학적인 고찰이 아니더라도 어느 시대에나 형태를 바꿔 존재해온 국가권력의 구속을 투영하면 이 책은 사회풍자가 된다.  삶과 죽음을 테마로 잡고 이 책을 보면, 이 또한 투영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책의 진정한 위대함은 timelessness가 아닐까?

 

아무튼간데, 카프카는 난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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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조지 오웰은 누가 뭐라고 해도 대표적인 그 시대의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그는 실제로 노동을 하고, 노동자들과 생활했으며,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여 왕당파의 반대편에서 싸우기도 했었다.  그런 참여를 통해 얻어진 경험과 지식은 고스란히 그의 작품세계에 반영된 철학을 구성하게 되었다.  나 같이 자리에 앉아서 세상을 조망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따라가려고 해도 따라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위대함.  좋아하는 작가를 따라잡기 위해 기껏 내가 해보는 것은 파스타 요리와 규칙적이고 꾸준한 운동 정도가 되겠다.  그러니 조지 오웰은 특히 요즘처럼 사이비 지식인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한번 정도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멋진 풍운아같다.

 

과연 사람은 돈이 없이도 살 수 있을까?  시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푸성귀를 뜯어 먹는 것이 아닌, 도시에서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으로는 어떤 생활을 하게 될까?  방세를 겨우 내면서, 지저분하고 비위생적이기 짝이 없는 여관에서 돈이 떨어지면, 그리고 더 이상 전당잡힐 물건도 다 떨어지면, 그야말로 굶는 것이 답이 되는데, 그렇게 하다보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회변혁에 대한 열망과 욕구도 그러니까, 최소한의 의식주가 보장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배고프면, 힘이 빠지다 못해, 뇌가 흐물흐물해지는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어진다는데, 요즘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불의에 저항하고 대항하려해도, 실제로는 허상에 가까운 스펙쌓기와 대기업 취업을 목표로 하면서 정신을 굶기는 우리들 말이다. 

 

굶다 못해, 이상한 직장이라도 일단 받아들이고, 일을 시작하는데, 그가 선택한 직업은, 그나마 연줄을 통해서, 호텔식당의 접시닦이가 되겠다.  12-14시간을 꼬박 일하고, 먹고 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경에서, 그가 목격하는 것은 역시 허상뿐인 고급식당에서 비싼 돈을 지불하고, 불결한 환경에서 준비된 음식을 거리낌없이 사먹는 상류층.  요즘이야 이런 정도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 시절의 파리는 참으로 더러웠다.  갑을관계는 여기서도 존재하는데, 이 구조의 가장 하층부에 존재하는 접시닦이생활을 끝내고 런던으로 돌아온 그를 기다리는 것은 다름아닌 빈민구제소.  미리 약속되어 있었던 일자리가 없어지고, 무일푼으로 런던을 살아갈 수가 없는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 되는 셈이다. 

 

이 책이 얼마나 조지 오웰의 실제 낭만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경험한 것이 더하면 더했지 이 작품에서 서술된 모습보다 덜하지는 않았을 듯.  보통 조지 오웰하면 '동물 농장'이나 '1984'를 떠올리겠지만, '카탈로니아 찬가'나 '위건 부두로 가는 길'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훌륭한 르뽀 작가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조금씩 읽으려고 사둔 2차대전 중에 그가 쓴 신문/라디오 사설 모음도 상당히 훌륭한 사료가 된다. 

 

참고로, 영어로 읽을 때에는 조지 오웰보다는 조올지 올웰에 가깝게 읽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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