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만이라는 독일의 작가가 있다.  '마의 산'으로 가장 유명하지만, 내가 접한 그의 첫 작품은 '부덴브로크크 가의 사람들'이다.  기억하기로는 3대에 걸쳐 쇠락해가는 한 가문의 이야기를 그린 것인데, 처음에는 세밀하고 자세한 묘사의 문체가 지겹다가 어느 순간부터 작품 속에 깊게 빠져들 수 있었던 것 같다.  토머스 만을 처음 시작하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책이다.

 

한 가문의 부와 명예가 이어지는 불운과 그릇된 판단의 조합의 결과, 절정기에는 그들만 못하다고 여겨지던 다른 경쟁가문으로 고스란히 옮겨지는 것을 보면서 문득 부라는 것은 결국 유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자기계발서에서 줄창 떠드는 말은 '부'라는 것은 '무한'하기 때문에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노력을 하면, 기타 등등을 하면 가질 수 있다는 말을 한다.  마음가짐을 긍정적으로 갖고 진취적으로 살기 위한 어떤 동기부여는 될 수 있겠지만, 정말로 세사의 '부'라는 것이 무한적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수도권의 아파트 단지 개발을 예로 들자.  한 도시에서 고급 프리미엄이 붙는 지역은 어느 정도 공식화가 되어 있는데, 신규단지로써, 좋은 아파트가 들어서는 곳이다.  5-10년을 두고 이들이 들어서는 재개발지역으로 한 도시의 부와 사람이 이동을 한다면 너무 심한 일반화가 될까?  이들이 빠져나간 예전의 hot spot은 이제 외견상 낮아진 시세 덕분에 보다 더 적은 돈으로 입주가 가능해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덜 부유한 이들, 또는 새로운 지역으로 옮길 수 없는 사람들로 일종의 물갈이를 하게 된다.  이 법칙에 따라 그리고 이를 이용하여 늘상 재개발 열풍이니 하면서 짓고 부수는 것을 되풀이 하는 것은 마치 어린 아이의 블록쌓기를 보는 것 같다.  이를 확대하면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또는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사람과 물산이 옮겨가는 모습을 그릴 수 있는데, 워낙 규모가 크고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기에 그 양상이 쉽게 드러나지는 않을 뿐, 도시에서의 '부'의 이동과 별로 달라보이지 않는다.

 

2012년 이 책을 구입하고 약 일 년 간 천천히 읽다가 만 자리는 대략 3분의 2 정도.  2013년에는 거의 펼쳐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렇게 이 책은 처음의 마음가짐과는 달리 책꽂이에 얌전히 모셔져 있었다. 

 

엊그제인가, 뭔가 프로젝트 삼아 읽어볼 책을 찾다가 다시 빼들은 이 책은 그렇게 하나의 도전이 되어 버렸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함께 많은 이들을 설레게 하지만, 엄청난 페이지 수와 어려운 내용 때문에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잡아 먹는 '마의 산'은 토머스 만의 역작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평판에 충실하게 첫 문장부터가 읽는 이를 확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조이스 만큼 난해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의 산'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지금도 궁금해 하고 있는데, 책을 다 읽는다 해도 과연 그 수수께끼가 풀릴지는 의문이다. 

 

단순히 글을 잘 쓰는 것 이상, 나는 자기의 양심과 의기가 살아있는 작가를 좋아한다.  그것도 순간의 충동에 흔들리는 문사의 감상 따위가 아닌, 깊은 진심에서 우러난 꼿꼿함이 보이는, 악과 부조리에 대해 매서운 글발로 저항하는 작가 말이다.  토머스 만은 그런 작가이기 때문에 더욱 좋아하는데, '발자크 평전'의 쯔바이크의 비극적인 최후만큼이나 토머스 만의 아들인 클라우스 만의 최후는 비극적이지만, 모든 것을 던져 악에 저항하는 사람의 자세로써 손색이 없다. 

 

장정일은 그의 독서일기에서 책은 가급적 한 호흡으로 읽을 것을 이야기 하면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읽히지 않는 책은 열정적으로 쓰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문학을 포함해서 픽션을 읽으면서 잠언과도 같은 작가의 표현이나 말에 밑줄치는 행위를 비판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짜집기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책을 만들기 위해 얼개를 잡고 한 주제씩 채워나간 책은 장정일의 말처럼 한 호흡에 쓰여진 책이 아니기에 한번에 읽히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문학사에 길이 남은 고전의 경우라면 어떻게 쓰였는지에 따라서가 아닌 읽는 이의 수준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 이상 수 많은 이유에 따라서 다르게 읽혀진다.  '마의 산'은 창작을 넘어 시대와 사람을 관통하는 수 많은 명문장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자제하려고 해도, 읽는 중간 중간에 자와 펜을 찾게 된다.  그리고 밑줄 친 문장을 한번씩 그렇게 음미해 보는 것이다. 

 

사람마다 그 경험과 교육수준, 직업 등 다양한 요소에 따라 다양한 책읽는 방법이나 목적을 보인다 할 때,  그의 도서목록과 나의 도서목록에 별로 겹치는 것이 없는 것처럼, 어쩌면 장정일 - 유명한 작가라는 계급장을 내려놓고나면 - 이 책을 읽고 평하는 방식이 어떤 참고를 넘어 꼭 나의 모델이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너무도 좋아하던 선배가 하숙하던 방에 당시 대학원생이던 그의 책을 펴보다가 배운 뒤, 한번도 놓아본 적이 없는, 이제는 온전히 나의 것이 된 밑줄 긋는 독서습관에 대한 변명아닌 변명을 장정일의 글을 접한 후부터는 꼭 한번 정도는 이렇게 쓰고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그 문장을 곰씹을 때마다 나는 그 선배를 생각한다.  그가 내게 해주던 애정어린 충고도, 그를 지키지 못했던 지난 시간도, 치기어린 마음에 그의 복수를 꿈꾸었지만, 아직은 요원하기만 한 그 앙값음도 모두 그렇게 가슴 속 깊이 담고서 말이다.  君子報讐十年不晩 (군자보수십년불만)이라는 말로 자신을 달래보기는 하지만, 가끔 이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움과 함께 아직 내가 원하던 위치에 오르지 못했음을 탓하곤 한다.

 

'마의 산'과 함께 유명한 '파우스트 박사'와 '요셉과 그의 형제들' 또한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독일어를 영어로 번역한 본은 언어적인 부분 때문이 아니라도 쉽지는 않을 것 같아서 영문과 한국어 두 가지를 모두 구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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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02-28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마스 만은 아직 접해보지 못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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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주말 보내시구요~ ^^

transient-guest 2014-03-01 05:13   좋아요 0 | URL
저도 우연하게 읽었는데 의외로 '마의 산' 같은건 인용되는 책이 많기에 토마스 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뭐랄까 색다른 재미와 어려움(?)이 있습니다.ㅎㅎ 서재에 일단은 답글을 드렸습니다만, 결정에 따르겠습니다.ㅎ

2014-03-03 1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04 0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04 1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05 0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4-03-05 10:22   좋아요 0 | URL
알려주신 이메일 주소로 발송했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

transient-guest 2014-03-06 02:14   좋아요 0 | URL
너무 감사합니다. 잘 사용할게요.

아이리시스 2014-03-04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처럼 두가지언어가 안되는 사람은 일단 누군가에게 토마스만이 원서로 읽한다는 자체가 신기한것 같아요. 토마스 만은 우리말로 되어있어도 안 읽히는데.. 이책은 1차적으로 언어적 어려움이 아니지만, 어떤 책이든 영문판을 tran님이 쭉쭉 읽으실거란 사실 자체가 신기해요. +_+ 우왓... 저는 다 못읽어봤어요ㅠ.ㅠ 단편집만 읽었어요, 여기있는책들도 조만간.. 서른다섯이 되기전에...( '')

transient-guest 2014-03-05 01:51   좋아요 0 | URL
지금 '마의 산'을 조금씩 다시 읽고 있어요. 확실히 처음보다는 더 눈에 잘 들어오는 것 같구요, 또 중간에 막히면 그 의미를 이해할 때까지 곰씹어 보게 됩니다. 말이 길고 장황하다거나 등장인물의 다음 행동을 설명하려고 가끔 부연설명이 긴데, 여러 번 읽게 되네요. 천천히 읽다보면 한 권씩 어쩌면 평소에 많이 접하지 않는, 덜 익숙한 책도 보시게 될거에요.ㅎ 저도 영문은 한글같이 쭉쭉은 아니구요..그냥 익숙한거죠..

노이에자이트 2014-03-09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마스 만의 장편 중에 <펠릭스 크롤의 고백>이 있는데 꽤 재밌어요.한 번 읽어보세요.저도 <브텐부로그 일가>가 <마의 산>보다 재밌었어요.아무래도 가문의 흥망사 이야기는 읽는 재미를 주는 듯해요.

transient-guest 2014-03-10 12:10   좋아요 0 | URL
토마스 만의 작품은 하나씩 읽어갈 예정이니까 추천해주신 책도 일단 보관함에 넣으려고 찾아봤는데 안 나오네요. 어쩌면 헌책방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어요.ㅎ '마의 산'은 확실히 더 어렵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쇠찌르레기 2022-10-01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짜집기 X
짜깁기 O
 

부자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누구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정확하게는 돈을 벌기 위해서인데, 돈을 번다는 것은 결국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함이니 삶 = 일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아주 드문 경우, 취미 = 일 = 삶이 되는 경우를 볼 수 있지만, 이는 말 그대로 매우 적은 숫자의 사람들에게 국한된 것이고, 이들 중에도 실은 취미 = 일 = 삶이라는 형태가 가공되거나 과다하게 포장되어 팔리는 걸 보면 실제로는 이 삼박자가 맞아떨어지는 삶이라는 어렵다. 

 

물론 취미 = 일 = 삶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일 = 삶이 차지하는 빈도를 줄이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이 역시 자주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오로지 인간에게만 통용되는 사치나 욕심이라는 것, 물욕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범위에서 예상할 수 있는 욕심, 예컨데 교육열이나 문화욕구 같은 것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면 어느 한도내에서는 생활을 영위하는데 드는데 필요한 재화의 양이 낮아지고, 이에 따라 조금 더 많은 시간을 일이 아닌 다른 것을 하면서 보낼 수는 있다.  다소 보헤미안적이기는 하지만, 인간극장 같은 프로에서 어쩌다 소개되는 사람들의 사연을 보면 결국 도시라는 구조에 붙어 사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도시의 삶이 요구하는 막대한 비용을 벌어들여야 하는 필요를 벗어난 삶을 찾아낸 이들이 있기는 하다.  여기서 포기할 것은 안정적인 직장, 도시의 분주하지만 화려할 수도 있는 cliche, 문명의 이기, 그리고 아이나 교육인 경우도 포함된다.  

 

기실 인터넷과 케이블 또는 위성방송이 일상화되고 노력여하에 따라서는 산골이나 어촌의 한적한 마을에 칩거하는 삶이라 해도 세상 돌아가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고, 벽촌의 삶에서 문제가 되기도 하는 전기공급 같은 것도 태양열 발전기 설치를 통해 많은 해결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전기만 제대로 들어와도 냉난방부터 물사용까지 거의 모든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원한다면 칩거하지만, 최소한 세상만사를 virtual하게나며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일 또한 자기 재주껏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갖춘 상태라면 디자인이나 프로그래밍 계통의 일은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법무, 세무나 번역 같은 일도 가능은 하다.  시급직이고 계약에 임시직이니만큼 4대보험도 없고 돈도 짜겠지만, 높은 개인생산성, 그러니까 봉급을 위해 지출되어야 하는 일종의 생산단가가 낮으니만큼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서울에서 거주하면서 월 500만원을 받아도 사실 거주비용과 교통비, 생활비, 그리고 도시에 살기 때문에 발생하는 각종 비용을 생각하면 많으면서도 부족할 수도 있지만, 수도권을 벗어난 삶이라면 그 반을 벌어도 훨씬 풍족할 수 있을게다.

 

일에 쓰는 시간이나 부담이 적다면 그 남는 시간은 취미생활이나 배움에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운동을 못하는 어린아이였던 나는, 정작 나이가 들어버린 지금에는 운동과 몸을 쓰는 것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지난 5년 간의 꾸준한 단련으로 근력이 조금 세졌으니까, 다른 무술을 배우거나, 남보다 조금은 더 재주가 있다고 생각되는 외국어를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생활이라면 책을 원없이 읽을 수 있겠지 싶다.  집 한 구석, 마당 한 구석에 책을 읽기 좋은 공간을 마련할 것이다.  거기에 벚꽃나무라도 몇 그루 심는다면 봄에는 꽤나 운치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의 삶을 벗어날 수가 없다.  말은 쉽지만 삶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꾼다는 것은 큰 모험이고, 그 모험이 장기적으로 성공할 지에 대한 자신도 없거니와, 기본적인 준비를 위한 비용 또한 마련된 것이 없다.  사실 넓디 넓은 미국에서 물산이 풍부하고 사람이 많이 몰려있는 동부나 서부를 벗어나더라도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내가 하는 일은 큰 무리없이 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러면 무엇이 당면한 문제일까?  우선 이주하고자 하는 주의 면허를 따야한다.  내가 속한 주는 워낙 많은 사람이 모여들기 때문에 시험도 어렵고 면허도 다른 지역과 통해있지 않기에 나 역시 다른 주의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런데, 시험을 본 것도, 공부를 한 것도 모두 까마득한 옛 일이라서 이에 대한 어려움 있다.  그 어떤 것보다도 큰 걸림돌이다.  공부도 다 때가 있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괜한 것이 아니라고 새삼 느낀다.  

 

시험이 되면 다른 것은 나 아닌 다른 주변의 사람들을 설득하는 문제가 된다.  우선 시험이 된다면 그때의 업무량과 준비상태를 보고 판단할 일이다.

 

카잔차키스가 영국을 돌아본 시기는 1940년을 전후한, 독일이 일으킨 영토침공이 대륙을 넘어 확전되던 때였다.  거기에 1차대전 이후 점점 그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이 눈으로 보이고 몸으로 느껴지던 시절의 영국이었다.  거기에 사회의 양극화, 그러니까 귀족과 신사로 대변되는 상류계층과 그 하부구조를 받치고 있던 노동자 계급의 대립과 차이가 뚜렷하던 그 시절 그가 영국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눈으로 내가 들여다본 것은 제국에 대한 그리스인로서의 부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양면성 - 키프로스의 독립을 둘러싼 - 그리스에서는 볼 수 없는 활력과 힘, 자기최면이나 요망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리스가 같지 못한 영국 사회의 다이나미즘.  그 시절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문화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오래된, 하지만, 고대 제국과 영광의 잔재만 남아있던 그리스를 보면서 느꼈을 비애.  모레아와 지중해, 중국과 일본, 스페인과 러시아까지 돌아본 그의 여행편력이 부럽기 그지 없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즐거움에 그치지 않고 이를 하나의 작품으로 녹여낸 그의 필력 또한 그 부러움의 대상이다.  기행문임에도 불구하고 한 통의 사진도 들어있지 않았다는 점이 그 힘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가 묻는다.  영국은 제국의 경영자로써 그 품위와 공정성을 영국 자신의 이익이 걸린 일에도 적용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가 21세기의 제국을 꿈꾸는 모든 나라들에게 묻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최근에 나온 그의 빌-산-버린 책 3이 2주 정도면 내 손에 들어온다.  그간 장정일이 쓴 독서일기 일곱 권, 거기에 빌-산-버 두 권에 공부까지 모두 열 권의 독서일기를 읽었다.  비교적 요즘의 책에서는 약간 덜하지만, 정말이지 그가 읽은 책과 내가 읽은 책이 만나는 지점이 없다는 사실은 황당을 넘어 허탈하다.  주체할 수도 없이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라지만, 그와 나의 독서궤적이 이렇게 엇나갈 수 있을까?  

 

이런 경향은 초기의 독서일기에서는 더욱 심하다.  그러니까 90년대의 책만 해도 내가 읽기는 커녕 들어보지도 못했고, 어쩌다 아주 우연히 운 좋은 날 헌책방에서 마침 떠올리지 못한다면 만날 수도 없을 책들이 가득하다.  이런 점에서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훗날 자기계발의 광풍과 함께 몰아닥친 독서경영서적과는 확연히 차별된다.  일례로, 내가 가진 독서경영서적이나 작가등단을 위한 독서후기서적을 몇 권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학서적, 계발서적, 에세이류가 등장하고 내 눈에는 꽤나 비슷한 단상을 제공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어쩌면 이다지도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비슷한 책을 썼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비해서 장정일의 독서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한 사람의 침잠을 보여준다.  특히 다른 그런 류의 책들과는 달리 장정일의 독서일기에는 좋은 책과 나쁜 책 모두 후기를 적어놓았기에 더욱 빼어남과 솔직함을 느낀다.  

 

일찌기 공무원이 되어 8-5시까지 일을 하고는 발을 씻고 저녁을 먹은 후 자기 전까지 책을 읽는 삶을 생각했다는 장정일은 작가로서의 유명세 만큼이나 정말 많은 책을 읽은 사람이다.  요즘의 신진작가들이 입에 붙은 말이 책을 별로 읽지 않았어도 글을 쓰는데 지장이 없다는 것인데, 그들의 신선함과 대중성을 좋아하면서도 그만큼 느껴지는 가벼움과 얕음은 그 자체로 그들의 깊이를 보여준다.  요컨데,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좋은 글을 쓰려면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나도, 어쩔 수 없는 고시대의 유물같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이다.

 

여행과 독서가 지속적으로 가능한 삶.  마음이 편안하고 몸을 단정히 할 수 있는 삶에 드는 비용은 얼마나 될까?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일과 공부를 병행해야할 이유가 된다.  다음의 삶을 준비하는 자세로써 말이다. 

 

고작 책 두 권에 참 많은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문득 조금은 반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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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2-24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이책도 책이면서
삶책도 책이기에,
종이책을 많이 넘기지 않았어도
온갖 삶을 부대끼면서 한 해 두 해 이은 나날은
기나긴 '여행'이 되면서 '책읽기'였구나 하고 느끼기도 해요.

transient-guest 님 또한
종이책뿐 아니라 삶책을 늘 아름답게 누리면서
하루하루 씩씩하게 걸어가시리라 생각해요~

transient-guest 2014-02-25 04:57   좋아요 0 | URL
아마도 지금의 생활과는 다른 삶을 꿈꾸는 것이 여행과 책에 대한 바램으로 나타나는 것인가 봅니다. 자기 자리보다는 다른 곳을 보는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싶네요.

감은빛 2014-02-25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상하게 장정일에게 거부감이 들어 읽어본 적이 없네요.

여기 알라딘에는 비슷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계실 듯해요.
어디 시골에 박혀서 평생 책만 읽고 싶다는 생각을 갖거나,
이 글의 제목처럼 여행과 독서를 간절히 원하는 분들이요.

현재의 삶의 틀을 바꾼다는 것은 큰 모험이죠.
언젠가는 꿈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transient-guest 2014-02-26 02:04   좋아요 0 | URL
장정일의 거침없는 평과 말투가 때로는 너무 offending한 면이 있어요. 그게 부러울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더라구요. 제대로 된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어요.

알라딘 마을이라도 만들어서 분양하면 어떨까요?ㅎ 평생 책 읽고 책 이야기 하면서 사는 마을...-_-: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을 습득하고 실천하는 순간 꿈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ㅎ
 

일을 하다보면 항상 느끼지만, 업무는 언제나 한꺼번에 몰려들어온다.  작년 이맘때와 비교하여 현재까지 확실히 더욱 바빠진 것을 보면서, 금년에는 안정권에 들어올지 기대하고 있는데, 연말 결산을 하는 12월에는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지난 주 일요일과 연휴였던 월요일을 꼬박 사무실에서 보내면서 책을 읽을 여유가 없었던 것이, 주말근무 덕분에 약간은 정상화가 된 평일 저녁 때 시간을 만들어 주었기에 몇 권 챙겨 볼 기회가 있었다.  사람의 생체시계라는 것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통상 연휴 월요일 휴무 후 화요일에 출근을 하면 월요일 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일-월요일에 출근을 한 내 몸은 화요일을 마치 수요일처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체리듬과 시계를 결국 자연조건에 더 맞추는 것이 그 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건강을 위해서 말이다.

 

오묘한 크리스티 여사의 창작은 추리소설을 고대 이집트로 옮겨 놓았다.  대영제국에 해질 날이 없던 식민지 시대에 대한 오마쥬였을까?  이집트는 그 많던 영국의 식민지의 하나였지만, 북아프리카의 중요한 거점이었고, 그 이상,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써, 큰 의미가 있는 지역이었을게다.  거기에 사막 한 가운데 거대하게 솟아있는 피라미드는 그때나 지금이나 시간의 영속성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인간사를 느끼게 해주었을 것이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써 이집트에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나이든 아버지의 첩이 일으키는 시기와 질투로 인해 끄집어내진 마음속 깊은 곳의 본능으로 인해 벌어지는, 재산과 상속자리를 둘러싼 음모와 살인이 주된 내용이다.  언제나처럼 크리스티의 교묘한 장치는 끝까지 진범을 찾기 어렵게 만들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의외로 가까운 곳에 놓인 범인을 추적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다른 재미다.

 

가끔씩 복잡한 머리를 식히는데에는 무협지나 판타지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추리소설이나 SF도 좋지만, 오랜 작품일수록 내포하고 있는 철학이나 의미가 깊어서 선뜻 손에 잡히지 않을 때도 있는데, '가즈 나이트'급의 가벼운 판타지는 쉽게 읽을 수 있어 좋다.  굳이 작품성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싶다.  하이텔이나 PC통신 시절에 나온 국산 판타지는 나쁘게 말하면 서양 판타지나 세계관을 빌려온 아류작 같이 느껴질 때가 많은데, 그러니만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을 갖고 있는 분야라서 더 이상의 말이 조심스럽다.  차원과 세계가 합쳐지려는 위기를 헤쳐나가는 것이 이번 4 권의 주된 내용이다.  나쁜 놈은 언제나 일본국적...

 

엊그제 읽은 카잔차키스의 '영국 기행'은 따로 정리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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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2-23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이 바쁘다고 한다면
할 일이 많다는 뜻이요
그만큼 일이 잘 된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즐겁게 일을 잘 다스리면서
아름다운 책도 즐겁게 만나시기를 빌어요.
바쁜 틈에도 차근차근
예쁜 이야기 새록새록 갈무리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transient-guest 2014-02-24 02:48   좋아요 0 | URL
바쁘면 새삼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낄 때가 있어요. 책을 읽고 유유자적하는 것도 열심히 일하면서 짬을 내서 틈틈히 할 때 더 재미있구요. 깊은 독서만큼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책을 계속 읽을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사무실 근처에 있는 헌책방인데, 이름이 재미있게도 Recycled Bookstore입니다.

 

 

 

다운타운 길 위에 바로 위치한 오래된 집을 개조해서 만든 책방인데, 내부는 엄청 넓고 책도 많이 구비하고 있어서 종종 가보는 곳입니다.  사무실에서 걸어서 한 5-10분 정도면 갈 수 있고, 바로 옆에 스타벅스도 있어서 처음에 사무실 차리고는 많이 갔었네요.

 

 

 

 

 

사진을 많이 찍지도 않았고 아무생각없이 내부를 찍은터라 지금보니 올릴만한 사진이 많이는 없네요. 

 

오늘은 책을 딱 세 권만 샀는데, 발자크의 단편모음 장정본과 Dresden Files의 하드커버 중고판, 그리고 무려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영문판을 샀네요.  허/남은 한국어로도 구하기 힘든 것으로 아는데요, 계산을 하면서 주인 아저씨가 그러더군요.  "최근에 가격을 다시 알아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되팔면 더 높은 값을 받을거야"라는...  중고책 거래의 가장 밑 단계에서 암약하는 분들이 종종 가게들을 돌아다니면서 숨은 보물을 찾는다는 얘기는 John Dunning의 Bookman시리즈에서 많이 봤는데 그 비슷한 일을 겪을 줄이야.ㅎㅎ  

 

발자크의 책은 검색이 어렵네요.  어제 구매한 책은 요녀석들입니다.  허/남은 영문본인데, 옛날의 책답게 책주머니가 따로 있어서 더욱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나저나 쓰고나서 보니 허/남 한국판은 구할 수 있는 것이군요.

 

San Jose근처에 또 다른 Recycled Bookstore가 있는데, 자매점이라고 합니다.  책도 많이 갖추고 있다고하니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가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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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2-20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난 이름만큼 재미난 이야기를 길어올릴 재미난 책을
즐겁게 만날 책방이겠지요?

세 권 가슴으로 곱다시 품으면서
즐겁게 웃으신 하루가 노래 되어
이곳까지 날아오네요.

transient-guest 2014-02-20 02:42   좋아요 0 | URL
요즘은 예전만큼 자주 찾지는 못하지만 보물이 많은 곳 같습니다. ㅎㅎ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6 (완전판) - 엔드하우스의 비극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원경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코난 도일은 자신이 창조한 가상의 인물인 셜록 홈즈가 마땅히 작가 자신에게 돌아왔어야 한다고 생각한 모든 명예와 영광을 가져가 버렸다고 느낀 나머지 은밀히 그를 제거해 버릴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홈즈는 그의 천적인 모리아티 교수와의 일전 끝에 스위스 어느 폭포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스토리가 여기서 끝났다면 물론 이 일화는 그리 유명하게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홈즈를 죽인 코난 도일은 수 많은 팬들과 여론의 탄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심지어는 그의 어머니까지도 도대체 왜 홈즈를 죽인것이냐고 물었을 정도로 홈즈를 죽인 댓가를 톡톡히 받게 된 것이다.  길거리에서 폭행을 당할 뻔한 적도 있다고 할 만큼 시달린 그는 결국 홈즈를 살려내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셜록  홈즈는 귀환했고, 스토리는 모리아티 교수를 처리한 후 그의 난폭한 하수인이자 저격수인 모랜을 찾기 위해 은둔한 것으로 일부 수정되었다. 

 

크리스티는 왜 포와로를 죽여야 했을까?  그것도 시리즈 상 초기에 해당하는 '커튼'에서 갑작스럽게 말년의 포와로와 헤이스팅스를 등장시키고 영웅적이지만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한 것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커튼'을 읽은 후로 남은 시리즈를 읽어가는 내내 포와로가 나오는 에피소드는 일종의 후일담처럼 느껴지고 아련한 추억을 명탐정을 그리워하는 나 자신을 보는 것이 이상할 뿐이다. 

 

매 스토리마다 기묘한 트위스트와 중복트릭을 보여주는 크리스티의 소설답게 이번의 이야기 또한 독자와 함께 포와로 마저도 중반까지 속아넘어가는 즐거움을 주는 '엔드하우스의 비극'을 읽는 내내 포와로와 헤이스팅스의 말년, '커튼'에서 본 그 모습이 생각나서 우울해했다.  그 만큼의 몰입을 갖게 된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다소 엉뚱하고 거만하기까지 한 포와로에게 말이다.  남은 이야기들을 읽어가는 내내 조금은 찜찜하고 조금은 서글플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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