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꿈 같았던 휴가에서 돌아왔다.  Big Island는 다음에 푹 쉬고 싶을 때 다시 찾아갈 것이다.  대도시인 Honolulu가 있는 Oahu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특색이 가득한 곳이었는데, 사진은 정리가 되면 조금씩 올려볼까 생각하고 있다.  사진을 잘 찍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 여행의 몇 가지 멋진 풍경들은 사진으로 남기기 잘한 것 같다.   저녁에 와서 자고 다음 날이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밀린 일처리에 일단 사무실에 나갔었고, 연휴인 오늘도 그렇게 반나절을 보냈다.  이쪽의 본토와는 2시간의 시차밖에 나지 않았지만, 여행에서 다녀오면 늘 가서, 또 와서, 한바탕 약간이라도 적응기를 거쳐야한다.  이번에 돌아와서 찾아보니 Maui에도 끝내주는 스노클링 장소가 있어 다음엔 Maui를 가야할 것 같다.


내전은 이어지고, 이 와중에 일단의 웨일즈인들이 수녀원을 습격하려다 오히려 수녀원을 지키려는 농민들과 이들을 지휘하는 한 수녀에 막혀 포로를 남긴다.  약간은 덜렁대는 끼가 있는 이 신분이 낮지 않은 웨일즈인 포로는 자신들이 적으로 돌린 지역 행정과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았고, 협정에 따라 포로교환도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렇게 진행되면 이 책이 추리소설일 수가 없겠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돌아온 행정관은 누군가의 손에 침대에서 죽고, 유력한 용의자는 둘.  그들 각각 충분한 모티브가 있다...는 무슨, 순전히 fake였다, 언제나처럼.  대단한 추리는 필요없었고,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미 범인을 유추해낼 수 있었는데, 결말 또한 언제나처럼, 인간의 법보다 더 중요한 것을 찾으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도덕적'이고 '실리적'인 해결책으로 끝난다.  


법과 질서가 엉망이고 약탈과, 살인, 강간, 방화가 일상이던 시절이라서 그랬는지, 명예를 건 약속에 꽤나 큰 무게를 얹어두고 있는 사고방식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이 시절의 특징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식으로라도 약속을 지키고 협의를 할 무엇인가를 만들어냈어야 하는 시대였을 것이니까.  


또다시 낚였다.  사이토 다카시의 책을 괜찮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 망설이다가 샀는데, 역시나.  내가 성장하고 나이를 먹은 것인지, 저자의 내공이 빠져, 왕년에 힘쓰는 가닥으로 버티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아무튼 이제 사이토 다카시의 신작을 읽지는 않을 것 같다.  결론을 끄집어내기 위한 무리한 인용과 대입은 모든 성공학과 자계서의 어떤 공식과도 같다는 생각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그랬고, 이 책을 읽지 말고, 니체를 사서 읽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니체의 책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을 빼고는 본 적이 없고, 꽤 난해하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입문서도 아니고, 어록도 아닌 이런 어정쩡한 책으로 필요한 구절을 뜯어다가 저자가 말하는 바와 함께 버무려, 니체가 이랬네 저랬네 하는 억측으로 가득한 책을 더 읽어야할 이유가 없다.  젠장.


내가 한국인의 피를 가진 사람으로서 일본의 근대문학을 파고드는 이유는 생각해보면 자주 말하는 사라진 우리의 근대화에 대한 환상을 찾는 것 외에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이들의 문학에서 나타나는 사회상과 식민지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시각, 당시 뻗어나가던 일본의 팽창과 점령에 대한 일반 일본인들의 사고나 생각 같은 것들을 찾고, 증거로도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입만 열면 나오는 '일반대중은 모두가 피해자'라는 둥, '그땐 다 그랬다'는 둥, 아니면 '그런 적이 없다'는 둥의 회피성 발언과 입장에 대한 냉정한 증거는 당시를 살았던 사람을 붙잡에 녹취라도 해야 남길 수 있겠지만, 그 이상 좋은 것은 이렇게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남긴 글에서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화모음과 단편모음인데, 동화를 보면 참도 열심히 서구화하려고, 서구의 방식을 따라가려고 발버둥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기법도 그렇고, 일본과 무관한 소재를 사용한 점도 그랬다.  단편의 경우 번역자의 이름 옆에 '외'를 붙인 후, 각각은 자신의 학생의 번역으로 충당했는데, 무성의한 것인지, 원래 그 바닥이 그런 것인지?  단편 하나마다 번역자가 이런 저런 해석을 달아놓았는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반발심만 불러일으킨 것은 내가 비딱한 탓인지?  


책도 열심히, 운동도 열심히, 일도 열심히, 규모를 키우는 것도 무엇도 열심히.  이번 해는 그렇게 아주 빨리, 그러니까 엄청 빨리 지나간 작년보다도 훨씬 빨리 지나갈 것이다.   결과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정해놓은 목표는 잘 이루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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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절이다.  어디를 가도 호텔에는 인터넷, AC가 가동되고, 공항에서 차를 렌트해서 바로 올 수 있고.  게다가 이곳은 머나먼 섬나라지만, 엄연히 미국의 50개 주의 하나, 정확하게는 가장 마지막, 그러니까 50번째로 편입된, 아니 강점되어 편입되어버린 땅, 하와이다.  오늘 도착했다.  원래 어제 도착했어야 했다.  


원 출발지에서 한 시간 반이나 출발이 지연된 탓에 connection flight을 놓쳤다.  순전히 항공사의 실수였음에도 - crew가 전날 밤에 병가를 냈으면 당장 대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그러나 당일 오전까지 기다렸다가 대체인원을 찾았는데, 이 사람은 FAA 법규에 맞춘 휴식시간을 지냈어야 했기에, 모든 상황이 종료된 시점은 출발에서 이미 그렇게 늦어졌던 것이다.  경유지에 내려서  두 시간 반을 기다린 끝에 하루치 호텔과 식사비용으로 미리 산정되 쿠폰을 받았는데, 결론적으로 호텔은 맘에 들었지만 잃어버린 휴가 24시간과, 그간의 고통과 불만, 그리고 쿠폰을 훨씬 상회하는 식사비용, 거기에 이미 pre-book하여 날려버린 하루치의 하와이 리조트와 렌트카 비용까지가 오늘 도착하기 전에 이미 지불된 이 망할 delay의 댓가이다.  여러분께 권하건데 American Airline은 가급적 피하시라.  이런 종류의 delay는 기본이고, 동시다발적이고, 처리도 엉망에 후속조치 또한 개판이다.  장거리나 단거리 여행을 꽤 다니는 편인데, 지난 십년간, delay도 있었고, 자잘한 문제도 많았었지만, 이런 그지같은 일처리는 처음이었다.  

덕분에 휴양지에서 읽을 책을 몇 권 날려버렸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떠나기 전날 읽었으니까 AA때문에 날린 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신앙의 이름아래 온갖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살아있던 12세기답게, 잠꼬대조차 악마의 행위라고 믿는 수도사들.  이런 잠꼬대를 하는 사람은 갑자기 떠맡겨진 견습수사.  그리고 왕과 황후의 왕위쟁탈전 사이에서 왕의 전령으로 동맹을 확인하는 고위성직자가 사라지는 사건의 배후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호의와 사랑, 배신과 믿음.  이번에는 범인을 추리하기 힘들었다.  전혀 중요하지도 않았고,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은 사람이 뜻밖의 범인이었을 줄이야.


어제 경유지의 호텔방에 틀어박혀서 읽은 책.  오랫만에 만난 터펜스 부부.  벌써 터펜스 부부는 70대를 지나고 있고, 유럽에는 EEC (EC도 아니고 무려 EEC)가 만들어진 시점.  EEC는 1958년에 만들어졌고, 이들이 한창이던 20대의 활약이 1차대전을 전후한 시점이니까, 이들은 19세기 말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들을 다시 만나는 것이 반가웠고, 터펜스는 70대라는 나이와는 달리 모든 면에서 맹랑한 20대 아가씨의 모습 그대로였다.  솔직히 추리와 내용은 무엇인가 예전에 있었던 사건을 찾아가는 내용인데, 이전의 어디에선가 나왔던 과거의 기억속 살인사건을 찾는 것과 닮은 것도 그렇고, 그다지 흥미가 가지 않았던 탓도 있고, 도합 4시간의 스트레스에 지친 머리가 켜놓았던 NFL playoff에 온통 신경을 빼았겨 별로 남아있지 않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는 남자다.  그러나 누군가를 만나거나 그럴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밑줄을 긋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는 때는 거의 없다.  이 책의 정체불명의 남자와는 반대인 것이다.  이곳으로 날아오는 비행기에서 2-3시간에 팟캐스트로 물뚝심송님의 deep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읽었다.  눈으로 빨리 지나간 부분은 다시 읽으면서도 그 정도 시간에 읽었으니까, 깊이 들여다 본 것은 아니다.  나에겐 그리 맘을 울려주는 내용도 없었고, 아주 평이한 이야기와 문체로 그 시간을 보냈다.  이 책 역시 딱 그 정도만 남았으니까, 내 후기는 별로 쓸모있는 내용은 아닌 듯 싶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만날 줄 알았지만, 결국 이는 사랑의 계기가 되었음인데, 이 역시 그리 설득력이 있거나 나의 공감을 뽑아내지는 못했다.  감성은 딱 내 시절의 그것인데도 말이다.  다음의 구절만 기억에 남아 페이지까지 정확하게 기억했는데,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나에 대해 느꼈던 것과 꽤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는 필시 예전의 딴 시대에서 온 사람으로, 다정한 말로 점진적인 사랑을 하고, 사려 깊게 데이트를 하는 사람일 터였다. "


그렇게 난 그저 기다리고 가슴 설레여하던 모습으로 10대와 20대를 보냈는데, 늘 감성이 앞섰던 연애였다.  


내가 보는 요즘 세대의 연애는 껍데기만 '다정하'고 '점진적'인 이벤트를 치루며 '사려 깊은'척을 할 뿐이다.  잘 차려입고, 후까시를 잡고, 이리 저리 모양을 찾아 모두 연예인처럼, TV드라마처럼 되고싶어하는 그런 시절.  


난 90년대에 70년대스러운 연애의 기술을 낭만적으로 바라봤었고, 그 만큼 '딴 시대'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스토너를 제외한 지금까지 읽은 모든 책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냈다.  스토너를 마주할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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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1-11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다릴테니 어서 스토너를!

transient-guest 2016-01-12 00:43   좋아요 0 | URL
네! 읽고나서 생각을 정리하면 바로 써볼 생각입니다.

해피북 2016-01-11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항공사의 문제로 정말 화나셨겠어요. 그래도 남은 시간동안 즐겁게 만끽하시길 바라며 살포시....아주 살포시...하..하와이 보고싶어요! 라고 작은 목소리만 놓고갑니다 ㅎㅎ

transient-guest 2016-01-12 00:44   좋아요 0 | URL
사진을 잘 찍는 편이 아니라서 뭐가 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노력해보겠습니다.ㅎㅎ
 

예전에도 정민 교수가 쓴 책을 읽은 것이 기억난다.  그땐 이런 느낌을 받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맘을 감출 수가 없다.  일본학자들에게 보이는 호의, 그것도 일제강점기시절의 이마니시 류나 후지츠카 치카시에 대한 호의를 보이는 모습 때문이다.  잠시 찾아보니 후지츠카 치카시는 일제강점기 중국-조선-일본의 과거문화교류를 연구했고, 추사에 심취해서 추사에 대한 자료를 일본으로 가져간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강점기시절, 문화유산을, 비록 연구라는 명목이지만, 잔뜩 가져간 사람이지만, 죽은 후 그가 모은 추사관련문물이 유언에 의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덕분인지, 그가 모았기 때문에 미국의 폭격에 사라진 다른 문화유산에 대한 책임이나 기타 다른 문제의식이 없이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정민 교수도 이와 마찬가지로 최소한 일정한 학문적인 테두리 안에서 그를 좋게 평가하는 것 같다.  그런데, 후지츠카는 조선사편수회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와니시 류와 친했던 학자인 듯 하고 (정민 교수에 의하면 이와니시 류의 책인지 무엇인지가 몽땅 후지츠카에게 넘거간 듯 하니 꽤 친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와니시 류 만큼이나 한국 근대사의 학맥에 그늘을 깊은 그늘을 드리운 사람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이들에 대한 정민 교수의 글에서 풍기는 친근함이 불편하여, 난 혹시 정민 교수도 한국에 종횡으로 퍼진 친일교수에서 이어진 학연에 속하는지가 책을 읽는 동안 계속 궁금했었다.  공부와 독서에 대한 좋은 내용, 자료를 모으고 보관하는 방법, 자료에 대한 자세 등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마음 때문인지 한동안 리뷰를 쓰지 못하다가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 잠시 적어본다.  내용을 조금 더 보강하려면 책이 있어야 하는데, 사무실에 있어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어렵지만, 이 책에서 짚어준 것들은 매우 유용한 내용이라서, 나의 이런 편견어린 평가가 조금은 박하기도 한 것 같다만, 어쩌랴.  한국을 떠난지도 벌써 24년이 넘은 지금에도 일제강점기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왜세의 깊숙한 한국침투를 보면 화가 나는 것을.


누군들 안 그랬겠냐만, '세월호 참사'는 작가로써, 인간으로서의 김탁환의 영혼 깊숙한 곳에 무엇인가를 건드린 것 같다.  '목격자들'이란 소설에서 조선의 사건을 빗댄 풍자도 그랬지만, 이번의 산문모음에도 2014년 이 때를 기점으로 그의 글에서, 말에서, '세월호'가 떠날 수 없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제 곧 2주기가 될 이 끔찍한 사건은 아직도 그 배후와 정황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못했고, 유병언과 선원들만이 속죄양이 되어 형을 받았을 뿐, 해경과 해수부를 비롯한 진짜 책임자들과 그 배후일 것으로 강하게 추정되는 국정원과 선사와의 관계와 책임소재는 정부여당의 조직적인 방해로 인해 전혀 수사되지 못하고 있다.  사라진 7시간의 문제도 그렇고, 언젠가 모든 사건사실과 정황을 바탕으로 르포타쥬가 나옴직한 한국현대사의 너무도 많은 미스테리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김탁환이 읽은 책과 세상이야기를 섞은 부분 외에 이번의 책에는 뚜렷하게 깊은 내용은 보지 못했다.  이런 저런 밑줄은 습관적으로 그었지만, 역시 깊은 울림을 주지는 못했는데, 가끔씩 김탁환의 소설이 다소 가볍게 느껴지는 이유다.  간혹 묵직한 글을 지어내기도 하지만, 아직은 조금 더 가야할 것만 같은 그의 소설가로써의 완성으로 가는 길에서 더욱 좋은 소설이 나와도 기쁘겠고, 지금처럼 예전의 유수작품들을 다시 출간하는 것도 좋겠다.  내가 구하지 못한 '압록강'은 언제 나오려나?


'스토너'는 정말 아직도 글을 쓸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아무래도 영문판을 구해서 다시 읽어본 후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참 제대로 마주보기 힘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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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6-01-09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문판을 읽어보고 싶은 유일한 책이예요^^

transient-guest 2016-01-11 13:02   좋아요 0 | URL
저도 곧 구해서 읽어볼 것 같습니다.

몬스터 2016-01-12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주보기 힘든 책은 어떤 느낌의 책일까요? 궁금하네요

transient-guest 2016-01-13 14:00   좋아요 0 | URL
무엇인가 처음 책을 읽을때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고, 읽고나서는 절절함이 가슴에 사무친 듯 먹먹하더라구요. 아직 이걸 정리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거 정말 물건이다.  이런 생각을 책을 읽는동안 계속 하고 있다.  추리의 짜릿한 맛도 그렇지만, 상상력과 역사의 사실을 교묘하게 섞어서 이런 재미있는 시대극을 만들어낸 작가는 정말 대단하다.  애거서 크리스티를 뛰어넘었다는 평이 정확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냥 나온 말은 아닌거다.  브라운 신부와 파인즈의 조합을 연상시키는 캐드펠 수사와 휴 버링가의 관계도 상당히 흥미로운데, 첫 번째 이야기에서를 볼 때만 해도 난 그가 악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캐드펠 수사와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두뇌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그의 선함과 정직함이 드러났고, 지금까지도 그는 캐드펠 수사가 가장 신뢰하는 왕의 고관이로서, 이런 저런 상황에 나타나서 캐드펠 수사에게 도움을 준다.  왕당파가 되어버린 구 황후파인데, 왕권쟁탈전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이 시기에 휴 버링가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도 20권까지 읽으면서 계속 관심이 가는 부분이다.  정말 재미있는 책.


G-20으로 분류되는 국가, 아니 러시아, 인도, 중국은 빼고.  적어도 현대의 법과 질서가 지배한다고 말할 수 있는 (여기서 한국도 일부 빼고) 나라에서는 약자와 소수가 그런대로 법과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주 늦은 시간에 어두운 도시 한 구석을 걷거나 인적이 끊어진 산골, 지방도로를 걸어가는 것은 성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위험한 일이지만, 적어도 일부러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면, 제한된 의미로나마 안전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확대해도 고작 200년이 채 되지 못한 이런 법치질서는 몇 안되는 근대국가의 장점이고 혜택이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실질적인 시점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만 50년 안팎이라고 보지만.


캐드펠 수사가 살던 12세기는 이런 우리의 기준에서 보면 무척 위험한 시대였다.  툭하면 이웃왕국이나 지역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멀쩡하게 해가 뜬 시간이라도 물을 긷던 처녀가 사라지거나 살해당하는 일이 빈번했고, 심지어는 도시 한복판이라고 해도 지역에 따라 위험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감시카메라도 없었고, 인구도 드문드문이라서 아마도 꽤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그렇게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왕당파와 황후파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한 무더기의 불한당이 마을을 습격하고 양곡과 여자를 끌어간다.  이 와중에 수녀원에서 보호받던 귀족의 자녀가 사라지는데, 이들을 찾는 와중에 남매를 보호하던 수녀가 죽은채 발견되는데, 친구와 적의 경계도 분명하지 않고, 사람과의 관계도 일정하지 않게 되어 도무지 범인의 정체를 알 길이 없다.  


캐드펠 수사는 여러 모로 내가 볼 때 성직에 합당한 사람이다.  요컨데 세상을 충분히 경험한 후 자신의 뜻에 따라 수도사가 된 사람이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동경이나 환상으로 수사생활을 망칠 가능성이 적고, 훨씬 더 단단한 마음으로 이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게다가 바깥세상에서 얻는 유용한 지식과 경험은 사건추리에도, 사람을 살리는 것에도 쓰이니 금상첨화다.  


이번에도 남들은 그냥 보고 지나치는 단서들을 충분히 살펴 사건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그는, 그 이상 기쁜 일을 경험하게 된다.  그간의 고된(?) 수사관(?) 행보에 대한 보답일게다.


이름의 끝에 '윈'자가 들어가는 영어권 이름이 한글로 읽으면 꽤 가볍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물론 개중에는 '볼드윈'처럼 영주나 기사의 이름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에드윈'이나 '릴리윈' 같은 이름은 그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의 신언서판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들 수도 있다.  그 '릴리윈'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은 이 작품에서는 '광대'다.  그것도 벌이나 먹을 것이 나쁘진 않았을 궁정의 광대 (court jester)가 아닌 혼자서 떠도는 어릿광대다.  벌이도 시원치않고, 온갖 멸시와 모욕에 익숙해져야 하는 운명은 거의 태어나면서부터 지워지는데, 평생 떠돌아다니면서 남을 웃긴 댓가로 겨우 밥 한술을 뜰 수 있는 이들은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했었을 것 같다.  게다가 마을이나 씨족개념이 강한 시대에 이렇게 연고없이 떠도는 사람은 뒷배경이 하나도 없는 외톨이였을 것이기에 이 책에서처럼 자신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마을 뒷 산의 나무에 매달리기 십상이었을 것 같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이렇게 정황, 그것도 아주 희미한 정황상의 이유로 목이 매달릴 뻔한 떠돌이 광대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이 캐드펠 수사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다른 이야기처럼 범인으로 밝혀지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의 슬픔과 비극이 있는데, 역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12세기는 매우 불합리한 시대였을 것이다.  범인이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 속도라면 2-3월이면 캐드펠 시리즈도 모두 다 읽게 될 것 같다.  그간 쌓아놓은 책도 많고, 들어올 책도 많으니까, 일만 계속 들어와주면 이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읽고, 운동하고, 일하고.  이게 하루의 큰 축이다.  여기에 이런 저런 즐거움을 덧붙여 느낄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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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6-01-08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 건강 챙기세요. ㅎㅎ transient-guest님의 엄청난 독서량을 보고 갑자기 드리고 싶은 말씀이네요 ^^

transient-guest 2016-01-09 02:26   좋아요 0 | URL
결명자차를 구해서 마시려고 합니다.ㅎㅎㅎ 눈건강은 늘 챙겨야죠.ㅎ 감사합니다.

붉은돼지 2016-01-0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건`이라고 하시니 장물애비 된 몸으로 가만히 있을 수 없군요 ㅎㅎㅎㅎ

transient-guest 2016-01-09 02:26   좋아요 0 | URL
절판되기 전에 사들이심이.. 추리소설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라고 합니다.ㅎㅎ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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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리모 레비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서 2차대전이 끝나가던 무렵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가 망한 후에 이루어진 독일의 침공으로 인해 수용소로 끌려갔던 사람이다.  여기서의 경험과 유대인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책을 썼는데, 모든 것을 그렇게 다 털어냈다고 생각하던 무렵 갑자기 자살한 사람이다.  서경식 교수는 쁘리모 레비가 죽은 후 그 자취를 따라 또리노를 돌아다닌 후 이 책을 썼다.  여러 모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서경식 교수를 통해 다른 이들을 만나는 것은 책에서만 찾게 되는 즐거움인데, 문제는 서경식 교수, 그리고 그가 다루는 주제나 인물의 특성상 즐거움은 씁쓸함을 함께 가져온다는 점이다.


악한 사람들을 타자화하여 욕하는 것, 즉 그들은 괴물인 "이해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성을 초월한 괴물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단순하고 쉬운 방법으로 어떤 사건이나 행위를 이해하는 것이다.  서경식 교수가 쓴 이 말 (살짝 paraphrase한)을 본 순간, 그의 책을 읽으면서 느낀 피로감과 절망감의 원인에 조금은 다가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괴물이 자기 자신이나 다른 보통 사람들과 같은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어찌될까..."  '병신년의 얼굴들'이란 제목으로 올린 어떤 사진속의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들 또한 집에 가면 누군가의 엄마이고, 할머니이고, 아내일 것이란 생각에 아뜩해지는 건 이런 이유다.  


일전에 서경식 교수가 쓴 "내 서재 속 고전"을 보는 내내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이유는 그의 삶 내내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 이에 못지 않은, 모국에서의 시선, 게다가 학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국내 공안세력이 조작한 북한 스파이 사건으로 구속되어 고문 받고, 재판을 받은 후 실형을 살았던 두 형들을 생각하면, 그의 인생에서 반대쪽에 서 있는 저편의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시도는...그야말로 심신을 갉아먹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이는 쁘리모 레비에게 있어 독일인을 악마가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면서,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펑범성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그를 "소통 불능의 깊은 균열 속으로 빠져"들게 했음을 서경식 교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사 청산과 화해를 부르짖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없음은 매한가지.  거기다 타자화도 어려운 그들은, 너무도 평범한 선의를 가장하는 그들은  상황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피해자를 가해자로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킨다.  이런 사례는 재일조선인인 서경식 교수가 너무도 잘 알고 있고, 그간 일본의 우익정치인들과 이 땅의 친일파와 독재부역세력을 경험한 우리도 또한 너무 익숙하다.


"일본에서는 예전부터 그때는 '시대'가 좋지 않았고 '전쟁'은 그런 것이며, 일부의 '광신적 군인'이 폭주한 것이지 국민도 (왜왕)도 이 '사실을 몰랐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공생'을 위해서는 서로 '원한'을 버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때 서경식 교수는 "조선인이 일본인에게 '원한'을 품는 이유를 얼마든지 댈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서로'라는 말이" 수상하게 느껴진다.  이런 자들은 한국이나 왜를 가리지 않고 "실제 '증오'의 원인이 된...현실을 개선하려고 하기는커녕 가해자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고, 상처를 치유할 수 없는 피해자에게" 과거를 잊으라고, 다 털어버리라고 강요한다고 한다.  이게 일본의 우익이나 소위 온건중돈만의 현실이 아니라는 점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고, 가끔은 이유도 없이 분노하고 잔인한 생각을 하게 한다.


하나씩 서경식 교수가 저술한 책과 그가 소개한 책들을 읽으면서 천천히 이 가슴아픈 역사를 깊이 가슴에 새길 것이다.  선행학습을 통하여 미리 피로감을 느끼는 체험을 통해, 아무리 심각하고 긴 반동의 세월을 살더라도, 더 나이가 들어도 지치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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