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 누구에게 보여주거나 또다른 특정 목적이 있는 독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권수에 집착하게 되는 때가 종종 있다. 원래 이런 버릇은 없었는데, 2007년 부터인가 연간 읽는 책의 권수를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것 같다. 좋은 점이라면 물론 지금까지의 독서현황을 특히 이 서재에 남기는 행위와 함께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씩은 읽은 책의 권수가 해당 권수에 도달한 날짜에 마킹되어 꽉 찬 달력을 보면서 웃다가 반대의 경우로 텅 빈 달력을 보면 조급해지기도 하거나 내용이나 질보다는 권수에 집착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등의 단점도 많다.
누구나 일상은 바쁘고 정신없이 지나간다. 돌이켜 보면 학생 때에는 그나마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지만, 이는 심한 추정과 기억의 파편을 종합한 "그땐 그랬지"수준의 회고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학생 때에는 오후 5-6시가 지나도 공부를 하러 가는 일상에 대해 생각할 때면, 미래에 직장을 잡고 일하는, 그러다가 종이 치면 퇴근하여 머리 스위치를 꺼버리는 단순반복을 그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즉 갖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버린 시간 또는 다가올 미래의 긍정성만 바라보는 인간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에 어쩌면 나의 사는 모습은 늘 비슷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것은 지금의 나, 매사 지나가버리는 지금이라는 순간순간의 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점점 시간에 쫒기는 하루를 보내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여유가 나지 않는 시간을 보면서 자칫하면 나의 독서가 또다시 암흑기에 돌입할 수도 있다는 약간의 위기의식을 느낀다. 그렇게 버릇처럼 책을 사들이면서 읽지는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은 모든 독서광이나 장서가들이 조심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어제 그런 의미에서 마음을 잡고 몇 권의 소설과 역사강의를 읽어 내려갔다. 마중물을 부은 것이리라.
지난 번에 찾아보니 "R"시리즈는 일종의 reboot으로써 새로 나온 시리즈 같다. 그러니까 이번에 다 읽은 15권은 오리지널인 셈이다.
한국의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은 소위 대본소 소설과 한국적인 정착시도 사이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일례로 많은 사람들이 이영도의 '드레곤 라쟈'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전민희 작가 외에는 다소 폄하하는 것을 보는데, 내 개인적으로는 이들 사이에서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세계관이나 구성은 초기 D&D에서 많이 빌려왔고, (이는 나중에 D&D에서 copyright를 주장하고 도용방지공문을 보내게 했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읽은 것 같다) 이름을 비롯한 서양적인 용어는 기실 서구적이기보다는 한국적이기까지 할 만큼 얕은 언어학적 지식과 상상의 결합물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차원적인 부분이나 신계의 복잡한 구성 등은 동양적 사고에 기반에 창작으로 보이는데, 흠이라면 확고하게 다듬어지지 않아 적어도 이 시기의 '가즈 나이트'는 PC통신 수준을 크게 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재미있게 읽었고, 그 희소성이나 가치를 볼 때 노골적인 대본소 소설을 지향한, 이름도 생각나지 않은 작품들이 아니라면 앞으로도 계속 볼 생각이다.
'정도전'이 큰 화두다. 드라마의 시작을 전후로 하여 이런 저런 밑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많은 작가나 학자들이 섭외가 되었던 것 같고 여기에 착안하여 기획된 많은 책이 드라마와 거의 동시에 나오게 된 것 같다. 개인적으로 즐겨 읽는 김탁환의 책은 아직 구하지 못했고, 일전에 주문한 이덕일의 강의록을 어제 읽었다.
분명히 기억하지만 내가 어릴 적 정도전은 고려를 무너뜨린 '나쁜 꾀'를 낸 사람, 그리고 이성계에 붙어 '좋은' 군왕감이던 왕자 이방원을 몰아내기 위해 측실의 아들을 왕으로 추도한 '모리배'로 그려졌었다. 내가 지금도 갖고 있는 역사개론서 또는 그 시절의 책에서 그리는 정도전의 최후 또한 간신이 모략을 성사시킨 후 기분 좋게 술이나 마시고 놀다가 갑자기 기습당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반만 맞는 것 같다.
저자가 말하는 정도전은 사대부의 통치에 의한 이상국가를 꿈꾼, 아마도 우리 역사에서 흔하지 않는 소위 큰 판을 볼 줄 아는 책사였다. 대체로 우두머리에 의해 주도되는 우리 역사에서 책사의 위치는 딱 그 정도까지였다고 하는데, 일견 틀린 말 같지는 않다. 특히 조선시대 이후 현세까지도 우리에는 과연 '왕'을 움직여서 경세지략을 현실화하는 '책사', 그러니까 '킹메이커'말고, 자신의 사상이 확고한 '왕사'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는데, 이렇게 정도전이 부각되는 시대상은 결국 '정도전' 같은 책사를 원하는 세태의 반영이라는 것인데, 저자의 말에 따르면 '영웅을 원하는'시대는 '불행한'시대이니 적어도 작금의 대한민국의 '불행'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아직 정도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여 그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겠다. 게다가 이제까지 충신으로 배운 최영장군이나 정몽주에 대한 이야기 또한 정도전을 재평가하면서 잘해야 시대에 뒤쳐진 자들, 심하면 수구세력으로 다시 이야기되는 것 또한 심히 혼란스럽다. 아무래도 요즘에 나오는 책들 이상 과거의 책들, 그리고 평설이나 통사 형태의 책에서 다룬 정도전 또한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어쨌든 요즘의 화두와도 같은 '정도전'에 대한 한 갈래의 이야기로 보고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이덕일의 사관은 잘못 보면 국수주의적일 수도 있고 혹자가 폄하하듯이 만선사관의 계승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고토회복이나 한국 민족주의관점에서의 역사회복과 단순한 만선사관과는 큰 차이가 있는데, 이런 부분은 이덕일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애써서 외면하는 것 같다), 이덕일은 적어도 기득권에 붙어 학자로서의 양심을 포기한 파충류의 뇌를 가진 그들에 비해 순수하고 그들보다 더욱 정확한 사료적 관찰과 해석에 입각한 것이기에 그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