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즐겨찾던 Santa Clara도서관은 이번에 보니 군립도 아니고 산호세시립도 아닌 말 그대로 산타클라라시립도서관이다.  내친김에 오늘 온라인으로 대출카드를 신청했다.  아무때나 30일 안에 가서 마무리하고 픽업하면 그만이다.  남들은 다 알고 있는 것을 나만 이제서야 이용하게 된 것이지만, 상당히 즐겁다.  군립도서관에서는 특히 한번에 100권까지 빌려 보톹 3주까지 갖고 있을 수 있으니까 사실상 무제한으로 책을 빌릴 수 있는 시스템이다.  


금요일 오전인가 목요일인가 우리 unit의 지붕 밑으로 지나가는 수도관파이프에 문제가 생겨서 시작된 공사의 마무리가 오늘까지 이어진 탓에 오후 세 시가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출근하지 못하고 있다. 대략 오전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하여 오전업무에 필요한 서류만 갖고 왔기에, 점심을 먹고나서는 책을 읽고 메일에 답변을 쓰는 등 월요일치고는 가벼운 잡무처리만 하고 있는 셈이다.  남의 돈을 벌어주기 위해 바쁘게 뛰던 예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여유니까, 너무 자주 이렇게 지내지 않으면 괜찮을 것이다.  


오후에 잠깐 출근하여 몇 가지 업무처리를 하면서 다시 도서관에 들려서 읽은 책을 반납하고 새 책을 빌려올 계획이다.  사무실에서 걸어서 5-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니까 점심시간에을 이용하면 운동삼아 다운타운을 한 바퀴 돌면서 들릴 수도 있다.  이것으로 당분간은 점심 때 멍하게 일을 하거나 빠른 식사를 끝내고 할 일이 없어 다시 업무복귀를 할 필요가 없이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 100년이 조금 넘은 국민학교건물을 개조한 사무실건물에는 중앙정원이 있는데, 제대로 즐기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역시 여유가 아쉬운 거다.


아무래도 오후 4시나 되어야 상황이 종료될 것 같은데, 몇 가지 일처리를 더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이 슬슬 든다.  천천히 하나라도 일처리를 하면, 매일 그렇게 조금씩 일을 하면, 급한 상황이나 가끔 발생하는 큰 업무가 아니면 하나씩 케이스가 처리된다.  그런 생각을 하면 오늘은 skip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반대로 그래도 사무실에 나가서 조금은 일을 해야지 라고 생각을 하면, 맘이 급해진다.  


일단 언제 집을 나설 수 있는지에 따라 결정을 해야겠다.  12시 정도에 점심을 먹었는데, 살짝 출출한 것이, 한국에 있었다면 짜장면을 시켜먹으면 딱 좋을 상태다.  업무때문에 밤을 넘기는 일은 좀처럼 없지만, 가끔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처럼 맛난 것들을 한가득 사들고 오피스텔에 들어가 푸짐하게 차려놓고 흘러간 옛날 노래라도 들으면서 밤샘근무에 지친 몸을 달래는 것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겠다.  술과 기생이 있어야만 풍류이겠는가...그렇게 자기 분위기에 푹 젖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비라도 내려준다면 끝내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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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5-10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달부터 공공도서관 1인당 대출권수가 10권으로 개정되었어요. 저처럼 신간도서를 안 사고 도서관 책을 빌려 읽는 사람이 많아지겠죠? ^^;;

transient-guest 2016-05-11 02:41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도서관을 더 자주 이용할 것 같습니다. 막소설도 읽으면 재미있는데 살 생각은 없어서 놓치던 것들이 있거든요. 종류가 많지는 않아도 도서관 마다 책장 한 두개 정도의 한국책이 있으니까 조금씩 골라 보려구요. 어제도 가서 10권인가 들고 왔습니다.ㅎㅎ 한번에 100권까지 가능하니까요..ㅎㅎㅎ

몬스터 2016-05-10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짜장면 먹은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납니다. ( 그래서 사는게 우울한가 봅니다. ㅎㅎ ) , 군만두도 맛나는데. 그쵸?

요즘 느끼는데 나이 먹을 수록 , 자기 분위기에 자주 빠질 수 있는 능력이 더 필요한게 아닐까 합니다. 저도 ( 여러모로 ) 노력중입니다. ㅎㅎ

transient-guest 2016-05-11 02:42   좋아요 0 | URL
그곳은 한국음식을 드시기 어려울 듯하고 아무리 중국음식점은 세계 곳곳에 있다지만, 짜장면을 하는 곳은 없을 것 같아요..-_-: 저는 짜장면과 탕슉ㅇ...
어릴 땐 남이 나를 규정하는 경우가 많고, 나이가 들수록 자기세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늙어가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습니다.ㅎㅎ 그저 열심히 살아야죠..ㅎ

yamoo 2016-05-11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한 번에 100권을 빌려볼 수 있다니!!! 미쿡은 참 도서관이 좋군요~

트랜스 님 덕택에 미쿡 도서관 문화도 살짝 엿볼 수 있어 좋습니다~ 이런 페이퍼 종종 부탁드립니다!^^

transient-guest 2016-05-12 01:30   좋아요 0 | URL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100권이면 진짜 무제한인거잖아요..사실상..ㅎ
종종 포스팅 올리겠습니다.ㅎ
 

여유를 이야기할 때 흔히 '평일 오후 3시에 여의도 공원을 걷'거나 그렇지 못한 것을 기준으로 표현하는 것을 본다.  실제로 이 비슷한 이야기는 누군가가 회사를 그만둔 그날 오후 3시에 여의도 공원을 걸으면서의 맘을 쓴 것인데, 출전은 기억나지 않는다.  벌써 2016년의 5월.  일단은 일정이 조금 정리가 되었는데, 막상 그렇게 되니 겨우 조금씩 할 일만 하면서 burnout된 자신을 추스리고 있다. 원래 이런 스케줄이면 오전에는 업무, 오후에는 영문홈페이지작업 등 다가오는 2017년을 위한 여러 가지 행정적인 처리를 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늘 그렇다.  이건 또 다시 맘을 다잡고 적응을 하면서 시간을 나눠야 슬슬 진행이 된다.  


오후에 잠깐 서점을 나갈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  내가 이곳에서 20년이 넘게 살아왔는데, 5월에 비가 오는 건 처음 보는 듯.  보통 늦어도 4월이면 비가 멎고 11월까지는 비가 오는 걸 볼 수 없는데, 엘리뇨의 영향이다.  그간의 심한 가뭄 탓에 이렇게 비가 오면 그래도 반갑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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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이어쓰기 시작한 건 5/8 일요일.  오전에 잠깐 서점에 가서 bargain으로 나온 책 몇 권을 사서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제 city와 county 도서관 카드를 만들게 되었다.  이들 두 개면 이 지역의 거의 모든 공립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가져다 줄 수 있다.  다른 용도는 없고, 심심하거나, 가진 책이 잘 안 읽어질 때, 한국어 막소설을 빌려다 읽을 생각으로 만들었고, 어제 바로 다섯 권의 책을 빌려왔다.  보통 3주 정도 갖고 있을 수 있으니 괜찮은 수준이다.  도서관 branch에 따라 책장 몇 개에서 한 섹션의 한국어 도서를 갖추고 있다.  덕분에 갑자기 책이 더 많아진 느낌이다. 


저자의 팟캐스트 강연을 듣고 산 책.  남자라면 어릴 때 한 번 정도는 공룡에 흥미를 가져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도 T-Rex와 트리케라톱스 장난감을 갖고 놀았고, 공룡백만년똘이 같은 만화를 보면서 T-Rex = 나쁜 놈, 트리케라톱스 = 우리의 친구 같은 등식을 꽤 오래 갖고 있었다.  과학적으로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지만, 공룡이란 것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저자에 의하면, 연구가 계속되고 발굴이 이루어질 수록, 그리고 현대에 들어 발전된 scanning이나 modeling기술을 적용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공룡의 모습도 계속 변하고 있으니, 지금 '과학적'으로 올바른 이론이 고작 10년 정도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것이다.  워낙 많은 공룡들이 아주 오랜, 인간에게는 영겁과도 같은 세월 이전에 지구를 지배했었고, 어쩌면 인간종 전체의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래 이곳에서 진화하면서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었는데, 어림잡아도 이들 공룡이 지구를 지배한 시간은 수 백만 년이 넘는 것으로 안다.  우리가 아는 틀에서, 인간이 그렇게 오래 산다면 엄청난 변화를 겪을 것이 분명한데, 공룡 또한 그랬기에 이 책에서 특정한 것은 가장 유명한 여섯 종의 공룡이다.  사실 공룡은 그 큰 몸체와 아스라한 기억속의 미스테리 덕분에 괴물처럼 인식되기 쉽지만, 이들은 어떻게 살았는지는 그저 남은 화석으로 추측할 뿐이다.  이들이 '공룡'인류의 전부가 아니고, 다른 종으로, 그러니까 문명화를 이룰 수 있는 수준의 종으로 진화했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했는데, 지금 우리가 보는 UFO는 어쩌면 외계로 갔었던 이들의 후손이 다시 고향을 방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득히 먼 시대, 우리의 기억과 역사가 미치지 않는 시절에 지구에 존재했었다는 고도로 발달한 인간종의 기술문명 이전에, 어쩌면 공룡종의 기술문명이 존재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책에서 다루는 건 이런 주제가 아니지만.


저자는 공룡은 멸종하지 않았고, 새와 다른 파충류 생물로 진화해서 지금까지 우리 주변에 살아있다고 한다. 그런데, 작년 이맘 때 갔었던 타조농장에서 난 이를 실감하는 경험을 했다.  타조의 얼굴과 눈을 보면서, 무엇보다 튼튼한 다리를 보면서 난 새의 조상이 공룡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현재의 학술에 의하면 새는 공룡의 후손 일부로 분류된다고 이 책에 나와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일 공룡을 보면서 살고 있는 셈이고, 진화는 학술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읽었던 것 같기도 한데, 장서목록을 보내 내가 갖고 있는 히가시노의 책은 아니다. 아마도 이런 비슷한 모티브의 만화책이나 다른 작품과 혼동한 것 같다.  

결혼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죽은 여자.  그녀의 사촌자매, 부모, 오빠 등의 가족과 약혼자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인 곳은 대기업의 오너인 망자 아버지의 별장.  그런데 이 자리는 그녀를 추모하기 위한 자리에서 어떤 계기로 그녀가 살해되었다는 추리를 논증하는 것으로 바뀐다.  다양한 트릭과 장치, 그리고 grand finale까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안배까지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히가시노의 책은 빠른 페이스로 쭉 읽어내려가도 큰 무리가 없고, 추리활극의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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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어쓰는 월요일 5/9/2016.


앞서의 책도 그랬지만, 확실히 요즘 읽는 히가시노의 책은 다소 무리하게 트릭을 배치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거의 속임수가 가까운 앞서의 판 뒤엎기처럼 심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clue를 주더라도 독자에게 허용되지 않은 fact로 사건해결의 실마리를 만드는 건 반칙이다.  재미있게 읽기는 했고, 책이 나오던 시기의 유행과도 꽤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는 등 반전을 적절히 잘 사용했다는 생각은 든다. 다만 역시 약간 멀찌감치 떨어진 자세로 즐기면 적절한 활극을 벗어나진 못했다는 생각이다.


빅 픽쳐를 보고 재미는 있었지만, 보관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기에 이 책이 도서관에 있는게 반가웠다.  냉큼 집어들었고,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약 한 시간 반 정도에 깨끗하게 끝낼 수 있었다.  요즘 entertainment비용을 생각하면 역시 이제는 책이 가장 저렴한 오락매체가 되어버린 것 같다.  예전에 스티븐 킹 소설을 잔뜩 집어들고 헌책방 계산대에 섰을 때 들었던 말 같은데, 정말 그렇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모든 것을 잃고 - 역시 불륜테마 - 파리로 넘어온 중서부 3류대학 교수출신의 주인공이 겪는 희안한 인생유전과 사건.  추리와 서스펜스, 그리고 약간의 호러물을 넘나드는 장르파괴성이야 현대소설에서 그리 낯선 방식은 아니지만, 설마 스토리가 그런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못했기에 반전은 나름 신선했다.  오히려 이전 작품보다 이 책이 소장가치가 있을 것 같다.


해리 보슈 시리즈가 한국에서도 꽤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일전에 읽은 이 시리즈 최신작을 보고 재미는 있지만 내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읽은 '혼돈의 도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추리소설을 보면 일종의 illusionist의 마술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 방향으로 계속 독자의 추리를 몰아놓고 정작 사건의 단초는 엉뚱한 곳에서 나오는 이 작품도 그런 느낌이다.  좀 생뚱맞지만 '적은 혼노지에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산문집. 작가는 처음으로 본 김영현 선생인데, 학생시절부터 민주화운동으로 옥고를 치룬 바 있다.  박정희정권에서, 그리고 전두환까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사상의 바탕을 굳건히 지키고 계시는 듯.  저서를 찾아보니 꽤 많이 나오는데, 동화도 있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쓴 책도 있으며, 심지어 선도기공에 관한 책도 있으니 연배에 맞게 상당한 다작인 듯 싶다.  


짧은 글을 모아 책 한 권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깊은 울림을 주는 건, 이분이 작가가 되던 시절만 해도 지금과는 달랐음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사실 모든 것이 제도화되고 규격화되어 찍어나오는 요즘의 세태에 따라 작가도 작품도 그렇게 문창과->문학상등단 혹은 출판으로 이어짐에 따른 공장도 제품의 느낌을 많이 받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얘기다.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를 따지자는 것도 아니지만, 대략 80년대 말까지, 그러니까, 아직은 작가들이 '교수'자리를 차고 앉기 전, 기껏해야 수도권의 이러 저런 글쓰기 강사로 들어앉기 시작한 그 시절까지만 해도 글을 쓴다는 건, 엄청난 세월의 습작과 자기류의 개발에 공을 들인다는 의미였던 것이, 이제는 작가가 되려고 - 다른 무엇과 똑같이 - 대학을 가는 시대가 된 것이다.  거기서 묻어나는 상업성, 규격화, 제도화, 그리고 줄타기까지, 우리말로 쓰인 현대소설에 조금씩 관심과 애정을 늘려가고 있으면서도 가끔씩 이들이 싫어지는 이유가 오직 나의 편견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데모하던 시절, 글쓰다 잡혀간 시절, 박정희가 총맞아 뒈지고 좀 살만해지나 싶다가 바로 전두환이 그 자리를 찾이하고 벌인 예비검속으로 죽도록 맞고 또 맞고...글쓰는 사람한테도 이렇게 했으니, 어쩌면 전두환이 80년 5월, 광주를 피바다로 만든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일지도 모르겠다.  보통사람이 집권하고 심지어 문민정부가 들어선 다음에도 사회 뒷편에서는 계속 검거와 고문이 이어졌다는 사실도 김선생의 글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는데, 이제와서 보니 90년대에도 계속 된 화염병 시위와 점거농성은 역시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연대생들을 고사시키려고 물을 끊어버리고, 풀어준다는 거짓말 후 뒷문에서 한 명씩 연행되던 그들의 모습이 시대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도.  


박완서선생과의 추억도 여러 차례 언급이 되는데, 개인적으로 박완서선생의 책을 별로 읽지는 않았고, 한때 이민자들 - 정확히는 IMF당시 한국을 떠나던 사람들을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하는 쥐떼로 묘사한 것을 보고 지금까지도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분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문득 이 책에서 또한 여러 번 언급된 김지하를 생각하면서 그가 죽고나면 좋은 말은 별로 못 듣겠구나 싶다.  멀리 있던 나도 생생하던 것이 90년대 운동권의 치열함이고 당위성인데, '죽음의 굿판을...'어쩌고 하던 김지하는 용산을 보고서도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이문열이나 김지하나 얄팍하고 가벼운 문사의 나쁜 모습을 보여주는데, 뭐 그들만 그런가. 박근혜비판에 열을 올리는 도올선생도 잠깐이지만 이명박에게 기대를 했었고, 황석영작가는 역시 엉뚱하게 갑자기 이명박의 중앙아시아 국비낭비출장에 동행하지 않았던가.  괜찮은 작가를 찾은 것 같기도 한데, 내가 받은 impression과 다를까 살짝 두렵기도 하지만, 김선생의 책 몇 권을 더 구해볼 생각이다.  


모어와 모국어가 다른 것임을, 재일조선인의 이슈가 단순한 국가통합이나 민족의 문제 이상의 큰 것임을, 지금까지 이어지는 차별에 있어 한국/북한정부나 일본정부 모두 큰 책임이 있음을 일깨워 준 선생의 책들 중 내가 읽은 3-4번째.  말 그대로 '디아스포라'를 떠돌며 느낀 이야기.  아무리 노력하고 몸부림친들 평생 outsider를 벗어나지 못할 선생의 삶이 가슴아프다.  사이드와 프리모 레비를 주축으로 주류에 편입될 수 없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책은 읽는 내내 속이 불편하고 시릴 수 밖에 없었다.  꾸준히 읽게 만드는 힘은 그 절절한 슬픔과 비통함, 그 이상 속 깊이 다가오는 평생의 투쟁에서 오는 피로감이 아닐까.


평생의 싸움이라면 살만 류슈디 역시 초보가 아니다.  '악마의 시'를 발표한 이래 무척 오랜 기간을 살해위협에 시달렸고 이는 호메이니옹이 죽을 무렵에서야 풀린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한들 그 경험이 사라지겠는가.  

보통 읽는 책은 한중일과 미국/유럽의 모습을 보여주는 매우 편향되지 집중되어 있어서 그랬는지 인도와 다른 소위 3세계의 일상과 사고를 보여주는 지적산책이 매우 즐거웠다.  기발한 이야기도 있고, behind story를 알지 못해 우화임을 알면서도 너무도 난해했던 이야기도 있다만, 동 작가도 그렇게 같은 시리즈로 편집되는 책을 더 구해보고 싶다.  


금-토-일 주말엔 책만 읽은 것 같다.  그야말로 폭풍독서가 되어버렸는데, 일종의 '도서관깨기'도 생각하고 있다.  San Jose 시립도서관이 본관-지부를 합쳐 24곳, Santa Clara 군립도서관이 8군데로 모두 32곳의 도서관 곳곳에 한국어 도서가 흩어져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연고도서관끼리는 빌린 책을 아무곳에나 반납할 수 있어서 읽은 후 다시 먼곳까지 갈 필요가 없어 더욱 그럴 듯 하다.  내가 가진 책도 많고, 이들도 다 못 읽고 있지만, 남이 디자인한 서재를 보는 건 언제나 새로운 경험이고 눈이 즐거운 한때의 모험이다.  전혀 모르는 작가를 발견하기도 하는 등 좋은 경험을 했고, 공립도서관이 책과 음악 CD, 그리고 영화 DVD/BDVD까지 빌려주는 것을 보면서, 돈이 없이도 많은 것을 즐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른 곳도 좋겠지만, 책을 사랑하는 나는 기부를 한다면 조금이라도 공립도서관에 보내야겠다.  그게 지금으로써는 내가 책의 신에게 보답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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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2016-05-10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이 없어도 많은 것을 즐길 수 있구나 하는데서 ( 빙그레 ) :)
계신 곳에서는 한국책 빌려주는 도서관도 있나봅니다. 여기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지 않는 해요. ( 저도 그렇지만 ) 가끔 도서관에 가보면 , 텅-

저도 다시 읽기 생활을 시작해야겠어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transient-guest 2016-05-12 01:31   좋아요 0 | URL
일단 궁금하던 소설을 찾아 읽는 것도 좋구요, 맘만 먹으면 영화나 음반도 빌릴 수 있으니까요, 모두 무료로..ㅎ 여긴 아무래도 아시안 인구가 많아서 한국책도 구할 수 있네요.ㅎ

yamoo 2016-05-11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 진진한 책이 가득하군요! <공룡열전>이 궁금합니다. 교보 갈 때 읽고 와야 겠습니다~ㅎ

폭풍독서...정말 부럽습니다! 정말 대단하신 트랜스님~^^

transient-guest 2016-05-12 01:31   좋아요 0 | URL
나쁘진 않았습니다. 조금 늘어지는 부분도 있는데, 강연을 듣고 읽어서 그런지 괜찮더라구요..ㅎ
 

주말에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건만.  어쩌다 보니 이번 일요일도 사무실에서 반나절을 보내버렸다.  그만큼 내일의 일이 줄어든다는 계산과는 달리, 하지만, 주말에 일을 하므로써 얻어지는 건 다른 일을, 그리고 더 많이 할 시간이라는 역설이다.  그래도 가뿐하게 몇 개의 업무처리를 마치고 어제 IKEA에서 사온 플라스틱 박스에 그간 종이박스에 보관하던 종료된 케이스 파일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여기까지 마치고 나니 대략 오후 한 시반.  gym으로 가서 운동을 하고 집에 가려다가 BN에서 책이나 읽자고 하면서 왔다.  그리고 아이스 커피 한 잔과 앉아서 다시 한 시간 반 정도를 보내고 나니, 어제부터 읽던 장정일의 책이 끝났다.  같이 구입한 공룡에 관한 책을 마저 읽으려다가 조금 쉬면서, 다시 아이스 커피 한 잔을 뽑아 노트북을 켜고 한 켠에 자리를 잡았다.  최근에 알게 된 것인데, 일반 brew커피처럼 아이스 커피도 50센트면 refill이 된다.  espresso야 당연히 refill이 없지만. 어쨌든 덕분에 가끔 시간이 있으면 커피 두 잔을 마시곤 한다.  갑자기 날이 풀려 한껏 봄햇살을 받은 오늘이라면 아이스 커피 두 잔도 괜찮다.  여기에 서점 내의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공짜 WiFi 덕분에 앱을 통해 스트리밍되는 KUSC의 클래식이나 KPLU의 재즈를 듣고 있으니 잠깐이지만 정말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어제 새벽의 감성을 이어 이 책을 읽었다.  앞서의 책이 나오고 나서 3년 정도가 지난 다음에 나온 책이다.  시간대가 달라서였을까, 새벽에 느낀 정도의 필이 충만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 흠이지만, 이 책에서 다룬 또다른 영화들 덕분에 예전에 무심코 넘긴 영화들 몇 편을 다시 들여다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와 잉마르 베리만의 작품들이 지금 생각하는 리스트의 일부.  아무래도 이야기를 듣고나면 좀더 깊은 의미로 다가올 것이기에 이들 영화를 보는 것을 기대하게 된다.  '다운'받는 것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갖고 있는 DVD나 비디오테잎을 뒤져서 꼭 아날로그하게 - 비록 매체가 이미 디지털이고 하더라도 - 볼 것이다.  과정이 결말보다 중요하다는 말처럼, 우리의 일상과 정신에서 하나의 '행위'가 차지하는 부분이 생각보다 큰데,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좋았던 여행도 있고, 캐스트 어웨이를 따라하려다가 실패한 이야기나 어려웠던 티벳에서의 머묾을 보면서, 그래도 비용과 준비차원에서 지원을 받고 이런 여행을 한 후 책을 쓰는 건 참 좋겠다며 계속 부러워했다.  '영리'목적의 여행이지만, 이런 여행과 평소의 감성이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생활속에 녹아있기에 이동진이 읽어주는 책은 한 귀절씩 그렇게 맘속 깊이 들어온다.  평범한 곳이야 나 정도의 초보라도 찾아갈 수 있겠지만, 어떤 지역은 언론사의 취재를 위해 미리 협조를 받아 arrange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들이 있어 살짝 공감도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제공받은 CD의 음악도 듣고 하면서 꽤 좋은 시간을 보냈다. 

다 읽고 나니 살짝 후회가 밀려온다.  사들이고 싶은 책을 가득 추천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정말 "책 많으면 부자"가 아니라 "책 사느라 적자"가 될 판이니까.  그러나 개가 똥을 끊지, 내가 책을 사들이는 걸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43인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났다.  내가 알던 인물은 김기협, 이다 도시, 조용헌을 비롯해 다섯 분도 채 되지 않았던 것 같고, 거의 다 모르는 사람들이, 희곡인으로, 소설가로, 인문학자로, 다양하게 등장했다.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아도 짧은 삶이라지만, 계속 익숙한 것만 보고 듣고 접하는 삶은 - 그 나름대로의 평화가 있겠지만 -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지양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싫어하는 사람의 책을 굳이 사서 보거나 하지는 않고 있다.  기실 공론도 좋고, 공평한 시각도, 열린 마음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아무리 맘을 열고 상대방의 시각에서 보려고 한들, 변희재나 2000년대 이후의 조갑제의 글을 읽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다른 것에도 맘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평소 장정일의 책을 읽으면서는 밑줄을 많이 긋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자유로운 flow를 느끼면서 읽기 위해 아예 자와 펜을 챙기지 않았고, 좋은 말이 있어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과연,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던 때보다 훨씬 더 생각의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전체적인 구도를 보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밑줄긋기가 좋은 습관이기는 하지만, 간혹 밑줄긋기라는 행위에 또는 전체적인 내용을 보는 것에서 멀리 떨어져 그저 좋은 문장을 찾고 있는 건 아닌가 한번 정도 생각하게 된다.  운동도 같은 걸 계속 하면 plateau (사전을 보니 고원현상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가 더 어렵다)가 오는 것처럼, 책읽기도 한 가지 방법만이 능사는 아닐게다.  


어느덧 오후 3시 반.  오전에 UFC를 보려고 했는데, 자다 회사로 뛰어나가느라 놓쳤고, 주말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그래도 꽤 행복한 이틀이었다.  이런 여유가 자주 오지 않기에 더욱 소중한 일상의 추억이 된, 그런 행복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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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6-05-07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가 x을 끊지라니요 ㅋㅋㅋㅋㅋㅋ 제 북플 벗님들은 어찌 이리 다들 재미나신지ㅋ 아, 그런데 구입하셨다는 공룡 관련 서적은 재밌으셨나요? 저도 공룡에 관심이 많아서 혹시 시간나시면 제목 좀 알려 주세요. =)

transient-guest 2016-05-09 07:54   좋아요 1 | URL
ㅎㅎㅎ 박진영의 `공룡열전`입니다. 즐겨듣는 과학팟캐스트 `파토의 과학하고 앉아있네`에서 강연한 것을 듣고 샀습니다. 상당히 up-to-date이라서 과거의 연구역사 외에도 지금 현재 공룡학이 어디까지 왔는지 볼 수 있었습니다.
 

새벽에 일찍 잠에서 깨어나서,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일처리를 한 후, 운동을 하고 왔다.  IKEA에 갈 예정이라서 running이나 cycling은 빼고 - 가면 한 시간은 족히 걸어야 하니까.  어제 맛없는 와인을 3/4병 정도 마시고 음식도 많이 먹고 잔 탓에 조금 무겁긴 했지만, 그런대로 패턴을 바꾼 운동은 할 만했다.  고작 오전 9시 15분인데, 벌써 하루의 여섯 시간 가까이를 보낸 셈이다.  오전에 페이퍼에 글도 술술 풀렸고, 힘을 받았던 덕분인지 잘 안 풀리던 drafting도 한 통 끝내고 나서 맘 편하게 하는 운동이어서 그랬을까.  아주 제대로 아침운동의 뽕발을 받은 느낌이다.  남은 하루도 이렇게 활기차가 지나갈 수 있을까?


아침은 IKEA에서 파는 것으로 먹을 예정인데, Swedish meatball이 맛있기는 하지만 가능하면 훈제연어와 샐러드로 해결할 생각이다.  운동을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해도 몸상태가 확 좋아지지 않는 이유가 나의 경우 섭생의 문제와 상당부분 관련이 있다.  가끔 폭식하는 것, 특히 술과 함께 먹을 때에는 평소 끼니의 정량보다 훨씬 많은 양을 먹는 나쁜 습관이 있다는 것.  운동이 중요하지만, 그 이상 중요한 것이 좋은 음식을 적절하게 때에 맞춰 먹는 것이다.  현대인이라면 대부분 그렇듯이 나의 식생활도 고열량, 고당분, 고염식단을 피해갈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가능하면 적게 먹고, 많이 움직여야 하리라.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꾸준하고 열심한 주색잡기로 30대 중반부터 통풍에 시달리고 있는 형이 한 분 있다.  내가 남은 생을 아무리 난리를 부려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좀 심하게 몸을 굴린 그 형은 한 3-4년 전에 살을 확 빼고 많이 건강해졌다 (물론 통풍이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 증상도 아니고, 식습관과 음주는 바꿨지만, 나머지는 그대로인 탓에 이번에 만나보니 여전히 간헐적인 통풍발작에 시달리고 있기는 하더만).  건강해진 몸으로 주와 잡기를 뺀 나머지에 집중하는 모습은 물론 내가 추구하는 삶은 아니지만, 그렇게 극단적이지는 못해도, 나 역시 좀더 건강한 식습관으로 보다 더 가벼운 몸으로 생활하고 싶기는 하다.  


게을러질 때마다 오늘 아침의 느낌을 기억하며 그렇게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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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2016-05-01 0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하 하 하 , 남은 생을 아무리 난리를 부려도.... 에서 빵 터집니다. 하 하 하 .. 사는 방식은 사람 수 만큼 가지각색인 듯요 , 운동은 대부분 좋아요 , 저는 오늘 줌바 했어요 할머니들과... 좋았어요

transient-guest 2016-05-02 00:20   좋아요 0 | URL
자기가 믿는 바에 따라서,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것 같아요. 저도 운동은 꾸준히 합니다. 주로 개인운동이요..ㅎ
 

내게도 팬심이라는 것이 있을까.  생각해보니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무엇인가를, 또는 누군가를 그렇게 깊이 추종(?)하다시피 좋아한 때가 별로 없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그래도 김광석을 듣고 코드를 따서 어떻게 하면 그 일찍 가버린 가객의 목소리와 기타소리에 가까이 갈 수 있을까 하던 대가 있기는 했으니까, 팬심 비슷한 것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로스쿨 입학 전후의 시기가 될 것이다.  자주 얘기하지만, 그놈의 로스쿨을 다닌 덕분에 이렇게 밥을 먹고 살기는 하지만, 난 아마도 20대의 가장 좋던 시절을 책도, 여자도, 생활도 다 멀리하고 고통과 고뇌의 제단에 바쳐버린 것 같다.  anyway, 그 3-4년, 거기다 시험까지 1년 정도는 책도 잘 안 읽고, 영화는 좀 본 것 같고, 열심히 하던 검도도 그때 다 날려버리다가 막판에 심하게 다치는 것으로 끝장을 보았으니까, 평생의 밥벌이의 댓가로 톡톡히 값을 치룬 셈이다.  그렇게 살다가 2006년 겨울부터 한 두어 달을 놀았는데, 이때 다시 책에 가까이 갈 수 있었고, 이후 2011년에 남의 회사에서의 밥벌이가 끝난 다음 가졌던 두어 달 같의 휴식기 때 무라카미 하루키, 마쓰모토 세이초, 에도가와 란포 등의 작가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여기에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입사하여 "어쩌다" 보니 영화평론이란 것을 하게 된 이동진 이란 사람이 있다.  솔직히 말하지만, 인문학 팟캐스트의 붐을 타고 시작된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란 것을 듣기 전까지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지만, 전문성이 담뿍 들어간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나면 갑자기 학창시절 '별밤'을 - '별밤'이 개판이 되기 전, 그러니까, 이문세의 '별밤'까지 - 듣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덕분에 지금까지 '빨책'을 듣고, 이동진과 또다른 중심축인 김중혁 작가의 책을 읽게 되었다. (사실 '빨책'의 매력은 유쾌한 책수다도 좋지만, 방송 마지막엔가 이동진이 책을 읽어주는 부분이다.  아름다운 theme과 함께 그의 살짝 뜬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주는 책의 한 귀절...) 덕분에 난 김중혁 작가가 고전을 읽지 않는 작가란 사실도 알게 되었고, 이동진을 통해 미야모토 테루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음이다.  


그의 '밤은 책이다'는 솔직히 조금은 딱딱했던 것 같고, 다른 '책'에 관한 '책'과는 다른 감성이라서 그랬는지, 딱히 기억하는 부분이 없다.  책을 읽기보다는 사들이는 '마니아'라는 그는 장서가와 애서가의 경계 어디엔게 서있는 나의 모습과도 닮았기에 그의 책내공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무려 만 여권이 넘는 책을 보관하기 위해 대여점에서 쓰는 rolling bookcase를 주문제작한 일화는 장샤오위안 교수의 방식과 함께 내가 고려하는 미래의 책보관방법이다), 이동진 하면 뭐니뭐니해도 '영화'다.  지금도 유투브에 이동진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온갖 영화대담과 강연, 그리고 방송클립이 나올 정도로 그는 영화에 한해서는 현존하는 몇 안되는 고수들 중 하나라고 하겠다.  현학성이나 견강부회 없이, 그저 아름다운 감성과 장면을 따라가면서도 작품성에 대한 평을 잊지 않는 그의 평은 다른 누구에 의하면 알게 모르게 한국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흥행을 좌지우지'한다고.  


오늘 이 책을 보면서 나도 한번 봤던 영화는 다시 보고 싶어졌고, 그냥 지나갔던 영화는 새삼 다른 의미로 다가왔으며, 못 본 영화는 꼭 한번은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영화의 흥행을 좌지우지'한다는 소리가 괜한 것 같지는 않다.  각 챕터마다 한 편의 영화를 따라가는 여행을 직접 사진기에 담고, 밤 12시 정도의 라디오 방송이라면 딱 어울릴 듯한 감성의 글,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한 여정을 모아놓은 이 책은 토요일 오전 새벽 4시 20분의 지금 딱 반 정도를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만에 깨어난 새벽, 책을 읽다가 문득 한 가득 떠오른 혼자만의 감상, 일종의 충동과도 같은 이 맘을 흘려보내기 싫었기에 페이퍼에 남겨 봤다.  쓰고 나니, 이 시간을 그냥 보내버렸더라면 설사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고 해도, 오늘의 이런 글이 나오지 못했을 것을 알겠다.  나이가 들수록,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아쉬운 법이다.  이렇게 잔잔하게 세상 모든 것들이 잠들었을 시간에 홀로 깨어있는 시간은 그래서 더더욱 소중하다.  오롯히 혼자만을 위한 시간, 공간.  그래서 기도는 새벽에 홀로 하는 것인가보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말은 이럴 때 하라고 만들어진 것 같다.  예전에 버지니아의 폐탄광촌 근처 어딘가에서 서점을 열었던 이야기, 빈에서 갑자기 서점주인이 된 사람의 이야기, 이상북스나 시골의 어딘가에서 책가게를 연 이야기까지 부러움과 아쉬움, 그리고 '그게 되겠어?'라는 맘의 경계를 오가게 하는 책들에 이제 한 권을 더하게 되었다.  오키나와 하고도, 헌책방, 하고도, 열었다잖아?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식의 작은 서점은 역시 일본이 아니면 어렵겠다.  시장통의 다른 가게들 사이에 딱 2평의 공간으로 헌책방을 연 우다씨는 원래 대형서점의 직원으로 오키나와에 2년간 파견을 나왔던 것.  그러다가 오키나와에 주저앉아 같은 자리에 있던 헌책방을 인수하여 경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2평의 서점에서 취급할 수 있는 책의 숫자와 종류는 제한될 수 밖에 없는데,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오키나와에서는 오키나와에 관련되 모든 책, 예컨데, 작가든, 주제든, 사람이든, 무엇이든 잘 팔린다는 점이다.  거기에 일본 특유의 - 오키나와는 사실 일본이 아니지만 - 옛것을 보존하고 유통시키는 자세까지 더하면, 그래도 이 정도 규모의 헌책방을 운영하면서 먹고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일본의 어느 곳에 있을 것이니, 우다씨가 살짝 부럽다.  하루 종일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책 몇 권을 팔고 그날의 양식을 마련하는 삶은 물론 모두의 것이 될 수 는 없겠지만, 그러니까 더욱 부럽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 하나하나는 블로그의 글처럼, 일기처럼, 그냥 하루의 일상을 써내려간 듯, 깊은 내용은 없다.  그저 담담하게, 아주 가끔은 발랄하게 헌책방을 열고 꾸려가는 우다씨의 이야기.  덕분에 이 책을 먼저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의 감성은 반만 읽은 이동진의 책이 먼저가 되었다.


새벽에 눈이 떠졌는데, 그리 피곤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뒤척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꽤 숙면을 취한 것 같다.  몇 개의 일감을 들고 퇴근했던 터라 여섯 시에 gym이 여는 시간까지 조금 해보려고 노트북을 켰더니 이렇게 페이퍼를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35분간, 물이 팔팔 끓어 휘슬소리가 나는 주전자도 간만에 한번 써보고, 역시 간만에 earl grey를 한 잔 마시고 있다.  엘리뇨의 끝자락을 지나는 덕분에 더디게 온 봄을 엘러지로 한 가득 느끼면서 이틀 사이에 헐어, 퉁퉁 부어버린 코끝의 둔중함과 따거움까지 온몸의 감성세포가 한껏 열린 듯한 새벽.  그래도 이제는 춥지 않아서 베란다 문을 열어놓고 식탁에 앉아 있을 수 있다.  


이동진 작가/DJ/기자/평론가가 잠에 드는 시간이 대략 새벽 다섯 시라니까, 지금 시간이면 그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잘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맑은 정신으로 새벽을 맞는 것과 밤으로서의 새벽을 맞는 그의 일상과의 사이 어디엔가 오귀스트 뒤팽과 함께 한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이나 '매리 로저스 살인사건'의 시간이 있을 것이다.  낮에는 두꺼운 커튼으로 빛을 가리고 촛불을 가득 켜서 밤의 시간을 이어가고, 밤이 오면 다시 살아나 인적이 끊긴 거리를 배회하던 그들의 시간은 일견 아름답긴 하지만, Jack the Ripper나 하이드씨 또는 드라큘라 백작의 시간이기도 한 탓에 그 모습을 상상하면 살짝 등골이 시려오기도 한다.  그래도 내가 정상적인 생활이 필수인 보통사람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면 한 일년 정도는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한 오전 6시 정도에 잠이 들고 오후 2시 정도에 깨어나 운동을 하고 (이 시간대의 gym이 가장 덜 붐빈다) 오후 5시부터 일을 하며, 밤 12시엔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대다수가 잠을 청하는 시간부터 TV를 보면서 하루의 피로를 끄다가 책을 붙잡고...그렇게 한 일년을 살면, 글쎄 수명이 좀 줄어들지도 모를 일이지만, 일생에서 딱 일년의 기괴한 삶이 허락된다면 다른 일년 정도는 댓가로 치뤄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 책을 읽은 덕분에 미국도 아닌 알라딘에서 한국어 자막이 달린 이런 저런 영화 DVD합본을 찾고 있다.  이를 끝으로 당분간은 정말 책주문을 끊어야지...(이 book buying sprees는 이미 사무실이 들어가 있는 건물의 receptionist들 사이에선 나름 유명하다) 그러면서도 큰 건이 성사되면 또 몇 십만원어치의 책은 쉽게 주문할 터이니, 난 역시 집값이 좀 싼 곳으로 이사를 가야만 할 것 같다.  


살짝 엿본 '기괴한' 삶은 이렇듯 호기심을 자극하는 감성의 맛을 조금 보여주었다.  딱 일년만 그렇게 해볼까???  상담이 문제인데, 일은 오히려 더 많이 처리할 듯.  그런데, 그렇게 살다보면 오후 1-2시의 감성이 이런 새벽의 감성으로 다가오려나??  그럼 '기괴하게' 사는 의미가 없을텐데...


거의 50분 동안 붙잡고 있던 이 페이퍼를 다시 읽어보니 역시 마구잡이의 감상어린 글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오랫동안 잊고 지낸, 맘에 떠오르는 것들을 한껏 글로 풀어낸 시원함이 있어 속이 후련하다.  그거면 됐다.



지금에 딱 어울리는 노래.  내 어머니가 소녀시절에 사랑한 가수들, 그 어머니를 통해서 알게 된 듀오 Simon & Garfunkel의 Wednesday Morning 3am이란 노래는 어머니가 아닌 내가 찾은 숨은 보석같은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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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30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01 0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몬스터 2016-05-01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성 퐁퐁 ㅎㅎㅎ

transient-guest 2016-05-02 00:2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정말 오랫만의 경험이었네요.ㅎ

yamoo 2016-05-01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트랜스 님은 법을 전공하신 거 같았는데, 로스쿨 전공하셨네요. 지금 미쿡에서 변호사로 일하시는 듯합니다아~

저는 이동진의 책도 팟캐스트도 안 들어 봤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동진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그가 쓴 책도 읽지 않을 듯합니다. 이동진의 영화평론 보단 박평식의 평론이 끌립니다. 도대체 박평식은 뭔대 그리 영화 평점을 짜게 주지?? 이런 반감의 나날들이 지속되던 어느날...그 박평식이 추천하는 영화들을 하나 둘 보기 시작했는데....영화들이 정말 다 끝내줬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전 이동진 보단 박평식..ㅎ

이런 감상어린 글 좋습니다!^^

transient-guest 2016-05-02 00:22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ㅇ 박평식은 누군지 모르겠네요. 사실 평론프로그램도 워낙 많고, 저는 한국 TV나 라디오를 듣지 않아서 이동진도 우연히 알게 되었지요. 감사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