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주문할때만 해도 그 내용이 이처럼 방대한 fact를 시간흐름에 맞춰 전후일본의 시발점이 되는 천황제와 도쿄대학교의 역사로 풀어낸 것일줄은 몰랐다. 약 2000페이지가 넘어가는 엄청난 양인데, 다카시의 다른 책들과는 다르게 상당부분이 사건사실의 나열로 이루어져 있다. 좀 나쁘게 말하면 지겨울 수밖에 없는 부분이 많았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그래도 다카시의 책이니만큼 읽는 중간마다 그의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찾을 수 있었다.
전에 읽은 같은 작가의 이런 저런 대학, 교육, 및 정치담론을 보면서 역시 한국의 현대사는 일본의 그것을 따라가는 경향이 강하다는 생각을 한 바 있다. 기실 강점기 교육을 받는 친일 엘리트가 해방 후에도 숙청되기는 커녕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군대, 언론 등 나라의 요직을 대부분 차지해버린 나라가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최근 창극의 참극에서 보았듯이 일제, 그러니까 현대 일본보다는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에 가까운 자들이 대한민국 건국 후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한국의 건설에는 음으로 양으로 일본의 입김과 간섭이 영향을 끼쳤는데, 특이한 점은 상당부분의 그런 답습이 한국인에 의해서 이어져왔다는 사실이라고 하겠다.
도쿄대학은 철저하게 국가에 의해, 국가를 위한 목적으로 인재양성을 위해 세워진 교육기관이다. 따라서 모든 교과과정은 당시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정부의 숙원인 서구화, 탈아, 근대화와 부국강병에 초점이 맞춰졌었고, 이후 이들은 메이지, 그리고 소화시대의 팽창시대를 거쳐 전후에 이어 지금까지도 일본을 움직이는 최고 엘리트 기관이 되어있다. 한국의 서울대학교 출신들이 사회전반에 포진되어 모든 요직을 독차지한 한국 현대사의 전신이 결국 여기에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물론 세세한 모습은 차이가 있으나 거쳐온 역사를 보면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볼 수 있기에 이 책을 읽는 것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읽는 것이기도 하다.
도쿄대학을 둘러싼 일본의 이런 저런 이야기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할만큼 너무도 일본에 국한된 fact에 충실했으나, 엉뚱하게도 나는 여기서 당시 군국주의자 - 이들을 혁신파라고 불렀다 - 들이 적은 숫자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내세운 '일인일살, 일살다생'의 개념에 살짝 끌렸다. 과정이 잘못되면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인정 받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로 보면 암살은 정도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최근 세월호 참사 이후 달라지기는 커녕 더더욱 나빠지고 있는 한국의 상황을 보면서, 7인회니, 만만회니, 그리고 그 뒤를 알 수 없는 닭씨의 비선라인의 전횡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what if를 떠올리는 것은 망상주의적인 낭만파 기질이 있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테러,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불특정다수를 노리는 폭탄테러 같은 짓 말고, 우리 독립지사들의 전술적인 방법론으로써의 테러와 암살은 힘있는 majority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강한 유혹으로써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과거의 망령이 백주대낮을 활보하면서 시간을 거꾸로 돌려놓는 지금, 이미 쌓일만큼 쌓인 조직력과 자금줄로 향후 스러지지 않을 강고한 권력으로 자손대대로 한국을 지배하려는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쩌면 한 사람이 한 명을 암살하여 일인의 죽음으로 다수를 살리는 것 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얘기다. 솔깃하니까. 하지만, 암살로 야기될 혼란과 이를 기화로 다시 세를 불리는 불의한 조직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서라도 폭력은 답이 될 수가 없음이다. 그저 엉뚱한 상상을 해보는 것 뿐이다.
얼마전에 돌아가신 선생의 마지막 작품인 듯 싶다. '백년간의 고독'에서 보여지는 환상소설의 묘사와도 같은 부분이 있고, 한 노인의 회고와도 같고, 사랑을 찾지 못해 육체를 갈구한 늙은이의 씨부렁거림 같기도 하다만, 같은 얘기라도 '은교'에서 언뜻 느껴지는 작가의 딸딸이 같은 투영이 이 작품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90이 되어서 숫처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 때문에 오히려 평소의 자신처럼 쉽게 돈으로 몸을 사들여 섞지 못하고 그저 환상처럼 중간의 외줄타기를 즐기면서 행복해하는 노인의 모습은 마치 '여자'를 알기전에 먼저 관념으로 시작되는 첫사랑을 닮았다. 지나고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러니까 남자의 말로 경험을 하고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러나 그 경험을 처음으로 치루기 전까지는 그 관념의 세계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해결된다.
그런데, 이 노인의 사랑은 먼저 몸으로 시작되었고, 90대가 되어 죽음을 예감하는 어느 날 갑자기 숫처녀을 찾고, 그녀를 보자마자 '관념'적으로 지켜보는 사랑을 하게되는 거꾸로 가는 형식을 통해 역설적으로 가장 첫 번째로 배웠어야 했을 사랑의 방식을 인생의 황혼기의 마지막에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
노인이 되면 다시 아이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인지, 무엇인지 쉬이 추론하기에는 내 문학독해력이 너무도 보잘것이 없다. 그저 왜 이 책을 이 나이에 썼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면, 처음과 끝, 끝과 처음은 결국 하나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노대가가 말년에 쓴 작품이니만큼, 살아온 세월의 그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을 것인데, 언제나처럼 나는 알 수가 없다.
July 4th연휴를 하루 일찍 시작하였는데, 막상 하루 쉰다고하여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럭저럭 지리한 하루를 보냈다. 지금은 실로 오랫만에 서점에 나와서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보다가 이렇게 끼적거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른 책 한 권이 더 있는데,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