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계획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하루키의 책을 네 권씩이나 연달아 읽게 되었다.  작품도 그렇고 에세이도 그렇고 읽고나서 보니 역시 80-90년대의 글이 거의 전부였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는 2000년대의 글을 모은 것인데, 그래도 그 감성이 꽤 좋았던 것을 보면, 본격적인 60대가 시작되기 전의 하루키의 글은 확실히 지금보다는 더 힘이 좋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색체...'도 그렇고, 요즘에 나오는 하루키의 글, 그러니까 옛날의 글을 다시 편집해서 재출간된 책들 말고, 요즘의 글은 뭔가 많이 힘에 겨운 느낌이다.  마치 조정래 작가의 신간을 보는 듯한 느낌인데, 술술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지 못하고, 아주 힘겹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듯한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역시 사람이나 짐승이나, 작가나 무엇이나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좀더 잘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 모양이다. 이 페이퍼를 쓰기 위해 찾아보니 최근에 책이 또 한 권 나온 것 같은데, 신간인지, 복간인지 알 수가 없다.  보지 못했던 제목이라고 해도, 워낙 다양한 에세이를 다양한 이름과 삽화로 버무려서 다시 만들어 내는 출판사의 '되는 상품'을 내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세상이라서 쉽게 믿을 수는 없다.  


그런데 그의 글이 즐거운 이유가 단순히 젊을 때 '잘'쓴 글이라서만은 아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어떤 감성에 대한 나의 몰입인데, 아마도 아날로그적인 냄새에 푹 잠겨버린 듯한 80년대의 글에서 오는 없었던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닌가 싶다.  83년에 있었던 이런 저런 에피소드를 보면 그의 80년대와 우리의 80년대, 나의 80년대와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정도의 거리를 느끼게 되는데, 그런 감성이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표면적으로나마 군사독재도 사라지고, 데모할 힘도 슬슬 빠지기 시작한 시기였을 것이다 (라고 평론가들은 말했다).  뭐 그건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즐기는 그의 감성충만은 역시 80년대의 글이다라는 점은 확실하다 (에서 멈춰야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4월 중에는 책을 마구 사들이는 바람에 이제 마구 읽어나가지 않으면 좀 미안한 시점이 되었다.  영어도 한국어도 엄청 쟁여버렸는데, 적당히 돈을 모아서 좀 한적한 교외에 작은 ranch를 곁들이 오두막을 구해서 서재를 꾸미고 살았으면 좋겠다.  일은 지금처럼 사무실과 집을 오가면서 유비쿼터스 환경을 한껏 이용하고, 동물하고 교감하면서 책을 보다가 운동을 하고, 그날의 먹거리를 만드는 여유까지 가는 것이 왜 이리도 어려운 것일까...


주말에는 심야식당의 류처럼 빨간 비엔나 소세지를 다듬어서 문어모양으로 볶은 안주에 맥주라도 마셔야겠다.  일본맥주도 좋고, 아니면 하루키가 가끔 즐긴다는 블루리본이라는 싸구려 미국맥주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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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5-08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리본_ 이름 깜찍해요, 맛은 어떨지 살짝 궁금_ 그러고 보니 저는 어느 순간부터 하루키 에세이는 잘 읽지 않게 되더라구요. 근데 이 글 읽으니 읽고 싶어지네요. :) 아, 1Q84 읽으려고 하는데_ 읽어보셨어요?

transient-guest 2015-05-09 02:41   좋아요 0 | URL
보통의 싼 맥주맛인데, 처음 마셔서 그런지 신선하더라구요. 1Q84는 어떻게 보면 하루키라는 작가를 별로 생각하지 않고 읽은 하루키의 소설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어요. 옴 진리교 사건이 모티브라고 하는데, 확실히 그 사건은 일본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 같네요.

붉은돼지 2015-05-08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우연히 집에서 텔레비젼 보다가 봤습니다.
크린트이스트우드 나오는 영화 <그랜토리노>. 크린트할아버지 줄기차게 블루리본 캔 드시더군요.. 영화를 한참 보다보니까 ˝아... 이거 하루키의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에 나오는 그 영화구나˝ 알겠더라구요.. 영화는 그런대로 좋았습니다. 마트 수입맥주 코너에 블루리본은 없더군요...^^

transient-guest 2015-05-09 02:42   좋아요 0 | URL
저도 하루키가 그 얘기한 부분이 생각나네요, 최근에 읽어서 그런지...ㅎㅎ 수입될 만큼 좋은 맥주는 아닌듯 하구요, 버드와이저처첨 싸면서도 인지도가 높은 맥주도 아닌 듯 합니다. 여기서 마트에 가보니 딱 버드/밀러급이네요.
 

이곳은 오늘이 수요일이다.  지금 시간은 수요일 오후 2:38.  평소 같았으면 사무실에 있어야 하는 시간이지만, 어제 복잡한 케이스를 거의 끝내고, 고객의 확인을 받았기 때문에 오늘 오후까지 예정되어 있는 업무가 조금 일찍 끝나버렸다.  5월의 첫 주를 보내면서 꾸준히 전화도 받고, 업무는 언제나 진행형인 만큼의 양은 쌓여 있지만, 그래도 따뜻한 볕을 쬐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나니, 사무실에 오후 내내 앉아있을 자신이 없어졌다.  


점심때 짐을 싸들고 나와서 운동을 끝낸 후 - 중간에 잠깐 전화가 들어와서 15분 정도 상담을 하기는 했다 - 서점으로 와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하여 최대한 구석진 테이블을 찾아서 노트북을 켜놓고, 책을 한 권 들여다보면서 노닥거리고 있다.  


나만의 사무실을 갖게 되었을때, 가끔 나른한 오후에 조금은 게으르게, 이런 시간을 갖고 있는 자신을 그려보곤 했었다.  생각만큼 쉽지는 않고, 특히 전화를 받거나 진지한 업무를 보는 것은 어렵지만, 그래도 잠깐 slow한 날, 일을 조금 미루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가능해진 것 같다.  사람이나 일이나 역시 혼자라면 조금은 가볍다.  최소한 반은 가벼운 셈이다.


다만, 이런 good time에도 불편한 점이 한 가지 있는데, 화장실이다.  짐을 그대로 두고서 화장실을 다녀오기에는 믿을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운동을 하면서 물을 많이 마시는데, 여기에 커피까지 들어가니 금강산 댐이 무너지는건 그야말로 시간문제다.  평화의 댐 같은건 애시당초 존재할 수 없으니 결국 이 좋은 자리를 포기하고 짐을 싸들고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다 풀어놔야하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하는거다. 젠장...


퇴근시간까지 2-3시간이 더 남았는데, 여기에 그저 마냥 한가한 이 시간을 즐겼으면 한다.  책 한 권 정도 읽어주면 시간을 낭비했다는 자책감을 살짝 달래줄 수 있다.  그나저나 화장실...어떻게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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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edgling 2015-05-07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진게 적을수록 자유롭다` 라는 생각이 떠오르네요. 제가 요즘 그런 기분에 살고 있답니다. ^^ 어디 해외에 살고 계신가봐요~

transient-guest 2015-05-08 01:10   좋아요 0 | URL
방광이 비어있으면 자유롭죠.ㅎㅎㅎㅎ 네 외국에 있어요.

수이 2015-05-07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는 그래도 옆 좌석 사람한테 잠시만 봐주세요 하면 괜찮던데_ 안타까워요 ㅠㅠ

transient-guest 2015-05-08 01:10   좋아요 0 | URL
저도 잘 그러는데, 작은 카페도 아니고, 큰 서점 내부에 있는 카페라서도 글쿠, 노트북에 모든게 들어있어서 그런지 어렵더라구요.ㅎ

다락방 2015-05-07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혼자 까페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은데, 그럴 경우엔 지갑하고 스맛폰만 들고 화장실 가요. 다른 짐은 다 놓고요. 다른 짐도 다 싸들고 가기엔 너무나 번거로워서요.

그나저나 정말 뜬금 댓글이 되겠지만, 제목의 `굿 타임`을 보니 아주 오랜 시절, 제가 노래방에서 부르던 노래가 생각나네요. `클레오`란 걸그룹이 부른 노래 제목이 `굿 타임` 이었거든요. 가사가 이렇게나 유치한 곡입니다.


너와 함께 지내고 싶은 밤/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하지만/ 내가 너와 보내려 하는 이 밤이/ 가장 소중한 시간인 걸


아하하하하하하하. 이 노래 아십니까, 혹시? 하하하하하하하하하

transient-guest 2015-05-08 01:12   좋아요 0 | URL
다 들고 가야만 했답니다.ㅎㅎㅎ 좀 작은 곳에서는 두고 갈 수도 있지만요.. 굿타임/클레오는 기억합니다. 가슴에서 일자로 내려오는 공주옷 같은거 입고 나왔던 애기처자들도 이제는 30대 중반 정도가 되었겠네요.ㅎㅎ 이때만해도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하단 소리로 가사를 순화했었죠. 요즘은 중딩정도의 아이돌도 스스럼없이 타오르는 시절이니 새삼 거시기하네요.ㅎㅎ

cyrus 2015-05-07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면 병 생깁니다. 저가 guest님의 상황이라면 불편해도 짐을 챙기고 화장실에 갔을거예요. ^^;;

transient-guest 2015-05-08 01:09   좋아요 0 | URL
챙겨서 얼른 다녀왔지요. 다 싸들고 갔다오니 다행히 자리가 그대로 있더라구요.ㅎ
 

어제인가 그저께인가에 읽은 신문에서 S/W의 발전으로 인한 원가절감을 칭찬하는 기사를 보았다.  일종의 실시간적인 물건매매에 따라 즉시 인보이스가 처리/결제되어 돈이 오가는 것을 처리하는 업무에 전통적으로 최근까지 약 300여명의 회계직원에 4000시간이 소요되던 업무가 S/W업무처리에 따라 이제는 약 10명의 직원에 300시간 정도가 소요되어 엄청난 비용이 줄었다는 내용이다.


블루칼러의 직업군에서 기계나 S/W가 사람을 대체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경향은 이미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미 선진국의 공장에서는 예전같으면 100여명이 할 일을 10명 정도가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화이트칼러의 직업군에도 점점 이런 경우가 늘어나는 것 같다. 물론 '생각'하는 것이 주업무인 직업군의 경우에는 아직 걱정을 덜 하겠지만, 단순한 computing이 요구되는 직업군에서는 점점 S/W가 사람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일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  국지적인 수준이 아니라 만약 전 세계적으로 모든 직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예전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노동은 모두 로보트가 맡고, 사람은 좀더 유익한 자기계발이나 레져활동을 하면서 서서히 늙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아니, 그 경향이 너무 심해져서 나중에는 문명의 쇠퇴로 이어진다는 주장까지도 있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극으로 치닫는 지금에 와서 보면, 과학기술이 발전해서 노동력으로써의 인간을 대체한다고 해서, 작업장에서 밀려난 우리들의 라이프가 즐거워지기는 커녕, (1) 다수는 일자리를 빼앗기고, (2) 수입원이 없어져서 (3) 가난해지는데, (4) 거기서 창출되는 부는 극소수의 관리자와 투자자, 그러니까 거대자본가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 같다.  


이 현상이 심화될수록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시키고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임시적인 제도가 마련될 것이다.  대기업에게는 극히 미미한 영향을 끼치지만, 중소업체들에게는 심각하게 타격을 주게 되는 기본임금인상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결과적으로 이는 대기업과 부자들이 대상인 소득분배를, 대부분 영세한 수준인 자영업자들에게 떠안기는 방편에 다름이 아니다.  


결국 어느 시점에서는 99%는 게토에서 살면서 죽지 않을만큼의 보조를 받아 목숨을 부지하고 나머지 1%만 유토피아 같은, 그러니까 20세기에 많은 이들이 보편적으로 실현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그런 곳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을 제도적으로 고칠 방법은 거의 없어보인다.  가진 자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일차적으로는 job sharing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더 적은 시간으로 고용하면서, 기존의 소득수준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록 분명히 적은 인원으로 훨씬 더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분배만 확실하다면 이 방법은 전 세계적으로 채택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하는 방법은 완벽한 파괴와 혼란을 통한 새로운 질서의 구성이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것으로 엄청난 사람들이 죽고, 많은 것들이 파괴되었지만, 이를 통해서 강력한 절대권력이 무너질 수 있었고, 부족국가의 형성을 통해서 과도기를 거친 후 봉건주의라는 나름대로의 질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후 봉건주의가 고착화되던 시점에 다시 절대왕정을 통한 강력한 군주국가로, 이는 다시 시민계급의 대두로 배움과 자본의 힘에 의해 무너졌고, 궁극적으로 이는 자본가계급을 탄생시켰는데, 현 시대의 체제는 여기서부터의 연장선상이라고 본다.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은 이미 기울만큼 기울었고, 달은 찰만큼 꽉 찬 것이다. 


언제 무너지는가는 결국 matter of time인데, 사람이 무너뜨리기는 자본의 힘이 너무 강하기 땜분에 나는 천재지변이 현 체제를 파괴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다수는 끔찍한 혼란과 함께 매드맥스 같은 시대를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로마제국이 지금까지 유지되었더라면 우리 대다수는 노예로 살고 있었을 것이니까, 어쩔 수는 없지 않을까?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paradigm을 완전히 바꾸지 못하면 인류에게 앞으로의 긴 장밋빛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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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5-05-07 0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도시에 큰 재앙이 닥쳐 모든 전기와 수도와 가스공급이 중단되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 봅니다. 아마 지옥과 아비규환이 따로 없겠지요.

transient-guest 2015-05-08 01:09   좋아요 0 | URL
서바이버는 역시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골이죠.ㅎㅎ 도시는 인프라가 무너지면 그냥 아비규환이 될 겁니다. 빠져나오기도 힘든...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 - 살아있는 시체들 속에서 살아남기 완벽 공략
맥스 브룩스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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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Brooks는 꽤 천재스럽다.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그럴싸한 이야기라서 읽은 내내 `정말?`이라고 물어가며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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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민주주의 1 한길그레이트북스 24
A. 토크빌 지음, 박지동.임효선 옮김 / 한길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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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옛날에, 그러니까 대학때 교과서로 읽은 기억이 난다. 내용이 떠오르지는 않는데, 아마도 세월 탓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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