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요즘은 추리소설을 주로 읽고 있다. 아무래도 쉽게 읽어지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대략 가진 책의 70%는 한번이라도 완독하는 것을 마지노선으로 삼아 장서가의 길을 가고 있는데, 점점 70%가 위태로워지는 것 같다. 최근에 책을 배송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이런 저런 이유로 열댓권을 주문했으니까. 사실 한국에서 살고 있었더라면 온라인 주문, 헌책방, 퇴근길이나 주말 산책을 겸한 서점순례로 더 빠른 속도로 책을 사들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게임도 예전처럼 재미있게 즐기지 못하는 요즘, 책이라도 벗삼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문신살인사건'이래 저자의 팬이 되어버렸는데, 한 동안은 얼마 되지도 않는 번역본들이 모두 절판되었다가 요즘 다시 나오고 있어 한 권씩 읽어나가고 있다. 걸작인 '문신살인사건'과는 다른 의미로 이 책도 상당히 특이한 작품이다. 우선 주인공은 형사법 소송전문 변호사이고, 전개는 모두 법정에서의 변론을 통해 이루어지며, 추리 또한 변론과정에서 나오는 점은 가히 전무후무했던 구성이었을 듯하다.
21세기의 기준으로 보면 검사가 너무 상황적 증거나 캐릭터 증거에 매달리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50년대가 작품의 주무대임을 생각하면 그리 못 받아들일 것도 없다. 인간의 심리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차별대우에 의한 상처와 인격형성이 한 축이 되는 이 작품에서는 반갑게도, 그리고 일본인 작가로써는 특이하게 관동대지진 당시 조직적인 유언비어에 의한 재일조선인 학살이 있었음을 짚어, 근거없는 차별과 박해가 가져오는 결과물에 대한 예를 들고 있는점이 신선하다.
드디어 30권을 돌파했다만, 아직도 34권 정도가 남아있고, 내가 사들이지 못한 뒷 부분까지 포함하면 40권도 넘는 작품들이 남아있는 셈이다. 거의 운동하면서 읽는 책으로 되어버린 작품인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한번에 이어가면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이 시리즈를 끝내면 캐드팰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눈앞에서 지나가는 수많은 장면들 중 우리의 주의를 끌지 않는 것들은 기억에서 모두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일상적인 풍경이나 자동으로 인식된 풍경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 장면은 보아도 본 것이 아니다. 이 점을 중심으로 잡고 작품을 보면 결말까지의 이해를 돕는다. 하지만, 이제 내 추리소설읽기는 깊은 분석이나 맞추리가 아닌 그저 서술을 읽어가면서 머리를 식히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래도 재미있게 한 권씩 오랜 시간을 들여 읽어나가고 있다.
장서가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누리는 일종의 SM적인 부분이 있다는 점을 자꾸만 환기시키면서, 올바른 장서가는 질로, 또는 일정한 법칙을 갖고 승부해야 한다는 점을 현실적인 예를 들어 타이르는 듯 한 책이다. 자꾸 모았다가 팔아버리는 것을 되풀이 하는 것은 현실과의 타협이나 합리성을 찾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술꾼이 술을 끊었다가 다시 마시는 것을 반복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고 느껴진다. 그러니까 나는 설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일본의 목조건물이나 다다미방이 책 때문에 주저앉거나 빈번한 지진, 그리고 이에 취약한 주택구조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꽤나 괴로운 부분이 있기는 하겠다는 생각. 한국도 대다수의 도시인구가 복층구조의 아파트, 그것도 고층으로 지어져서 8-90년대의 아파트보다 층간간격도 좁아지고, 상대적으로 덜 단단하게 지은 요즘의 아파트의 한 unit이 감당할 수 있는 책의 무게를 생각하면 일본의 장서가들 만큼이나 괴로운 것이 우리네 장서가들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난 내 책을 정리해서 팔 생각은 눈꼽만큼도 가져본 적이 없고, 정 안되면 집과 사무실에 적절한 양을 나누어 보관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사무실은 내 공간이니까, 조금 더 내 유희와 도락에 맞게 방을 재정비해서 책장을 더 많이 넣으면 일과 함께 독서도 상시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이 될 수도 있음이다.
지난 다자키 쓰쿠루 때와는 다르게 소리소문없이 하루키의 단편모음이 나왔다. 예전의 것들을 다시 버무린 것이 아닌 새 작품을 모은 것인데, 그래도 겹치는 모티브는 이제 이만큼 그의 작품을 읽은 나라면, 그리고 이만큼 작품을 써온 하루키라면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열심히 뛰고, 채식을 하고, 맥주를 마시면서 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통해 더 많은 즐거움을 그가 우리에게 주기를 바랄 뿐이다. 더불어 소설도 좋지만, 그의 담담한 어투가 좋은 소품집이나 에세이도 더 나와주었으면 한다.
강신주 박사를 비롯한 다수의 대세인문학자들은 하루키의 작품을 인문학 포르노로 비판하지만, 나는 하루키의 작품이 주는 담담한 이야기들이 좋다. 어쩌면 그것은 젊은 나이를 젊게 살지 못하고, 그 당시에만 느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희생하면서 살아온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가 책을 내면 읽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비록 한창때 만큼 잘 쓰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오마이뉴스인가 시사인의 추천으로 사 읽은 책인데, 솔직히 큰 감동을 받거나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저자가 짚은 문제점에는 공감하지만, 그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에는 공감할 수 없고, 저자가 생각하는 해결책이 무엇인지도 명확하지는 않다. 나아가서, '하류'를 지향하게 만드는 사회적인 원인, 그러니까 열심히 노력해도 reward가 돌아오지 않는 현실에 대한 담론의 부재는 논거에 있어 치명적이다.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짚지 못하면서 개탄만 하는 것은 사람을 무식한 꼰대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데, 최근 모 무술협회 회장의 글에서 느낀 점을 유수학자의 글에서 느끼게 될 줄이야. (참고로 이 회장님은 이종격투기를 2종격투기로 쓰신 정도의 배움을 갖고 있다).
희안한 것이 분명히 한국-일본의 사회문화현상의 평행선적인 부분은 존재하는데,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을 보면서는 확실한 공감을 한 반면, 이 책에서는 별로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 읽은 책이 있었는가 확실하지가 않다. 역시 밀리면 나쁘다,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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