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무실의 불을 모두 끄고, 블라인드는 살짝 열어 흐리고 바람이 부는, 지금이라도 비가 내릴 듯한 하늘을 창에 담아 놓은채, 작은 스탠드만 켜놓고 작업을 하고 있다.  BGM은 '전기뱀장어'의 'Fluke.'  원래 '마지막 승부'가 좋아서 산 건데, 앨범의 노래가 다 수준급이다.  음악이야 장르를 가리지 않고 내 귀에 좋으면 다 듣지만, 이런 전자기타음 가득한 인디밴드 풍의 노래도 참 좋다.  아련한 전자기타의 사운드는 무척 몽환적인 것이 오늘의 내 기분과 날씨에 너무도 잘 어울린다.  


마음이 살짝 아프기도 하고, 뭔가 아리면서, 조금은 다행이라고도 생각한다.  내 속엔 아직도 '소년'이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있으니까.  늙은 척을 하지 않아도 나이를 먹을만큼은 먹었고, 이젠 어지간한 곳에서는 I.D.확인이 필요하지 않다.  속절없이 좋은 시절은 다 갔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는데, 어쩌면,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중에 돌아보면 지금은 한창 봄이었다고 추억할지도 모른다. 


영화 [일대종사]에서 문득 엽문과 궁이의 이야기가 떠올라 잠시 그 둘이 처음 만나는 장면, 그리고 뒤에 다시 만나서 지나간 인연을 이야기하는 부분을 보고나서 다시 Once Upon a Time in America의 theme이 흐르는 엽문의 회상을 보았다.  이런 날에는 그런 장면에서 살짝 눈가에 안개가 낀다.




20-25페이지 서류에서 15페이지 정도를 남겨놓고 한 페이지를 나가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집중이 잘 되는 날에는 오전 3시간 정도면 2-30페이지는 너끈히 나오는데, 이번 주는 그게 쉽지 않다. 책을 읽어도, 음악을 들어도, 커피를 마셔도, 일을 해도, 운동을 해도, 그냥 마음은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마냥, 3년 간 말도 못 붙혀보고 편지만 쓰던 그 시절 그 때의 내가 되어 하루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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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6-10-15 0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을타셔서인가, 소세키의 영향인가 문장이 좋네요.

transient-guest 2016-10-15 06:35   좋아요 0 | URL
가을을 타서 그런가봐요..ㅎㅎ 아니면 지금 읽고 있는 `풀베개` 때문일까요??ㅎㅎ 오늘 같은 날은 일도 하기 싫고 하루 종일 누군가와 수다나 떨었으면 좋겠어요..ㅎㅎㅎ

2016-10-15 0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10월부터 나쓰메 소세키를 하나씩 읽어나가기로 하고 벌써 거의 2주가 지나갔다.  다른 책도 읽고 싶기에 소세키는 집에서만 읽기로 했더니 속도가 상당히 느리다.  이제 첫 두 권을 읽었다.  두 권 다 다른 출판사의 판본으로 이미 읽은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느릿느릿 걸어가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처럼 읽었다.  특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무척 천천히 읽을 수 밖에 없었는데, 앞서의 reading과는 달리 그저 유머러스한 satire로만 보이지 않았고, 번역의 차이였는지 무척 소화하기 어렵게 느껴졌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오후에 이어서 쓴다.  저녁운동으로 가볍게 50분 정도를 뛰다 걷다 하면서 4일째의 패턴을 마쳤다.  내일은 하루를 쉰다.  보통 3-4일에 한번 쉬면서 몸을 추스려야 부상위험도 적고, 몸이 회복을 한다고 한다.  뛰는 내내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금수'편 1-2부를 내리 들었다.  2부 마지막 약 30분간 이동진 DJ의 목소리로 '금수'의 주요부분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배경음악과 함께 목소리 좋은 이동진 DJ의 reading으로 듣는 '금수'의 장면, 내가 남긴 부분도 들어 있기에 뭔가 내 취향이 전문가처럼 느껴진다.  '빨간 책방'의 묘미는 바로 이 부분이다.  문학평론도 좋고 책 이야기나 작가 인터뷰도 좋지만, 내가 가장 즐기는 시간은 잔잔한 피아노에 맞춰 읽어주는 이동진 DJ의 목소리다.  


훨씬 더 꼬장꼬장하게 느껴진 현암사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였다.  읽는 동안 flow가 좋지 못했고, 예전에 나를 웃게했었던 장면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이란게 있어 그리 마음이 쓰이지는 않지만, 왜 그런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도련님]

지난 번에 읽었을 때보다 더 재미있게 느꼈다.  지난 4-5년의 세월이 무엇이었기에 그런걸까? 다란 판본으로 읽은 '도련님'은 조금 지루했는데, 현암사의 '도련님'은 훨씬 매 장면이 리얼했다. 위선에 가득찬 인간들 사이에서, 망나니같도, 세상을 사는 요령도 없지만 도련님은 훨씬 더 나은 사람이다.  시스템안에서 그렇게 안주하는 인간들과는 다른 종으로, 아예 그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지 않는다.  편입하고자 했더라면 최소한 형과 유산을 놓고 한바탕 난리를 부렸을 것인데, 그냥 되는대로 흘러가면서 어찌어찌해서 시골바닥의 선생으로 잠시 지내다가 다 던져버리고 다시 도쿄로 올라온다.  소세키가 본 시대상이 대저 이러했을 것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묘사된 인간들도 그렇게 볼 수 있지만, 도련님이 부임해간 시골학교는 그야말로 메이지시대의 축소판이 아니었나 싶다.  


또 한 주가 무심하게 지나가버렸고, 난 한 주만큼 나이를 먹는다.  나름 한 시절, 뭇 소녀들을 살짝 홀리던 내 목소리도 이젠 투박하거나 막힌 소리가 random하게 나올 뿐이다.  그야말로 '무사태평하게 보이는' 나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나는 것이다.  요즘처럼 시간이 지나가버린 것이, 나이를 먹은 것이, 지금의 내 상태가 허탈한 때가 없었다.  내가 가을남이라면 정말이지 제대로 가을을 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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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10-14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현암사판 소세키 전집은 여러권은 사놓고는 있는데 아직 읽은 책은 없군요.ㅜㅜ
고양이로소이다와 마음은 읽은 것도 같은데....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완주하시길 응원합니다. ^^

transient-guest 2016-10-15 02:00   좋아요 0 | URL
애거서 크리스티를 완주한 기억으로 천천히 꾸준히 가겠습니다. 이렇게 한 작가를 터는 것도 꽤 여러 번 하게 되는군요...ㅎㅎㅎ

Forgettable. 2016-10-14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세키 작품은 거의 완독을 했는데요, 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도 좋았어요. 아무래도 고양이랑 같이 살기도 했어서 고양이 관찰기라던가 이런게 더 흥미로웠던 것 같네요. ㅎㅎ 확실히 태풍같은 작품에 비하면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심심할 때 펼쳐보는 에세이집이라고 생각하시면 더 읽기 쉽지 않을까 싶네요. 아무래도 하루이틀안에 다 읽기엔 힘든작품이라고 기억하고 있어서.. 번역 때문일 수도 있겠군요.
도련님도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어째 별 사건도 없으면서 재밌게 글을 잘 쓰는지, 아무래도 인간 행동이나 심리의 세밀하고 정확한 묘사때문이 아닐까요. 내 얘기 같은 그런 기분.

여기도 부쩍 추워졌습니다. 그래도 낮엔 덥지만요. ㅎㅎ 감기 조심하시고 가을도 조금만 타고 얼른 보내시길!

transient-guest 2016-10-15 02:01   좋아요 0 | URL
그렇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보면 정말 자세히도 관찰하고 놀면서 자연스럽게 글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에요.ㅎ `도련님`을 보면 저도 공감하는 점이 꽤 있었어요. 더러운 꼴을 보느니 다 던져버리는...
오늘은 가을의 첫 비가 옵니다. 아직은 제대로 떨어지고 있지는 않지만, 오후부터는 제법 올 것 같아요.. 님께서도 늘 건강하시길...
 
금수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한번 들렸던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게다가 내가 은근히 이런 가슴속의 butterfly를 즐기는 건 아닌지 의심된다.  덕분에 오전에도 집중도가 낮은 업무를 위주로 진행하고 있다.  아무래도 오늘 예정한 일거리 하나를 내일로 미루게 될 것 같다.  그럼 나머지도 줄줄이 밀리는데, 어쩔 수가 없다. 사실 이럴 때일수록 더 일에 집중하는게 맞는 건데, 그냥 그럴 맘이 나지 않는다.  아침에는 해가 늦게 뜨고 늘 흐려있기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어렵다.  아무리 내 맘대로 사무실이라지만, 이렇게 일정을 지키지 않으면 문제가 된다.  주말에 다녀온 출장 때문에 피곤하다는 것도 적지 않은 이유가 되겠지만, 꼭 그것때문만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출장에서 생긴 일 때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다.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낮아져서 이러나???  잠깐 읽다가 던져 두었던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를 읽고 확 맛이 가버리는 경험을 했다.  그렇게 갑자기 다가오는 책이라니.  대학시절 3년의 연애를 거쳐 결혼 후 2년 만에 파경이 난 부부가 헤어지고 나서 10년 정도 지난 시점에 아주 우연하게 마주친다.  그리고 시작되는 편지, 이를 통해 진정으로 안 시절의 맺음을 향해 가는 두 사람.  얽힌 인연의 끝에서 지금은 두 사람이 다 행복하지 않는 듯 보이고, 두 사람이 헤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맘이 들어서 읽으면서 계속 맘이 먹먹하더라.    


한 사람이 배우자를 두고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되는 계기와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아주 극단적으로 본다면 육체적인 욕망이나 금전적인 이유가 흔할 것 같지만, 꼭 그런지는 장담할 수 없을만큼 사람의 인연이라는 건 정말 복.잡.하.다.  


아리마와 아키의 엇나감도 그랬을 것 같다.  아리마와 아키의 부부사이엔 달리 문제가 없었고, 둘은 연애결혼이고 아키의 아버지가 세운 건설회사에서 아리마는 착실하게 후계자수업을 받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접대를 위해 요정을 찾았지만, 이건 그 시절 일본에서는 꽤 흔했던 일이었고, 달리 아리마가 이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다.  


아리마는 아주 어릴 때 육친을 잃고서 잠깐 입양되어 어떤 어촌에서 살았었다.  이때 다니던 학교의 유카코라는 여자아이에게 잠깐 십대 특유의 짝사랑을 품지만, 이건 아리마가 다시 오사카로 돌아오면서 몇 번의 편지왕래 후 끊어졌다.  


우연한 기회에 어촌마을을 찾은 아리마는 유카코의 부모를 통해 그녀가 오사카 어딘가의 백화점에서 점원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여기서 멈췄었다면 아리마와 아키는 그냥 잘 살았을 것이다.


아리마는 고민했을 거다.  어떻게 할까.  한번 유카코를 만나볼까?  어쩌면 꽤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유카코에게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육체적인 욕망의 기대로 치부했지만, 마음속 깊숙히 그런 마음, 예전에 좋아했던 이성을 성인이 되어 만나보고 싶은,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결국 아리마는 백화점으로 찾아가서 유카코를 만나고, 하필이면 유카코는 백화점을 그만두고 호스테스로 취직하기로 맘먹은 상태.  가장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고도 볼 수 있다.   


직업의 특성상 아리마는 요정을 자주 드나든다.  근데 하필이면 십대 시절 동경했던, 뭔가 아련히 아름답고 색기어린 유카코는 요정에서 일을 한다.  호스테스는 자기의 단골이 늘어날수록 좋은 위치가 되는데, 역시 처음에는 아리마도 그저 유카코를 만나는 정도로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녀의 일이 어디 그렇게 점잖게 흘러가나.  


그리고 어느 날.  아리마와 아키가 결혼하고서 약 2년 정도가 흐른 밤.  유카코는 아리마를 칼로 찌르고 자신의 목을 그어 자살한다.  그 맘을 이해할 듯 말듯 했는데, 후반부로 가면서 약간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아리마가, 남자가 나빴던 것이다.  두 여자 사이에서 언제고 그렇게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키는 그렇다해도 유카코는 더없이 허무하고 불안했을 것이다.  함께 있는 순간의 행복이 어쩌고 하는 건 그냥 B/S다.  돌아갈 곳이 있는, 돌아가야 하는 아리마와, 순간이 지나면 다시 혼자인 유카코는 절대 같을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유카코에게 스폰서 제의가 들어온 것을 아리마에게 이야기했을 때, 아리마는 '잘 됐다'는 식으로, '너도 나이가 있으니 언제까지 호스테스를 할 수는 없지 않냐'는 식으로 말해버렸다.  나는 그 순간에 유카코는 이미 죽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왜 굳이 아리마를 데려가려 했는지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런 남자 따위, 전혀 갖고갈 가치가 없는데.  


이 사건은 사실 아리마와 아키의 인생이 엎어지고 뒤틀리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리고 책의 2/3 정도는 이후 10년 간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에둘러 헤어진 탓에 정리하지 못했던 아키의 맘이 진정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아리마와 헤어지게 되는 과정이 되는데, 사실 이 부분의 이야기도 많이 맘에 들어왔지만, 역시 아리마와 아키 말고, 아리마와 유카코의, 어쩌면 한 방향으로였을지도 모를 애사가 계속 맘을 울리고 있다. 


남녀사이에서의 행복은 뭐고, 불행은 뭘까?  학교시절 유명한 교수가 있었는데, 미국에 자기 가족이 있고, 일본에는 따로 애인과 아이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더랬다.  그 얘길 들었을 땐 그냥 나쁜놈이란 생각을 했는데, 일본의 애인은 그렇게 일년에 한 두번 교수를 보고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고, 어쩌면 그것이 그들이 나눌 수 있는 사랑의 한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금은 한다. 물론 모든 것의 책임은 둘이 지는 거다.  그렇게 합의가 되었다면, 그 나름대로의, 한때 잠깐 겹칠 수 있었던 두 사람의 인생이 그런 이상한 형태로나마 이어지고 있는 것이고, 둘이 happy하다면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나도 많이 liberal해졌나보다...  


"마이즈루에서 보낸 짧은 기간 중에 제가 경험한 단 하나의 선명한 사건은 세오 유카코라는 소녀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결코 보내지도 못한 여러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다 쓰면 봉투에 넣어 이삼일 책상 밑에 넣어 두었다가 집 뒤 공터에서 태워 버렸습니다...사춘기 소년의 아련한 연정이었습니다...제 눈에는 그녀가 그만큼 아름답고 화려하게 비쳤습니다...그 눈은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여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을 한층 돋보이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으니 저는 문득 평소의 억두르기 힘든 적요감에 휩싸였습니다.  세오 유카코라는 소녀가 발산하는 신기한 어둠은...외진 항도의 모습과 동질의 것이었습니다...이렇게 쓰고 있으니 그때의 정경이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오릅니다.  저는 그때의 추억을, 어떤 환상적이고 꿈같고 덧없으며 둘도 없는 것으로 마음속에 계속 간직해 왔습니다.  성인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 당신과 결혼하고 나서도 저는 그 추억 속에 잠기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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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남은 삶에서 다시는 연애라는 걸 경험할 수 없을 것이란 걸 안다.  하지만, 그 비슷한 감정은 종종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순전히 혼자서의 감정이어야만 하고, 거기서 멈춰야하는 걸 알고 있다면, 나머지는 마음의 작용이기에, 봄에 잠깐 부는 나른하고 따뜻한 바람처럼 지나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말의 출장을 마무리했다.  


일에 치이기도 했지만, 책읽기가 여러 이유로 속도가 나질 않았다.  여기에 주말에 출장을 다녀온 관계로 한 주가 좀 balance가 깨진 상태로 시작되었고, 마음도 이리 저리 오르내리고 있어 살짝 험난한(?) 일정이 예상된다.  


고등학교 때였나, 일본애니메이션을 처음 접하면서 구할 수 있는 건 닥치는 대로 가져다 보던 시기에 80년대에 만든 Vampire Hunter D 극장판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난다.  이후 한 십 수년, 처음으로 이 시리즈가 영어로 번역되어 나오던 것이 벌써 24번째 이야기가 끝났다. 오래 계속된 이야기라서 가끔은 지겹게 느끼기도 하지만, 적당한 interval로 신간이 나오기 때문에 잊을만하면 한 권씩 읽어주게 되어 그럭저럭 괜찮다.  이번의 이야기는 게다가 상당히 신선했는데, 아마도 구성이 조금 산만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렇게 느낀 것 같다.  작가후기에 따르면 ebook으로 연재를 했기에 매일 조금씩 이야기를 올렸고 이를 모아서 정리한 것이 24번째 책이 되었다고 한다.  한번에 긴 호흡으로 쓰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매일 조금씩 다르게,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를 쓰는 것도 작가로서 좋은 경험일 것 같다.  일도 그렇지만, 한 가지 방식으로만 계속 하면 지겨운 법이고, 달리 일에서의 인간관계가 없는 나는 특히 이런 부분을 많이 고려한 매일의 업무를 진행하는 것으로 지겨움을 달랜다.  익숙한 일을 익수한 방식으로 계속 하면 거의 자동으로 일처리를 하게 되는데, 사실 이때는 실수가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늘 같은 걸 보면 눈과 머리가 trick을 당해서 약간의 오탈자나 잘못 기재된 정보가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기실 이런 점도 내가 조직을 만들어 조금은 더 structure을 갖춘 회사로 키우려는 이유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조금은 밑도 끝도 없는 구성의 이야기지만 난 이 시리즈를 좋아한다.  무한반복의 루프고, 죽여도 죽여도 Noble은 계속 나오지만, 처음의 이야기가 인간/선 vs Noble/악의 구도였다면 지금은 D도 등장하는 Noble도 무척 인간적인 면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결국 작가가 시작한 것을 스토리가 끌어나가는 듯, 이야기의 느낌 자체가 조금씩 바뀌어 온 것이다.  이런 경험은 한 작가가 쓴 긴 시리즈를 계속 읽어나갈 때 특히 많이 하게 되는데, 한 작가의 여러 이야기를 읽는 것과는 또다른 감성이다.  다음 해 2월에 25권이 나온다고 하는데,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번 주에는 가을의 첫 비가 올 것 같다.  아침과 저녁으로 흐린 날씨도 이어지고 있는, 완연한 가을이다.  괜찮았다.  가을에 맞는 봄바람 비스무레한 것은.  잠깐 스쳐지나더라도, 나이가 들수록 그런 경험은 귀하게 느껴진다.  


뭐 그랬다구요.  주말 잘 쉬고 열심히 다시 일하고 짧은 한 주를 보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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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2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3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6-10-12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전에, 국민학생일 때 유선방송에서 해주는 만화를 봤는데요. 그게 뱀파이어가 나오는 거였어요. 뱀파이어인데, 뱀파이어의 손이 따로 말을 하더라고요? 손만의 인격이 있다고 해야하나.. 어쨌든 그 뱀파이어가 인간 여자를 사랑하는 내용이 나왔는데, 여자의 드러난 등을 보고 물고 싶은 욕망을 느꼈지만 가까스로 참고, 그런 뱀파이어를 뱀파이어의 손이 놀려대는, 그런 장면이었는데 되게 인상깊게 봤거든요. 근데 그게 링크하신 저 만화책인 것 같아요.

저 만화책 구경 가야 겠어요.

다락방 2016-10-12 10:22   좋아요 0 | URL
번역본은 절판이네요... Orz

CREBBP 2016-10-12 10:51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절판본 구해달라면 구해주는 제도가 있어서 전에 한번 시도해봤는데 못찾고 환불해주더군요 ㅎ

다락방 2016-10-12 10:54   좋아요 0 | URL
ㅎㅎ 네, 저도 절판본 구해주는 시스템 이용했었는데 못찾고 환불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이용 안해요 ㅋㅋㅋㅋㅋ

transient-guest 2016-10-13 01:52   좋아요 0 | URL
그 만화가 80년대에 나온 거에요. Vampire Hunter D 1권을 극화한거죠. 만화책 버전도 있는데 별로고, 소설이 최곱니다.ㅎㅎ 근데 절판되었구요...거의 구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저도 한국어로 책을 갖고 싶어서 찾았는데, 어렵겠더라구요..
 

오늘의 일과를 대략 정리하고 나서 잠깐 짬을 내 서재에 글을 써본다.  그간 미루던 행정업무도 많이 밀어냈고, 원래 계획했던 bulk의 일은 고객의 자료부족 및 효율성 때문에 조금만 건드리고 다음 주중으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하루의 일을 조금씩 하는 건 지금의 나에게는 꽤 좋은 방법이다. 처음 혼자 일을 시작했을때는 계획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적은 업무량이라서 금방 마무리하던 것이 이젠 전년도에서 넘어오는 케이스관리, 신규업무, 그리고 on-going한 일 등, 조금만 손을 놓으면 금방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리고, 땜질 위주로 일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어쨌든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서재나 블로그를 보면 자신에 대해 매우 솔직한 글을 쓰는 분들도 꽤 많다.  나는 아직은 그럴 자신이 없지만, 가끔은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도 페이퍼에 자리를 하나 만들어서 조금씩 소개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영업이라고까지 하면 그렇고,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지식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인데, 물론 그런 경로로 일하고 연결되는 건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그냥 내 자신은 조금 더 서재의 뒤에 숨어있고 싶은 거다.  어떻게 할까 늘 고민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생각해본다.  그냥 그렇다고요.


사람이 죽는 순간에, 그러니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위치한 그 순간에는 삶의 모든 것이 한번 눈앞으로 스쳐지나간다고 한다.  증명할 방법도 없고, 어디서 시작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듯 영화나 책에서 많이 이런 모습이 차용되곤 한다.

자신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 어쩌고 한 것도 이 책을 읽고 든 생각이다.  죽어서 무덤에 묻힌 이의 고백도 무엇도 아닌 제 3자의 시선으로 한 남자의 삶을 judging하지 않고 비교적 담담하게 그려내는 이 짧은 책을 읽으면서, 언젠가는 나도 죽을 것이고, 그때 내 장례식장엔 누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올까, 진정으로 내 죽음을 슬퍼해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주인공 모씨의 삶은 모순 투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공과 affair가 늘 함께 했고, 자신에게 정말 잘 맞는 짝을 두고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애정행각에 빠져 결국은 딸 하나, 자신의 형 이렇게 두 사람 빼고는 모두을 잃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런 모순을 한 두개씩은 갖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주어진 것은 이미 손에 들어왔으니 안중에도 없고, 갖지 못할 것, 또는 가지면 안될 것을 바라보면서 유혹을 느낀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는 말이 막 살라는 것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야말로 심각한 오독이 아닌가 한다.  순간에 충실하라는 말은 그렇게 잘못 회자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금을 남용하고 있지 않을까?  마음은 낮추고 눈은 높은 곳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하루의 삶에 충실하고 싶다.  


이 책에는 mixed feeling이 있다.  일단 좋은 책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천천히 좋은 것을 권하고 명상이나 행공을 안내하여 좀처럼 풀리지 않는 과거의 트라우마, 여기서 발생하는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지향까지, 많은 것들의 근본으로 파고들어간다.  잊거나 버리고 타파할 과거가 아닌 온전히 마주하여 받아낸 후에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다만, 내 맘이 이 책에서 말한 것을 하나씩 실천할 여유가 없었을 뿐, 이 책에서 김도인이 대상으로 삼은 독자의 유형에는 나도 포함된다.  

김도인은 지대넓얇의 유일한 여성멤버로 명상, 선도 같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약간은 어눌한 말투지만, 할 말은 다 하고, 그쪽 방면의 공부와 수행도 꽤 깊은 것 같다.  단순히 책이나 이론으로만 배운 것이 아니라서 나이는 어리지만 수행에 좋은 가이드가 되어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도 가짜 스승이 많은 시대이고, 실제로 조금만 세력을 얻으면 바로 '교주'가 되어버리는 건 도판의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유명하다는 목사나 승려들의 내면을 보면, 특히 이권이 관련되는 경우, 그러니까 돈이 모여드는 순간 이들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그런 세상에는 그저 많이 읽고 경험하고 직접 찾아보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아야 '수행'에 다가갈 수 있다.  말씀을 강조들 하시는데, 말씀이 없어서 지금 세상이 이따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  기회가 되면 천천히 다시 읽어보면서 하나씩 따라가볼 것이다. 마치 클래식 음악에 대한 책을 제대로 보려면 다뤄지는 음악을 하나씩 들어봐야 하는 것처럼, 수행이나 행공에 관한 책도 그렇게 하나씩 따라서 해봐야 알 수 있다.  


오후에 조금 일찍 퇴근하고 낮잠을 잔 후, 밤운동을 다녀왔더니 각성이 되어 잠이 오질 않는다. 아마도 오늘은 새벽 두 시는 넘겨야 잠들 수 있으리라.  이번 주는 그렇게 밤운동으로 기초운동량을 맞춰야 한다.  날이 추워지면서 새벽에 일어나서 뛰어나가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기에.  


사무실과 부모님 댁, 그리고 지금 사는 아파트까지 책으로 넘쳐나고 있는데, 읽지 못한 책도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책은 계속 사들이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걱정된다.  이번 달엔 책주문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쓰메 소세키를 읽다 잠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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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05 17: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에서 만큼은 솔찍하고 싶습니다^^. 책 영업사원처럼 뻥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이 선택한 책인데 비판만 할수도 없고요. 비판될만한 책은 일단 구매부터 안하니.구매한 책은 대부분 좋은 평가가 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죠..물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더라도 뭔가 끌려서 빌리지 흥미 유발되지 않는 책이면 대출도 하지 않거든요..일상의 이야기야 뭐 속속들이 다 할 수도 없으니 ㅎㅎㅎ

오거서 2016-10-05 20:44   좋아요 2 | URL
솔찍하게 말하면 사놓고도 맘에 들지 않는 책들이 있어요. 선택이 항상 옳고 맘에 드는 것은 아니더라구요. 그걸 어찌 일일이 말하면서 살 수 있나요. 그저 웃지요… ^^;;

yureka01 2016-10-05 20:43   좋아요 2 | URL
그럴땐 까야죠..ㅎㅎㅎ낚시에 걸렸음을 알려야죠.^^.

오거서 2016-10-05 20:46   좋아요 1 | URL
그렇죠. 그래야 하는데… ㅎㅎㅎ

transient-guest 2016-10-06 02:31   좋아요 1 | URL
책은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어요. 개인의 신변잡기도 큰 무리가 없고요. 다만, 그 이상으로 가보고 싶은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이건 좀 어렵더라구요. 아주 내면적인 이야기는 친구하고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고민도 있고, 또 제가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많이 조심스럽죠. 책에 대한 이야기는 제 느낌 그대로 하는 편입니다. 제 서재글을 보면 극단적으로 낚시에 걸린 이야기도 가끔 나와요.ㅎ

cyrus 2016-10-05 18: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인의 사생활에 관해서 솔직하게 쓰는 것을 저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아요. 이 글이 `전체 공개`가 되기 때문에 타인 앞에 자신의 모습을 잘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약간의 과장이 곁들여집니다.

오거서 2016-10-05 19:53   좋아요 2 | URL
약간의 과장도 없으면 사는 재미가 있나요. 그리고 과장된 걸 이루어내면 더 이상 과장도 아니게 되지요.

transient-guest 2016-10-06 02:49   좋아요 1 | URL
그런 점이 없지는 않겠죠. 제가 고민하는 건 나쁜 모습(?) 또는 나쁜 생각(?)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내면의 고민이나 이야기를 하는 건데 아무래도 쉽지 않겠어요. 책블로그라는 원래의 취지도 그렇고. 다만 제가 하는 일에 대한 건 조금 더 생각해 보려구요.

오거서님: 약간은 몰라도, 보여주기 위주의 서재가 될 risk도 무시할 수 없죠. 이미 네이놈 블로그에서 많이들 하고있는...ㅎ

2016-10-05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06 0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