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마지막 주, 이곳의 기준으로는 여름의 마지막이 지나가고 있다. 12월 말에서 1월로 넘어가면서 헤롱거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4-4분기로 들어서는 문턱까지 왔다. 새삼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가는구나 싶다.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 삶의 무게를 조금만 가볍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 이런 저런 고민을 한다. 나만 그렇게 살겠냐만, 언제나 삶의 기준도 문제도 모두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 남이 사는 모습은 참고가 될 수는 있어도 기준이 되거나 직접적인 도움이 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업무때문에 최근 스트레스 지수가 확 올라가는 일을 겪었다. 내 잘못도 아니고, 고객의 잘못도 아닌, 순수하게 기관의 잘못으로 일이 좀 꼬였는데, 말이 그렇지 고객 입장에서는 일단 최종적인 결과가 나쁘게 나오게 되면 당연히 내 탓을 할 수 밖에 없다. 일이란게 그렇다. 이걸 어떻게 긍정적으로 풀어갈 수 있을지 매일 고민을 한다. 약간의 유동성을 발휘하고 발상을 전환할 경우 일단 최악의 경우는 피할 수 있는데, 신뢰회복이 관건이다. 자기 사무실 4년차 처음 겪는 일이다. 항상 고객의 이익을 앞세워 결정을 하는데, 앞으로는 문제가 생길 경우에 대비한 메뉴얼 대로의 진행으로만 가야만 할 수도 있겠다. 이번 경우도 그냥 내버려 두었을 경우 고객에게는 피해가 발생했을 수도 있지만, 내 책임은 전혀 없고, 일이 모 아니면 도의 경우로 풀렸을 것이기에 지금처럼 머리가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것이 옳은 방향일까?
바쁜 와중이지만, 평일 저녁 때 밥을 먹고 TV앞에 널부러지는 시간을 줄이고 책을 들고 서점으로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2시간 정도 책을 읽었다. 2-3일 정도를 그렇게 했더니 책읽기가 다시 수월해지는 것을 느낀다. 재미도 그렇고, 오랫만에 신선하게 하루를 마감하는 보람이 있다. 이번 주에도 다시 그렇게 해볼 생각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계열에 속하는 '무뢰파'작가인 다나카 히데미쓰의 작품 두 개를 모은 책이다. 작은 문고판처럼 생긴 구성과 기획이 참신한데, 꽤 오래전에 출판되어 상당수가 이미 절판된 상태이다. 사진속의 작가를 보면 참 잘생긴 얼굴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데, 소설에서 다뤄진 이런 저런 인물들의 면면을 다 갖추고 있을 것이다. 36세로 다자이 오사무의 묘 앞세서 자살했다는데, 그 시절 문인들의 깊은 작품/장르와의 동화, 치열한 문학의 삶이 보인다. 자기가 쓰는 작품이나 깊이 들어간 장르와 자신과 자신의 삶의 동화를 막을 길이 없었을만큼 이미 깊은 일체를 이룬 것일까? 이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취한 배'에서의 무대가 일제강점기의 경성인지라 일본작가의 눈으로 본 식민지 조선과 식민지의 문인들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는 점도 이 작품이 주는 재미라고 하겠다. 다자이 오사무는 가끔 나에겐 너무 난해할 때가 있는데, 다나카 히데미쓰의 작품 - 친근하게 말하지만 이 시리즈를 통해 처음으로 접한 작가이다 - 은 무엇보다 쉽고 간결하게 읽힌다. 마치 세련되고 좀더 단순화된 다자이 오사무? 시대상을 보는데 큰 도움이 되는 작품이다.
예전에 읽은 기억이 있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일단 목록에 들어있지는 않기 때문에 아마 실제로 읽은 책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책이 절판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리 흥미를 갖는다고 해도, 내 손에 들어올지는 의문이다. 몇 권 각별하게 관심이 가는 책도 있는데, 이런 책을 얻을 방법은 없고, 한 권인가 두 권인가는 나도 갖고 있는 책인데, 그렇게 귀하게 취급될 수도 있다는건 처음으로 알았다.
비싼 고서나 First Edition을 수집하는 것이 과연 책의 본질적인 목적인 읽힘에 대한 것일까에 대한 논란이 있다. 내 개인적으로 책을 읽는 목적이 없이 순전히 수집을 위해 사들이는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지만, 그것도 책을 소비하는 하나의 형태로써, 나름대로 출판업계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가격이 너무 높게 오르는건 하지만 고운 시선으로는 볼 수가 없다.
읽는 내내 저자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내가 즐겨찾는 서재의 주인장과 많이 닮은 듯한 스토리 때문인데, 과연 진실은 어디에?
때때로 난 사람과 사람의 관계보다 동물과 사람의 관계에서 진정으로 깊은 영혼의 교류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실재하는 관계이든, 사람이 느끼는 것을 믿는 것이든. 순전히 상대적인 것일수도 있고, 착각일 수도 있지만, 일단 소통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생물학적인 차이 때문에 생기는 몇 가지 어려움을 넘고, 한계를 인정하고 나면 그때에는 사람-동물의 교류의 깊이와 정은 사람-사람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거기에 나와 다르게 생긴 존재이고 다른 종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관계에 대한 흥미진진함은 정말이지 연애초기보다도 더 낫다는 생각을 한다.
마크 롤랜즈는 우연한 기회에 늑대새끼를 입양하여 늑대로 키웠고, 늑대를 보내기까지 11년 동안의 삶을 함께 나누었다. 사람을 멀리하는 성향도 있었다고 하는데, 초기의 호쾌한 학교생활과 럭비선수생활을 보면 누구나 어떤 계기로 동물과 함께 하면서, 동물의 편의와 동물과 함께 살기 위한 방편으로의 고립적인 삶을 택하다보면 기질과는 무관하게 이렇게 될 수도 있겠다. 사진을 많이 보고 싶었는데, 이 책은 동물을 키운 이야기를 빙자한 사진첩이 아니기 때문에 브레닌 the wolf의 사진은 저자가 목을 끌어안고 찍은 웃는 모습 하나뿐이다. 하지만, 이 하나의 사진에서 동물을 아는 사람이라면, 활짝 웃는 늑대의 얼굴에서 브레닌이 마크 롤랜즈와 함께 한 삶이 얼마나 그에게 큰 행복이었는지 알 수 있다.
동물을 키우면서 그를 통해 인간 본연의 모습을 떠올리고, 관계를 정립하면서 늑대라는 브레닌의 한계를 인정하고 '참아내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받아들임'을 통해 함께 11년을 보낸 저자의 경험은 쉽게 흉내낼 수 있는 삶이 아니기에 더욱 이 책에서 다뤄지는 성찰은 소중하다.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초기에 다룬 책인데 이제서야 내 손에 들어왔다. 한국에 살았더라면 많은 한계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책은 참 많이 사들여 읽었을 것이란 생각을 자주 하는데, 좋은 책과의 매우늦은 만남은 늘 그런 생각이 드는 계기가 된다.
이영도 = 한국형 판타지의 시조라고까지 볼 수 있다는게 내 의견이다. 비록 '드래곤 라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시절에도 이미 이곳에서 서구의 판타지를 접한 내 눈에는 '모사'보다는 '모조'에 가깝다는 생각도 많이 했고, PC통신의 어투를 벗어나지 못한 유치함도 많이 느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시도의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는다.
이 책은 드래곤 라자의 시대로부터 아주 많은 시간이 흐린 뒤의 이야기인데, 단권의 작품이 주는 공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이야기를 보여준다. 또 그간의 세월이 작가를 더욱 좋은 글쟁이로 만들어주었음을 느끼게 한 세련된 묘사도 더욱 반갑게 책을 읽어나가게 했다. 판타지적인 요소 외에도 약간의 SF적인 요소를 보았다면 '그림자 지우기'를 사용한 댓가로 일어난 연쇄적인 사건의 재림과 재구성에서 약간은 Time Paradox적인 요소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장정이 맘에 드는데, '드래곤 라자'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멋지게 제본되어 다시 나온 것을 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늘 가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기어가고, 굴러가고, 잠깐 주저앉아서 망연자실 앉아 있다가 또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일어나서 걷고, 뛰고...인생은 과정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결말은 내가 죽어야 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미 많은 것을 이룬 소위 '성공한 인생'을 사는 top 1%, 아닌 top 10%가 생각하는 인생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렇게 끊임없이 걸어가는 그 자체가 사는 것이라면, 계속 걸어가는 한, 진퇴를 반복하더라도 실패한 삶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여정이 희망고문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맘 뿐이다. 나머지는 어떤 선택이든 최선을 다하고 부지런하게 살면 된다. 그렇게 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