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매우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일단 매주 due date을 정해놓고 끝내가야 하는 큰 케이스들을 하나씩 치워나가는 부분이 있어 하루의 일정시간은 늘 머리를 써야했고, 다른 자투리 케이스나, 작은 일감들은 나머지 시간에 적절히 업무량과 강도에 따라 배분하여 일을 했기 때문에 매일 출근해서 작업하다가 시계를 보면 퇴근할 시간이 되어버리곤 했다. 물론 나 정도의 스케줄이야 한국 직장인의 흔한 격무 스트레스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느끼는 것이 다르니만큼, 어쨌든 퇴근해서 집에 가면 머리가 띵~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수-목요일을 거쳐 어느 정도 이번주의 할당량이 정리가 되고해서 금요일인 오늘은 가볍게 오전에 잡무를 하고 오후에는 책을 읽을 계획이었다. 마침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고, 이래저래 좋았던 것 (이 가사를 아는 당신의 나이는??).
그러나 나의 바램은 계속해서 들어오는 이메일과 전화, 그리고 갑작스런 방문상담신청에 가볍게 날아가버리고, 난 지금에서야 겨우 한숨을 돌리면서 오후의 미팅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월 말에 주문한 책과 CD가 막 도착한 참이라서 '그네와 꽃'이나 '가을방학' 아니면 '나희경'을 틀어놓고 그렇게 나른한 봄날의 독서를 즐기려고 했는데...
읽는 내내 책을 손에서 내려놓기 힘들 정도로 나를 깊이 사로잡은 책이다. 누구나 가끔씩은 느끼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만의 인생, 업적, 불안함, 그리고 모자람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만 뒤돌아보게 만드는, 특히 한 방향으로만 꾸준히, 한눈팔지 않고 걸어간 사람일수록, 그가 이룬바와는 상관없이.
그레고리우스는 50여년을 잘 살아왔다. 물론 여느 사람들처럼 후회되는 순간, 아팠던 일들, 즐거움 모두 적절히 경험했을만큼 비교적 평범한 삶이었을게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말이다. 꾸준한 공부와 학구열로 학교에서 이미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고문헌/고어선생님인 그의 인생은 하지만, 어느 비오는 날 아침, 어느 여자의 자살시도(?)를 말리려다가 매우 급작스럽고도 급진적으로 다른 turn을 시작하게 된다.
불면증이 있는 주인공은 매우 쓸쓸하게 긴 밤의 끝과 동시에 아침의 시작을 맞는다. 아무것도 생각할 것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는다. 밤에 잠을 못자게 하는건 소설에서 구체화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가본 길, 그리고 가보지 못한 길, 다른 인생여정에 대한 반추가 아닐까 싶다. 그런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같은 그의 정신은, 아주 우연히 자기 손에 들어온 한 권의 책, 그 책을 쓴 저자의 삶으로 들어가는 여행을 시작하는데, 그 동기만큼이나 격정적인 그 시작은 익숙한 일상, 2-30년은 그렇게 살아왔을듯한 그의 일상을 한꺼번에 drop해버리는 지점에 맞물려 있다.
아주 금방 나는 이 책의 이야기속으로, 정확하게는 그레고리우스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와 함께 긴장하고 갈구하고 실망하고, 때론 잠시잠깐의 승리감도 맛보면서 한 권의 인생을 살아야했다. 나답지 않은,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표현이지만, 조금만 참아주시길. 정말 내 맘이 그러했으니까.
기실 나에게 어쩌면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의 인생을 되짚어가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레고리우스를 보면서, 그의 50평생을 보면서, 나 자신의 이야기, 나 자신의 50대를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 말썽이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다. 어려움도 겪고, 부모님을 속상하게 해드린적도 있었지만, 정말이지 그 흔한 사춘기 한번 제대로 겪지 않고 지나왔었고, 큰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하고 조신하게 풀어짐 없이 살아왔다. 그 덕분에 모자란 실력으로 그나마 남들이 쬐끔은 부러워하는 직종에 들어왔고, 초기에 고생은 좀 했지만, 점점 나아지는 실적으로 하는 일의 양에 비해서는 훨씬 좋은 대우를 받고 있으며, 상황은 더욱 좋아질 수도 있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꽤 건전한 취미와 건전한 생활, 건강하고 균형잡힌 생활 덕분에 나이에 비해 몸도 건강한 편이고 또래보다 어려보이는 편이다 (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항상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인생을 던질만한 무엇. 정열적으로 나를 던질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답은 정해져있다. 그것도 딱 정답수준의 답으로. 그레고리우스처럼 언제 어디서 무엇을 계기로 나 또한 그렇게 radical하게 갑자기 모든 것을 던져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가 학교를 뒤로하고 리스본으로 떠날때부터 끊임없이 나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그간의 생을 새겨보고 있을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레고리우스는 한 여자를 찾아서 떠났지만, 그 끝에서 얻은 것은 다른 사람의 인생여정의 깊은 이야기, 그리고 그 주변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자신의 이야기만이 세상의 전부였던 사람에게 그것은 그 나름대로 큰 의미였을 터이다. 하지만, 책에서는 끝까지 그가 찾아 떠난 여인을 만났는지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그 큰 떡밥을 그렇게 가볍게 날려버리고, 그레고리우스는 다시 베른으로,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다. 그게 다다.
어떤 의미를, 깊은 무엇인가를 찾는건 실패했지만, 어쩌면 그레고리우스의 여행은 그 자체로써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마치 내가 이 책에서 깊은 철학적 사유를 끄집어내지는 못했지만, 그레고리우스의 모습에 나 자신을 투영시켰던 것처럼. 간만에 깊은 사고를 하게 만드는 책을 읽은 듯 감동아닌 감동같은게 계속 내 마음속에 부유하고 있다.
'의천도룡기'를 보면 초반에 주인공인 장무기의 엄마, 은소소가 자결하면서 하는 말이 있다. '여자는 사람을 잘 속인단다. 예쁜 여자일수록 더 잘 속인단다'라는 취지의 말인데,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장치로써의 아름다운 여인은 정말, 그 미모나 매력에 정비례로 문제가 많다. 단순히 거짓말이라면 그 시대의 애교로 봐주겠지만...이렇게 말하고 나니 스포일러가 쏟아지는 느낌이다.
페이퍼를 시작한건 오후 2시. 이렇게나마 마무리하는건 5시. 그 동안 두 건의 상담과 업무처리, 그리고 세금정산을 위해 회계사와 만나는 부분까지 정신없이 돌아간 3시간이었다.
언젠가 정말 다 던지고 나갈 용기가 생긴다면 나도 우선은 기차를 타고 서부종단, 그리고 대륙횡단을 할 것이다. 그 계기를 찾기위해 비오는 날 아침 금문교를 걸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