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기를 처음 만난 것은 어렴풋이 기억하면 내가 국민학교 3학년 정도였을 때이다. 잠깐 머무르던 미국의 어느 곳에서 일주일에 한번 정도 열리던 flea market에서 어머니가 사온 것을 즐겁에 갖고 놀았는데, 그 어린 나이에도 TV와 영화에서 본 typing을 흉내내면서 뭔가 작업을 하는 듯이 타자기를 두들기면서 그 특유의 소리와 타격감을 느끼면서 뭔가 영화속의 사람이 된 것처럼 재밌어했던 기억이 있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누나와 친척동생까지 타자기 하나를 둘러싸고 차례를 정해서 놀았던 그때가 아련하게 눈앞에 떠오른다. 그 아파트, 책상, 타자기, 사람들, 불빛까지 하나씩 마치 회광반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나는 노는 정도에서 그쳤고, 내가 숙제 때문에라도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에는 벌써 전자타자기의 시대와 워드프로세서의 시대도 저물고 PC의 시대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덕분에 필수불가결한 이유로 가끔씩 사용하는 전자타자기를 제외하고는 이런 아날로그적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하지만, 폴 오스터는 글을 쓰던 처음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 타자기를 사용하여 글을 쓰는 것 같다.
책 자체는 살짝 실망스러울 정도로 간결하게 그림, 그리고 아주 드문드문 폴 오스터의 타자기 이야기가 쓰여있다. 그림 때문인지 두꺼운 도화지 같은 종이로 프린트 된 이 책을 보면 오스터는 지금까지도 타자기로 작업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갈수록 구하기 힘들어질 타자기 부품과 리본때문에 언젠가는 전자식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가능하면 더욱 오래 그의 글만은 타자기로 만들어져 나왔으면 좋겠다. 손으로 쓰는 글, 타자기로 치는 글, PC나 Mac을 사용하여 쓰는 글은 그 각각의 방법에 의해 비슷하지만, 기실 전혀 다른 hand-eye coordination을 통해 다른 뇌의 stimulation을 일으킬 것으로 생각되며, 이에 따라 이 세 가지 방식은 각각의 다른 글을,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는 글을, 만들어 낼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오스터의 글이 가장 오스터 답기 위해서는 타자기로 글을 써야만 할 것 같다. 타자기가 완전히 사라지는 날, 그러니까 부품도 구할 수 없고, 리본도 더 이상은 어디를 뒤져도, 심지어는 ebay에서도 구할 수 없는 그날은 오스터의 '글', 적어도 우리가 아는 그 모습으로써의 글은 사라지는 것이다.
아무리 방법론적인, 또는 실험적인 면에서 극찬을 받아도 나는 이런 종류의 스토리텔링을 좋아하지 않는다. 책속의 책, 스토리속에 배치된 또다른, 하지만 같은 중첩되는 이야기를 통해 마치 장자의 나비꿈같은 소리를 하는게 적어도 서구권에서는 꽤 먹히는 것 같지만, 난 이런건 장난질 같단 말이다. 작가의 심오한 말장난. 그래서, 다른건 다 배제하고 한참 이런 저런 추리를 하다가 이건 알츠하이머환자의 이야기라는 것으로 결론짓기로 했다.
크게 기대하고 본 책은 아닌데, 마지막 파트를 제외하고는 꽤 많이 공감하면서 재미있게 읽은 유익한 책이었다. 늘 말하고 생각하지만, 책읽기자체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면서 산다. 그게 좋을때도 있고, 어쩌면 너무 모든것을 복잡하게 관념화하는데서 오는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책을 가까이 하고, 평생 이를 벗삼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가끔이라도 이런 고민을 할 것이다. 이 고민에서, 그리고 종종 오던 책읽기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조금씩 구해서 읽어온 책읽기에 관한 책들이 이제는 거의 백여권이 되어간다. 거기에 한 권이 더 얹어지는게 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책은 꼭 사서 읽으라는 말, 그리고 재미있는 책을 읽으라는 말 외에도 다양한 형태와 의미로써 책읽기와 구매와 함께 따라오는 여러 가지를 '탐욕'이라는 말로 정리한 것이 꽤 신선하게 남는다.
실로 오래간만에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을 읽었다. 그의 많은 작품들처럼 이 작품도 실화에 일정부분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특성상 많은 일들의 흑막이 드러나지 않았고, 군정하에서 또는 정치적인 이유로 이를 밝혀낼 수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픽션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란포의 기괴한 세계관도 좋고,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고스케도 재미있게 보는데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들은 또다른 방식으로 재미와 함께 깊은 impression을 남기곤 한다.
1월호부터 계속 보고 있다. 한국에서 나오는 월간지를 구해보는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그래도 책에 대한 잡지라서 애정을 갖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용이나 구성은 아직도 많은 보완이 필요한데, 이번 4월호에는 책에 대한 이야기가 좀더 늘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워낙에 쉽지 않는 소재라서 그렇겠지만, 겉만 번드르르한 취재보다는 좀더 깊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싶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내 구독이 잡지의 수명과 건강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새로 배달된 책은 확실히 좀 빨리 읽게 된다. 그리고 페이스에서 밀려 한쪽에 꽂혀버린 책들은 나중에 다시 눈에 들어오는 날 읽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게해서 책은 자꾸만 쌓여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사는걸 멈출 수 없으니 점점 병적으로 가는 것 같다. 사무실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receptionist겸 비서들 중 한명이 책을 꽤 많이 읽는 사람인데, 옷쇼핑보다는 좋은 취미가 아니냐면서 위로(?)를 한다. 일견 맞는 말이겠지. 그래서 나도 네 드레스 한벌이면 책 20권 정도는 살 수 있느니까, 네 말이 맞다고 했다. 그렇게 자기합리화와 정당화는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