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프니 만사가 귀찮고 괴롭다. 책도 운동을 하면서, 그리고 자기 전에 조금씩 계속 읽고는 있는데 도무지 속도가 나지 않고, 사실 즐겁지도 않다. 그나마 '킨'을 재미있게 읽고 있으며, 우연히 손에 잡은 셜록 홈즈의 영문판 - Easton Press판이라고 가죽으로 예쁘게 제본한 판본인데, 20년 정도 갖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손에 들어온다 - 을 조금씩 보고, 다른 책 몇 권을 몇 페이지씩 읽는 정도다. 덕분에 지난 주 중반까지 속도가 붙던 이번 해의 독서는 갑자기 모두 slow down이다.
휴가를 다녀온 덕분에 미뤄둔 일, 하필이면 진도가 나가기 어려운 일들만 골라서 쌓여있는데, 몸도 아프고 다음 주엔 Jury Duty가 떠서 나가봐야 할 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정신이 없는 한 해의 시작이라서 일단 음력새해까지는 새해로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부디 설날까지 골치아픈 건 몇 개를 싹 끝내고 새롭게 멋진 한 해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런 특이한 세계관으로 SF를 쓰는 작가도 있구나 싶다. 미국에 살면서도 전혀 모르고 지나간 작가를 한국어를 하는 덕분에 만났다. 간혹 반대의 경우도 있기는 한데, 어차피 이쪽 시장에서 뜬 책이나 원래 잘 나가는 고전은 대부분 번역되어 들어가니 가끔 한국어로는 절판되었거나 구하기 어려운 책을 다소 쉽게 그리고 싸게 구하는 정도가 영어책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덕분이다. 반대로, 한국어를 하는 덕분에 알게 되는 이곳의 책이 월등히 더 많은 것 같으니 이건 모두 세종대왕 이래 한글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 선열의 덕이라고 하겠다. 갑자기 든 생각이지만 자기말, 자기글자가 없는 민족은 여러 모로 문화를 발전시키고 계승시키는데 불리했을 것 같다. 한자와 기묘한 알파벳 조합으로 글을 표현하는 베트남만 해도 그렇고.
아프리칸-아메리칸의 정체성, 여성으로서의 자아가 많이 드러나는 단편들인데, 각 이야기 하나하나가 개성이 매우 뚜렷하고 특별하다. 다른 분의 서재에서 보고 쟁여놨는데, 이렇게 멋진 만남을 갖다니. 이런 경험이 쌓일수록 - 지적인 허영은 차치하고라도 - 책을 멀리할 수가 없는 것이고, 계속 사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끔 '책을 너무 많이 읽는다' 또는 '책을 너무 많이 산다'는 투의 비난(?)을 듣는데, 그들은 내가 아는 이 기쁨을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지난 11월인가 LA에 갔을 때 책을 한 꾸러미 들고 오던 나를 가리키며 한 숙소의 reception의 말이 'may be he's lonely'였다. 직업에 귀천이 없고, 그런 걸로 사람을 평가하는 건 야비하지만 솔직히 내 맘속을 스쳐간 reaction은 "니가 그러니까 그 나이에 거기에 있지"였다. 순전히 화가 나서 든 생각이지만, 그런 저급한 말을 듣고 즉각 그대로 쏘아붙이지 않는 정도가 내 인격의 한계였으리라.
어릴 때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이런 저런 전집을 많이 갖고 있었다. 때는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발품과 책을 함께 파는 외판원 아주머니들의 전성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우리 집만 해도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위인전기, 세계위인전기, 만화한국사, SF문고, 백과사전, 세계문학전집 등이 할부로 구매되어 있었고, 그 밖에도 계림사 - 나중에 보니 쇼각칸이라는 일본의 출판사 시리즈를 그대로 들여왔다고 - 에서 나온 300여권의 명작소설이 집에 가득차있었다. 평생 TV라고는 20인치를 넘어보지 못했고 가구든 뭣이든 함부로 못사게 하던 아버지가 유독 책에는 관대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당신의 경험을 넘지 못하고 사는데, 덕분에 난 반작용을 강하게 받아 뭐든 해보고, 접해야 한다는, 내가 좋아하는 것 말고도 해봐야 한다는 등의 오픈된 사고를 갖고 있기는 하다. 어쨌든, 그때 읽었던 SF시리즈엔 아시모프나 하인라인, 섀클리 등 최고의 작가들이 쓴 명작이 많았는데, 그때 조금씩 읽었던 아시모프의 로봇 단편이 이 책에 들어있다. 로봇 3대 원칙도 그렇고, 이 천재적인 작가의 로봇 단편을 잘 정리해서 읽는 재미는 역시 최고였다. 이곳에는 SF를 읽고 스타워즈나 스타트랙 덕분에 현재 세계를 호령하는 과학자가 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꼭 그렇게 잘(?) 풀리지 못하더라도, 그저 어린 시절의 재미를 주고, 나이가 들어서 다시 읽어도 즐거운 그런 작품들은 언젠가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않을까?
막간에 읽은 책. 말 그대로 오키나와의 근-현대문제를 다룬 책인데, 간략한 소개서에 가깝다. 류쿠왕국의 배경역사를 살짝 다룬 후 어떻게 번영을 구가하던 독립국이 사쓰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후 비극 일변도로 흐른 2차대전 당시의 오키나와의 모습, 전후 미군의 기지로 돌변한 땅,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차별과 미군의 병참기지로서의 경제와 정체성 등 동아시아의 평화와 떼어낼 수 없는 많은 이슈들이 제기된다. 오키나와에 대한 관심은 이런 저런 이유로 예전부터 갖고 있었는데, 가라테의 원류인 오키나와테, 슈리테에 대한 관심도 그렇고,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의 모습과 역사, 한국땅과의 관계 등 많은 의문점은 이 책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전후 오키나와의 문제를 다룬 정도로써, 좀더 자세한 역사는 다른 책들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운이 좋아서 일하기 싫은 잠깐의 시간에 이렇게 마구잡이로나마 정리를 마쳤다. 목요일인 오늘, 오늘 계획한 일정의 반 정도만 마칠 수 있어도 그렇게 주말까지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목표한 업무량을 맞춰야 할 것이다. 프로라는 건, 아플 때, 귀찮을 때, 일하기 싫을 때, 놀고 싶을 때, 등등, 던지고 싶을 때 던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show를 멈출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