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덕후기질이 있거나, 매니악한 소질은 없는 것으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 덕후든, 매니악이든 긴 시간 끊임없이, 그리고 그 시간속에서 꾸준한 짧은 집중이 필요한데, 나에겐 꾸준한 짧은 집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넓은 관점에서의 끈기는 갖췄으되, 말하자면, 앉아서 10시간 동안 게임을 하는 집중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런 내가, 드디어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전집을 모두 읽었다.
시작은 대략 2013년, 알라딘이 한국과 미국영업을 통합하던 시점이었고, 끝낸 날짜는 이곳 시간으로 2016년 2월 14일 밤이니까, 2년 하고도 반이 넘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내가 읽는 것은 황금가지에서 나온 판본인데, 번역이 우수하고 추리소설과 SF소설에서 질이 좋은 작품을 많이 출판해주고 있는 고마운 곳이다. 셜록 홈즈 전집도 그랬고, 괴도신사 뤼팽 전집도 이 출판사의 책을 읽었다. 다른 경쟁사가 두 군데 정도 있는데, 한 곳은 그렇다치고, 다른 한 곳은 일인번역이 아닌 "번역가 집단"의 이름으로 작업을 하는 곳이라서, 영 맘에 들지 않았다. 김한조 가짜 작곡가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이렇게 "집단"의 이름 뒤에는 종종 병목과도 같은 돈줄이나 일거리의 경로를 틀어쥔 업자가 적은 비용으로, 특히 업계에 입문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을 착취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이 착취구조에서는 번역의 질도 떨어지고, 다수의 피해자가 양산되는데, "번역가 집단"이 다 그렇다거나 특정 "집단"이 그렇다기 보다는, 그런 의심이 들기 때문에 피하고 싶다.
터펜스 부부를 마지막으로 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몇 개의 미스 마플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모두 포와로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피날레는 모든 인물이 모여 장식할 것이라는 예상에 잠깐 서운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포와로야말로 이 피날레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긴 하다. 긴 시간, 꾸준히도 읽었구나 싶은데, 중간에 대충 읽고 지나간 작품들도 있기 때문에 서재를 제대로 꾸며놓고, 원하는 책을 쉽게 뽑아서 뒤적거릴 여유가 생기면, 맘이 닿는 대로 한 권씩 뽑아서 조금씩 즐길 생각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들 6 권도 천천히 한 권씩 읽어나갈 것이다. 한 작가의 책을 다 읽는 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그리고 에세이나 자전적인 요소가 강했던 하루키 전작과는 달리 이 전작을 통해 크리스티를 더 잘 알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이지만, 무엇인가 내 독서인생에서 기념할 일을 해낸 것 같다. 전작의 시작은 김용의 소설이었고, 2012-2013년 사이에는 하루키를 그렇게 읽었었다. 곧 캐드펠도 다 볼 것이고, 이젠 조금 더 문학으로 가서 모아들이고 있었던 카잔차키스를 다 사들이고 처음부터 다시 읽어볼까 생각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겐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하지만, 그의 기행문도 그렇고 다른 훌륭한 작품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깊이 읽어볼 만한 문학사의 거장이라고 본다.
신앙생활은 신의 존재유무를 떠나서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내 평소의 생각이다. 다만, 진정으로 깨인 머리와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하면 종종 신앙생활은 abusive해지거나, 이를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의 부조리함과 부도덕함을 뻔히 보고도 알지 못하는 눈뜬 장님이 되는 것, 그리고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에 대한 경계가 필요한데, 깊은 뉘우침과는 달리 자신을 학대하는 것을 통한 피학의 열정은 종교에서 추구하는 진리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번 '할루인 수사의 고백'에서는 '죄의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뉘우침과 학대의 경계가 어디에 있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아온 할루인 수사. 그런데, 사건이 전개됨에 따라 이는 모두 할루인 수사를 사랑했던 다른 한 여인, 할루인 수사가 사랑한 여자의 어머니의 욕심과 집착이 빚어낸 일이었다. 캐드펠 수사가 은연중에 느끼던 사건의 배경의 밑에 가라앉아있던 행간이 드러나는 순간은 그렇게 추악하기 그지 없었다. 갖지 못할 것도 없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얻고자 하는 모습은 시대와 대상을 떠나 그 모습이 별로 아름답지 못하다. 자신이 갖지 못할 나라는 다수의 남들도 살기 힘들게 나라를 망쳐버리고 있는 누구와 너무도 닮았다. 그래도 할루인 수사는 결과적으로 모든 죄의식과 집착을 털어내고 남은 인생을 깊은 구도속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니까, 역시 항상 그렇지는 않은 이 시리지의 happy ending이 된 셈이다.
이제 무엇을 읽을까. 추리소설은 확실히 캐드펠을 끝내면 일본의 추리소설로 옮겨가겠지만, 정말 금년에는 고전문학을 읽을 필요가 있다. 지금 듣고 있는 팟캐스트에서 버니 샌더스의 자서전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관심이 간다. 이것도 읽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