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러니까 문학으로 분류되는 고전이 아닌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문장이 유려한 작품일 경우, 그러니까 따라가는 방향이 '소설'보다는 '고전'으로 보이는 책은 좀 다른 이야기지만, 쉽게 말해서 무협지를 읽으면서 밑줄을 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지난 주에 시작해서 주말까지 읽어낸 '음양사'는 비록 단 한 단락이지만, 장르소설로는 드물게 밑줄을 긋게 만들었다.
'헤이안 시대란, 우아한 어둠의 시대라고 난 생각한다. 나는 지금부터 그 우아하고 멋스럽고 음침한 어둠 속을, 바람에 떠도는 구름처럼 표표히 흘러간 남자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홉 권의 책을 읽으면서 딱 한번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을만큼 맘에 쏙 드는 표현이었다. 헤이안 시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위키에 잘 정리되어 있는데, 서기 794년에서 1185년까지의 일본을 말한다. 중국의 당, 한국의 삼국시대와도 일부 겹치는데, 한 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신화와 역사가 공존하는 시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위의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초자연적인 것들과 인간이 공존했던 시대라고도 말 할 수 있는 것이 이 시대에는 귀신과 영의 존재, 주술, 저주로 이한 병과 죽음 등 요즘의 기준으로는 순전히 미신으로 치부되는 것들이 실재한다고 믿었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아베노 세이메이는 헤이안 시대의 한 자락을 주름잡았던 유명한 음양사로 실제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조선시대의 관상감처럼 이 시대에는 음양료라는 기관이 있어 천문/기상을 살피고 방술을 행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국가기관에서 공식적으로 기적을 빌거나 굿을 하지는 않지만, 기실 지도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음으로 양으로 이런 일은 일어나고 있으니, 귀신과 자연현상이 생활 깊숙히 자리잡고 있던 헤이안 시대라면 음양사의 활약은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들이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주문을 외워 이적을 행했는지는 다소 의문이지만, 적어도 이 시대의 사람들의 세계관에 맞춰 이런 저런 방술을 펼쳤을 것이다. 사람의 믿음이란게 세상을 움직이는 힘, 그러니까 현상의 근거가 된다는 논리로 보면 또 초자연적인 일도 실제로 일어났을 것이고 거기에 따른 적절한 음양사의 활동도 있지 않았을까?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은 부정되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음양술의 기본이 되는 개념은 주문이다. 가장 쉬운 예로 이름을 드는데, 이름이라는 주문에 우리는 모두 속박되어 있다는 것. 이 개념을 넓혀 세상만사의 작용과 반작용을 설명하게 되는데, 저주나 축복, 귀신을 부리는 술법, 병, 등등 오만가지를 이 '주'라는 한 마디로 이야기하는 점이 참 재미있다. 이름이 '주문'이 되는 것은 마법에서는 동서양의 공통된 개념인 듯 한데, 여기서도 이름을 함부로 주거나 부르는 이름에 함부로 대답하다가 주문에 걸리는 경우가 있다. Jim Butcher의 Dresden Files의 주인공인 Harry Blackstone Copperfield Dresden은 어떤 경우라도 그의 full name을 말하는 경우가 없다. 친구들에게는 Harry Dresden으로, 가능하면 그냥 Harry로 퉁치는 경우가 허다한데, 바로 이름 = 주문이라는 공식에 의거한 방어인 셈이다.
작은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옛날 이야기를 계속 듣는 기분으로 읽게 되는데, 그러면서 이 '주'의 개념을 요즘의 현상에 대입해 보아도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이 신기했다. 작은 '주'가 종국에는 '주'의 주체가 되는 것마저도 집어삼키는 현상까지도 역시 시사적인 이슈를 쉽게 풀어낼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대형교회라는 것, 신자, 목사, 돈, 여자 이런 것들이 왜 지금처럼 그렇게 뒤섞이는지 어느 정도 '주'의 개념으로 풀어낼 수 있었다는 말이다. 깊이 들어가면 안 될 이야기 같고, 욕만 하게 되는 이런 이야기를 할 생각도 없으니 여기서 생략할 생각이다만...
신화같고 몽환적인 이 시대가 물론 모두 낭만적일 수는 없다. 귀신이 나타나고 저주가 내려지며, 피하지 못하면 산채로 귀신한테 잡아먹히고, 저주를 받아 고통을 겪다가 더러는 목숨을 잃기도 하며, 아마도 전 국민의 90%이상의 노동으로 우아한 어둠의 시대를 즐긴 사람들의 이야기니까, 아베노 세이메이나 미나모토노 히로마사 같은 사람들은 도무지 먹고살기 위한 일이란 것은 하지 않고도 늘 술잔을 기울이고 풍류를 즐긴다. 병이 나도 약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판타지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인 위대한 마법사나 전사가 아닌 사람들의 삶을 보면 소설속의 세계관이 그리 매력적이지 못한 것과 같은 이유로, 너무 깊이 생각하다보면 가끔씩 소설의 재미가 멀어지곤 했었다.
책이 나오다 말다 하고, 절판되기도 하니까, 여느 한국의 책이나 마찬가지로 관심이 갈 때 구매하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