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만, 불쾌한 경험은 책을 읽다가도 얼마든지 하게 된다.  책의 내용에 따라서, 다루는 주제에 따라서, 그냥 구성이나 목적이 뻔해서 등등, 이루 다 거론할 수 없는 많은 이유에 따라 나 또한 책을 읽다가 화가 나기도 한다.  


'~적'이라는 말이 아무리 마구 쓰이는 일본어에서 온 표현이지만, 적어도 책을 짓고 꾸미는 사람이 '~적'이라는 말을 책의 제목에 쓰는 것은 무리가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제목에 낚여 사들인 책인데, 이렇게 읽은 책은 그 끝이 좋은 경험을 하지 못했다.  일단 이 책의 P.G. 해머튼이라는 사람이 쓴 'Intellectual Life'가 포함된 몇 권의 책을 '지적 생활의 즐거움'이라는 제목으로 묶어 편역한 책이다.  한 권의 책을 충실하게 번역하거나, 평역 또는 편역하는 것과는 다르게 다가오는데 'Intellectual Life'에 '즐거움'이란 말을 더한 이 책은 책이나 지식생활에 대한 내용보다는 무엇인지 모르게 자계서의 느낌을 주고 있다.  나만 그랬을지도 모르겠고, 굳이 다른 이들의 평을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무엇을 하라는 말로 가득찬, 원 저자의 느낌보다는 역시 왠지 모르게 편역자의 말과 생각을 저자의 말에 교묘하게 엮어 왜곡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것은 물론 순전히 나 혼자만의 느낌이고, 편견일 가능성도 있는데, 어쨌든, 읽으면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특별한 즐거움을 받지는 못했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불쾌한 책 이야기를 하면서 그 시작에 어울리는 책이라고 하겠다.


이런 f**king piece of shit이라는 말이 읽는 내내 절로 나오게 만들어 준 이 책은 단지 학계, SKY-in Seoul-지방대학교를 넘어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한 제도화된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  대학원 진학은 하나의 학문분야를 좀더 깊이 파고들기 위함인데, 유독 한국에서는 석사과정은 교수의 따까리 과정에 다름아닌 노동착취와 대충 만들어 받는 학위과정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아!  그들, 교수라는 이름, 은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무위도식도착자들!  그 공감제로의 일화들, 그리고 좋든 싫든 대물림될 같은 종류의 착취까지, 읽는 동안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기실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들은 바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보니 정말 그들만의 리그라는 것이 똥더미를 둘러싼 쉬파리떼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학문과는 무관한 정치행각, 발언, 행사, 착취의 대물림.  교수들이 '돈'만 밝힌다는 말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연구비 횡령, 아주 낮은 수위의 처벌까지, 이보다 더 썩었을 수 있을까?


그 와중에, 저자를 비판하는 댓글을 단 용기(?)있는 개자식은 아마도 자신은 그렇게 착취를 당하지 않을 만큼 배경이 든든하거나, 운이 좋거나, 아니면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만큼 교수에 대한 충성과 맹목의 성공지향의 무뇌아가 아니었을까?  공감이 사회의 화두인 세상세서 그렇게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이 어느 곳에서인가 박사를 받고, 강사를 거쳐 언젠가 학생들을 가르칠 것을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하다.  


아직까지는 현재진행형이지만, 이 책이 출판된 후 저자의 인생은 더 어려워진 것 같다.  학교에서 내몰렸고, 아마 다시 학계로 돌아가는 건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분이 차라리 정치에 뛰어드는 것은 어떨까?  이런 문제는 온몸으로 겪은 사람이라면 좀더 나은 활동을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다음의 책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시 일처리를 해야 한다.  몇 가지 에피소드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싶지는 않은 책이 '사십사'라서, 좀더 생각을 정리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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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3-05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머튼의 책이 몇 년 전에도 나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마도 제목이 `지적 생활`이던가, 아무튼 그렇습니다.

일본이 서양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 해머튼의 책도 일본에 소개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일본이 교양문화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transient-guest 2016-03-05 09:39   좋아요 0 | URL
`지적 생활`은 책 한 권을 그대로 번역한 것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책은 짜집기 느낌도 나고, 원 저자의 말이 편역자의 의도에 따라 배치된 것 같기도 했습니다. 일본이 우리보다 확실히 훨씬 빨리 서양의 책을 번역해서 옮긴 건 알고 있습니다만, 교양문화에도 관심이 많았나 보네요.

cyrus 2016-03-05 09:50   좋아요 0 | URL
알라딘 검색창에 `교양`을 검색해보면 일본 저자가 쓴 관련 책 몇 권 나옵니다. 가장 대표적인 저자가 다치바나 다카시입니다. 그가 젊은 시절에 읽은 책들 대부분은 서양고전이나 서양철학 쪽입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는 교양의 체계를 살펴보면 서양교양의 영향을 받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t-guest님이 지적한 책을 저도 읽어봐야겠습니다. 까면 깔수록 내용이 별로인 책들을 디스하는 게 재미있어요. ^^;;

transient-guest 2016-03-05 10:22   좋아요 0 | URL
다치바나 다카시는 제가 좋아하는 지식인입니다. 그의 자연과학에 대한 편애와 편중이 좀 문제랄까 싶지만, 그도 이전엔 어지간한 고전은 다 읽은 것 같고, 나름대로 한 세계를 구축한 점이 좋습니다. `지적 생활의 즐거움`을 보시면 저하고 다른 평가를 하실 수도 있으니 더욱 기대하고 있겠습니다.ㅎㅎ

cyrus 2016-03-0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guest님. 해머튼의 책을 방금 검색해봤는데 《지적 생활》이 아니라 《지적 즐거움》이었습니다.

transient-guest 2016-03-05 10:23   좋아요 0 | URL
Intellectual Life를 `지적 즐거움`으로 번역했던 것 같네요. 그런데 역자가 많은 것을 보면 역시 평역이나 편역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구요.

yamoo 2016-03-07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방대 시간 강사....저 책과 <흡혈귀가 지배하는 대학>을 같이 보면 우리나라 `대학`의 실상이 그대로 들어날 거 같습니다. 뉴스에 보니 일부 사립대가 등록금을 총장과 이사장의 사적 용도로 사용해서 감사원의 제재를 받았다는데.....재수 없어 걸린 것이지, 대부분의 사립대들이 같은 짓거리를 관행적으로 해 오는 듯합니다. 정말 우리나라 대학의 미래는 암울 그 자체..

transient-guest 2016-03-08 03:15   좋아요 0 | URL
언제나 뉴스가 터지면 ˝일부˝라고 합디다. 그런데 ˝일부˝교회, ˝일부˝학교라고 하는데, 그 ˝일부˝에 포함된 것들은 모두 주류거든요. 위에서 아래로 전부 썪어 있어요. 학생회도 예전부터 회장하면 졸업할 때 집이 한 채라는 말이 있었거든요. 70년대에도. 사회상이 바로 서지 못하니까, 대놓고 해먹는거에요. 진보가 정권을 잡는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쁜 짓을 대놓고는 못하거든요. 지금 한국을 보면 정말 망해가는 국가 같습니다.
 

어떻게 하든, inspiration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마침 금요일 오전, 다른 날들에 비해서 조금은 가벼운 스케줄이 예정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출근해서 간단한 업무를 처리한 후 바로 다시 짐을 챙겨 서점으로 나왔다.  9시 10분 정도에 오면서 문득 평일에 이렇게 일찍 서점에 나와본 것이 얼마만의 일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창업 후 첫 2년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이후로는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오전의 맑은 정신으로 종이냄새와 커피향을 맡는 것도, 평일 오후 4시 정도, 나른한 오후의 한 때를 즐기기 위해 가끔 서점에 들리겠다는 초기의 바램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무실 근처에 있던 분위기 좋던 서점이 그 해에 폐업했던 것도 큰 이유였는데, 그곳이야말로 2012년 한가함에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즐겨 찾던 곳이고, 오후 4시의 나른함은 이곳에서 즐겨야겠다고 벼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온 후 지근거리에 있는 BN서점이 네 개에서 두 개로 줄어들었다.  그나마 이곳과 다른 한 곳이 남아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반란의 여름]은 그 제목과는 달리 주교인 아버지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멀리 시집보내져야 하는 운명의 여인이 마침 웨일즈왕의 동생이 불의한 일로 인해 빼앗긴 자신의 세력을 복구하기 위해 불러들인 덴마크인들, 그 와중의 살인사건과 약탈 과정에서 생긴 혼란을 멋지게 이용해서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것이 메인이다.  결론적으로 그리 멋진 추리를 보여주지는 못했으나 최소한 주교도 출세에 지장이 없어지고, 여인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한 반려자와 함께 먼 곳에서, 그러나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고, 잘 살게 될 것이니까, 일종의 행복한 결말인 셈이다.  캐드펠 수사는 아끼던 마크 수사 - 지금은 부제가 되어 있는 - 와 함께 사절단으로서 간만에 수도원 담을 벗어나 모험을 즐겼으니 그 또한 나쁘지 않았을 한 편의 단막극이다.  


[성스러운 도둑]은, 시루즈베리 수도원에 사람을 모으는 큰 힘의 원천으로 여겨지는, 성녀 위네드의 시신을 둘러싼 도둑질,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주도권 다툼과 이를 해결하는 재미있는 이야기, 그리고 '소르테스 비블리카'라는 것이 등장하는데, 신의 뜻을 알아보는 일종의 신탁이 그리스도교에 받아들여졌음을 볼 수 있는 절차이다.  중요한 일에 있어 성인/성녀 혹은 신의 뜻을 기원하고, 무작위로 성서를 펼쳐서 나오는 구절을 읽고 이를 신성한 의지로 믿고 따르는 일종의 러시안 룰렛이다.  사람의 일이나 영적인 현상을 믿는 나이고, 종종 이런 것이 실제로 어떤 현상을 나타낸다고 믿지만, 이런 것을 자주 행하는 건 매일 작대기를 뽑아 일진을 확인하는 짓 만도 못하다고 본다.  물론 이 시대 사람들도 그걸 알았으니까, 이 '소르테스 비블리카'는 함부로 사용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믿음과 영적인 것, 어둠의 힘,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관념을 지배하던 시대에 이것은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절차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소르테스 비블리카'는 현대에 와서 일부 근본주의와 결합한 푸닥꺼리가 되었는데, 무슨 일만 있으면 '주님의 뜻'을 주워섬기는 자들이나 아침마다 성서를 랜덤하게 펼쳐 나오는 구절을 보며 그날의 정책결정을 했다고 전해지는 아들 부시 같은 자들의 행태가 그 예가 된다.  신탁은 러시안 룰렛이 아니다.  점은 도저히 호불호를 가릴 수 없는 두 개의 길을 앞에 두고 있을때, 영감을 바라고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이런 짓을 하는 건 뽕을 맞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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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3-07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때 저 두 소설을 갖고 있었지요. 시리즈 물인 거 같은데, 읽지 않아 처분했습니다. 이 글을 보니 좀 후회가 밀려오네요...

transient-guest 2016-03-08 03:16   좋아요 0 | URL
저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ㅎ 20권째를 거의 다 읽어갑니다.
 

오늘까지 읽은 책들, 그러니까 리뷰가 밀린 책들은 다음과 같다.










이들이 지난 리뷰를 남긴 후 읽은 책들이다.  시간과 정신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사실 세 권 정도는 벌써 리뷰를 썼어야 한다.  밀리지 않으려고 꽤 노력을 해왔는데, 결국 이렇게 손도 못대로 계속 책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주부터 계속 바쁜 맘도 있고, 주말에도 여유가 나지 않았던 것이 이번 주 수요일 오후까지 그렇게 서재에 글을 올리기 힘들게 만든 것이다.  일하다 틈을 봐서 글을 써봐도 영 내키지 않는다.


캐드펠 시리즈는 이제 마지막 권을 남겨두고 있는데, 이걸 다 읽으면 조르주 심농을 사 읽기 전에는 달려들어 읽을 추리소설 시리즈는 없다.  밀린 동서미스테리 북스의 책들도 있고, 삼국지도 어제 도착하였고, 무엇보다 쟁여놓은 책이 워낙 많아서 아마도 다음 일년, 아니 이삼년은 새로 책을 사지 않아도 될 만큼 펼쳐보지 못한 녀석들이 널려있다.  물론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라서, 벌써 이번 달에 신규로 몇 개 일처리를 맡게 되면 그들 중 하나의 수익을 온전히 다 털어서 절판이 우려되는 책들을 주문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 병도 이런 중증이 없다.  


아무튼, 즐겨찾기로 등록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금년의 서재는 썰렁하기 짝이 없는데, 졸작이나마 자주 글을 올리지도 못하고, 다른 분들처럼 멋진 리뷰나 서평을 쓸 실력도 없으니 모두 내 탓이다.  사실 서재 방문자 숫자가 뭐라고 이렇게 신경을 쓰는건지 원, 옛날에 싸이월드 하던 생각이 난다.  


조만간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해서 위의 책을 정리할 것이다.  그러고보니 스토너 영문판도 열어보지 못하고 있고, 덕분에 리뷰도 계속 미뤄지고 있다.  읽는 욕심보다 사들이는 욕심이 앞선 탓이다.  살다보면 반성할 것들 투성이라는데, 정말 그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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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3-03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다 읽고, 그 책의 서평을 빨리 기록하지 않으면 자꾸 미루게 됩니다. 이게 심하면 다시 읽어야 합니다. ^^;;

transient-guest 2016-03-04 07:40   좋아요 0 | URL
고민입니다. 한번 밀리면 참 어렵더라구요.ㅎ
 

성매매혐의로 대법원까지 가서 무죄환송으로 나온 모 배우가 있다.  좋은게 좋은거니까, 아니면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니까, 역시 뭐 다 좋다.  그런데, 법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나 있는데, 이 사건에 관련하여 성매매 알선혐의로 재판을 받고 형을 살고 나온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모 배우의 매니저였다고 하는데, 오늘 기사를 보니 이 자는 또 같은 짓을 해서 검찰수사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자의 형사건과 모 배우의 무죄건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유를 보자.


1.  이 자가 형을 살게 된 근거는 모 배우의 성매매를 알선했다는 혐의다.  

2.  고로 이 자의 죄는 모 배우의 행위가 단순한 애정행각이나 다른 것이 아닌 '성매매'라는데 근거한다.  성매매가 없으면 이를 알선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3. 그런데, 이 자는 성매매알선으로 처벌을 받았고, 모 배우의 행위는 '성매매'가 아니라는 판결이 난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총기소지죄로 처벌을 받았는데, 다른 재판에서는 내가 소지한 것이 총기가 아니라는 판결이 난 것과 같다.  이게 말이 되는가?


여러 가지 절차적인 문제, 정치적인 편향성, 권력추구 등 너무도 많은 문제가 대한민국 사법부 구석구석을 감싸고 있지만, 절차에 있어 판사에게 부여되는 권한이 너무도 막강하다는 것은 정말 큰 문제라고 본다.  지금처럼 판사가 법리적 해석과 적용, 그리고 사건사실의 판단을 함께 하는 것은 더구나 한국처럼 법조인이란 것이 사회경험이나 다른 것은 별로 없고, 그저 머리털 나고서 지금까지 4지선다형 문제만 열심히 풀어온 자들임을 볼 때 매우 큰 무리가 있다.   개인이 경험하는 사건사고, 이를 근거로 형성된 심리, 철학, 사고방식 등은 개개인에 있어 제한적이고 편차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배심원제를 채택한 나라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이나 문제가 많이 부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에게 사건사실의 판단을 맡기는 것은 재판부에 모든 권한을 맡기는 것보다는 더 나은 제도라고 본다.  다른 나라들의 판사들이 바보라서 배심원제도를 도입한 것이 아니란 얘기다.


한국에서도 선택적으로 배심원제가 도입되고 있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이를 더욱 확대하여 종국에는 모든 재판과정에서 판사는 법리를, 배심원단은 fact를 다루게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기울어진 판이 조금이라도 공정해질 것이다.  지금이 제도에서는 로비를 하든, 압력을 가하든, 권력으로 회유하든, 돈을 주든, 판사 하나면 잘 설득하면 뻔히 보이는 사실도 묻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사건사실에 유권해석을 적용하여 상황을 모두 조각조각 분리하고 취사선택하여 (1) 특정행위가 불법이다, (2) 하지만 A의 행위는 이 특정행위가 아니다, 또는 특정행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3) 고로 A는 무죄다 라는 식을 판결을 특히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의 뇌물사건 또는 다른 비리사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최소한 절차적으로는 이런 탓이 아닌가 싶다.  검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빼앗기 위해서는 이들의 비정치화와 함께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해야 하는데, 이에 못지 않게 판사들에게서 fact를 심판할 권한을 빼앗아서 시민들에게 주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면 늘 나오는 얘기가 있다.  검경수사기소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한국에서는 그렇게 하면 지방토호들과 경찰과 조폭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것이라고 검사들은 말하고, 판사들은 시민의식의 미성숙과 비전문성을 말한다.  그런데, 해먹기로 하면, 그 자리와 권력의 위중함에 있어 검사 한 명이 경찰 열 명이상으로 더 많이 해먹고, 더 많은 해악을 끼친다.  마찬가지로 판사들, 특히 지역사회의 향토세력과 결탁한 이들은 아마도 검사 열 명까지는 아니라도, 다섯 명 정도가 해먹는 수준과 강도로 법을 망치고 있을 수도 있다.  


직접선거를 이야기할 때 5공 시절, 꽤나 진보적이라는 식자들도 늘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일단 5천불 이상이 되면 그렇게 할 수 있고, 지금은 때가 아니란 소리를 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검경수사권 문제가 배심원제도문제를 그런 맥락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한 마디로 개소리만도 못한 것이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고, 배우고 고치고 익히는 과정이 있으며, 이를 통해 제도와 절차가 보완되며 자리를 잡는 것이다.  이제라도 배심원제도고 100% 도입되었으면 하고, 검경수사기소권 의 분리도 이뤄져야 한다.  검찰과 법원의 중립성과 탈권력지향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잠깐 기사를 읽다가 떠오른 생각을 두서 없이 정리해서 말이 될런지 모르겠다만, 속칭 '석궁테러'사건도 그랬고, 판사들이 함부로 재단하여 있는 fact를 걸러내거나 없는 fact를 끼워넣는 행태를 보는 것은 정말 괴롭다.  그만 괴롭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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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3-07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하게 공감합니다!

transient-guest 2016-03-08 03: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스케줄이 널을 뛰는 듯, 바쁜 날에는 아침부터 퇴근까지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그러다가 갑자기 하루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잡무와 행정업무를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일처리를 빠르고 정확하게 하면서도 짜여진 일정에 얽매이지 않고 필요하면 improvise하여 급작스럽게 발생한 업무처리를 하는 것은 나만의 강점이다.  하지만, 조직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조직에 필요한 것은 시스템이다.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 체계를 관리하면 사람 때문에 발생하는 에러를 어느 정도 방지하거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이것이 아마 회사의 사이즈를 키우면서 가장 처음에 맞닥뜨릴 문제가 될 것이다.  내년에 그녀석이 오면 변호사의 업무 외, 직원에게 할당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가르치고, 함께 메뉴얼을 만들어 체계저인 절차를 만들 것이다.  금년에는 이런 준비와 bulk-up을 위한 작업의 시작까지는 진행하고, 이에 따른 혜택도 있겠지만, 본격적인 전선은 내년이 시작일 것이다.  차분하게 업무를 볼 수 있어 지난 일주일을 미루던 업무를 오전 시간에 일차 마무리하였다.  항상 느끼지만, 일하는 환경이 복잡한 나는 이런 시간이 가끔씩은, 하지만 주기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다른 수도원과 맞교환을 통해 시루즈베리 수도원의 소유가 된 땅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자의 시체가 나온다.  그곳에서 아내와 살다가 갑작스러운 calling으로 그녀를 버리고 수도원으로 들어온 남자, 또 원래 그 땅의 소유주였던 집안의 차남으로서, 다른 수도원으로 갔었던 남자, 이렇게 두 명의 수도사가 주용의자로 일단 파악된다.  그 정체를 둔 추론과 수사는 일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면 바로 이를 cancel시키는 요소가 발생하여 진범은 커녕 죽은 여자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현실이라면 이건 100% 미결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증인확보도 어렵고, 설사 어렵사리 용의자를 잡아와도 결정적인 증거가 없이 정황과 자백만으로는 형사재판에 요구되는 beyond the reasonable doubt을 넘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중세는 고문에 의한 자백이 허용되었고, 믿어지던 시대인데, 캐드펠의 중세는 그런 '암흑'시대가 오기 조금 전, 그러니까 100년전쟁으로 시작되는 간빙기의 혼란 이전의 시대라서 그런지, 지금의 눈으로 봐도 상당히 합리적인 사람들이 존재한다.  


멀쩡한 사람이 어느 날부터 시름시름 앓다가 무당한테 가면 무병이 왔다고, 그래서 내림굿을 해서 신을 받아야 한다고, 당신은 무당이 될 운명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상황만 바꾸어 놓고 보면 기실 수도사나 신부가 되는 calling도 이에 못지 않은 면이 있다.  물론 몸이 아프거나 사람이 죽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이런 열정에 사로잡히면 나중에 후회할지언정, 그 당시에는 그저 사바세계를 떠나 수도원이나 신학교로 뛰어들어가게 된다.  다만, 무당과는 달리, 여러 가지의 검증절차와 시간을 견딘 사람만이 진정 그 calling을 인정 받게 되고, 이 과정에서 false calling이나 다른 이유로 현실을 도피하려는 시도는 많이 걸러지게 되는데, 안정적으로 정착된 종교시스템의 강점이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열정이 끝까지 이어져서 수도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때 미혼이라면 그리 문제될 것이 없으나, 이미 결혼한 몸이라면 남은 배우자 및 자녀는 그야말로 지옥을 맛보게 된다.  아무리 신앙심이 투철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자기의 남편이나 아내를, 아버지나 어머니를 잃게 되면 그야말로 돌아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이번 이야기의 한 수도사 역시 그런 일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사람의 불편함이나 후회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가서야 그의 아내가 얼마나 자기를 사랑했었는데, 아름다웠었는지를 주워섬기는데, 제 아무리 아름답고 고결한 수도생활을 이어가더라도 난 이런 설정과 결말에 동의할 수가 없다.  자신의 ,calling을 따라가는 것과,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가족을 버리는 것은 '신'이라는 대전제를 빼면 대체로 거의 같은 모양새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누가 '육욕'은 나쁘고, '수도생활'에 대한 열정은 거룩하다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calling이 오더라도 가족이 있으면 그의 calling은 가족을 유지하는 한도 내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렇게 봉사하는 분들도 많은데, 간혹 모든 것을 던지고 어디론가 뛰어들어가버리고야 마는 인간들이 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번의 사건은 결국 그 수도사의 calling에서 비롯된 것인데, 당사자들이 다 죽어버렸으니 그 피값은 어디서 받아야 할까?


요즘 '명리'와 함께 책이 대박이 났다고 하는데, 팟캐스트 강의와 이런 저런 출연료까지, 강헌 선생의 생활이 피긴 확실히 핀 것 같다.  끔찍한 교통사고로 전처를 잃고, 몸도 다친 강헌 선생이 다시 차를 사고 운전을 하는 것을 보면, 참 이분의 인생도 up-and-down의 연속이로구나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간 음악사에 대한 책을 꽤 읽었는데, 이 책은 문학수 기자의 책과 함께 매우 좋은 배경지식을 제공한다.  문학수 기자의 책이 교과서 같다면, 이 책은 만화로 만든 참고서 같다는 차이가 있지만, 그만큼 쉽고 재미있게, 강헌 선생의 말투 그대로 블루스, 재즈, R&R, 랩, 클래식, 한국음악의 중요한 순간들, 이른바 '전복과 반전의' 음악사적인 순간들을 보여준다.  보다 야사적이기도 하고, 소설적인 표현으로 중요한 음악사의 배경지식을 얻고, 이를 토대로 좀더 깊은 듣기와 역사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명리'보다도 더 쓰임새가 많은 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권씩, 두 권씩, 조금씩 읽고 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슬슬 문학을 시작할 채비를 하고 있는데, 막상 그렇게 하려고 하면 눈에 밟히는 책들이 많아서, 그리고 문학으로 가면 당분간은 그들을 만날 수 없다는 점에 마음이 약해진다.  아~ 즐거운 망상과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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