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복잡한 일이 요 근래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더 많은게 인생인데, 어느 정도는 control이 필요하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일이다. 항상 주변과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런 것도 참 피곤하다는 생각이다. 누군가 내게 조언했던 것처럼 number 1 is me 라는 자세가 나에게는 강제적으로라도 주입되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 쉽지 않다.
책을 읽기 전까지 이 사건에 대한 나의 인식은 "이상한 교수"와 "죄질에 대비해서 무거운 형량"이라는 정도였다. 그런데, 읽고나니 여기에는 매우 오랜 시간동안 한 개인에게 가해진 집단의 부정하고 불법한 폭력으로 인한 피해, 여기에 담당판사와의 사건이후 (그것이 석궁의거든 석궁테러든, 또는 attempted 상해이든) 개인에게 가해진 법관집단의 사법폭력 이렇게 두 가지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건 1: 성균관 대학교
대학교 당국의 실수에 대한 정당한, 아니 당연한 의무였을 교수의 문제제기건으로 결국 그는 일자리를 잃었다.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 법에 대한 믿음은 그 후 재판과정에서 학교-법원의 담합에 가까운 짓거리로 깡그리 사라지고, 그의 해직은 확정 되었다. 그 과정에서의 부당함, 불법적인 법원의 행각, 판사들의 행태는 책에 잘 서술되어 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사회의 투명성 정도를 떠나서 사는게 힘든 것은 분명하다. 상당히 독선적인 교수의 성향, 타협을 전혀 모르는, 오로지 이슈를 흑백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교수의 두뇌구조는 분명히 이슈가 있다. 다만, 성대 vs 교수 재판과정에서 보여진 법원의 사건사실을 완전히 배제한 판단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옳게 보이지 않는다. 늘 법리를 내세우는데, 기실 여기에는 함정이 있는 것이, 법리를 다른 방향으로 가게 할 fact를 모두 배제하고 특정피고나 원고에 유리한 fact만 남긴 다음에 법을 적용하면 당연히 '법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판단이 나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금의 문제는 더더욱 배심원 제도를 한국에 확정적으로 도입하여야 하는 이유가 된다. 요컨데 사건에서 사실관계판단은 일반 배심원단에게 맡기고 판사는 법리만 따지게 해야한다. 그래야만 그나마 그 무시무시한 권력을 조금이라도 분산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 건에서 보여지는 판사들의 행태를 보면 conflict of interest라는 개념을 무시하는 건 김앤장 만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사건2: 교수 vs. 판사
판결에 분노한 교수는 판사를 찾아갔고, 결과는 세간에 알려진 석궁사건이 되었다. 이 또한 재파과정에서 주요 fact나 clear하지 않는 증거자료나 상황은 깡그리 무시한채 그야말로 판사 마음대로 판결을 내리고 최종적으로는 형이 확정되었다. "피해자"라는 판사의 진술도, 형사들의 진술도, 상황을 보여주는 fact도 모두 판사 마음대로 재단하였고, 재판과정에서 법적인 절차와 적법한 문제재기는 깡그리 무시되었다. 내 생각에는 석궁에 맞았다고 주장하는 '피해자' 판사보다 더 나쁜놈이 원심판사라고 본다. 그 역시 법관의 자격이나 자질, 아니 법적인 지식과 application skill이 심히 의심스러운 수준의 행태를 보여주었는데, 그야말로 저질적인 사법테러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검사나 판사들 상당수가 참 괜찮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조직논리와 완장증후군이 발동하면 이 괜찮은 사람들이 저런 인간들로 변한다. 외국의 사례를 봐도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유독 한국에서 이런 일이 관행적으로 일어나는걸 보면 우리의 정치력이나 시민의식이 아직은 성숙하지 못한 탓도 하지만, 가끔 우리의 사회-문화적인 유전자에 이미 깊숙히 각인된 것이 조직문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정렬 판사. 소위 막말판사로 해직되고 진보진영의 팟캐스트에서 진보성향의 listener들이 들으면 좋은 얘기를 많이 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보여준 그의 법논리나 의식을 보면 기실 그 또한 진보버전의 강용석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도 막말사건으로 탄탄한 자리를 빼앗기고 느낀게 많이 있겠지만, 그래서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난 그의 진보플레이를 더 이상 좋게 볼 수가 없다.
사법개혁이 시급한 이유는 권력의 독점, 독단, 독선화이고, 세력화이며 조직화이다. 어떤 경우에도 조직논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저급한 법원, 검찰조직은 한국사회에 만연한 feature라고 보겠지만, 유독 그들이 문제가 되는건 그들에게 주어진 무시무시한 힘, 이에 따른 피해 때문이다. 엘리트 의식도 좋고, 정치성향도 인정해 줄 수 있겠지만, 검사가 검사답고 판사가 판사답지 못한 것은 결국 사회에는 거대한 '독'이고 '악'이 된다.
김화영은 번역가이고 에세이스트이다. 2015년 현재에는 아마도 원로급에 속할만큼 오랜 커리어를 자랑하며, 지금처럼 작가도 문창과라는 공장식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글쓰는 세계로 들어온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이 글이 쓰이던 당시의 풍조 때문일까, 이 책의 글은 요즘의 이런 책에서 쉽게 나타나지 않는 전문성과 문학적인 고련, 사색, 그리고 그것들을 시처럼 쓰인 산문으로 엮어내는 제법 묵직한 향기와 구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카뮈번역으로 더욱 유명한 이 분의 책을 읽다가 끓어오르는 지름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카뮈전집을 사버렸을 정도로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번역이라는 형식을 통한 것이지만 분명히 그만의 오리지널리티가 나타났을 카뮈전집에서 보게 될 그의 문장이 보고 싶어졌다.
70년대. 박정희씨의 독재가 그 절정을 지나 발악기에 접어들었을 무렵의 프로방스는 아마도 이 젊은 문학청년에게는 세상에 다시는 없을 이상향으로 보였을 것이다. 지금은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프로방스지만, 그때만 해도 아는 사람만 아는, 미스트랄로 상징되는 미지의 세계였을 것이다. 그의 인생은 분명히 글쓰는 이로서만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도 이 여행을 통해서, 넓어졌을 것이다.
문체와 어투가 상당히 old해서 지금의 눈으로 보면 다소 촌스럽게 보일 수도 있고, 진부한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 요즘의 책들과는 다른 '힘'과 '깊이'가 느껴지는 책이다.
(55: 장례식을 마치고)
운동하면서 읽은 덕분에 즐겁게 드라마를 즐겼지만, 추리는 좀 어려웠다. 크리스티의 작품 전반에 즐겨 쓰이는 트릭이 이번에도 쓰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수법을 생각하고 읽으면 의외로 금방 용의자를 유추할 수 있는데, 이번에 느낀 점은 역시 누군가가 살해당하면, 그 사건으로 이득을 보는 자가 범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점이다. 임과장의 죽음으로 가장 큰 득을 보는 자가 누구인가? 유병언이 죽어서 가장 잘 된 entity는 누구인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8월 첫 주간은 제대로 읽은 책이 없다. 바쁘고 복잡한 상황, 터질 것 같은 내 머릿속 덕분이다. 운동이라도 꾸준히 할 수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