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팬심이라는 것이 있을까. 생각해보니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무엇인가를, 또는 누군가를 그렇게 깊이 추종(?)하다시피 좋아한 때가 별로 없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그래도 김광석을 듣고 코드를 따서 어떻게 하면 그 일찍 가버린 가객의 목소리와 기타소리에 가까이 갈 수 있을까 하던 대가 있기는 했으니까, 팬심 비슷한 것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로스쿨 입학 전후의 시기가 될 것이다. 자주 얘기하지만, 그놈의 로스쿨을 다닌 덕분에 이렇게 밥을 먹고 살기는 하지만, 난 아마도 20대의 가장 좋던 시절을 책도, 여자도, 생활도 다 멀리하고 고통과 고뇌의 제단에 바쳐버린 것 같다. anyway, 그 3-4년, 거기다 시험까지 1년 정도는 책도 잘 안 읽고, 영화는 좀 본 것 같고, 열심히 하던 검도도 그때 다 날려버리다가 막판에 심하게 다치는 것으로 끝장을 보았으니까, 평생의 밥벌이의 댓가로 톡톡히 값을 치룬 셈이다. 그렇게 살다가 2006년 겨울부터 한 두어 달을 놀았는데, 이때 다시 책에 가까이 갈 수 있었고, 이후 2011년에 남의 회사에서의 밥벌이가 끝난 다음 가졌던 두어 달 같의 휴식기 때 무라카미 하루키, 마쓰모토 세이초, 에도가와 란포 등의 작가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여기에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입사하여 "어쩌다" 보니 영화평론이란 것을 하게 된 이동진 이란 사람이 있다. 솔직히 말하지만, 인문학 팟캐스트의 붐을 타고 시작된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란 것을 듣기 전까지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지만, 전문성이 담뿍 들어간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나면 갑자기 학창시절 '별밤'을 - '별밤'이 개판이 되기 전, 그러니까, 이문세의 '별밤'까지 - 듣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덕분에 지금까지 '빨책'을 듣고, 이동진과 또다른 중심축인 김중혁 작가의 책을 읽게 되었다. (사실 '빨책'의 매력은 유쾌한 책수다도 좋지만, 방송 마지막엔가 이동진이 책을 읽어주는 부분이다. 아름다운 theme과 함께 그의 살짝 뜬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주는 책의 한 귀절...) 덕분에 난 김중혁 작가가 고전을 읽지 않는 작가란 사실도 알게 되었고, 이동진을 통해 미야모토 테루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음이다.
그의 '밤은 책이다'는 솔직히 조금은 딱딱했던 것 같고, 다른 '책'에 관한 '책'과는 다른 감성이라서 그랬는지, 딱히 기억하는 부분이 없다. 책을 읽기보다는 사들이는 '마니아'라는 그는 장서가와 애서가의 경계 어디엔게 서있는 나의 모습과도 닮았기에 그의 책내공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무려 만 여권이 넘는 책을 보관하기 위해 대여점에서 쓰는 rolling bookcase를 주문제작한 일화는 장샤오위안 교수의 방식과 함께 내가 고려하는 미래의 책보관방법이다), 이동진 하면 뭐니뭐니해도 '영화'다. 지금도 유투브에 이동진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온갖 영화대담과 강연, 그리고 방송클립이 나올 정도로 그는 영화에 한해서는 현존하는 몇 안되는 고수들 중 하나라고 하겠다. 현학성이나 견강부회 없이, 그저 아름다운 감성과 장면을 따라가면서도 작품성에 대한 평을 잊지 않는 그의 평은 다른 누구에 의하면 알게 모르게 한국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흥행을 좌지우지'한다고.
오늘 이 책을 보면서 나도 한번 봤던 영화는 다시 보고 싶어졌고, 그냥 지나갔던 영화는 새삼 다른 의미로 다가왔으며, 못 본 영화는 꼭 한번은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영화의 흥행을 좌지우지'한다는 소리가 괜한 것 같지는 않다. 각 챕터마다 한 편의 영화를 따라가는 여행을 직접 사진기에 담고, 밤 12시 정도의 라디오 방송이라면 딱 어울릴 듯한 감성의 글,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한 여정을 모아놓은 이 책은 토요일 오전 새벽 4시 20분의 지금 딱 반 정도를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만에 깨어난 새벽, 책을 읽다가 문득 한 가득 떠오른 혼자만의 감상, 일종의 충동과도 같은 이 맘을 흘려보내기 싫었기에 페이퍼에 남겨 봤다. 쓰고 나니, 이 시간을 그냥 보내버렸더라면 설사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고 해도, 오늘의 이런 글이 나오지 못했을 것을 알겠다. 나이가 들수록,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아쉬운 법이다. 이렇게 잔잔하게 세상 모든 것들이 잠들었을 시간에 홀로 깨어있는 시간은 그래서 더더욱 소중하다. 오롯히 혼자만을 위한 시간, 공간. 그래서 기도는 새벽에 홀로 하는 것인가보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말은 이럴 때 하라고 만들어진 것 같다. 예전에 버지니아의 폐탄광촌 근처 어딘가에서 서점을 열었던 이야기, 빈에서 갑자기 서점주인이 된 사람의 이야기, 이상북스나 시골의 어딘가에서 책가게를 연 이야기까지 부러움과 아쉬움, 그리고 '그게 되겠어?'라는 맘의 경계를 오가게 하는 책들에 이제 한 권을 더하게 되었다. 오키나와 하고도, 헌책방, 하고도, 열었다잖아?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식의 작은 서점은 역시 일본이 아니면 어렵겠다. 시장통의 다른 가게들 사이에 딱 2평의 공간으로 헌책방을 연 우다씨는 원래 대형서점의 직원으로 오키나와에 2년간 파견을 나왔던 것. 그러다가 오키나와에 주저앉아 같은 자리에 있던 헌책방을 인수하여 경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2평의 서점에서 취급할 수 있는 책의 숫자와 종류는 제한될 수 밖에 없는데,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오키나와에서는 오키나와에 관련되 모든 책, 예컨데, 작가든, 주제든, 사람이든, 무엇이든 잘 팔린다는 점이다. 거기에 일본 특유의 - 오키나와는 사실 일본이 아니지만 - 옛것을 보존하고 유통시키는 자세까지 더하면, 그래도 이 정도 규모의 헌책방을 운영하면서 먹고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일본의 어느 곳에 있을 것이니, 우다씨가 살짝 부럽다. 하루 종일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책 몇 권을 팔고 그날의 양식을 마련하는 삶은 물론 모두의 것이 될 수 는 없겠지만, 그러니까 더욱 부럽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 하나하나는 블로그의 글처럼, 일기처럼, 그냥 하루의 일상을 써내려간 듯, 깊은 내용은 없다. 그저 담담하게, 아주 가끔은 발랄하게 헌책방을 열고 꾸려가는 우다씨의 이야기. 덕분에 이 책을 먼저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의 감성은 반만 읽은 이동진의 책이 먼저가 되었다.
새벽에 눈이 떠졌는데, 그리 피곤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뒤척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꽤 숙면을 취한 것 같다. 몇 개의 일감을 들고 퇴근했던 터라 여섯 시에 gym이 여는 시간까지 조금 해보려고 노트북을 켰더니 이렇게 페이퍼를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35분간, 물이 팔팔 끓어 휘슬소리가 나는 주전자도 간만에 한번 써보고, 역시 간만에 earl grey를 한 잔 마시고 있다. 엘리뇨의 끝자락을 지나는 덕분에 더디게 온 봄을 엘러지로 한 가득 느끼면서 이틀 사이에 헐어, 퉁퉁 부어버린 코끝의 둔중함과 따거움까지 온몸의 감성세포가 한껏 열린 듯한 새벽. 그래도 이제는 춥지 않아서 베란다 문을 열어놓고 식탁에 앉아 있을 수 있다.
이동진 작가/DJ/기자/평론가가 잠에 드는 시간이 대략 새벽 다섯 시라니까, 지금 시간이면 그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잘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맑은 정신으로 새벽을 맞는 것과 밤으로서의 새벽을 맞는 그의 일상과의 사이 어디엔가 오귀스트 뒤팽과 함께 한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이나 '매리 로저스 살인사건'의 시간이 있을 것이다. 낮에는 두꺼운 커튼으로 빛을 가리고 촛불을 가득 켜서 밤의 시간을 이어가고, 밤이 오면 다시 살아나 인적이 끊긴 거리를 배회하던 그들의 시간은 일견 아름답긴 하지만, Jack the Ripper나 하이드씨 또는 드라큘라 백작의 시간이기도 한 탓에 그 모습을 상상하면 살짝 등골이 시려오기도 한다. 그래도 내가 정상적인 생활이 필수인 보통사람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면 한 일년 정도는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한 오전 6시 정도에 잠이 들고 오후 2시 정도에 깨어나 운동을 하고 (이 시간대의 gym이 가장 덜 붐빈다) 오후 5시부터 일을 하며, 밤 12시엔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대다수가 잠을 청하는 시간부터 TV를 보면서 하루의 피로를 끄다가 책을 붙잡고...그렇게 한 일년을 살면, 글쎄 수명이 좀 줄어들지도 모를 일이지만, 일생에서 딱 일년의 기괴한 삶이 허락된다면 다른 일년 정도는 댓가로 치뤄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 책을 읽은 덕분에 미국도 아닌 알라딘에서 한국어 자막이 달린 이런 저런 영화 DVD합본을 찾고 있다. 이를 끝으로 당분간은 정말 책주문을 끊어야지...(이 book buying sprees는 이미 사무실이 들어가 있는 건물의 receptionist들 사이에선 나름 유명하다) 그러면서도 큰 건이 성사되면 또 몇 십만원어치의 책은 쉽게 주문할 터이니, 난 역시 집값이 좀 싼 곳으로 이사를 가야만 할 것 같다.
살짝 엿본 '기괴한' 삶은 이렇듯 호기심을 자극하는 감성의 맛을 조금 보여주었다. 딱 일년만 그렇게 해볼까??? 상담이 문제인데, 일은 오히려 더 많이 처리할 듯. 그런데, 그렇게 살다보면 오후 1-2시의 감성이 이런 새벽의 감성으로 다가오려나?? 그럼 '기괴하게' 사는 의미가 없을텐데...
거의 50분 동안 붙잡고 있던 이 페이퍼를 다시 읽어보니 역시 마구잡이의 감상어린 글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오랫동안 잊고 지낸, 맘에 떠오르는 것들을 한껏 글로 풀어낸 시원함이 있어 속이 후련하다. 그거면 됐다.
지금에 딱 어울리는 노래. 내 어머니가 소녀시절에 사랑한 가수들, 그 어머니를 통해서 알게 된 듀오 Simon & Garfunkel의 Wednesday Morning 3am이란 노래는 어머니가 아닌 내가 찾은 숨은 보석같은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