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셋트로 구매한 것들에서 남은 두 작품을 이틀간 내리 읽었다.  좌백의 '비적유성탄'과 진산의 '대사형'.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우습게도 마지막에 읽은 두 작품이 하필이면 이들 부부의 작품이라니.  아무튼 책을 읽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글로 정리하는 건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다.  머리로도 정리가 안되는 문제가 있고, 금방 잊어버리기도 하고, 차분히 앉아서 글을 쓰지 못하는 날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성공학적인 독서론으로 책과 글을 쓰고 강연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을 조금은 무시하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갑자기 그것도 다양한 삶의 방편들 중 한 가지,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림의 최고수 여덟 명이 각기 다른 날 같은 방법으로 청부살인을 당해 일곱은 죽고, 하나는 백치가 되었다.  더 황당한 건 이들이 당한 무기는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라는 것.  여덟 번의 암행을 끝으로 이 가공할 정체불명의 자객은 강호에서 사라진다.  항주에 나타난 이 은퇴자객은 평범하게 살고픈 그의 바램과는 달리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정확히 그 반대로 일이 풀리고, 금방 고강한 무공을 평범한 수법으로 드러내는 괴인으로 무림의 총아(?)가 된다.  그의 솜씨를 사기 위해 뒤를 따라다니는 해사방의 방주 강중행, 무림괴도 공손혜수까지, 중국을 무대로 하고는 있지만, 삐딱한 좌백의 작품답게 현대어와 현대적인 모티브가 난무하고, 사건도 그렇고 주인공의 궤적도 그렇고, 명문정파와 재자가인이 어우러지기 보다는 기인이사와 군소방파의 무리들이 주된 재료로 버무러진 재밌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내가 꼽는 좌백의 최고작품은 대도오인데, 이는 구할 방법이 없다.  이들의 뒷 이야기를 다룬 외전은 최근에 읽은 단편집으로 먼저 접했는데, 역시 무척 참신한 이야기를 즐길 수 있다. 


부창부수라고 하면 정확한 표현이 아니겠지만, 암튼 진산마님이 다루는 소재와 이야기는 좌백에서 두 걸음은 더 나아간, 비주류의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많이는 못 읽어 봤지만, 문단에서 흔하지 않은 여류무협작가라서 늘 흥미를 갖고 있다.  장백쾌검문 미래의 문주이자 최고수로 여겨지던 대사형이 첫 강호행에서 꼼수와 암수가 곁들여진 음모로 만들어진 비무로 허망하게 죽고, 그의 뼛가루가 몰고 온 폭풍으로 사부와 거처를 모두 잃은 사형제들은 좋든 싫든 강호로 몰린다.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거나 제대로 풀리지 못한 부분이 좀 있어 호불호가 갈릴 듯.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었으나 인과관계나 사건의 논리적인 flow가 부족한 점이 아쉽다.


예전에 다른 책으로 엮인 것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그게 full series인지, 아니면 이 책의 일부 이야기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워낙 많이도 썼고, 이런 저런 에세이 모음에서 이합집산을 시켰고, 새로운 판본으로 책이 나오다 보니, 그의 책이라면 가급적 덮어놓고 지르는 나는 같은 이야기를 새로운 모냥새로 다시 접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아주 쉽게, 하루키의 시드니 올림픽 취재기 정도.  작가라서 다행이야를 연발하는 걸 보는데, 사실 하루키의 반 정도만 성공한다 해도, 정말로 '작가라서 다행이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요즘 대다수의 삶과 그 빡빡함이라니...


'고양이의 서재'로 접한 장샤오위앤 교수의 책.  '고양이의 서재'와 함께 한국에 번역된 그의 책은 이것이 전부.  좀더 흥미있는 책이 몇 권 있는데, 이거라도 감지덕지한 것이 현실이다.  survey형식으로 고대의 동서양의 점성학에서 현대의 천문학이라는 과학으로 넘어오는 과정을 factual하게 그려냈다.  교양삼아 한번 읽으면 좋고,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과 저자의 관점을 조금 엿볼 수 있다.



이덕일 소장과는 어떤 관계인지 궁금한 강단사학에서 의도적으로 또는 의도하지 않고 계승되는 식민지사학이 왜 그렇게 고쳐지지 않는지에 대한 또다른 관점으로의 접근을 보여주는 책.  결국, 현 시대엔 연구를 게을리하고, 파벌에서 머무는 탓에 한국사연구가 지금 이따위라는 것을 결론으로 얻었다.  이덕일 소장이 보여주는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훨씬 덜 personal하고, 점잖기까지 하지만, 결국 학자로서 식민지사학을 그래도 이어가며 기득권에 머무는 강단사학자들은 쓰레기만도 못하다는 결론을 주는 책이다.  일례로, (1) 연구를 하지 않는다, (2) 논문을 써야한다, (3) 국내논문은 좀 그러니까, (4)일본의 논문을 표절한다, (5) 하면서 이와 부합하는 윗대나 그 윗대의 논문을 각주로 단다, (6) 학파의 자자손손 대대로 (1)에서 (5)를 반복한다.  저자에 따르면 바로 이 과정에서 식민사학이 어떤 비판도 없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  심지어는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천치 같은 자들이 작금 한국의 고대사학계를 지배하는 SKY를 비롯한 유수학교와 학계를 주름잡고 있다는 것.  덕분에 한일고대사연구세미나는 언제나 화기애애하다고.  특이한 과점도 그렇고 동 저자의 책을 몇 권 더 읽어볼 생각이다.


이번 주는 한 주를 푹 쉴 예정이었으나, 아마 아무리 못해도 내일까지는 달려야 하고, 어쩌면 목요일까지도 달려야한다.  C'est la 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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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6-28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열린책들 출판사의 <천일야화>를 읽고 있는 중입니다. 여섯 권짜리 책을 완독하기 위해서 지금 다른 책들은 아예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한 작품을 계속 읽는 게 힘겹네요. t-guest님은 그많은 아가사 크리스티 전집을 어떻게 다 읽으셨나요? 같은 작가의 책을 세 권 이상 읽으니까 지루합니다. ^^;;

transient-guest 2016-06-28 15:14   좋아요 0 | URL
비슷한 모티브가 이어지는 건 아무래도 피로도가 있죠. 다만, 크리스티 전집은 여러 주인공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오랜 시간을 두고 조금씩 천천히 다른 책을 읽으면서 함께 봐서 그나마 괜찮았던 것 같아요. 중간에 지루하거나 처지는 때도 있었구요.ㅎㅎ
 

갑자기 게을러졌기 때문일까.  잠시 책읽기가 주춤했었다.  간만에 게임을 잡은 것이 이유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주말에는 잠시 부모님을 모시고 어딜 다녀온 시간을 제외하고는 책을 붙잡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많은 일을 처리하지 못한 오늘.  운칠기삼의 의미를 또다시 되새긴 오늘.  한 일주일만 사무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지내면서 푹 쉬고 싶다.  


글을 쓰다가 말다가 하면서 이어지니까, 이렇게 조각을 모아놓은 것 같은 페이퍼만 나온다.  다음 주에는 거의 모든 미국사람들의 휴가기간이니까 너무 스케줄이 나쁘지 않다면 나도 사무실을 조금 떠나서 있어볼 생각이다.


'우주 전쟁'은 어릴 때 소년소녀문고로 접한 이후 처음으로 다시 읽었다.  그간 영문으로 몇 번 읽은 적은 있는데, 국문으로 (미국에서 20년을 넘게 산 나에게 영어는 국어, 한국어는 모국어로 분류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읽은 건 대충 따져봐도 25년만에 처음이다.  


이렇게 어린 시절에 읽은 책을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면 간혹 '이런 책이었나' 싶을 정도로 다르게 다가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우주 전쟁'이 그런 책이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나이를 먹으면서 쌓인 생각과 경험, 그리고 HG 웰즈, 아니 SF 장르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뀐 덕분일 것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그냥 '공상과학'썰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이야기.


사회적인 관점에서, 정치적인 관점에서, 혹은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등등 수 많은 다른 시각으로 이 책을 조명할 수 있는데, 이렇게 보면 이야기의 구성과 전개보다도 훨씬 더 그 해석이 복잡하고 다각적이다.  우주인을 만나게 되면 벌어질 수도 있는 하나의 이야기라는 점은 그 전보다 확실한데, 상대적으로 월등히 뛰어난 문명이 그렇지 못한 인류와 만났을 때 지금까지는 후자의 운명이 그리 밝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실 정말로 외계인이 있고, 차원이나 시공간이동이 가능한 문명이라면 그들과 우리의 기술적인 간극은 백인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차이수준을 훨씬 뒤어넘을 것이고, 그들이 우리의 반의 반, 아니 그 반만 같아도 지구멸망은 거의 확실한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미지의 문명과의 조우에서 적대적인이 우호적인지도 판단하지 못하고, 아무런 정보가 없이 우왕좌왕하는 한 시기 영국의 타운사람들의 모습과 앞으로 다가올 지도 모를 이계와의 조우 때 우리가 보일 모습이 그리 다르지도 않을 것 같고, 오히려 그간의 인구증가와 도시확장을 보면 훨씬 더 큰 혼란이 예상된다.  일단의 외계인 신봉자들이 이야기하듯 초고도로 발달한 문명은 선할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극선이나 극악이나 초고도문명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다고 보고, 또 그들의 선과 우리의 선은 그 기준이 다를 수도 있기에 어쩌면 지금처럼 UFO는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편이 나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간만에 나온 하루키의 여행에세이.  언제나처럼 큰 임팩트는 없이 잔잔한 그만의 필체로 과거의 여행을 다시 밟아간 이야기.  재탕이 종종 이뤄지지만, 이번의 이야기는 그가 8-90년대에 방문했거나 잠시 살았던 곳을 비교적 최근에 다시 돌아보면서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고, 친했던 사람이나 즐겨찾던 장소를 찾는 등 다른 책에서 보지 못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어 더욱 반가웠다.  워낙 이전의 여행과 이번의 재방문사이의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없어진 곳도 있었고, 대를 이어 운영하는 숙박시절도 있었는데, 우조를 너무 많이 마시면 안된다던, 가끔은 생선을 손질해주기도 하던 친절한 모씨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고 하니, 맘이 착잡하기도 했을 것이다.  잘 나가는 작가란 직업이 부러운 건 무엇보다 이렇게 어디든 쉽게 떠날 수 있다는 점.  게다가 잘하면 책을 쓰는 조건으로 비용지원까지 받을 수 있으니까 금상첨화다.  하루키도 이제 60대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젊은 시절만큼 힘있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은 점점 어려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여행기도 좋고, 잡문도 좋고, 그저 주기적으로 새로운 글을 써주었으면 한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읽을 땐 미처 몰랐는데, 윤성근씨의 글솜씨나 풀어내는 이야기의 소재들은 남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다.  헌책방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부러움도 있고 해서, 그가 쓴 책을 모두 구해보게 되었다.  지금 배송중인 두어 권도 받으면 바로 읽어낼 생각이다.  전문작가의 글도 보았고, 상당히 이런 쪽으로는 많은 글을 읽어봤는데, 윤성근씨의 글은 (1) 작가들의 독서평론처럼 빛이 나는 점은 없지만, (2) 자신의 커리어를 만들기 위해 일부 젊은이들이 시도하는 책출판경력서 따위의 글보다 훨씬 더 좋다.  책을 쓰기 위한 글이 아니고,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쌓인 것들이 술술 글로 풀려 모인 느낌이랄까?  한달 한번씩 심야책방을 열기도 한다는데, 아마 하루의 업무를 마친 늦은 밤, 혼자 조용히 책상앞에 앉아 낮의 번잡스러움과 벌이의 고달픔을 뒤로 하고 한땀씩 정성들여 새기지 않았을까?  특히 '탐서의 즐거움'에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혼자 부엌 한켠의 작은 식탁에 노트를 펼쳐놓고 글을 쓰는 모습이 떠오르게 하는 무엇인가가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그려낸 그의 모습이었다.


엘러지가 심해지니까 여느 기침감기와 다를 바가 없다.  1-2분에 한번씩 기침을 하고 그렁그렁하게 맺힌 가래를 닦아낸다.  좀더 심각한 증상일까봐 걱정이 되는건 확실히 나이를 먹은 탓이다. 가라앉지 않으면 조만간 다시 병원에 가봐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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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23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하루키 진짜 읽고 싶네요 ㅋ 기침 조심하세요 ㅠ 저도 가래가 너무 심해서 금연약 치료 받아서 챔픽스 먹으며 금연하고 있어요 담배를 안 피니 괴롭네요 ㅋ 알러지가 좀 없어지시면 좋겠어요

transient-guest 2016-06-24 00: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요즘은 어디가 아프면 확실히 예전보다는 만성으로 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aging...이죠..ㅎ 저는 담배를 피지 않고, 유일한 vice는 술이랍니다. 사실 술을 끊으면 만사형통인데 말이죠..ㅎㅎ 건강관리는 필수입니다.

cyrus 2016-06-23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 감기가 제일 무섭습니다. 지난주에 통풍이 무릎, 손목에 재발했는데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몸이 아프면 책 읽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집니다.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드러눕고 싶습니다. ㅎㅎㅎ

transient-guest 2016-06-24 00:57   좋아요 0 | URL
저는 5-6월엔 알러지가 심해질 때가 있어요. 증상이 심해지면 감기나 진배없어서 의사한테 가도 잘 모르더라구요.ㅎ 요즘 제가 딱 그래요. 만사가 귀찮고..책더미를 디벼서 읽기 쉽고 신나는 막소설을 찾아 읽어야할 것 같습니다.ㅎㅎ 통풍은 정말 괴롭죠...약을 먹으면 멍해진다고 한창 고생하던 선배가 말하더라구요. 식이요법과 다이어트로 극복하고 꾸준히 관리해야한다고 들었습니다. 통풍이 치료되었으면 합니다.

호서기 2016-09-02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방금 우주 전쟁을 읽었습니다. 임종기 씨가 옮긴 2005년 책세상 판으로요. 다큐멘터리 같았다는 님이 표현이 아주 적절한 것 같군요. 오죽하면 라디오 오페라를 듣던 사람들이 실제 상황인지 착각했겠나 싶더라구요. 암튼 전에 몰랐던 깊이가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transient-guest 2016-09-03 03:04   좋아요 0 | URL
SF를 흔히 어릴 때 읽는 책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우리나라엔 특히 강한 것 같습니다. 저도 늘 그렇게 생각했었구요. 그런데 알고 보면 세태풍자나 미래예측, 사회상을 반영하는 등 수준이 높은 소설이 많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다시 읽는 SF의 맛이 더욱 각별한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ㅎ
 

몸상태가 좋지 않을 때 가끔 막걸리를 마신 다음날 뻥~ 뚤린 경험이 있어 사러 나가려고 했더니 벌써 한국마트는 문을 닫을 시간이다.  지금이야 traffic도 심하지 않고 해서 빨리 갈 수 있지만, 그래도 20분은 잡아야 하는데, 여름해가 길어서 시간이 지나가는 걸 잘 모르고 있었다.  오후 4시에 방문상담이 잡혀버려서 점심운동을 싱겁게 했더니 좀 부족한 듯.  그런데 정작 오후 2시에 취소연락이 와버렸다.  가끔이지만 한국인 고객들, 특히 한국에서 갖 넘어온 사람들은 시간관념이 좀 부족한 것 같다.  심지어 전날 오후에 급하다고 생떼를 쓰길래 다음날 오전출근에 맞춰 약속을 잡아줬더니 밤새 맘이 바뀌었는지, 출근시간전에 전화를 해서 오지 않겠다고 메시지를 남기는 사람도 있었는데, 역시 잠시 방문중인 사람이었다.  이게 얘길 잘못하면 이상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데, 확실히 경험상 아직 한국-중국의 경우 (1) 지식정보에 대한 비용지불개념이 없는 경우, 그리고 (2) 같은 맥락에서 타인의 시간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것을 자주 본다.  중국계 변호사들하고 얘기하면 내가 한국인들에게서 느끼는 점과 싱크로율 거의 100%.  물론 근대시민의식은 우리가 좀더 앞선 부분이 있지만, 그거야 산업화가 더 빨리 되었고 그만큼 현대적인 의미에서 에티켓 같은데 더 정착된 것일뿐, 큰 부분에서는 아직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이런 말을 하다보면 역시 이곳에서 오래 살았구나 하는 생각과, 그리운 고국이지만, 뭐랄까 아련한 기억속의 첫사랑 같은거라서 지금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사는 건 무리라는 생각을 한다, 첫사랑을 다시 만나봐야 별볼일 없을 것처럼.  그러고보니 마지막으로 한국을 갔던 것도 거의 4년 전.  빠르게 변하는 도시는 얼마나 더 많이 변했을까.  주변에 산과 언덕을 다 깎아버리거나 빌딩으로 가려버린 삭막함을 넘어선 서리얼한 풍경에 가슴이 답답했었는데...


다시 운동을 가려고 하다가 컴을 켜고 나니 바깥은 너무 춥다...그렇다.  엘니뇨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밤 8시 40분인 지금의 온도는 섭씨 17도.  바람도 간간히 불어서 꽤 춥게 느껴진다.  원래 추위에 강한 사람이지만, 나이와 엘러지 앞에는 장사가 없는 듯.  문무겸전, 무림천하, 일통강호의 꿈은 점점 멀어져만 간다...


엄청난 속도로 읽어내던 책도 한풀 꺾여 요 근래엔 만화책만 붙잡고 있다. 여름 중에 로맹 가리와 소세키를 전작해보는 것을 목표로 삼기는 했는데, 현실은 소설과 SF, 그리고 만화라는...


밤이 되니 다시 차분하게 맘이 가라앉고, 어제 마시다 남긴 와인을 홀짝거릴까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이틀 연속은 너무하잖아...이젠 몸이 버텨내질 못하니, 참아야한다.  제때 끼니를 챙겼으면 딱 이시간 정도에 오는 술허기가 없을 것을...건강한 생활은 역시 좋은 습관에서 오는 것 같다.


사람이 모두 떠난 후쿠시마에 버려진 동물을 돌보는 한 아저씨의 이야기를 사진에 담았다.  사람이 필요에서 키우다가 방사능에 오염되어 먹을 수 없게 되고, 함께 할 수 없게 되니 살처분만이 답인 것처럼 접근하는 것에 반발하여 소중한 생명들을 돌보기 위해 남은 이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그렇게 고양이도, 개도, 타조도, 소도, 무엇도 손이 닿는대로 거두어 먹이고 함께 살아가는 걸 보면 잔잔하지만 깊은 감동을 느끼다 못해 이상한 부러움까지 느껴진다.  다만 구체적인 이야기보다는 짧은 사진집에 가까운 책이라는 점에서는 이 사람의 삶에 깊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에 아쉬움 부분이 있다.  이 의인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에 들은 기억이 있는데, 책을 보고 혹시나 이런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산 것.  


차를 한 잔 마시고 일찍 잘 생각이다.  엘러지 약을 먹으면 기침도 좀 잦아들테니까 잠이 오겠지?

이렇게 저렇게 하루씩 보내고 나니 벌써 또다시 목요일이다.  소중한 6월의 반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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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6-16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때 끼니를 정말 잘 챙기는 사람이지만 술허기는 언제나 오던걸요.....

transient-guest 2016-06-17 01:41   좋아요 0 | URL
저는 배가 부르면 술이 안들어가는 타입이라서 가끔은 술허기가 오지 않게 밥을 넉넉하게 먹을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밤이 늦어지면 싹 소화되고 다시 허기가..-_-:

북깨비 2016-06-16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는 무엇을 읽고 계신가요?

transient-guest 2016-06-17 01:41   좋아요 1 | URL
라즈웰 호소키의 `술 한잔, 인생 한입`을 보고 있습니다. 다 보면 다른 책을 보다가 `진격의 거인`을 볼 생각입니다.

수이 2016-06-16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술허기는 매일밤......

transient-guest 2016-06-17 01:42   좋아요 0 | URL
술 마시는 건 좋은데, 전 술이 들어가면 폭식을 하는 경향이 있어서 조심해야합니다.ㅎ
 

정신없는 4월과 5월, 그리고 신산스럽기 짝이 없는 6월의 반을 열심히 뛴 결과, 이번 주는 조금 slow down된 일정으로 보내고 있다.  보통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눈을 뜨면 출근해서 - 회사에서 차로 5-10분 거리 - 12시까지 열심히 그날의 목표치를 처리하고, 오후에는 조금 일찍 퇴근하면서 일거리를 들고 통상의 퇴근시간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서 전화를 받거나 메일을 처리하는 식의 가벼운 일을 한다.  사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물론 다소 넉넉한 일정을 즐기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처음 사무실을 시작할 때 텅빈 공간이 싫어서 책으로 채워놓은 공간이 이제는 내 책상을 제외하고는 그간 마구 사들인 책과 4년 이상 쌓인 케이스파일 - 주에 따라 다르지면 보통 최하 5년 이상은 보관할 의무가 있다 - 탓에, 내 방은 점점 집중력을 저해하는 환경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연말에는 이를 좀 정리할 계획인데, 책을 창고로 보내기는 싫으니까, 실질적으로는 조금 더 정리하고 다 본 책은 부모님 댁의 내 방에 가져다 놓는 것 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다.  운동을 하고 들어온 지금은 산뜻한 맘으로 남은 업무시간을 채우고 있는데, 엘니뇨 덕분에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있어 '술 한잔, 인생 한입'이 술술 읽히고 있다.


가끔은 이런 날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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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ia 2016-06-15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네요, 듣고만 있어도 산뜻해요 ㅎㅎ

transient-guest 2016-06-16 01:21   좋아요 0 | URL
오늘은 다시 정상영업(?)입니다.ㅎ

수이 2016-06-15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그런 날이면 좋겠어요. :)

transient-guest 2016-06-16 01:22   좋아요 0 | URL
좀 유유자적하는 삶을 원하는데,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ㅎ

cyrus 2016-06-15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텅 빈 공간이 생기면 새 책을 사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이렇게 인간은 부질없는 욕심에 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ㅎㅎㅎ

transient-guest 2016-06-16 01:22   좋아요 0 | URL
딱 그렇습니다.ㅎ 비우면 채우고 차면 비우고...ㅎ
 

Orlando, FL에서 9-11이래 최악의 본토테러가 터졌다.  하필이면 LGBT를 타깃으로 하여 300여명이 모여있는 클럽에서 총기를 난사했고 50명 사망에 53인 부상으로 현재까지 알려져있다.  범인은 경찰과의 총격전에서 사살됐는데, 아프간계 미국인으로 보도되고 있고 범행을 시작한 후 20여분 후 911에 전화해서 ISIS추종자임을 밝혔다고 한다.  우리 조상님들이 일제와 싸울땐 가급적 상징적이고 센놈을 골라 싸움을 걸었던 것을 기억하는데, 이놈들은 꼭 약자나 사회적인 소수자를 타깃으로 한다. 미국이 그간 중동의 정치-경제에 깊숙히 관여한 패악질도 알고, 중남미에 끼친 해악도 안다만 이런 목불인견의 테러라니.  누가 더 나쁜걸까. 


[건곤불이기]라는 다소 희안한 제목은 아직도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다. 역시 한국신무협의 특징이라면 특징인 loose한 인과관계나 깔끔한 사건의 마무리가 아쉽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꽤 재미있게 읽은 책.  이런 책은 보통 한 시간이면 한 권을 읽을 수 있으니까, 권수만 늘어날 뿐, 의미는 1/4정도로 봐야한다.  스토리의 거의 반 권 이상을 주인공을 숨기고 세월을 보내는데, 보통 주인공은 처음부터 '내가 누구다'하는 수준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은 무협소설에서 이는 나름 신선하다.  약간의 기연을 얻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 바로 고수로 성장하지 않는 점도 좋았고, 세가나 무가출신의 주인공다운 인간이 아닌, 소박한 객잔의 아들내미가 고수로 성장하는 모습도 좋았다.  무술의 묘사 같은 건 좀 떨어지는 편이고, 굳이 가자면 고룡처럼 환상적인 무공표현을 좋아하는 듯, 검강이나 검망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펼쳐지는 주술에 가까운 무술과 함께 강호의 2-3류에 해당할 듯한 무예가 함께 섞이는 듯.  여기에 객잔의 아들답게 요리의 이야기도 나오고, 나쁜 등장인물들은 적절하게 벌을 받기도 하는 등 중간중간에 속이 시원한 결말도 좋다.  다만 복잡한 인과관계나 마음의 얽힘과 끊어짐에 대한 전개와 묘사는 좀 많이 부족했기에 기왕에 다시 나오는 책이라면 이런 부분을 조금 더 보강하면 좋았을 것 같다.  PDF로 본 수많은 한국과 중국의 무협지에 포함되지 않았던, 처음보는 책이다.  고룡이나 와룡생, 그리고 양우생의 작품들도 좀 다시 나와주면 좋겠다.  어떤 기연을 얻어야 [다정검객무정검]을 책으로 만나볼 수 있을까?


능청스러운 세설의 대가 빌 브라이슨의 또다른 책이다.  지금까지 간간히 구해서 읽은 이야기에서 그의 어린 시절의 전부였던 Des Moines, Iowa를 주무대로 펼쳐지는 미국의 마지막 good old days라 할 수 있는 1950년대의 좋았던 한 시절의 이야기다.  흑인인권이나 사상의 자유에 있어 암흑기와 다름없던 이 시기는 하지만 많은 백인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메리카제국의 last great period로 인식되고 있다.  그럴 수 밖에.  51년인가를 기준으로 세계 부의 95%를 직접 생산하고 소유했던 미국인들은 당시 90%이상이 냉장고를 갖고 있었고, 모든 집에는 자동차가 한대씩 있었으면 많은 suburban 아메리칸들은 집도 한채씩 갖고 있었다.  모든 것은 미국에서 생산된 것들이었고, 워낙 다양한 home appliance들이 쏟아져나온 덕분에, 가정에서는 철마다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사들여 즐겼다고 한다.  월남전은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였고, 중산층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두터웠으며 고졸의 보통직장을 가진 가장은 온가족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빌 브라이슨의 익살맞은 회고와 멋진 미국의 과거의 이면에는 물론 흑인을 잔인하게 린치해서 죽이고도 무죄로 풀려난 백인들이 있었고, 중남미의 정치에 깊숙히 개입해서 사회민주주의를 탄압하던 미국의 CIA와 우파정권이 있었으며, 매카시의 진두지휘하에 미국 전역을 작살낸 Red Scare의 광풍이 몰아쳤음을 담담하게 하지만 그 특유의 sarcasm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매우 특별한 시기였고, 백인 미국인들 대다수에게도 일과 휴식과 호사가 적절히 어우러진 시절이었음은 강조되고 있는 듯.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휴식과 호사 대신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벌고, 그렇게 번 돈은 물건을 사는 것으로 여유를 대체한 미국이 되어버렸고,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franchise가 점령하기 시작한 지역상권은 미국 전역을 고만고만하게 비슷한 곳으로 만들어버렸다.  당연히 지역상권과 지역만의 특색은 함께 사라졌고, 지금 Des Moines, Iowa는 다른 중서부처럼 쇠퇴하는 과거의 도시가 되어버렸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맺은 빌 브라이슨의 어조에서는 쓸쓸함이 묻어나고, 이젠 고향에 가도 고향을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그의 현실은 거의 모든 개발국가의 지구인(?)들이 함께 맞은 현실이 되어버렸다.  50년대는 과연 좋은 시절이었을까? 선악의 구분이 확실하고 모든 것을 흑백으로 나눠볼 수 있던 시절이었음은 확실한데.  그럼 지금처럼 다각화된 세계보다 냉전시대가 더 나은 시기였을까?  도무지 답을 찾을 수가 없다.  보통 그의 책을 읽으면 유쾌한 웃음이 가득했는데, 이 책을 읽는 내내 서글픔과 약간의 분노, 그리고 지나간 한시절에 대한 상상의 향수만 잔뜩 느낀 건 이런 복잡한 마음 탓일지도 모른다.


이상북스와 저자를 스쳐간 수많은 헌책들 중, 글이 남겨진 책을 추려모은 것.  얇은 소책자정도의 양으로 70년대에서 90년대까지 다양한 책꾼들의 모습을 추릴 수 있다.  젊은 시절이 지금처럼 취직과 서바이벌 대신 진리와 대의를 추구하던 위험하고 슬프던 때의 모습도, 누구의 말처럼 깃발은 쓰러지고 동지만 남았던, 아니 동지는 흩어지고 깃발만 남았던 한 시절의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책을 선물하지 않은지도 꽤 되었다.  책을 선물하는 것이 낭만이고 가벼운 주머니로 멋진 선물이 되어주던 시절이 지나간 것이 벌써 못해도 15년은 넘은 듯 하니 말이다.  가난했지만, 당당하고 낭만이 넘치던 한 때의 모습은 역시 클리셰에 가까울 것이지만, 그래도 이젠 20년 하고도 4-5년은 더 전, 싸늘한 늦가을 누군가를 기다리던 그때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그리운 그때의 나, 그리고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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