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했던 일주일의 휴가는 결국 물건너간 상태로 주말을 맞게 되었다. 오늘까지 꼬박 일을 했는데, 오전에 계속 신경을 쓰고나면 오후에는 제대로 업무를 볼 수 없었는데, 아무래도 집중이 필요한 legal work는 미뤄진 탓이다. 게다가 밤늦게라도 한국의 고객회사와 긴밀하게 이런 저런 일들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나면 상대도 나도 지쳐버리게 된 것이다. 한국의 주말이 시작된 오늘은 그래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통의 전화도, 메일도 나누지 않았다. 책읽기를 놓을 수 없으니 계속 읽기는 했다만, 이상하게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나마 운동하면서 읽은 '황금가지'에서 나온 SF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책에 관한 책 세 권을 연달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깨끗한 삼자범퇴로 나란히 그저 그렇게 넘어가버렸다. 책이 문제인가 사람이 문제인가는 언제나 상황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답이 바뀌는데, 이번에는 내 문제도 반, 책의 문제도 반, 아니 굳이 깐깐하게 따지자면 7:3정도로 내 탓이 더 큰 것 같다.
이런 일상은 지난 금요일까지 이어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간 미뤄둔 보충자료 건을 열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꼬박 앉아서 20페이지의 커버편지를 작성했고, 조목조목 보충자료요청의 불필요성을 주장했다. 화요일인 내일 출근해서 한 시간 정도 관련자료를 보강하여 발송하면 끝이다. 토요일부터는 한 글자도 업무에 관련한 건 들여다보지 않았다. 일단 어디론가 좀 멀리 다녀올 기회가 생겼고, 그렇게 일박 정도 집을 떠나면서 노트북도 가져가지 않았는데, 다행히 특별히 급한 연락을 받지는 않았다. 물론 메일계정으로 들어가서 걸러진 메일을 찾아보면 아마 꽤 이런 저런 것들이 쌓여 있을 것이다만, 그건 내일부터의 일이다. 오늘 밤까지도 일부러 메일을 열거나 계정으로 들어가보지는 않을 것이다. 일주일간 널널하게 일할 생각이었는데, 결국은 토-일-월요일로 이어지는 연휴만 간신히 챙겼을 뿐이다.
내일, 그리고 수요일까지만 고생을 하면 어느 정도 내 선에서 할 일은 마무리될 것이고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주로 작성할 이런 저런 문서만 신경을 쓰면 되니까, 사실 내일의 일처리가 매끄럽게, 그리고 양적으로 잘 진행되면 당분간은 조금 괜찮은 스케줄이 될 것이다. 모두들 휴가를 떠나는 이 시기는 우리 업계의 특성상 상당히 slow 한 시즌이니까.
SF고전에 속하는 작품이다. 어릴 적 계림사 소년소녀문고집에 엮여 나온 것을 제목만 기억하는 '솔로몬의 동굴'의 동저자의 작품이다. 당시 서양사람들이 바라보는 이국문명에의 두 가지 관점 - 야만과 신비주의 - 이렇게 두 가지가 잘 버무려져있는 모험소설에 가깝다. 다뤄지는 주제도 신화, 아프리카의 모험, 야만족, 그들을 지배하는 신비한 여왕, 윤회, 부활, 너무도 아름다운 사악한 미 등등. 조금은 느리게 시작하는 이야기지만 읽기 시작하면 속도가 붙어 내려놓기 어려웠던, 다소는 촌스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활극의 요소도 있기에 우리 시대의 눈으로 봐도 많이 떨어지는 작품은 아니다. 결말은 조금 황당하고 허무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작품이 나오던 시기의 독자들에겐 특히 큰 재미와 이국과 미지의 땅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음에 틀림이 없는 책.

전문작가의 책도 한 사람의 책을 계속 읽다보면 일종의 plateau가 온다. 같은 의미로 이번의 '윤성근'님의 책은 그 울림이 미미했다. '야밤산책'은 더더욱 나에겐 너무 가벼웠고, '남편의 서가'는 제목에 좀더 충실한 글들로만 모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원히 떠나버린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책인데 니나 상코비치의 Tolstoy and the Purple Chair (혼자 책 읽는 시간)와 비교하면 어쩐지 니나 상코비치의 책만큼 그 절절함이나 주제의 일관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이건 내 개인의 의견이고 게다가 이 책을 다른 시기에 다시 읽는다면 어떤 맘으로 다가올지 알 수 없으니까, 어디까지 지금의 느낌으로 해둔다.
번역문학가이자 불문학박사/교수인 김화영의 산문집. 예전의 프랑스 유학시절을 다룬 '행복의 충격'의 시절에서 3-40년의 세월을 훌쩍 건너 이제는 거의 은퇴에 가까운 노학자로서 엑상 프로상스를 시작으로 자신의 과거 발자취와 그 시절의 고맙고 정다웠던 친구와 은사를 비롯한 지인들을 찾아가는 이야기. 어쩌다 보니 하루키의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와도 일면 겹치는 테제가 된다. 특히 그토록 다정스럽던 친구들 중 한 명은 이미 예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되는 부분에선 내가 다 심란해 했는데, 성공한 사람이 되어 과거를 다시 짚어나가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이렇게 뜻하지 않은 부고를 고스란히 맘에 담고 앞으로 가야하는건 그 속에서 마주하는 현실이다. 저자 특유의 산문체도 좋고, 약간은 여행소개서 같은 구성도 나쁘지 않았다. 카뮈도 그렇지만, 이분의 책도 더 읽어볼 생각.

30년 전, 애리조나 하고도 벽촌 국경마을에 자리를 잡고 이민생활을 시작한 저자의 그림이야기. 처음에는 한국과의 끈을 잡고 싶어서 시작한 그림수집이 이제는 취미를 넘어 이렇게 책을 내는 경지에 다다른 것에 놀라고, 다른 경로로도 소개되었던 '간홍 전형필'의 저자이기도 하며, 그의 이름으로 나온 책이 꽤 됨에 더 놀라게 된다. 어쩌면 입신양명을 꿈꾸며 실리콘 밸리로, LA로 뉴욕으로 부나방처럼 몰려드는 대다수와는 달리 이민이 요즘 같지 않던 시절에 미국에 와서 시골에 정착한 덕분에 누리게 되는 시간과 저렴한 생활물가와 부동산 구매비용으로 이렇게 하나씩 작은 그림부터 사들이고, 미술잡지를 읽고 겔러리와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쌓인 노하우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림에 대한, 그리고 수집에 대한 그의 철학은 온전히 보너스. 미술에는 까막눈이지만, 내 눈에 들어오는 그림을 너무 부담되지 않는 수준에서 그야말로 즐기기 위해, 심미안을 수련하는 방법으로 조금씩 구해서 걸어놓고 싶은 맘이 생겼는데, 조금은 더 미래의 이야기. 이런 것도 괜찮은 삶이구나 싶다. 비록 자조하듯, 피닉스에서도 3시간을 더 들어가는 애리조나의 국경마을 한 켠, 한인 30세대의 하나로 잡화점을 운영하고 산다고 말하지만, 저자의 삶에는 이곳처럼 부대끼는 곳에서 사는 사람과는 달리 여유가 느껴진다. 그것이 제일 부럽다는 건, 지금의 내 삶이 꽤나 팍팍한 탓일게다.
사무실을 차린 첫 2-3년은 월요병이 없었는데, 작년부터인가, 나에게도 어김없이 월요병이 찾아온다. 다시 처음의 그 벅찬 기쁨과 자유로움으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은 이제 겨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