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든지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등등.  너무도 흔한 말이지만, 이것만큼 여러 경우에 잘 들어맞는 말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음악이나 영화, 그림 같은 아트장르를 다룬 책은 특히 더 그런 느낌을 받는다.  어쩌다보니 보통의 이야기 책과 함께 조금씩 읽던 미술과 영화에 대한 책을 끝내면서 든 생각이다.  


1980년의 한 시절, 두 형은 고국유학 중 정부가 조작한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갖은 고문 끝에 당시에는 끝이 보이지않던 장기간의 수형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홧병에 다름아닌 병으로 부모님을 잃던 암울한 서경석이 택한 건 외유.  한국여권을 지녔으되 한국인이 아닌, 일본에서 사는 자이니치로서의 정체정의 혼란, 차별, 이런 것들로 다져진 내면의 우울.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어두움과는 다른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은 아마도 그런 과거에서 오는 것일게다.  어쩌면 이렇게 절절하게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다.  특별히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서경석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끼는 거의 유일한 감성은 이토록 절절한 어둠과 아픔이다.  힐링은 고사하고 이런 걸 털어낼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지금이 군부독재시절인지, 해방직후인지, 아니 김씨치하의 북한인지 헷깔리는 한국의 현실과 함께 서경석의 깊고 절절한 내면이 나에게 이식되어가는 것 같다.  유럽을 다니면서 본 그림, 화가, 예술에 대한 이야기는 도무지 떠올려지지 않는데, 이건 그저 이쪽 분야에 대해 불학무식한 나의 탓이다.  그림을 보는 것도 좋고, 화집도 몇 권 갖고 있지만, 그림은 여전히 어렵다.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늘어나지도 않는다.  덕분에 그림보다는 서경석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였으니 그림과 함께 이루어지는 이야기의 collaboration을 제대로 알아들었다고 말 할 수가 없다.  


드디어 이름만 듣던 87분서 시리즈를 읽었다.  첫 작품은 '경관 혐오' 또는 '경관 혐오자'로 번역된 책인데, 책장 깊이 어디엔가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이스'는 내용의 맥락으로 보아 방대한 시리즈에서 비교적 후기에 속하는 듯 싶다.  첫 작품이 50년대 중반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이스'에는 cellphone까지는 아니라도 제법 컴퓨터 운운하는 대사도 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정통 추리소설보다는 경찰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에드 맥베인의 '경관 혐오자'가 이 sub-genre의 시작이라고 하는 글도 있다.  희귀한 범죄, 희대의 살인마가 주인공과 두뇌게임을 벌이는 것이 아닌 일상의 police work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그야말로 경찰답게 발로 뛰면서 수사하는 것이다.  번득이는 추리는 구경할 수 없고, dot과 dot를 이어가면서 사건이 눈앞에서 윤곽을 드러내길 기다리면서 얽히고 섥히는 경찰의 일상을 구경하는 재미가 좋다.  절대로 다 번역되어 나오지는 못할 것 같아서 손이 가는대로 한국어 번역을 사들이고 있다. 퇴근하면서 집 앞에서 총맞아 죽은 발레리나, 거리의 쓰레기 같은 하급마약밀매상, 그리고 보석상이 모두 같은 총으로 살해당한 것이다.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이걸 고민하다가 의외로 쉽게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으니까, 그리 터프한 추리가 요구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아이스'에서 연상시킨 건 결정화되어 팔리는 싸구려 헤로인/히로뽕인가 싶은데, 전혀 다른 표현이고 오히려 일종의 장치에 가깝다.  제목을 장치로 쓰는 작가라면...그 머릿속도 궁금하다.  


아무리 좋은 이론과 실천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개량되어야 한다. 그 낡음을 개량하지 못한다면 뒷세대의 공감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좋은 이론이고, 공감을 느낄 수 있는 삶의 형태를 주창했지만, 2016년의 사회에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자급자족하고 노동을 줄이는 삶은 좋다.  하지만, 모두 그렇게 살면 사회가,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  지향은 이런 심플한 삶에 두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니어링이 얘기하는 radical이 될 생각은 없다.  그저 나에게 맞는 것,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삼키고 자양분으로 삼는 정도.  기술문명의 해악은 심각하지만, 덕분에 더 오래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가난한 사람이라도 비교적 좋은 음식을 싼 값에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도 생산기술의 발전에 따른 것이다.  예전에 읽은 다른 책만큼 쉽게 인정할 수 없는 이야기도 많이 보인다.  내가 나이를 먹긴 꽤 먹은 것 같다.  이젠 점점 무턱대고 좋은 이야기라고 매료되기 보다는 꼬장꼬장하게 내가 살고 있는 모습에 대조하고 견줘보니까.  


오전의 업무를 잘 마쳤기에 오후가 가볍다.  다만 새벽운동을 3일째 이어가는 건 좀 어려웠던지 아침엔 겨우 일어나서 사무실로 나왔고, 점심으로 미뤘던 운동은 결국 오후로 미뤄졌다.  대략 3-4시 사이에 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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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의 내용이나 질적인 면, 속도 모두 어느 정도 만족할 수준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드디어 긴 여름이 끝나가는가 싶다.  지난 주가 입추였던 것 같은데, 절기에 딱 맞는 날씨라서 더울 때 26-7도, 밤엔 17-9도 정도로 선선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해가 뜨거운 켈리포니아의 여름이지만 한낮을 지나면 그리 나쁘지 않고, 냉방에 시달리다가 가끔 나와서 받는 햇살의 따스함이 좋을 정도의 괜찮은 날씨다.  


내가 노는 걸, 특히 일하는 시간에 노는 걸, 그것도 남들은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을때 노는 걸 참 좋아한다.  하지만, 그런 짓(?)을 매일 할 수는 없고, 실상 남들이 일하는 시간엔 나도 당연히 일을 한다.  가끔은 답답함을 못 견디고 서점으로 뛰어나가지만, 그것도 정말 어쩌다 그런 것이다.  오전 4시간의 효율근무, 시간관리 같은 것은 다소 자유롭지만, 자영업이라고 해도 엄연히 직업이고 밥벌이라서 그렇게 멋대로 하다가는 다 털어먹는 것이 세상의 이치니까.  그런데 오늘은 팔자에도 없는 오전의 외근(?)을 하게 되었다.  


지난 일요일 사고(?) 덕분에 알게된 타이어 마모, 이를 고치기 위해 월요일에 들려 주문한 타이어 세트가 오늘 들어왔다는 전화를 받은 건 대략 아침 9시 30분.  8시 30분 정도에 나와서 사무실에서만 진행할 수 있는 일을 해놓았기 때문에 큰 부담 없이 일거리 몇 개를 챙겨 나왔다.  열심히 오전에 달려왔지만, 대기번호는 9, 기다리는 시간은 2시간 반.  어쩔 수 없이 마침 걸어갈 수 있는 맥도날드로 왔다.  여긴 Wi-Fi가 되는 곳이라서 원래 눈여겨 보아둔 곳이다, 오늘 같은 날을 예상하고.  근데 outlet에 없어서 대충 한 두 시간이면 notebook 배터리가 방전된다.  결국 갖고 온 일은 아주 조금만 하고, 나머지는 미룰 수 밖에 없다.  오늘 아침 월스트리트 저널, 그리고 반 정도를 읽은 책 한 권이 긴긴 두 시간 반을 버티게 해줄 도구(?).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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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1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은 밤에도 20도 넘어요. 낮보다는 더위가 덜하지만 그래도 덥습니다. ^^;;

transient-guest 2016-08-11 12:05   좋아요 0 | URL
다른 것보다 습도가 높은 건 어렵더라구요. 제가 마지막으로 여름에 한국에 간 건 거의 12년 정도 된 듯 합니다. 12년 간 5월 말 잠깐, 9월 초 잠깐 갔는데도 저한텐 너무 습하더라구요.ㅎ

yamoo 2016-08-11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탁자와 의자의 디자인이 참으로 이상야릇합니다^^;; 미쿡의 맥카페 테이크 아웃 종이컵은 저렇게 생겼군요! 노트북은 제가 엔날에 회사에서 받은 것과 똑같은 모델이라 반갑네요...근데, 저거 좀 오래 된 모델인데...아직도 쓰고 계시네요^^

transient-guest 2016-08-12 03:00   좋아요 0 | URL
생긴건 별로지만 은근히 편합니다. 구석진 부쓰에 앉아서 2시간 반을 보냈네요. 커피 한 잔 마시면서.ㅎㅎ 작년 언젠가부터 all size regular coffee는 $1이라서 그거 하나 시켜놓고 있었네요. 제 노트북은 2012년 개업과 동시에 꼭 써보고 싶었던 녀석과 workstation을 같이 샀어요. 작년부터 하드가 불안정해져서 SSD로 바꾸고 램 조금 더 넣고 리셋했더니 쌩쌩합니다. 2-3년은 더 쓸 듯. 다음엔 surface book으로 바꾸지 않을까 싶어요.ㅎ

yamoo 2016-08-12 08:14   좋아요 0 | URL
헐~~ 모든 레귤러 사이즈 커피가 1달러라뉘!!! 한국 맥도날드도 배우면 좋겠네요..ㅎ 와우!

2016-08-12 15: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3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러시아 사상가 - 19세기 러시아 지식인들의 갈등과 배반, 결단의 순간을 되살린다
이사야 벌린 지음, 에일린 켈리.헨리 하디 엮음, 조준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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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벌린은 좋은 작가 하지만 책의 번역은 영 아니다 전형적인 발번역과 그룹번역이 의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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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10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제 구입희망도서 목록에 오랫동안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생각의나무 출판사 망했을 때 교보문고에서 재고를 반값에 판 적이 있었어요. 그때부터 살려고 찜했는데, 다른 책들 사느라 결정이 미뤄졌습니다.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살지 말아야할지 결정해야겠어요. ^^

transient-guest 2016-08-11 00:47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그러시는 편이 나을 듯 합니다. 번역이 나쁘면 읽기 힘들어요. 특히 이런 책은...

yamoo 2016-08-11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는 엔날에 이 책 나왔을 때 고민하나다 패쓰했고,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몇 번 만났을 때도 그냥 과감히 패쓰했지욤^^

반값에도 이 책은 안 살 계획입니다요..ㅎㅎ

transient-guest 2016-08-12 03:01   좋아요 0 | URL
하드커버라는 점, 주제의 흥미, 그리고 저자까지 다 좋았는데, 번역이 너무 아쉽더라구요.
 
마트가 우리에게서 빼앗은 것들 - 편리한 마트 뒤에 숨은 자본주의의 은밀한 욕망
신승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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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력이 있는 테제이지만, 논증하는 방법은 조금 무리가 있다고 본다. 앞서 길게 풀어 얘기했던 바, LA폭동에서 희생된 한인상가를 그가 정의하는 `마트`의 개념에 도입한 것은 사실관계를 모르는 무지거나 알고도 애써 무시한 논리의 폭력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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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세트 - 전6권 로마제국 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 외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드디어 나도 이 책을 신간으로 다시 갖췄다. 예전의 판본은 중역이 의심되는데, 이번의 것은 완역본이다. 공부하는 맘으로 조금씩 들여다볼 날이 있을 것이다. 기왕이면 비잔틴제국에 대한 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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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09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습니다! ^^

transient-guest 2016-08-10 03:43   좋아요 0 | URL
올 여름, 엄청난 책주문에 출혈이 상당했습니다.ㅎㅎ

재아빠 2018-12-03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고싶은데~~ 부럽습니다~~~

transient-guest 2018-12-03 10:32   좋아요 0 | URL
이런 책은 절판이 잘 됩니다 기회가 되면 한권 한권 사들여야 합니다 ㅎ

gavino 2024-08-30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당근에서 새책세트 5만원 샀습니다. 꿀템입니다.

transient-guest 2024-08-30 23:10   좋아요 0 | URL
로마사 공부에 꼭 갖추어야 할 고전입니다 ㅎ 축하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