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절이다. 어디를 가도 호텔에는 인터넷, AC가 가동되고, 공항에서 차를 렌트해서 바로 올 수 있고. 게다가 이곳은 머나먼 섬나라지만, 엄연히 미국의 50개 주의 하나, 정확하게는 가장 마지막, 그러니까 50번째로 편입된, 아니 강점되어 편입되어버린 땅, 하와이다. 오늘 도착했다. 원래 어제 도착했어야 했다.
원 출발지에서 한 시간 반이나 출발이 지연된 탓에 connection flight을 놓쳤다. 순전히 항공사의 실수였음에도 - crew가 전날 밤에 병가를 냈으면 당장 대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그러나 당일 오전까지 기다렸다가 대체인원을 찾았는데, 이 사람은 FAA 법규에 맞춘 휴식시간을 지냈어야 했기에, 모든 상황이 종료된 시점은 출발에서 이미 그렇게 늦어졌던 것이다. 경유지에 내려서 두 시간 반을 기다린 끝에 하루치 호텔과 식사비용으로 미리 산정되 쿠폰을 받았는데, 결론적으로 호텔은 맘에 들었지만 잃어버린 휴가 24시간과, 그간의 고통과 불만, 그리고 쿠폰을 훨씬 상회하는 식사비용, 거기에 이미 pre-book하여 날려버린 하루치의 하와이 리조트와 렌트카 비용까지가 오늘 도착하기 전에 이미 지불된 이 망할 delay의 댓가이다. 여러분께 권하건데 American Airline은 가급적 피하시라. 이런 종류의 delay는 기본이고, 동시다발적이고, 처리도 엉망에 후속조치 또한 개판이다. 장거리나 단거리 여행을 꽤 다니는 편인데, 지난 십년간, delay도 있었고, 자잘한 문제도 많았었지만, 이런 그지같은 일처리는 처음이었다.
덕분에 휴양지에서 읽을 책을 몇 권 날려버렸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떠나기 전날 읽었으니까 AA때문에 날린 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신앙의 이름아래 온갖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살아있던 12세기답게, 잠꼬대조차 악마의 행위라고 믿는 수도사들. 이런 잠꼬대를 하는 사람은 갑자기 떠맡겨진 견습수사. 그리고 왕과 황후의 왕위쟁탈전 사이에서 왕의 전령으로 동맹을 확인하는 고위성직자가 사라지는 사건의 배후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호의와 사랑, 배신과 믿음. 이번에는 범인을 추리하기 힘들었다. 전혀 중요하지도 않았고,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은 사람이 뜻밖의 범인이었을 줄이야.
어제 경유지의 호텔방에 틀어박혀서 읽은 책. 오랫만에 만난 터펜스 부부. 벌써 터펜스 부부는 70대를 지나고 있고, 유럽에는 EEC (EC도 아니고 무려 EEC)가 만들어진 시점. EEC는 1958년에 만들어졌고, 이들이 한창이던 20대의 활약이 1차대전을 전후한 시점이니까, 이들은 19세기 말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들을 다시 만나는 것이 반가웠고, 터펜스는 70대라는 나이와는 달리 모든 면에서 맹랑한 20대 아가씨의 모습 그대로였다. 솔직히 추리와 내용은 무엇인가 예전에 있었던 사건을 찾아가는 내용인데, 이전의 어디에선가 나왔던 과거의 기억속 살인사건을 찾는 것과 닮은 것도 그렇고, 그다지 흥미가 가지 않았던 탓도 있고, 도합 4시간의 스트레스에 지친 머리가 켜놓았던 NFL playoff에 온통 신경을 빼았겨 별로 남아있지 않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는 남자다. 그러나 누군가를 만나거나 그럴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밑줄을 긋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는 때는 거의 없다. 이 책의 정체불명의 남자와는 반대인 것이다. 이곳으로 날아오는 비행기에서 2-3시간에 팟캐스트로 물뚝심송님의 deep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읽었다. 눈으로 빨리 지나간 부분은 다시 읽으면서도 그 정도 시간에 읽었으니까, 깊이 들여다 본 것은 아니다. 나에겐 그리 맘을 울려주는 내용도 없었고, 아주 평이한 이야기와 문체로 그 시간을 보냈다. 이 책 역시 딱 그 정도만 남았으니까, 내 후기는 별로 쓸모있는 내용은 아닌 듯 싶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만날 줄 알았지만, 결국 이는 사랑의 계기가 되었음인데, 이 역시 그리 설득력이 있거나 나의 공감을 뽑아내지는 못했다. 감성은 딱 내 시절의 그것인데도 말이다. 다음의 구절만 기억에 남아 페이지까지 정확하게 기억했는데,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나에 대해 느꼈던 것과 꽤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는 필시 예전의 딴 시대에서 온 사람으로, 다정한 말로 점진적인 사랑을 하고, 사려 깊게 데이트를 하는 사람일 터였다. "
그렇게 난 그저 기다리고 가슴 설레여하던 모습으로 10대와 20대를 보냈는데, 늘 감성이 앞섰던 연애였다.
내가 보는 요즘 세대의 연애는 껍데기만 '다정하'고 '점진적'인 이벤트를 치루며 '사려 깊은'척을 할 뿐이다. 잘 차려입고, 후까시를 잡고, 이리 저리 모양을 찾아 모두 연예인처럼, TV드라마처럼 되고싶어하는 그런 시절.
난 90년대에 70년대스러운 연애의 기술을 낭만적으로 바라봤었고, 그 만큼 '딴 시대'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스토너를 제외한 지금까지 읽은 모든 책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냈다. 스토너를 마주할 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