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나와서 일하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집은 공간이 넉넉하더라도 온갖 잡다한 일상의 것들에 집중력을 빼앗기기 쉽다. 사무실도 물론 지금은 너우 책과 서류로 넘쳐나는, 간신히 숨을 쉬면서 하루의 업무를 볼 수 있는 곳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전화가 오지 않는 주말이라면 이런 저런 잡무도 좋고, 적게는 4시간에서 많게는 8시간 이상의 집중을 요구하는 업무를 처리하기엔 딱 좋다. 다음 주의 바쁜 스케줄과 케이스 처리의 강행군을 예상하여 오늘 한 케이스를 끝냈는데, 결과적으로 6시간 정도를 쓴 것 같다. 오후 12시를 넘어가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약간의 백색소음을 위해 켜둔 TV의 NFL 준결승전 게임이 순식간에 1쿼터에서 3쿼터 종료 5분을 남겨둔 것을 봤고, 다시 고개를 들었더니 4쿼터 종료 2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잡스의 reality distortion field는 아니지만, 난 time distortion field가 가능한 것 같다. 어쨌든 덕분에 이렇게 50페이지 정도가 되는 변호사편지를 끝낼 수 있었다.
연초에 상정한 1-4분기의 목표에서 네이버에 회사소개자료를 만들고, 영문 홈페이지를 런칭하며 이와 함께 한글 홈페이지를 전격적으로 개량하는 것이 있는데, 네이버 부분은 외주를 준 덕분에 꽤 순조롭게 지나가고 있어, 주중에 다른 업무를 진행하면서 컨텐츠만 정리해서 넘기면 기본적인 작업은 끝낼 것 같다. 영문/한글 홈페이지는 좀 까다로운데, 일단 기본적인 구상을 업자와 확인하고, 이에 맞춰 컨텐츠를 만들어 보내줘야하기 때문이다. 네이버를 시작으로 해서, 잘 나오면, 이를 토대로 컨텐츠를 만들 생각이니까, 기본구상이 나오면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겠다. 열심히 진행해서 2월 중으로 넘겨주면 1-4분기의 런칭도 무리는 아니다. 이제 나도 천천히, 꾸준하게 몸집을 키울 때가 된 것이다.
아메리칸 항공에 휴가패키지로 지불된 금액의 1/7반환과 잃어버린 휴가 24시간, 및 거지같았던 경험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메일을 보냈는데, 이 나쁜 놈들은 이런 것을 접수할 창구라곤 (1) 내용과 양에 제한이 걸려있는 온라인 박스 혹은 (2) 직접 편지를 보낼 주소밖에 없다. 전화번호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최소한 이메일 창구는 있어야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데, 워낙 악명이 높은 항공사라서 딱히 놀랍지는 않다. 망하지 않는게 신기한 항공사다.
NFL 준결승 두 번째 경기를 보면서 간략하게 주말에 읽은 것을 정리하면 운동하러 갈 것이다. 이렇게 주중엔 복잡하고 피곤한 사무실이 조용한 주말엔 나의 man-cave로 바뀌는 모습이 참 재미있다.
그간 북스피어와 모비딕에서 다양한 시리즈로 나온 마쓰모초 세이초의 책을 다 사들여 읽었다. 동서문화사에서도 같은 작가의 책이 몇 권 나온게 있는데, 나중에 북스피어나 모비딕에서 다시 만들면 아니 살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번의 책은 '낭만픽션'이라는 시리즈의 일부로 나왔으니까, 그간 꾸준히 출판되던 하얀 커버의 책들과는 배다른 형제인 셈이다. 그래서였는지, 여기서 소개된 단편들 중 최소한 몇 개는 굉장히 낯이 익다. 예전에 다른 곳에서 읽은 것이 거의 확실한데, 경로를 좀처럼 짐작할 수가 없다.
책의 마지막에 나온 번역자의 후기에서도 말했지만, 이 단편들을 관통하는 테마는 displacement이다. '무숙자'라고 번역하는데, 막부시절 관의 허락이 없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 범죄나 가난이 아니라도 다양한 사유로 법으로 금해진 사적인 이동을 하게 되면 다시는 양민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막부시대였으니만큼, 이 무숙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폭력과 괴롭힘에 노출되어 살아갔을 것이다. 특히 관의 괴롭힘이 무척 심했는데, 주기적으로 이들을 잡아들여 강제노역형에 처하기도 했고, 때로는 하급관리들의 사건조작에 휘말리기도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래저래 집을 떠나면 고생이라고들 하는데, 신분과 직업, 그리고 사는 지역으로 사람의 자유를 꽁꽁 묶어놓았던 막부시대의 폭압은 그 후 일본의 국민정서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라는 해석이 있을만큼 어떤 집단무의식을 형성했다고도 볼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일본인 특유의 성실함이나 장인정신, 가업을 잇는 풍토, 그리고 속마음과 상관없이 나오는 친절함의 기저에는 이런 폭압적인 정치도 한 몫을 했을지 모르겠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다른 책들도 꾸준히 나와주길 바란다. 그러고보니 요즘 요코미조 세이시의 신작이 번역되어 나오지 않고 있는데, '시공사'는 분발하도록. 물론 2월 중에 나올 것으로 보이는 '검은숲'의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에는 큰 기대를 하고 있다. 어쩌면 내가 갖고 있는 에도가와 단편집 세 권과 겹칠지도 모르는데, 소개를 보면 그간 접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이 포함될 것 같아 기대가 크다.
변호사로 일하던 초기의 일이다. 상담을 할 때, 아니면 케이스를 진행하면서 보게 되는 고객들의 이런 저런 사연에, '왜 그랬냐'는 투의 질문을 던질 때가 있었다. 물론 금방 배워서, 그런 짓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설사 의문이 있더라도 '왜 그랬냐'는 일처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질의가 된다. 말하자면, 지나간 일은 깊이 들어가야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데, 성직자는 이런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던 교구신부가 죽고, 그 자리에 높은 곳에서 새로운 신부가 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여전히 왕과 황후의 전쟁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추리는 크게 어려울게 없었지만, 새로 부임한 사람이 어떻게 하면 금방 모두의 미움을 받게 되는가를 아주 쉽게 보여준 작품이다. 검은 수단을 펄럭이면서 흑단 지팡이를 들고 지나가는 이 신부의 모습은 마치 '갈가마귀'같다고 써놨는데, 어찌나 잘 들어맞는지. 사람과 그의 죄에 대한 연민과 배려 같은 덕을 빼면 모든 것을 갖춘 이 '갈가마귀'신부는 그에 걸맞는 이유로, 그 자신이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 곳으로 영원히 떠나는 것이 이번의 '살인'사건이었는데, 교묘한 단죄랄까, 아무튼 맘에 든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결말이었다.
벌써 일요일 오후 다섯시가 다 되어가고, 게임은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나가야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