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관한 글, 책장, 서재, 서점, 아니 책에 관련된 글이라면 이것 저것을 모아들인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처음에 책읽기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되었고, 유명한 작가들의 서평집이나 에세이를 읽는 것에서, 서재와 서점소개, 좀더 깊은 내용의 책읽기 에세이 등 여러 방면으로 뻗어나간 결과 지금은 못해도 이에 관련된 책들이 200권 정도는 모인 것 같다. 처음에는 좋은 책을 만날 확률이 높았지만, 많이 알려진 책들을 두루 읽고 나니 요즘은 좋은 책보다는 보통의 책을 만날 확률이 훨씬 더 높고, 가끔은 정말 실망스러운 책에 낚이는 일도 있다. 특히 지난 5-6년 간 정말 많이 쏟아져 나온 책읽기를 가장한 성공학책이나 자계서에 몇 번 낚이고 나니, 저자도 뜯어보고, 특정한 책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살펴보게 된다. 일단 책과 성공, 커리어, 직업 등, 책을 '현실'적인 성공 혹은 이를 위한 적용의 도구로써 접근하는 책들은 무조건 내버려두게 된다. 워낙 부화뇌동하는 부분도 있고, 주관적이지 못할 때도 많아서 이런 책들도 초기에는 꽤 호의적으로 바라보았으나, 지금은 마치 자기관리를 열심히 해서, 아름다움을 잘 가꿔서 유곽에 내놓아 비싸게 팔라는 소리로 들릴 때가 더 많다. 그런데 이번에느 꽤 좋은 책을 여러 권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읽은 서경식 교수의 세 번째 책. 다 구해볼 작정이니까, 절판되지 말고 좀 기다려주었으면 좋겠다. 앞서 몇 번 얘기했지만, 이분의 글에서는 깊이 가라앉은 허무가 느껴진다. 프리모 레비에 집착하는 것도 그랬고, 조선사람으로서, 일본의 말과 글을 쓰고, 그곳에 살되, 일본인이 아닌, 그러나 한국이나 북조선사람도 아닌 평생의 이방인으로서의 삶에서 생긴 상처와 막막함. 그리고 윗 형들 두 분이 조국정부의 모략에 의해 사상범으로 만들어져 40년 가까이 수형생활을 하던 시간동안의 투쟁, 아니 삶이 그냥 바깥의 부조리함과의 싸움, 정체성이 무엇인지의 내면적인 싸움이었던, 그러면서도 일상을 유지하였고 커리어를 만들어간 지난함까지 너무도 많은 이유로 이 분의 글은 읽을때마다 나를 먹먹하고 절절하게 만든다.
재미있는 점은 이 책에서 나온 여러 책들, 어린 서경식에서 출발해서 십대와 이십대를 거치고, 지금까지 그의 기억에 남은 많은 일본의 근현대소설과 작가들이 눈에는 꽤 익숙했다는 점이다. 작년에 갑자기 관심을 갖고 일본근대소설과 작가들을 살펴본 덕분일게다. 좋은 책을 쓰는 사람이라도 자기가 살아온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 무척 힘든 일임을 몇 작가들의 '식민지 조선'언급의 일화를 통해서 볼 수 있었다. 식민시대를 전후하여 일본인들이 가졌던 조선에 대한 인식을 살필 수 있고, 증거로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같은 시대의 소설 등 일차적인 사료를 읽는 것이라고 할 때, 이들을 사들여 모으는 것은 현재 일본이 취하고 있는 과거사에 대한 자세와 인식을 비판하고 그들의 거짓됨을 반박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책을 읽고서, '그래서 뭐 어쩌란 말야?'라는 생각을 할 때가 가끔 있는데, 이번이 그랬다. 무엇인가 심오한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우 주관적인 방법의 책정리 접근인데, 굳이 그렇게 해야하나 싶다. 책장을, 정확하게는 책장의 종류와 위치 및 구성을 편집해서 지금 읽고 있는 책, 보관하는 책, 다시 보지 않을 책 등으로 따로 모아두면 정리도 편하고 일목요연하게 자신의 thought-process를 볼 수 있다는 등, 그럴듯한 이론이긴 하다. 게다가 저자 또한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고, 90년대 초, 36살의 나이로 일본 IBM의 총책임자가 되었던 센세이션의 주인공이었으니만큼 한번 정도 귀를 씻고 들어줄 수는 있겠다. 예전에 그가 쓴 '책 열 권을 동시에 읽어라'는 많이 공감을 했었는데, 막상 지금와서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다. 사람이 늙는 것처럼 책도 늙어간다. 아니, 정확히는 사람은 나이를 먹고, 생각과 경험이 늘지만, 책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도 생각된다. 20대에 강렬한 인상을 준 책을 40대에 만나면 덜 자란 아이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나는 특별히 저자의 방식을 따를 생각이 없다. 하지만, 자리가 부족해서 책을 이중삼중으로 꽂아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 지금, 한 눈에 책이 눈에 들어오도록, 말아자면 외장형 두뇌처럼 보이는 책장의 구성은 좀 부럽다.
멋진 책이다. 상하이 교통대학교 교수인 장샤오위안의 책과 서재에 대한 이야기. 젊은 시절을 문혁 속에서 보냈고, 그 삼엄한 시절에도 열심히 책을 구해서 읽고 중개했다고 한다. 이 시절 금서를 구해 돌려보던 그와 친구들의 일화는 마치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의 주인공들 같아서 다이 시지에가 저자의 이야기를 어디선가 전해 듣고 이 책을 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문혁을 생각하면 참 무지막지한 시간인 듯 한데, 역시 책과 문사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시련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만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여기에 견줄 수 있는 것이 나찌의 분서인데, 그래도 진시황보다는 훨씬 못한 2등이다.
문과와 이과를 두루 익히라는 좋은 말씀도 감사하고, 책을 이렇게 많이 사들여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에 '그럼 괜찮고 말고'라고 말하는 듯, 그간 모아들인 장서가 3만 권이 넘는다는 이야기도 좋았다. 몇 가지 좋은 말씀을 여기에 적어서 나누고 싶다.
"눈 내리느 밤, 문을 닫고 금서를 읽는' 것은 중국 문인들이 줄곧 사랑해 온 경지다. 수많은 책이 금지됐던 그 시절, 문을 닫고 갖가지 '봉자수'의 '독초'를 읽는 것은 얼마나 자극적인 일이었는지!"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데 옛날에 부모님 몰래 TV를 보던 것. 금요일 저녁이면 성당모임에 6-7시 정도 가셨다가 10-11시에 돌아오시곤 했는데, 이때 열쇠를 다 걸어잠그고 한쪽 귀는 엘리베이터 소리에, 한쪽은 TV에 걸어놓고 평일엔 금지된 TV시청을 즐겼던 기억이 있다. 볼거리가 없었고, 그 시간대에 하던 한국방화 - 그래, 한국영화는 '영화'가 아닌 '방화'였다 - 를 본 덕분에 지금은 가끔씩 영화사에 등장하는 의미있는 한국영화 몇 편은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수재는 군사를 논한다'라는 중국 문인의 전통적인 취미도..." 이 구절을 보고 나도 군사학이나 전쟁사 책을 읽고 이에 대한 논하고 싶어졌다.
"나는 대개 조용히 경청만 했지만 듣는 내내 상쾌한 봄바람을 맞는 듯 선생의 말씀에 깊이 감화되었다" 이런 표현은 현대 한국소설에서 찾아보기 힘든 한자문화권 특유의 비유같다. 지난 시절에는 진부한 표현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주 신선하게 들린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그 기분이 어떤 것인지는 조금 알 것 같다.
"역사를 공부할 때는 역사서만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한쪽에는 연표, 다른 한쪽에서 역사 지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고 이해하고 싶다면 이 점은 필요 불가결하다." 공감 100%
"난 이런 충동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한다. 중년으로 접어들수록 더욱 귀하게 느껴져서 이런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소중히 하려고 한다. 젊을 때는 지식욕이 강하기 때문에 이런 걸 모른다...어떤 일에 흥미가 생기고 그 분야에 좀 더 깊이 들어가고자 할 때는 관련된 책을 읽는 편이 좋다...지금까지 독서는 나의 낙이었다. 내 인생의 정신적 지주였다. 나는 독서를 통새 나 자신을 지탱하고자 했다. 독서는 나 자신이 진실로 꽉 차 있다고 느끼게 해 주었고 허황되지 않았다." 정말 용기를 주는 말씀이다. 내가 가끔 미친듯이 한 작가를 파는 것도, 어떤 분야에 잠깐이지만 푹 빠지는 것도 결국은 '중년'의 나이에 더욱 귀한 지적 충동인 셈이다. 내 독서행각에 든든한 멘토이자 우군을 얻은 듯하다.
"책을 모아서 가장 직접적으로 좋은 점은 필요로 할 때 언제든 찾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나는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려주지 않는 편이다. 돌려받지 못할까 걱정하는 탓이다. 책에 대한 나의 애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책을 빌려 가고도 신경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굴리다가 책을 잃어버리면 없어졌나 하고 만다." 실제로 겪은 일이다. 그래서 나도 또한 부모님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책을 빌려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불안하다. 여러 권을 한꺼번에 빌려드렸더니 집에 있는 책꽂이네 넣어놓고 돌려주지 않고 계시기 때문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책장을 보는 일이 무척 즐거울 것이다. 하루 종일 나가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에서 보낼 것이다" Me too, me three, me four...
"독서에서 가장 좋은 경지는 놀이 삼아 읽다가 역사 자료를 발견하는 것이다"
"좋은 서평에는 세 가지 의무가 있다. 첫째, 책을 소개한다...둘째, 책을 평가한다...셋째,...책에서 재미있는 어떤 것을 찾아내 독자와 공유하는 작업이다..." 이건 어렵다. 나는 고작 소개하는 수준인데, 이건 매우 쉬운, 그러니까 가장 낮은 수준의 서평이다.
"관심이 있다면 시간은 생기기 마련이며, 문과와 이과를 두루 익히겠다는 목표는 평생을 들여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요금 공부하는 젊은이는 달달 들볶이거나 경비가 없어 학술회의조차 참가하지 못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각양각색의 비교 평가를 하지 않으면 처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진다...베이징대학교의 리링교수는 대학을 양계장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작금 한국의 현실이 이렇다. 아니 이것보다 더하면 더할 것이다. 대학교는 학사과정 뿐만 아니라 석박사과정도 결국 '취업학원'의 구성과 목표를 따르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무엇인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결국 높은 수준의 학문이 불가능해지고,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비판하는 것도 어려워질 것이다. 그것을 바라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국가의 재화를 좌지우지하고, 심지어는 신앙생활까지 주도하고 있으니 개탄할 노릇이다.
"어떤 상식 (혹은 진리)이라도 적용 범위라는 게 있고 이 범위를 넘어서면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되는 대로 아무거나 가져다 붙인 사회-정치-경제이론이 횡횡하는 지금의 시대에.
"인생의 고수는 사람을 볼 때 대체로 작은 데에서 큰 것을 아는 법이다" so true!
김용소설의 마니아를 자처하는 나에게 너무도 반가운 일화도 소개되었는데, 저명한 학자의 김용소설탐독과 비평이다. 이 책을 읽다가 문득, 과거에 나온 판본 외에는 갖고 있지 못한 내 처지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알라딘에서 김용의 작품들을 보관함에 담아놓기는 했는데, 예전에 그랬으나, 자꾸만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
장샤오위안의 책사랑에서 한 걸음 더 나간 것이 영화사랑인데, 영화를 즐기면서 이를 모아들인 그는 2-3년 사이에 금방 3천편이 넘는 DVD를 모았다고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 VHS-DVD-BRDVD로 모아들인 나도 그 정도는 안 될 것이다. 정말이지 고수를 만난 기분이다. 이런 분과 말이 통해서 '무공'을 절차탁마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전에 "물만두의 추리책방"을 읽고 저자를 추억하고 싶어 이 책을 읽었다. 일면식은 커녕 내가 서재에 제대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분이라서 교류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분의 일상에서 큰 공감을 얻거나 하지는 못했다. 다만, 하루가 지나면, 그만큼 삶에서 멀어지는 듯한 (이젠 결말을 알고 있으므로) 그의 삶이 안타까웠다. 이 글을 통해서 그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작은 사회생활을 한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황우석은 참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이들을 다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람. 지금도 이를 둘러싼 음모론에 무엇에 말이 많지만, 확실한 것은 황우석이 연구를 하지 않았고, 그의 조장 또는 묵인하에 가짜연구가 이루어졌고, 이를 성공으로 포장하여 널리 선전했다는 점이다. 현 시대 과학기술발전의 상징과도 같은 생체공학과 robotics, 이 두가지 길이 서로 공존하고 경쟁하면서 치명적인 병이나 사고로 신체의 일부 또는 기능을 잃은 사람들을 치료하고자 하고, 이는 AI와 big data를 비롯한 컴퓨터공학과 접목되어 더욱 큰 발전을 이룰 것임을 볼 때, 황우석 박사가 좀더 차분하게 먼 미래를 바라보고 연구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만, 어쨌든 그는 참 나쁜 짓을 했다.
그럭저럭 읽은 책들 중 두 권을 빼고는 읽은 기록을 남겼다. 잠깐 한숨을 돌리고 또 일하고...챗바퀴속으로 들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