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일이 생겨서 부모님 댁으로 들어와서 이번 한 주를 보내게 되었다. 집이 비어있고 이젠 아주 늙어버린 마지막 하나의 우리집 강아지를 돌보는 것이 주된 이유인데, 일거리는 언제나 들고 다니면서 처리가 가능하고, 중간에 잠깐 사무실에 나가서 필요한 업무만 진행하면 된다. 오전에 아주 일찍 일어나서 새벽운동을 마친 후 돌아와서 강아지를 데리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이젠 늙었고, 겁도 많은 녀석이 어쩐 일인지 오늘은 금방 돌아오려 하지 않고, 함께 멀리 다녀올 수 있었다. 아마도 오래간만에 나와 둘이 걷는 일이 반가웠던 것이리라. 자주는 못해도 가끔 금요일 오전에 다녀가면서 녀석과 시간을 보내고 걸릴 생각이다. 이제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기에 후회하고 싶지 않고, 가능하면 건강하게 있다가 잠깐 앓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요즘은 사무실에 온갖 잡동사니와 그간의 케이스 파일이 쌓인 관계로 집중도가 현저하게 떨어지는데 아파트에서도 이런 건 마찬가지라서 부모님 댁이 일종의 제3의 장소가 된 듯, 엄청나게 일이 잘 되는 것을 느낀다. 벌써 오늘 예정한 일을 모두 마친 상태. 조금 예상한 터, 읽을 책을 여러 권 갖고 왔는데, 어제부터 읽기 시작해서 모두 끝냈다. 십팔사략 8권 세트를 조금씩 읽는 와중에 신규구매한 책을 받았기에 몇 권을 따로 읽었다. 모두 쉬운 에세이 수준의 책이라서 무리는 없었다.
기대한 것은 보다 더 심도있게 다뤄진 시골생활, 여기서 파생되는 이야기로써의 기술백서였다. 하지만 신문에 연재되었던 칼럼을 묶은 책이라서 그랬는지 내가 원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피상적인 겉도는 수준의 이야기에 머문 듯 싶다. 언급된 기술은 다양한데 먹거리를 만들거나 농사를 짓는 기술 등의 S/W의 요소와 공예나 목공 등 무엇인가를 만드는 H/W기술로 나눌 수 있겠다. 그런데 S/W의 경우 농사는 그렇다해도 와인양조장이나 천연효모로 빵을 만드는 이야기에서는 조금 아스트랄해진다. 게다가 빵굽는 이의 경우 경기도 양평 어디의 bakery인데 요즘에 경기도 양평을 '시골'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와인의 경우엔 더더욱 공감하기 어려웠다. 소위 '장인'의 방편이나 특이한 것들은 적어도 시골생활의 기술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조금 고루한 듯 싶지만, 현실적으로 귀농을 해서 bakery나 winery를 운영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천연농약이나 효소를 만드는 건 그나마 좀 더 현실에 가까운 얘기같지만, 이 경우엔 또 이야기가 다뤄진 주변환경이 과연 '시골'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등 여러 모로 조금 그렇더라. 내가 생각하는 시골은 이런 곳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이 책에서 다뤄진 환경은 전원생활에 더 가깝다는 결론이다. 재미있는 나름대로의 아이디어도 그렇고 나쁘진 않지만, 도서관에서 빌려 봤더라면 딱 좋았을 책 같다.
지금 '나는 읽는다'를 키워드로 알라딘을 검색해보라. 온갖 책이 뭔가 문구와 함께 '나는 읽는다'를 제목에 차용하고 있다. 뭐뭐할 때 나는 읽는다 정도로 5-6권 이상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그 이상 많은 책이 나와있다. 이럴 땐 저자를 봐야한다. 책읽기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이래 서평이나 책읽기에 관한 에세이를 무척 많이 읽었는데, 얼핏 추려봐도 100권은 충분히 될 것 같다. 좋은 책도 많았지만, 개중에는 (이걸 개 중에는이라고 쓰면 정말 '개'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형편없는 자계서 수준의 책이나 질낮은 에세이도 꽤 많이 있었기에 처음에는 몰라도 나중에는 상당히 조심해서 책을 고르게 된다. 문정우 기자의 책은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높은 quality와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보장한다. 사실 시사IN의 팬이라서 예전에 이 책이 나온 2013년 이래 사려고 했으나 잘 생각나지 않는 이유로 순서가 밀려 계속 장바구니와 보관함을 반복했었는데, 이번에 구해서 읽었다.
다양한 책을 '상실', '뒤틀림', '인간', 그리고 '행성'의 테제로 분류하여 사회/정치/경제/세계의 이야기와 함께 에세이로 내용을 정리하고 현실에 대한 relevance나 application을 염두에 두고 구성되었다. 내가 대한민국 평균, 아니 미국 평균으로 봐도 연간 꽤 많은 책을 구매하고 읽고 있는데, 비슷한 정치지향에도 불구하고 문정우 기자가 언급한 것들 중 내가 읽었거나 구매한 책은 몇 권이 되지 않는다. 좋은 서평책을 읽으면 늘 저자와 견주게 되는데, 이런 때가 많다. 역시 책의 세계는 깊고도 넓어서 파고 또 파도, 가고 또 가도 끝이 없고, 읽고 싶은 책은 영원히 infinite하게 늘어난다. 당장 2016년과 2015년, 2015년과 2014년, 이런 식으로 비교할 때 매년 더 많은 양의 책을 다양한 주제로 사들여 읽었는데, 갈수록 사고, 읽고싶은 책이 늘어나는 걸 보면 죽을때까지 고치지 못할 병이라는 생각이다. 지금은 '독서본능'이라는 칼럼으로 글을 올리는 듯 한데, 다음 번에 정리되어 나오면 또 사 읽을 것이다.
전업작가, 그것도 성공한 전업작가가 부러울 때가 종종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렇고, 일단 경제적인 여유가 보장된 수준으로 '뜬' 작가에게는 이런 저런 기회로 글이 '돈'이 되는데, 덕분에 나 같은 자영업자가 보기에도 상당히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유정 작가도 특히 최근의 '종의기원'까지 계속 연타를 치고 있는, 굉장히 성공한 현대작가로서의 자유로움이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방전이 되어 방바닥을 붙잡고 발버둥치며 울어본들 한 달 가까이 히말라야 트래킹이 가능할리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이 과정에서 느낀 것을 책으로 내고, 팔고, 이를 다시 라디오나 팟캐스트에 나가서 팔고...역시 성공한 작가의 삶은...부럽기 그지없다. 그 과정의 고통이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벌어먹고 사는 일에 또 그 정도의 지난함이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니까, 역시 부럽다.
트래킹을 가게된 이유도 재미있고, 등정에서 마주친 다양한 인간군상이나 환경의 raw한 묘사도 즐겁다. 여기에 흔하디 흔한 여행책처럼 사진으로 도배한 관광블로그 수준이 아닌 전업작가의 글이니 가벼우면서도 맛깔나는 건 plus! 특히 내가 천착하는 신진대사의 문제...먹는 것 외에도...를 심도있게(?) 다뤄준 건 무척 반가운 일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단 한번도 메인테마를 단어로 구체화하지 않은 건 '똥'에 대한 결례인데, 다음부터는 꼭 제대로 mention해주었으면 한다.
끝으로, 어려운 길에서 아마도 중간 중간 영혼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반추된 작가의 과거 - 전업작가가 되기 전 간호사로 가족을 부양하던 - 의 이야기, 여기서 쌓였을 일종의 상처, 엄마의 이야기가 전혀 무겁지 않게, 하지만 꽤 깊은 울림으로 다가와 주었는데 - 그런 의미에서 이건 여행이나 기행이 아닌 '방황'이 맞다고도 하겠다. 몸은 코스를 걸었으되, 마음은 과거와 현재를 방황하게 있었으니까 - 덕분에 산티아고와 함께 히말라야도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 종주가 되어버렸다. 근육의 힘을 길러 배낭에 대비하고 음식을 단련하여 아무거나 잘 먹도록 하고 (머튼은 좀 어렵지만, 램 수준의 양고기는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난 마살라를 아주 좋아하니까, 작가가 겪은 어려움은 일정부분 잘 넘어갈 수 있을 것 같ㄷ), 뛰기와 걷기를 꾸준히 수행해서 몸무게를 덜고 각력과 지구력을 키우면 한 50 정도엔 두 가지 다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제 드디어 문제적 인간에서 히틀러 시리즈를 주문했다. 이로써 '루소'만 구하면 지금까지 나온 문제적 인간을 다 모으게 된다. 이렇게 귀하게 모은 시리즈로는 '제안들'이 있는데, 워크룸 프레스라는 곳에서 편집한 것이다. 30권을 목표로 한다고 들었는데, 작년 12월에 나온 13번째에서 소식이 없고, 몸젠의 로마사 또한 3권 이후 소식이 없다. 기왕에 출판을 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나가야지 이런 건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한편, 이것도 영리행위라서 bottom line 중요하겠다는 맘도 든다. 그래도 몸젠의 로마사는 이렇게 끝나면 영영 한글로는 못 읽을 것 같고, 제안들의 예쁜 책모양도 그렇고, 계속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같은 의미로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와 '죽음은 두렵지 않다'는 언제 나오는 겁니까? 문학동네 여러분들, 답해보세요. 여럿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나도 약간은 집요한 덕후기질이 있는 듯, 한 작가를 좋아하면 다 구해보고 싶어진다. 하루키가 그랬고, 최근에 현암사에서 나온 나쓰메 소세키 전집 14권이 그랬으며 얼마전에 모든 한글번역을 구한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가 그랬다. 여기에 열린책들에서 만든 카잔차키스 전집에서 빠진 것들을 최근에 모두 주문했다. 도착하면 소세키와 로맹 가리 다음으로 카잔차키스도 전작의 준비가 끝난다. 언제 시작할지도 모르지만 역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고전문학도 더 열심히 읽어야하는데, 사들여 모으다보면 언젠가 아주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날이 올테니 조급해하지 않는다.
전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제 곧 9월인데, 여기 날씨는 8월부터 가을이랍니다. 모두 건강히 열독생활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