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던 글이 갑자기 다 날아가버렸고, 찰나지간이라서 세이브도 하지 못했다. 마우스 없이 노트북을 쓰다보면 가끔씩 꼭 뭔가를 잘못 누르고 보통 페이지 리셋버튼이 이렇게 잘못 누르기 딱 좋은 자리에 있는 것 같다. 덕분에 한 주가 어떻게 날아가버렸고, 무얼하다가 금요일을 맞게 되었는지 주절거리던 것을 다 날려버렸다. 결론적으로 무리한 일정 때문에 몸살이 와서 꼬박 3일을 집에서 쉬었고, 이제서야 좀 살만해졌다는 이야기. 다행히 한 주의 일정이 널널해서 크게 밀렸거나 놓친 건 없지만, 덕분에 넉넉하게 하나씩 진행할 수 있던 것들을 한꺼번에 동시다발적으로 2-3주 정도 마구 close해야한다는 얘기. 그리고 끙끙 앓다가 그래도 금방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던 건 결국 그간 꾸준히 해온 운동의 덕분이 아닌가 하는 얘기. 한국에서 사는 수 많은 내 또래들보단 덜 아저씨스럽게 살 수 있는 환경과 상황에 감사한 얘기. 쓰고 보니 별건 아닌데, 여기까지 쓴 분량의 세 배 정도의 글이 날아간 터라 여전히 좀 짜증이 난다.
주로 뉴욕을 무대로 벌어지는 엘러리 퀸이나 도르리 레인의 추리활극이 서부로 옮겨졌다. 유명한 작가이자 탐정인 퀸 선생이, 살아나지 않는 글발을 다시 일으켜보려고 와 있던 헐리우드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무더위와 짜증과 싸우면서 계속 꼬이기만 하는 매듭을 풀기위해 두뇌게임에 몰입한다.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 LA Confidential이나 Gang Squad가 떠오르는데, 이런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LA의 여름은 꽤나 끔찍하고, 이에 대한 묘사가 너무도 생생해서, 내 인생에서 상당히 힘들었던 한 때를 떠오르게 했다. 놀러 내려갔거나 출장 때문이 아닌 경우 난 LA로 가지 않는데, 그렇게 내려갔던 것도 이곳으로 오고 나서 겨우 3-4번 정도 밖에 안 되는 것 같다. 내가 워낙 대도시 스타일이 아닌 것도 있지만.
사건은 좀 이상한 형태로 결말이 나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범인이 튀어나오는데, 소설 속에서 만큼이나 엄청난 고민을 하면서 스토리를 꾸려갔을 현실의 엘러리 퀸, 정확히는 현실에서조차 가상인물인 엘러리 퀸도 당시 비슷하게 무더운 여름을 보냈을 것이다. LA와는 다른 이유로 뉴욕의 여름은 그 특유의 끔찍함이 보장되어 왔으니까.

작은 꽁트를 계속 엮은 듯한, 마치 시트콤을 보는 것처럼 한 사람의 말년과 과거의 순간들을 오베라는 한 남자의 삶에서 그려냈다. 무색무취의 담백하지만 거짓없는 인생을 살아온 오베에게 부인은 색과 향기를 더해주는 존재였고, 이제 오베는 다시 무색무취로 남았다. 더 살아있을 이유가 없기에 삶을 정리하려고 하지만, 갑자기 바빠진 일상은 그가 세상을 버릴 여유를 주지 않고, 원하지는 않지만, 옳기 때문에 끼어들게 되는 이런 저런 일들로 그를 다시 사람들 틈으로 불러낸다. 우리가 노인들을 보면서, 보수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싶은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가끔 있다면 오베 정도는 되어야 보수라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것 같다. 영문학이나 불어권, 또는 독어권, 그리고 일어와 중어권 문학을 읽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어투와 전개로 보여주는 사회상이 이렇게 가끔 읽는 스웨덴어권의 작품의 매력인 것 같다. 늘 보던 것만 보다가 다른 것을 보는 신선함이 이번에도 가득했는데, 어떻게 보면 비주류 같은 유럽의 아기자기한 언어권의 작품들을, 비록 번역이라도, 좀더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세상이 개판인 건 어쩌면 모두가 말도 많고, 생각도 많아서 그런 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단순하게 인생을 살아간다면 잃는 것이 더 많겠지만, 그리고 21세기는 이런 꿋꿋한 단순함으로 살기엔 너무도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한 시절이지만, 희소성에 더욱 돋보이는 하나의 삶의 형태. 일이 힘들 때, 사는 것이 힘들 때, 나 스스로를 위로하는 건 결국 그래도 내가 솔직하게 열심히 일해서 벌어먹고 살고 있다는 사실인데, 그 마지노선에 딱 올라가서 평생을 살아간다는 건 너무도 힘들지 않을까. 오베는 그렇게 살아왔지만, 그건 아주 옛날이고, 그게 가능했던 소설속의 토양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무얼 배운다기 보다는 그렇게 철저하게 관찰하고 즐기는 방식으로 책을 소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걸 권해준 분이 누구더라...서친들 중 한 분의 리뷰를 보고서 읽게 되었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신선했고, 최근에 본 "The President"라는 영화도 생각이 났다. 오로지 남자들의 지배를 농단하기 위해 왕위계승권자를 바꾼 대비에 의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왕이 되어 특별한 이유와 목적이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무능한 왕이 암군/폭군이 되어가는 걸 보면서, 왕정시대의 암군이나 폭군으로 역사에 남은 많은 지도자들의 내면도 저러했을 것 같았다. 우리도 최근에 503호의 인생에서 본 것처럼 특별한 악의는 없이 그저 꾸준히, 부단히, 극심하게 무능했던 사람의 모든 것이 어떻게 악정으로 귀결되었는지를 생각하게 한 책이다. 작가가 쓴 다른 책을 꼭 읽어보고 싶어졌고, 주변에 추천해서 읽게하고 있는데, 반응이 아주 좋다. 열정적으로 쓰여졌을 것처럼 술술 앉은 자리에서 막힘이 없이 읽은 책.
예로부터 서울의 진짜 부자들은 북촌에서 살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지금도 사실 오래된 부자들은 강북에 있다. 강남은 박정희에 의해 개발되어 독재정권의 배를 불리는 과정에서 그들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엄청나게 서울의 면적을 넓혀버렸고, 강남불패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부동산부자들을 만들어냈다. 그 과정의 역사가 고스란히 정리되어 있는 책인데, 빨책에서 다뤄졌다. 서울사람이 아닌고로 내용이 가슴와 박히지는 않았고, 어떤 부분에서는 그리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서울의 개념이 어떤 방식으로 계속 넓어졌는지, 지금처럼 서울특별시가 예전에 위성도시라고 하던 곳들을 넘어 경기도를 포함한 수도권 일대를 잡아먹은 그 시작이 강남이었음을 생각할 수 있었다. 실제로 가보면 정신 하나 없고 복잡하기만 한데, 그곳의 토박이들이나 출신들은 고향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다른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어쩌면 꽤 illusory한 것이 사람의 인식인 듯.

박범신 작가는 모종의 사건이 좀 가라앉은 지금 생각해보면 측은한 면이 없지는 않다.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이었고, 예전부터 그런 점이 지적되어 왔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뭔가 그리 악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조금만 더 사려 깊게 살아온 날과 세상을 돌아봤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소금'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적어도 연애이야기에 있어서는 늘 그의 판타지가 작품에 투영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아버지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중간중간 했더랬다.
찾아보니 김영하작가가 읽어준 책은 '빨간 공책'이었는데, 절판되어 있다. 이 자전적 소설은 우연히 시간을 보내면서 한숨에 다시 읽었는데, 덕분에 스토리가 비교적 잘 기억이 난다. 역시 책은 재독, 삼독을 해야 곰곰히 씹어볼 수 있는 것 같다. 3년 간 1만권을 읽었다는 모씨의 뻥카는 처음엔 꽤 흥미를 갖게 되었었지만, 그리고 책을 쓴다는 행위의 매력에 그의 책을 잘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싸구려 독서론 자영업자의 모습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난 완독한 책이 아니라면 일단 읽은 책의 숫자에는 넣지 않는다. 저런 방식에 잡지까지 다 집어넣어 집계한다면 난 1년에 만 권은 읽었다고 떠들어댈 수 있을 것 같다. anyway, 폴 오스터는 늘 즐겁다.
작년 이맘 때 만약 전쟁이 났었더라면, 아니 지난 9년 내내 든 생각이지만, 전쟁이 났었더라면 나라는 망했을 것이다. 누구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남한산성의 무대가 되는 호란 당시 조선처럼 말이다. 무능한 왕과 대소신료, 명분에 사로잡혀 현실을 무시한 주전론의 댓가는 참혹했다. 아무도 왕을 위해 나서지 않았고 이미 왜란을 겪으면서 약해진 국가의 힘은 인조반정으로 회복단계에서 주저앉아버렸고, 선조가 어떻게 의병장과 전쟁공신들을 대우했는지 본 백성들은 나서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스케치 하듯 그려냈다. 좀더 길게 쓰면 그럴듯한 대하소설로 다듬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김훈작가의 스타일은 또 그게 아니니까...
5월 들어서는 바쁜 일정도 그렇고, 워낙 5/8주간에 고생을 했었기에 제대로 책을 읽지는 못하고 있다. 그냥 이리 저리 뒤적거리면서 흥미가 가는 걸 찾아보는 정도. 시간이 참 빠르다. 금년도 곧 반이 지나갈 것이니. 그래도 요즘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와 트럼프의 삽질 덕분에 사는 재미가 조금은 있다. 5년 동안 열심히 청소해주시고 아메리칸 잡놈은 탄핵되어 꺼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