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남은 삶에서 다시는 연애라는 걸 경험할 수 없을 것이란 걸 안다.  하지만, 그 비슷한 감정은 종종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순전히 혼자서의 감정이어야만 하고, 거기서 멈춰야하는 걸 알고 있다면, 나머지는 마음의 작용이기에, 봄에 잠깐 부는 나른하고 따뜻한 바람처럼 지나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말의 출장을 마무리했다.  


일에 치이기도 했지만, 책읽기가 여러 이유로 속도가 나질 않았다.  여기에 주말에 출장을 다녀온 관계로 한 주가 좀 balance가 깨진 상태로 시작되었고, 마음도 이리 저리 오르내리고 있어 살짝 험난한(?) 일정이 예상된다.  


고등학교 때였나, 일본애니메이션을 처음 접하면서 구할 수 있는 건 닥치는 대로 가져다 보던 시기에 80년대에 만든 Vampire Hunter D 극장판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난다.  이후 한 십 수년, 처음으로 이 시리즈가 영어로 번역되어 나오던 것이 벌써 24번째 이야기가 끝났다. 오래 계속된 이야기라서 가끔은 지겹게 느끼기도 하지만, 적당한 interval로 신간이 나오기 때문에 잊을만하면 한 권씩 읽어주게 되어 그럭저럭 괜찮다.  이번의 이야기는 게다가 상당히 신선했는데, 아마도 구성이 조금 산만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렇게 느낀 것 같다.  작가후기에 따르면 ebook으로 연재를 했기에 매일 조금씩 이야기를 올렸고 이를 모아서 정리한 것이 24번째 책이 되었다고 한다.  한번에 긴 호흡으로 쓰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매일 조금씩 다르게,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를 쓰는 것도 작가로서 좋은 경험일 것 같다.  일도 그렇지만, 한 가지 방식으로만 계속 하면 지겨운 법이고, 달리 일에서의 인간관계가 없는 나는 특히 이런 부분을 많이 고려한 매일의 업무를 진행하는 것으로 지겨움을 달랜다.  익숙한 일을 익수한 방식으로 계속 하면 거의 자동으로 일처리를 하게 되는데, 사실 이때는 실수가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늘 같은 걸 보면 눈과 머리가 trick을 당해서 약간의 오탈자나 잘못 기재된 정보가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기실 이런 점도 내가 조직을 만들어 조금은 더 structure을 갖춘 회사로 키우려는 이유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조금은 밑도 끝도 없는 구성의 이야기지만 난 이 시리즈를 좋아한다.  무한반복의 루프고, 죽여도 죽여도 Noble은 계속 나오지만, 처음의 이야기가 인간/선 vs Noble/악의 구도였다면 지금은 D도 등장하는 Noble도 무척 인간적인 면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결국 작가가 시작한 것을 스토리가 끌어나가는 듯, 이야기의 느낌 자체가 조금씩 바뀌어 온 것이다.  이런 경험은 한 작가가 쓴 긴 시리즈를 계속 읽어나갈 때 특히 많이 하게 되는데, 한 작가의 여러 이야기를 읽는 것과는 또다른 감성이다.  다음 해 2월에 25권이 나온다고 하는데,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번 주에는 가을의 첫 비가 올 것 같다.  아침과 저녁으로 흐린 날씨도 이어지고 있는, 완연한 가을이다.  괜찮았다.  가을에 맞는 봄바람 비스무레한 것은.  잠깐 스쳐지나더라도, 나이가 들수록 그런 경험은 귀하게 느껴진다.  


뭐 그랬다구요.  주말 잘 쉬고 열심히 다시 일하고 짧은 한 주를 보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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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2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3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6-10-12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전에, 국민학생일 때 유선방송에서 해주는 만화를 봤는데요. 그게 뱀파이어가 나오는 거였어요. 뱀파이어인데, 뱀파이어의 손이 따로 말을 하더라고요? 손만의 인격이 있다고 해야하나.. 어쨌든 그 뱀파이어가 인간 여자를 사랑하는 내용이 나왔는데, 여자의 드러난 등을 보고 물고 싶은 욕망을 느꼈지만 가까스로 참고, 그런 뱀파이어를 뱀파이어의 손이 놀려대는, 그런 장면이었는데 되게 인상깊게 봤거든요. 근데 그게 링크하신 저 만화책인 것 같아요.

저 만화책 구경 가야 겠어요.

다락방 2016-10-12 10:22   좋아요 0 | URL
번역본은 절판이네요... Orz

CREBBP 2016-10-12 10:51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절판본 구해달라면 구해주는 제도가 있어서 전에 한번 시도해봤는데 못찾고 환불해주더군요 ㅎ

다락방 2016-10-12 10:54   좋아요 0 | URL
ㅎㅎ 네, 저도 절판본 구해주는 시스템 이용했었는데 못찾고 환불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이용 안해요 ㅋㅋㅋㅋㅋ

transient-guest 2016-10-13 01:52   좋아요 0 | URL
그 만화가 80년대에 나온 거에요. Vampire Hunter D 1권을 극화한거죠. 만화책 버전도 있는데 별로고, 소설이 최곱니다.ㅎㅎ 근데 절판되었구요...거의 구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저도 한국어로 책을 갖고 싶어서 찾았는데, 어렵겠더라구요..
 

오늘의 일과를 대략 정리하고 나서 잠깐 짬을 내 서재에 글을 써본다.  그간 미루던 행정업무도 많이 밀어냈고, 원래 계획했던 bulk의 일은 고객의 자료부족 및 효율성 때문에 조금만 건드리고 다음 주중으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하루의 일을 조금씩 하는 건 지금의 나에게는 꽤 좋은 방법이다. 처음 혼자 일을 시작했을때는 계획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적은 업무량이라서 금방 마무리하던 것이 이젠 전년도에서 넘어오는 케이스관리, 신규업무, 그리고 on-going한 일 등, 조금만 손을 놓으면 금방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리고, 땜질 위주로 일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어쨌든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서재나 블로그를 보면 자신에 대해 매우 솔직한 글을 쓰는 분들도 꽤 많다.  나는 아직은 그럴 자신이 없지만, 가끔은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도 페이퍼에 자리를 하나 만들어서 조금씩 소개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영업이라고까지 하면 그렇고,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지식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인데, 물론 그런 경로로 일하고 연결되는 건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그냥 내 자신은 조금 더 서재의 뒤에 숨어있고 싶은 거다.  어떻게 할까 늘 고민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생각해본다.  그냥 그렇다고요.


사람이 죽는 순간에, 그러니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위치한 그 순간에는 삶의 모든 것이 한번 눈앞으로 스쳐지나간다고 한다.  증명할 방법도 없고, 어디서 시작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듯 영화나 책에서 많이 이런 모습이 차용되곤 한다.

자신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 어쩌고 한 것도 이 책을 읽고 든 생각이다.  죽어서 무덤에 묻힌 이의 고백도 무엇도 아닌 제 3자의 시선으로 한 남자의 삶을 judging하지 않고 비교적 담담하게 그려내는 이 짧은 책을 읽으면서, 언젠가는 나도 죽을 것이고, 그때 내 장례식장엔 누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올까, 진정으로 내 죽음을 슬퍼해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주인공 모씨의 삶은 모순 투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공과 affair가 늘 함께 했고, 자신에게 정말 잘 맞는 짝을 두고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애정행각에 빠져 결국은 딸 하나, 자신의 형 이렇게 두 사람 빼고는 모두을 잃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런 모순을 한 두개씩은 갖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주어진 것은 이미 손에 들어왔으니 안중에도 없고, 갖지 못할 것, 또는 가지면 안될 것을 바라보면서 유혹을 느낀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는 말이 막 살라는 것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야말로 심각한 오독이 아닌가 한다.  순간에 충실하라는 말은 그렇게 잘못 회자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금을 남용하고 있지 않을까?  마음은 낮추고 눈은 높은 곳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하루의 삶에 충실하고 싶다.  


이 책에는 mixed feeling이 있다.  일단 좋은 책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천천히 좋은 것을 권하고 명상이나 행공을 안내하여 좀처럼 풀리지 않는 과거의 트라우마, 여기서 발생하는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지향까지, 많은 것들의 근본으로 파고들어간다.  잊거나 버리고 타파할 과거가 아닌 온전히 마주하여 받아낸 후에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다만, 내 맘이 이 책에서 말한 것을 하나씩 실천할 여유가 없었을 뿐, 이 책에서 김도인이 대상으로 삼은 독자의 유형에는 나도 포함된다.  

김도인은 지대넓얇의 유일한 여성멤버로 명상, 선도 같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약간은 어눌한 말투지만, 할 말은 다 하고, 그쪽 방면의 공부와 수행도 꽤 깊은 것 같다.  단순히 책이나 이론으로만 배운 것이 아니라서 나이는 어리지만 수행에 좋은 가이드가 되어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도 가짜 스승이 많은 시대이고, 실제로 조금만 세력을 얻으면 바로 '교주'가 되어버리는 건 도판의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유명하다는 목사나 승려들의 내면을 보면, 특히 이권이 관련되는 경우, 그러니까 돈이 모여드는 순간 이들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그런 세상에는 그저 많이 읽고 경험하고 직접 찾아보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아야 '수행'에 다가갈 수 있다.  말씀을 강조들 하시는데, 말씀이 없어서 지금 세상이 이따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  기회가 되면 천천히 다시 읽어보면서 하나씩 따라가볼 것이다. 마치 클래식 음악에 대한 책을 제대로 보려면 다뤄지는 음악을 하나씩 들어봐야 하는 것처럼, 수행이나 행공에 관한 책도 그렇게 하나씩 따라서 해봐야 알 수 있다.  


오후에 조금 일찍 퇴근하고 낮잠을 잔 후, 밤운동을 다녀왔더니 각성이 되어 잠이 오질 않는다. 아마도 오늘은 새벽 두 시는 넘겨야 잠들 수 있으리라.  이번 주는 그렇게 밤운동으로 기초운동량을 맞춰야 한다.  날이 추워지면서 새벽에 일어나서 뛰어나가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기에.  


사무실과 부모님 댁, 그리고 지금 사는 아파트까지 책으로 넘쳐나고 있는데, 읽지 못한 책도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책은 계속 사들이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걱정된다.  이번 달엔 책주문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쓰메 소세키를 읽다 잠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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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05 17: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에서 만큼은 솔찍하고 싶습니다^^. 책 영업사원처럼 뻥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이 선택한 책인데 비판만 할수도 없고요. 비판될만한 책은 일단 구매부터 안하니.구매한 책은 대부분 좋은 평가가 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죠..물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더라도 뭔가 끌려서 빌리지 흥미 유발되지 않는 책이면 대출도 하지 않거든요..일상의 이야기야 뭐 속속들이 다 할 수도 없으니 ㅎㅎㅎ

오거서 2016-10-05 20:44   좋아요 2 | URL
솔찍하게 말하면 사놓고도 맘에 들지 않는 책들이 있어요. 선택이 항상 옳고 맘에 드는 것은 아니더라구요. 그걸 어찌 일일이 말하면서 살 수 있나요. 그저 웃지요… ^^;;

yureka01 2016-10-05 20:43   좋아요 2 | URL
그럴땐 까야죠..ㅎㅎㅎ낚시에 걸렸음을 알려야죠.^^.

오거서 2016-10-05 20:46   좋아요 1 | URL
그렇죠. 그래야 하는데… ㅎㅎㅎ

transient-guest 2016-10-06 02:31   좋아요 1 | URL
책은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어요. 개인의 신변잡기도 큰 무리가 없고요. 다만, 그 이상으로 가보고 싶은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이건 좀 어렵더라구요. 아주 내면적인 이야기는 친구하고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고민도 있고, 또 제가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많이 조심스럽죠. 책에 대한 이야기는 제 느낌 그대로 하는 편입니다. 제 서재글을 보면 극단적으로 낚시에 걸린 이야기도 가끔 나와요.ㅎ

cyrus 2016-10-05 18: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인의 사생활에 관해서 솔직하게 쓰는 것을 저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아요. 이 글이 `전체 공개`가 되기 때문에 타인 앞에 자신의 모습을 잘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약간의 과장이 곁들여집니다.

오거서 2016-10-05 19:53   좋아요 2 | URL
약간의 과장도 없으면 사는 재미가 있나요. 그리고 과장된 걸 이루어내면 더 이상 과장도 아니게 되지요.

transient-guest 2016-10-06 02:49   좋아요 1 | URL
그런 점이 없지는 않겠죠. 제가 고민하는 건 나쁜 모습(?) 또는 나쁜 생각(?)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내면의 고민이나 이야기를 하는 건데 아무래도 쉽지 않겠어요. 책블로그라는 원래의 취지도 그렇고. 다만 제가 하는 일에 대한 건 조금 더 생각해 보려구요.

오거서님: 약간은 몰라도, 보여주기 위주의 서재가 될 risk도 무시할 수 없죠. 이미 네이놈 블로그에서 많이들 하고있는...ㅎ

2016-10-05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06 0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엊그제 시작한 것 같던 2016년이 벌써 10월이다.  그간 추진하던 일도 무엇도 up and down이 있지만, 계속 만들어가고 있다.  머리 아픈 일이 좀 해결이 되었으면 하는데, 이건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중.  연말에서 연초로 새로운 직원이 오면 내년은 정말 열심히 회사를 키워볼 생각이다.  대략 business의 target을 네 가지 축으로 삼고 이를 키워가면 어느 정도 결실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만, 중요한 건 준비단계에서 가능하면 빠르고 정확하면서도 smooth한 작업이 되었으면 한다.  일과 병행하는 행정 및 promotional 업무는 여러 모로 피곤할 때가 있다.  


본격적인 가을을 맞아 매년 다짐했던 바, 문학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고전이나 그간 나를 괴롭힌 작품이면 좋겠지만, 일단 조금 쉽게 접근하기 위해 현암사에서 완간된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하나씩 읽어나가기로 했다.  회사에서 쉬면서, 혹은 운동을 하면서 읽는 책에는 제약을 두지 않기로 하고, 집에서 읽는 책은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다 끝낼 때까지는 소세키만 읽기로 했다. 10월 중에 다 끝내기로 목표를 잡고, 그 다음은 로맹 가리, 혹은 '마의 산' 둘 중 하나에 도전하게 될 것이다.  


지난 주에는 필요한 일은 거의 진행하지 못했고, 급한 업무처리만 간신히 마칠 수 있었다.  주로 manual한 task위주로 나갔는데, 도무지 일에 흥이 나지 않았을 뿐더러, 최근의 케이스 동향 - 미국 정부의 횡포와 업체난립으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에서 발생한 - 때문에 여러 모로 일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보다 의욕저하는 단순히 일에 대한 것이 아닌 인생전반의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게 했을만큼 심각하게 다가왔는데, 나이도 있고 해서 상당히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다.  그래도 자투리 시간에 책읽기를 하면서 용기를 얻었는데, 주말까지 해서 손에 잡히는 대로 읽으면서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덕분에 일요일인 어제 오후엔 커피를 마시면서 구체적인 한 주간의 계획을 쓰면서 다시 각오를 다지고, 첫 날인 오늘, 예정했던 업무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책이 없었다면 난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든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달리 남도다 잘하는 것이 없었던, 운동도, 공부도, 학습능력도, 어쩌면 삶에 대한 꿈이나 자각도 그다지 별볼일이 없었던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주변의 도움과 책읽기 덕분이다.  


책은 나이게 여럿의 role model을 보내주었고, 그들을 비교하고 다시 배치하는 등 나이와 시기에 맞춰 계속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난 거의 전투적인 책읽기와 강박적인 구매를 보여주는 등, 정신적으로 다소 문제가 있다고 볼 수도 있는 상태이다.  다가오는 한 해는 physical도 겸해서 이런 저런 건강검진과 치과치료, 여기에 가능하다면 psychiatric evaluation도 받아볼 생각을 하고 있다.  가끔 내가 하는 생각이나 이런 것들이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또는 이런 마구잡이식의 독서와 책구매가 어떤 특정 심리나 정신상태를 reflect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도 느낀다.  


내일은 내일의 일이 있고, 정해진 일정이 있다.  여러 개인과 회사들의 일을 맡고 있으니 그 외에도 갑자기 발생할 수 있는 일을 급하게 처리할 수 있는 시간 또한 예상하여 배분되어 있으니, 오늘의 남은 2-3시간은 조금 한가하게 지내도 무방하다.  오전 9시에 시작해서 거의 쉬지 않고, 심지어 점심식사를 하면서 계속 업무처리를 진행한 결과 오후 2시 반 정도에는 필요한 일정을 소화했다.  내일의 몫은 조금 더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이렇게 하면 이틀이면 마칠 수도 있을만큼 집중한다는 건 성공적인 하루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알면서도 실천이 어려운, 순간의 집중. 잘 활용하면 이로써 다른 잔생각이나 반복되는 걱정과 고민을 잠시나마 떨쳐낼 수 있다.   


시마다 소지를 더 인정하게 해준 작품.  나아가서 그가 창조한 요시키 형사를 인정하게 해준 작품.  현재의 살인사건과 과거의 기묘한 사건을 30년을 두고 추적해가는 요시키 형사는 그 과정에서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더 많은 경우는 적극적으로 은폐하는 식민지시대, 그리고 태평양전쟁 기간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일본은 피해자'라는 이상한 reality distortion이 아닌, 가해자로써 일본의 적나라한 모습에 대하여, 작중인물을 통해 시마다 소지라는 개인이 갖고 있는 생각을 볼 수 있었는데, 과거사에 대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식을 읽은 다음 이상으로 이런 일본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사할린에 징용되어 끌려온 형제, 패전 후 탈출하는 일본인들에 의해 소련치하에 버려진 조선인들 틈에서 악전고투를 겪으며 간신히 탈출한 형제.  먹고살기 위해 곡마단에 들어간 형제.  그리고 현재의 살인사건.  복수가 30년의 세월동안 버무려져 추리는 거의 불가능했으나 이 작품만큼은 작중설정을 통해 시마다 소지가 일본의 팬들에게 던지는 한 방이 아닌가 싶다.  


'그 형제는 전쟁 때부터 단둘이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해왔습니다...전쟁 중의 이른바 강제징용입니다.  쇼와 13년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이라는 것을 내세워....식민지 백성에게 아주 지독한 짓을 했지요...(요시키는 잘 모르는 듯...'그런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지독했습니다...사할린에는 지금도 일본인이 강제로 보내 노동을 시킨 조선인이 4만 명 이상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짓을 한 일본인은 모르는 척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전쟁 탓이라고 해도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도리에 어긋한 일들을 하결하지 않으면 일본은 진정한 일등 국가가 못 될 거라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대화해서, 그간 읽은 수 많은 일본의 소설과 논픽션에서도 이토록 세밀하게 다뤄진 적이 없는 참상이 묘사되며, (아주 극히 일부지만) 전쟁을 탓할 수만도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pp 381 - 388을 읽어보면 좋겠다.  그리고 사건의 모든 추리가 완성된 후, 요시키 형사는 '철창 너머로 여태영을 바라'본다.  그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아주기를 원하지만, 여태영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요시키는 그대로 깊숙이 머리를 숙인다.  '지독한 꼴을 당하게 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한다.  이 사건을 통해 하늘이 자신에게 뭔가를 이야기한 것 같다고.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충분히 알 수 없지만, 아마 쇼와라는 시대, 그리고 일본인이 과거에 저지른 죄 혹은 지금도 계속 범하고 있는 죄 또한 이 인종의 본질 같은 것이 아닐까. 경찰관인 자신에게 이것을 깨닫고 그리고 파악하라, 하늘이 그렇게 재촉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토록 솔직한 전쟁과 만행에 대한 책임통감, 혹은 자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난 시마다 소지의 팬이 되어버린 것 같다.  


흔히 일본의 좋은 점이나 멋진 점은 이런 '아싸리'함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한국인이, 일제의 만행으로 식민지 시절 희생된 수많은 분들이 바라는 건 이런 거다.  그까짓 돈 몇 푼이 지금에 와서 무슨 소용이겠는가.  깊이 머리숙여 진심을 곁들인 사과 한 마디면 되는 거다.  작중인물만도 못한 인간들이 너무 많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어느 날 개를 키우기로 결심한다.  맘에 드는 개를 카탈로그에서 고르고 주문한다.  그런데 하필 이 애견사는 나중에 밝혀지지만 마구잡이식으로 개를 생산해서 팔아치우는 공장이었던 것.  그래서 그랬는지, 입양하는 족족 죽어나간다.  그 다음에는 조금 더 경험이 생겨서 믿을만한 trainer를 통해서 개를 구한다.  그런데, 밖에 내놓고 키우면서 심장사상충 때문인지, 주기적으로 죽어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을 먹이거나 실내에서 키운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게다가 개를 그저 이런 저런 방식으로 훈련을 시켜 편하게 키우거나 뿌듯함(?)을 느끼고 싶은 마음, 그리고 왜 맘대로 되지 않는가에 대한 생각 밖에는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개를 키우지 말아야 한다.  싫어지면 쉽게 다른 집으로 보내버리고, 하나의 개, 혹은 견종에 따른 특성이나 성격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이에 대한 인식도 하지 못한다. 예전에 본 '개를 키우다'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마루야마 겐지의 견친사육기.  그나마 후반부에는 조금 더 성찰이 된 자세랄까, 이런 것이 보이지만, 그건 이미 수 많은 개를 키우다 죽이고, 입양시켜버린 후의 일이다.  


그런데, 이 책이 불편한 이유는 따로 있는데, 그것은 마루야마 겐지가 초기에 개를 대하던 자세는 사실 개에 대해 잘 모르던 어린 시절 나의 자세와 많이 다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돗개 넷과 함께한 지난 17년간 많은 것을 배웠고, 개도 사람처럼 감정과 생각도 있고 각각의 캐릭터도 있으며 우리가 '인성'이라고 굳이 인간에게 제한해서 찾아내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인 실내생활, 청결, 이런 것들이고, 개나 다른 동물도 더 깨끗한 환경에서 살게 되면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사람을 돼지우리에 넣어 키우면 사람도 곧 돼지가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마루야마 겐지를 거쳐간 개들은 지금 그가 개들을 대하는 자세를 만들어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심하게 물건처럼 대한 과거, 그리고 그 경험에서 얻어진 성찰이 책의 뒷부분에서 나타나는 그의 바뀐 인지와 자세의 밑걸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완전하고 완벽하게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건 어렵다.  부모의 인지로 아이를 교육할 수는 있겠지만, 부모도 모른다면, 결국 함께 하는 경험이 쌓이고 그것이 지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조금 더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개를 키울 때 최소한 약도 좀 먹이고 청결이나 운동에 신경을 쓰고, 무엇보다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었으면 한다.  개는 그를 키우는 주인의 reflect한다고 믿는다.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란포 결정판 2권을 읽었다.  두 번째 책도 다행히 멋진 모습으로 나와주었고, 일부 다른 모음집에 포함되지 않은 이야기가 있어 더욱 좋았다.  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특히 '대암성'이라는 작품은 앞서 수록된 '파노라마 섬', 그리고 나중에 괴도20면상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는 괴도 뤼팽을 차용한 악당과 영웅적인 주인공의 대결을 그렸는데, 그의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기발한 발상과 서리얼한 기행이 잘 버무려진 작품이다.  토요일 오전에 읽기 시작해서 거의 그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을 정도로 란포의 작품은 큰 재미를 준다.  란포가 필명으로 가져왔을만큼 빠졌던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과 다른 점이 있다면 포는 좀더 본질적인 삶이나 철학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면, 란포의 포의 서리얼한 부분을 보다 더 많이 가져왔다는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렇게 한 권씩 나오더라도 란포의 모든 작품을 한 시리즈로 묶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그간 동서추리문고와 전단편집으로 얼기설기 꾸려진 책모음도 좋지만, 책집과 함께 예전의 제본까지 모든 것이 마음에 든다.  언젠가 19세기 영국신사의 서재처럼 벽난로가 있는 서재에 은은한 불빛 아래 위스키 한 잔을 따라놓고 소파나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아주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임종국 선생을 만나 인생의 방향이 바뀐 정운현 선생의 '백수일기' 또는 '백수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나이나 커리어가 그래도 아직 한창이고, 정치적인 이유로 짤릴 염려는 없는 직업이라서 그리 확 끌리는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이명박근혜의 8년간 이렇게 직업을 잃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런 분들이 이 책을 읽고 힘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참고할 수 있고, 정운현 선생이 무엇보다 책을 쓰는 여정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은 듯 하여, 그렇게 집중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았으면 한다.  시대가 좋아지면, 많은 것들이 바로잡히면, 수 많은 5-60대의 쟁쟁한 원로들이 다시 복권되어 사회 곳곳의 질서를 잡고, 스승 노릇을 해주셔야 한다.  억울하고 힘들더라도 반드시 이겨내라는 말을 아주 잔잔히 '난 이렇게 했어'라는 어투로 다독여주는 듯한 글이다.


'에브리맨'과 '숨쉬듯 가볍게'는 다음 기회에 정리하기로 한다.  둘 다 내용이 쉽게 파악이 되기는 하는데, 그것 말고는 딱히 남은 것이 없어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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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4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05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04 1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도가와 란포의 단편 ‘애벌레’를 읽고,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전 ‘애벌레’가 정말 대단한 공포 단편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서양 작가들의 작품과 비견해도 꿀리지 않다고 봅니다. ^^

transient-guest 2016-10-05 02:27   좋아요 0 | URL
`애벌레`는 정말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에로틱한 측면이 함께 섞여 있어서 아주 기괴합니다. 그야말로 란포의 청출어람이죠.ㅎ 일본의 추리소설은 그 수준이 꽤 높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장도 크고 역사도 길어서 상당히 부럽더라구요.
 

마구잡이로 책을 읽다가 보면 읽은 책이 무엇인지 가끔은 까맣게 잊고 지나갈 때가 있다.  사실 한 권을 읽고 깊이 음미하면서 정리하는 것이 후기를 남기는 왕도(?) 같은데, 말처럼 쉽지가 않다.  오늘 아침까지도 그렇게 한 권의 책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책을 읽다가 빗소리가 듣고 싶어 관련앱을 찾았다.  네 가지 소리가 옵션인 앱을 다운 받아서 하루 종일 빗소리를 들으며 일하고 있다.  은근히 집중력이 높아지는 것 같다.  특히 카페에서 듣는 빗소리를 시뮬레이션 한 옵션이 맘에 드는데, 마침 마지막 무더위로 해가 쨍쨍하게 내려꽂는 오늘 같은 날 그렇게 걸으니 한 순간 두 개의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양 아주 특별한 기분을 느낀다.


이건 cyrus님의 서재에서 리뷰를 보고 나서 마침 주문하려던 다른 책들과 함께 구했다.  나찌의 분서에 대항하는 의미로, 사상적 무기로, 참전이 본격화되면서는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군인들의 사기와 여가를 위해서 시작된 책모으기 운동이 본격화 되면서 아예 전쟁터에서 보기 편하도록 상대적으로 싼 값에 휴대성과 보급성을 향상한 새로운 edition이 만들어진 것이 진중문고의 탄생이었다.  


미국이 2차대전에 뛰어들면서 어제까지 학교를 다니거나 일을 하던, 그때까지 외국이라고는 가본 적도 없는 수 많은 젊은이들이 갑자기 기초훈련을 받고 유럽과 태평양으로 가게 되었다.  전쟁 초기엔 엄청난 사상자가 나올 수 밖에 없었고, 심지어는 유럽에서의 승리 후 파병부대를 다시 태평양 전선으로 보내면서 또다시 엄청산 희생이 따랐기에 여가시간을 달리 보낼 방법이 없었던 군인들에게 책과 아이스크림, 그리고 어쩌다 주어지는 샤워시간은 사기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군대로 보내진 책은 또한 야전병원의 부상병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는데, 특히 심각한 부상을 입고 사지를 절단해야 했던, 고작해야 18-26살 사이의 많은 젊은이들은 책을 읽음으로써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진중문고'라는 것을 아마존에서 찾아보니 책의 상태에 비해서 꽤나 고가에 거래가 되고 있었다. 언젠가 한 권 정도는 이 책을 읽은 기념으로, 그리고 나찌가 시작했고, 일본과 소련, 중공이 이어갔었던 끔찍한 지식말살과 분서를 이겨낸 '책'에게 바치는 마음으로 진중문고 edition을 구해서 보관할 생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60년이 넘어 분단이 고착화되고 있는, 아니 분단을 이용하는 세력이 점령한 남과 북의 현실,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국방부 '불온'서적 selection이 너무나 마음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중문고'의 이야기를 통해 얻은 희망이 있다면 사특한 세력의 시대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것, 책과 책을 통해 퍼지는 진실과 진리를 영원히 조작하고 탄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지금의 내 커리어에 너무도 맞아 떨어지는 제목이라서 충동구매를 했지만, 내용은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이런 책을 읽으면 심각한 일반화의 오류가 눈에 들어온다.  또한 논리를 너무 비약시키는 점이 없지 않은데, 역시 어쩐지 결론을 정해놓고 쓴 책이란 느낌이 들고, 이 때문에 causation과 correlation을 자주 혼동하는 것 같다.  비록 저자는 최대한 평형감각을 유지하려 애를 쓴 흔적이 보이지만.  


혼자 일하는 것에 대한 예찬을 많이 하는데, 방법론의 접근은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누구나 다 '창업'하거나 '컨설팅'을 하면서 먹고 살 수는 없기에, 한번 정도는 '혼자' 일하라는 투의 말투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내가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분명히 조직생활에 어울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고, 50:50으로 이 균형이 완벽한 경우는 없는 것 같다.  다만 얼마나 잘 적응을 하느냐는 것으로 어울리지 않는 조직생활도 잘 해내는 사람이 있고, 적성에 맞는 생활도 인간관계나 사회적응의 문제로 어렵게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조직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라면 혼자서 일하는 것도 금방 할 수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다만, 굳이 나누자면 조직생활이 개인사업보다 훨씬 힘든 점이 있다고 보는데, 혼자 일하면 모든 것이 자신의 일이지만, 그 외엔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조직에선 자신의 일도 있고, 조직의 일도 자신의 일이기에 이론상 여럿이 나눠하는 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는 때가 종종 있고, 직장 안에서의 인간관계는 역시 많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혼자 일하는 즐거움의 큰 portion은 역시 financial reward에 있는데, 오롯히 성과는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물론, risk도 혼자 이겨내야하고, 가끔은 같이 의논할 사람이 없다는 것도 큰 어려움이긴 하지만.  적절한 시기에 필요에 따라 읽어볼 만한 책.


예전에 한참 머리에 바람이 가득 들어, 연예/영화/저작권법을 하겠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잠깐 당시 한국에서 잘 나가던 연예법 전문법인에서 1-2개월 정도 인턴을 했었다.  그때 알았던 멘토와 최근에 facebook으로 연결이 되어 근황을 알게 되었는데, 책을 한 권 쓰셨다고 보내주셨다.  기억하기로는 감성이 남달랐고, 문화적 소양이 풍부했던 분인데, 이런 책을 쓸만큼 대단한 전문지식과 경험, 글솜씨, 그리고 악기까지 잘 다루시니 재주가 참 많은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프리랜서 변호사로 뉴욕에서 열심히 활동을 하시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만나서 좀더 많은 얘기를 나누었으면 한다.  


음악에 대한 추억과 개인의 이야기, 그리고 청중 또는 fan으로서 축적된 지식과 감성을 서양음악사의 대표적인 고전작곡가, 연주가, 지휘가, 성악가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풀어냈기에 간혹 보이는 이런 계통의 책에서 느껴지는 지겨움이나 현학적이고 교조적인 부분이 전혀 없어, 음악에 대한 책이면서도, 저자와 편안하게 "내가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어"라면서 담소를 나눈 느낌이다.  참고서나 입문서를 생각한다면 문학수 기자의 '더 클래식' 시리즈가 좀더 구체적인데, 이 책은 클래식에 흥미를 갓 느끼는 사람이 좀더 클래식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해줄 것 같다.  저자의 풍부한 감성과 깊고 넓은 지식에 비해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는데, 그래서 그랬는지 오페라 부분의 이야기는 기실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뒷날의 즐거움으로 남겨둘까 한다.


유명작가의 인터뷰, 그들의 인생의 책, 이런 것들과 다양한 anecdote을 버무린 이야기.  그런데, 신문기자의 책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어디 weekly 칼럼 같은 걸 위해 쓴 것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책보다는 딱 신문지상의 글을 읽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원래 관심이 좀 있었던 작가들 - 김영하, 김중혁, 은희경, 정유정 같은 - 의 이야기는 팟캐스트 같은 매체로 이미 들은 부분도 있었지만, 정유정 작가가 추구하는 길은 그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주었다. 게다가 조너선 프랜즌이라는 걸출한 작가는,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나의 레이더망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는데, 이번에 소개를 받았으니 꽤 이득을 본 셈이다.  전혀 모르는 분들의 이야기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못했고, 공감하지 못하는 점도 있었지만, 그건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크게 신경쓰진 않는다.  우연히 구한 책인데, 좋은 것들을 얻었다고 생각하니 슬며시 기분이 좋아진다.


어제 내친 김에 시마다 소지의 다른 책들을 모두 구매해버렸다.  한 달이면 오는데, 어떻게 기다리나...사놓고 읽지 않고 있는 책은 넘친다만...움베르토 에코의 5만권에 비하면 10%도 안될 것 같다.  사놓고 읽지 않는 책이라해도 언젠가는 읽거나 참고하거나 읽은 듯 내용을 조금씩 알게 될 책이니까 guilty free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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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9-29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한국의 진중문고는 뭐랄까요..정권 홍보물의 전시장이었더군요...진정한 책의 문고가 군대에 있는 의미인 진중문구와는 급이 너무 떨어지거든요.

transient-guest 2016-09-30 06:14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잘은 모르지만 늘 발생하는 국방부 불온문서 파동도 그렇고, 뭘 해도 전시성이 높고, 돈도 여기 저기로 새는 것 같구요. 사병으로 군대 같다온 옛 직원이 다 알 정도면 횡령은 거의 단계별로 다 발생하는 것 같은데, 이념논쟁도 그렇지만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겠네요.

cyrus 2016-09-29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의 진중문고는 전문 사서들이 직접 뽑은 양서인데, 우리나라 진중문고는 국방부의 권한이 많이 개입되어 있는 편입니다. 확실하지 않지만, 진중문고 선정 과정에 뉴라이트의 개입도 있을 거로 생각됩니다.

transient-guest 2016-09-30 06:15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의심됩니다. 국방부가 outsourcing을 할 것이고, 그 대상이 아마도 자기들과 배가 맞는 곳이겠죠...한심한 일이에요.
 

이곳 날짜로 지난 목요일은 추분이었다.  보통 찾아보면 First Day of Autumn이라고도 하는데, Fall Equinox라고도 나온다.  공식적으로 2016년의 가을이 시작된 것이다.  아마 날씨도 이번 주말과 다음 주 화요일까지만 반짝 더워졌다가 이후로는 섭씨 18-24도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떨어질 것이다.  습기가 거의 없는 날씨라서 이 정도면 일출 전, 일몰 후엔 꽤 추운데, 가을비라도 한번 오면 이곳 기준으로는 상당히 쌀쌀해진다.  9월이면 시작되는 NFL Football시즌 개막전은 그래서인지 늘 한 해를 정리하는 4/4분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다가온다.  이번 가을에는 고전과 문학을 파고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현실은 갑자기 손이 쥔 시마다 소지의 작품이다.  '점성술 살인사건'을 읽고나서 이 작가도 상당히 괜찮다고 봤는데, 신본격추리소설의 본좌(?)에 실력있는 후배작가들을 여럿 양성하는 등 높은 업적을 인정 받고 있다.


이른바 토막살인은 이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트릭인 듯.  도저히 한 사람이 할 수 없는 동시다발적인 사체유기, 용의자는 오리무중, 게다가 아무리 파고들어도 여럿의 용의자가 나오기 힘든 상황.  이걸 정리하는 건, 작가가 창조한 2대 주인공 중 하나인 요시키 형사.  8-90년대까지만 해도 기차를 이용한 여행이 국내여행방법의 주류였을 것으로 보이고, 일본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조금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사용된 트릭은 철도노선과 각각의 정거장이나 속도 및 교차에 따른 것으로 이 방면에 무지한 사람도 그럭저럭 스토리에 몰입할 수는 있지만, 역시 detail을 더 파고들면 더욱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본다.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에 대한 인과관계를 조금 더 꼬아놓고, 마지막까지 실마리를 풀어주지 않는데, 시마다 소지의 작품을 보면 이런 구성이 많은 듯.



시마다 소지가 즐겨 사용하는 트릭이나 기법에서 특히 재미난 건 어느 정도의 clue를 주거나 심지어는 범인의 정체까지도 금방 밝혀주고나서 독자의 brain game을 유도하는 건데, 이번의 책에서도 그런 '도전'을 받았으나 역시 난 가볍게 패쓰하고 끝까지 스토리를 즐기는 선에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수많은 조작의 대상이고 심지어 일본학계에서도 그렇게 인정되는 부분이 상당한 일본의 고대신화를 테마로 삼았는데, 이즈모 지방의 전설이 일본의 고대사를 집대성했다는 고서기 (거의 위서 수준이지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고 하는데, 역시 이 부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기에 사건추리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토막살인이 또다시 등장하고, 또다시 여러 노선의 기차를 이용한 트릭을 사용했다는 점, 요시키 형사가 또다시 등장한다는 점에서 앞서의 작품과 이어지는 부분이 많다.



원래 다른 책을 먼저 읽었으나 같은 작가의 책이고, 또다시 요시키 형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점, 게다가 또다시 기차를 이용한 트릭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감안해서, 다음 순서로 정리한다.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가 사건의 당사자에 가깝게 되어버린 형국이다.  이유는 5년 간의 결혼생활 끝에 헤어진 전처가 휘말린 살인사건 때문.  기차에서 발견된 신원미상의 시체가 전처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 요시키 형사는 전처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사건에 매달리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밝혀진 트릭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로 가능할 것 같지는 않은 진자운동의 원리를 사용한 것이다.  소설 초입에 보면 전처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살인사건 (전처의 아파트에서 시체 두구가 발견됨)을 그리면서 위에서 내려다본 아파트의 구조를 보여주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일본 특유의 신파를 보여주는 ending은 조금 귀엽지만, 역시 살짝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요시키 형사도 미타라이 기요시도 등장하지 않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은 이야기. 내 나이가 나이라서 이렇게 과거를 회상하는, 과거의 아쉬움이나 돌아올 수 없는 시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서술되는 형식에 쉽게 공감하는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오토바이를 타는 것 말고는 달리 희망도 꿈도 없던 주인공의 19세 여름.  교통사고 때문에 입원해 있었던 병실에서 내려다보이는 집 한채.  그곳에 사는 모녀를 살피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주인공은 딸에게 반하고, 일상을 살피는 과정에서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다. 딸에게 홀딱 반한 주인공은 그녀에게 접근하고, 그 과정에서 이상한 일을 겪지만, 연애는 어느 정도 성공.  하지만 이건 그냥 파국을 향해 달리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잠깐 산다화에 수록된 이야기와 겹쳐 책을 찾아서 확인하니까 역시 다른 이야기).  이 책을 읽고서 한참 지나간 시절을 떠올리면서 진한 아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는 한심한 중년이 되어버린 나.


미타라이 기요시라는 점성술사/명탐정과 소설가 이시오카라는 콤비는 아무리 봐도 셜록홈즈와 왓슨을 차용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미타라이의 그 심각한 나르시시즘, 엄청난 실력, 기괴한 지식, 그리고 늘 빈정거리지만 이시오카에 대한 우정과 사랑까지.  홈즈와 왓슨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을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제목까지도 '셜록 홈즈의 마지막 인사'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네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시덴카이 연구 보존회'의 에피소드는 왠지 '붉은 머리 클럽'을 닮았다.  이래저래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가벼운 추리, 그리고 그리운 홈즈와 왓슨을 다시 만난 듯한 기분 좋은 기시감까지.  미타라이 기요시가 등장하는 다른 작품을 찾아볼 수 밖에 없는데, 기대하는 건 추리보다도 미타리아 기요시와 이시오카의 브로맨스(?).



이건 조금 너무 스토리를 길게 가져간 듯.  내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선전에서도 그랬고, 요코미조 세이시가 '팔묘촌'의 모티브로 삼았던 실제 사건 을 배경으로 가져다가 그 후손들이 얽혀드는 작품으로 만들어낸 것 같다.  통칭 츠야마 사건이라는 엽기적인 대량살인사건.  

미타라이 기요시가 직접 등장하지 않고, 그와 함께 지내면서 기가 꺾인 이시오카만 혼자 엉뚱한 경로로 사건에 말려들어 엄청난 고생 끝에 사건해결과 동시에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은 트릭과 함께 배치된 재미있는 구성요소라고 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매일 같이 자신이 inferior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천재적인 사람과 살다보면 이시오카처럼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홈즈와 왓슨의 경우에서 좀더 못난 왓슨과 좀더 못된 홈즈의 관계랄까?  '점성술 살인사건'외엔 미타라이 기요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작품을 못 봤는데, 역시 책을 몇 권 더 구해야할 것 같다.


지금 가진 몇 권만 더 읽으면 일단 보유중인 시마다 소지를 다 읽게 된다.  이 중간에 읽은 '혼자 일하는 즐거움'은 나중에 다시 정리할 것이다.  이렇게 추리소설에 둘러싸여 한 주간을 보냈는데, 나쁘지 않다 나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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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27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선 후보 연설 때문에 미국 분위기 뜨거울 것 같습니다. 여기 우리나라는 국민들 혈압 올리는 소식 때문에 미치겠습니다. 성완종 리스트 관련 이한구 2심 무죄... 메디안 치약 회수...

transient-guest 2016-09-28 03:33   좋아요 0 | URL
일단 힐러리의 완승입니다. 트럼프는 거짓말/막말 빼고는 없더군요.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는 거의 장광설이라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보였습니다. 다만, 힐러리의 호감도가 낮은 점, 점점 더 안철수를 연상시키는 샌더스, 부동의 트럼프 지지층 같은 점이 걱정입니다.

요즘 한국은...그냥 심정적으로 포기하게 됩니다. 뉴스도 무엇도 거의 4년 내내 점입가경이 뭔지 보여주는...박근혜...그 권력의 정점엔 역시 최씨가 있었네요. 검찰은 여전히 정치만 하고 있기에 이명박을 잡아간다고 해도 정의라곤 눈꼽만큼도 없을 그들이라서 지금 모습엔 전혀 흥미가 없습니다. 이한구가 무죄가 나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