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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러지가 심해서 한의원에 가서 급한 대로 침을 맞게 되었다. 늘 가던 곳인데, 오늘은 엘러지 처방이라서 그랬는지 코에 약물을 붓고 청소해주시는 과정에서 마치 수영장에서 코로 물을 들이킨 것처럼 짠~한 고통을 맛보게 되었다. 덕분에 보통은 한숨 푹 자면서 쉬는 침세션이 그야말로 고통의 연속이었다. 더운 날씨까지 사람을 몹시 괴롭히는데, 내가 봄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 이유라고 하겠다. 저녁을 먹고 참다 못해 서점에 나와서 차가운 커피를 마시면서 업무를 보다가 여유가 생겨서 잠시 서재를 열었다. ice coffee를 주문했으나 ice coffee가 다 떨어져서 상대적으로 더 좋고 비싼 ice americano를 마실 수 있었는데, re-fill까지도 일반 커피값을 적용해주겠다니 감사할 수 밖에. 근처에서 하나밖에 남지 않는 BN이 소중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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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처럼 밤잠을 설치다가 비몽사몽간에 자다 깨면서 새벽을 맞았다. 오전 미팅 전에 일을 해두면 좋을 것 같아서 일찍 사무실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마침 오늘 바로 '그분'이 오신 것. 갑자기 예전의 감각이 살아나면서 미팅 전에 문서 두 건을 가뿐히 작성하고, 한 시간의 상담 후 다시 바로 남은 한 건을 처리한 후 내친김에 다섯 통의 짧은 문서까지 다 처리해버린 것. 덕분에 오후 2시 정도에 완전히 방전이 되어버렸고, 이후 한 시간 정도는 꽤 멍하게 관성으로 일처리를 하다가 더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가버렸다. 계획으로는 빈 속에 열심히 운동을 해서 더욱 burn을 늘리는 것이었는데, 한 시간 정도 근육운동을 하는 것으로 머리가 띵하게 속이 비워졌기에 running을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빈 속을 허겁지겁 손에 잡히는 것들을 입에 털어넣는 것으로 꽉 채우고는, 지쳐 앉아있다가 다시 서점카페로 나온 것이 딱 어제의 그 타이밍이다.
대를 이어 경영하는 서점이 한국에 몇 개나 남아있을까. 그것도 작은 규모의 책방이 아닌, 한때는 나름 지역에서 잘나가던 대형서점을 말이다. 요즘은 개인책방이라고 하면, 그것도 오프라인에 헌책방이 아니라고 하면, 최근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 작은 독립서점, 카페나 공방을 겸한, 또는 서점으로 생계를 꾸리지는 못하고, 업주가 다른 일로 돈을 벌면서 side로, 보다 더 정신적인 만족에 가까운 경영이 아닌가 싶은 그런 수준의 작은 공간이 대부분일텐데, 아무리 지방이라지만 알라딘과 YES24가 양분해버린 온라인서점과, 틈새를 노린 헌책방들 사이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존재하고 있는 서점이 바로 속초 동아서점이다. 기실 이야기 자체는 전문작가가 드라마틱하게 쓴 것도 아니고 해서 재미 반, 흥미 반, 이야기 반, 그럭저럭 읽어버렸지만, 덥썩 아버지의 길을 따라 간 아들의 모습에서 책을 읽지 않는 시대의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느낀 것으로 기억한다. DC가는 길, 라운지에서 취해가며 읽은 것 같아, 자세한 이야기는 생각나지 않지만.

두 작가 모두 좋아하는 터라 은근히 기대를 많이 했으나, 결코 나쁘지 않은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스타일의 글을 좋아하지 않기에 매우 그럭저럭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객관적으로 흥미있는 내용이었지만, 단숨에 읽지 못하고 (빨리 읽기는 했지만) 중언부언 하는 식으로 책을 들여다보았다.
일본의 책방, 헌책방 문화는 참 부러운 점이 많고, 아직도 지하철에서는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노벨상을 받는 힘도 여기서 나오는 것이 아니가 싶다. 우리 입장에서는 비판할 점도 많은 국민성이지만, 세계무대에서 놓고 보면, 아마도 우리보다 나은 점도 많이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일본이나 우리나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규정짓고, 동일화하는 걸 즐기지만, 이들의 다른 점은 바로 장인정신의 연장선상에서, 어떤 한 가지에 매진하는 걸 좋게 봐준다는 점이 아닐까. 책을 좋아하든, 피규어든, 영화든, 무엇이든 이렇게 한 가지 기예를 깊이 파고 드는 점에서 우리가 받지 못하는 제대로 된 노벨상을 여럿 받은 저력의 근원을 볼 수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헌책도'라는 이상한 '도'는 싫고, 다른 사람의 '류'가 아닌 나만의 방식에 따라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무엇인가 사들이고 읽고 즐길 것이다. 노벨상과는 결코 인연이 없을 인생이지만, 어느새 돌아보면 많은 것들을 접했고 좋아하는 것들을 열심히 누렸음에 만족할 있을 것 같다.
강상중 선생은 서경석 선생과 함께 재일조선인을 대표하는 현대의 지식인이 아닌가 싶다. 비록 그의 책을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서경석 선생의 고심참담한 자이니치로서의 고민보다는 훨씬 다른 환경에서의 성장과 경험이 보여주는 경쾌함과 댄디한 지식인의 모습은 확실히 강상준 선생의 글을 다른 느낌으로 보게 한다.
내 개인적으로는 이런 댄디함에 약간의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실상은 엄청 부러운 맘이 가득한데, 젊은 시절은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모습만 보아도 참 멋쟁이 지식인, 즉 겉과 속이 모두 꽉찬 모습과 자기관리가 그만큼 철저할 것이라는 추측에서 오는 부러움이다.
아쉽게도 책의 내용은 설렁설렁 읽은 터라, 그저 화보와 함께 한 대담집 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는 그의 도쿄산책기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점점 더 집중하지 않으면 책장을 덮는 순간 모든 것이 한 밤의 꿈인 듯 싸그리 사라져버리는 갱년기의 문턱에 서 있는 지식인 wanna-be는 슬프다.
마침내 우리에게도 추리소설의 선구자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건 모두 강헌 선생의 덕이다. 최근에 읽은 선생의 책에서 소개를 받고 찾아낸 '마인'은 동시대 일본의 추리소설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등, 아주 즐거운 시간을 주었다. 조금은 촌스럽게 느낄 수 있는 어투, 단어, 대화체도 구수한 것이 행복하기 그지 없었고, 추리의 면에서도 상당히 탄탄한 구성을 보여주는 등, 과연 이것이 근대소설일까 싶을 만큼 치밀한 전개를 볼 수 있었다. 그저 놀라움의 연속. 김성종 작가도 꽤 한가락 하는, 한국에 있어 결코 그 존재가 가볍지 않은 분야의 선구자라고 하겠지만, 김내성의 앞에서는 겸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어야 할 것만 같다. 내친김에 더 읽어보려 했으나 e-book으로 나온 것들만 찾았을 뿐이다. 언젠가 e-book으로도 책을 모아야 하나 싶은 것이 첫 번째는 란포였는데, 김내성도 그 이유가 된 것이다. 명탐정도, 경찰도, 아름다운 여성도,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미스테리도, 과감한 트릭도, 모두 볼 수 있는, 그야말로 한국 추리문단의 보물이 아닌가 싶다.

앞서 읽은 책인데, 동서미스테리 문고의 중역본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깔끔하다. 덕분에 상당히 다른 느낌을 주었고, 중반까지 내가 이 책을 과거에 읽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책 디자인도 나름 장서가인 나에게 꽤나 매력적인데, 헌책으로 산 '스페인 곶...'의 경우 이 겉테두리가 없어, 어쩌면 나중에 그냥 새책으로 한 권을 더 갖게 될 것만 같다.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연쇄살인이 일어나는데, 희생자들을 이어줄 만한 패턴이 보이지 않고, 엘러리는 이내 엄청난 고뇌에 빠진다. 중반을 넘어가도록 아무런 clue가 보이지 않는데, 우연한 계기로 혐의가 짙은 인물을 찾고, 이로부터 사건은 일사천리로 수사되어 마침내 범인을 잡는가 싶었는데, 반전은 이야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갑작스런 '현자타임'을 통해 일어난다.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는 없지만, 추리게임보다는 추리활극에 가까운, 마치 관객처럼 제 3자의 입장에서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책읽기의 속도가 갑자기 확 떨어진 이번 한 주간 드디어 이렇게 해서 밀린 정리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가끔은 휴식이 필요한 건 이런 이유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