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읽고 싶은 책, 읽어야 할 책, 정말이지 다른 취미를 끊고 평생을 읽어도 모자랄만큼 많은 책을 갖고 싶고, 읽고 싶은 중독상태가 심해지고 있는 지금, 살짝 이제 그만 페이퍼를 써야겠다는 유혹까지 오기 시작했다.  


여럿의 단편에서 내가 가장 몰입해서 읽은 소설은 첫 번째 이야기다. 어린 시절 주인공을 골탕먹이고 괴롭혔던 '일진'을 나이가 들어 우연히 만나는 이야기.  모든 것을 다 털어버린 듯 '좋았던 어린 시절'을 들먹이며 '친구'라고 하는 그 새끼는 기실 주인공의 친구였던 때가 없다.  혼히들 어른들이 아이들을 야단치거나 할 때, '친구'끼리 싸우지 말아라, '친구'끼리 싸울 수도 있다는 말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이건 '친구'라는 말의 심각한 오용이자 남용이 아닐 수 없다.  주인공과 그 '친구'새끼는 일방적으로 주인공이 복종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사이였고, 급기야 친했던 여사친이 그 '친구'새끼한테 겁탈당하는 계기를 만들기까지 했으니까,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그 새끼는 주인공의 '친구'가 아니다.  


왕따를 당하고 숱한 고생을 거쳐 일정 부분 트라우마를 갖고 어른으로 자라난 아이가 있다고 하자.  어른이 된 그 아이가 과연 학창시절을 그리워 할까?  아니, 자신을 못살게 군 '그들'을 친구라고 여길까?  아무리 세월은 과거를 아름답게 윤색하여 기억하게 하지만, 절대로 '그들'은 친구라고 기억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이야기들도 아름답긴 커녕 성질을 돋구는 아주 raw하고 직설적인 이야기였다고 기억한다.  punch를 pull하는 것이 하나도 없이, 아니면 철학적으로 관념화 시키는 것도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하나씩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1) 재미도 있었지만, (2) 주로는 나를 매우 화나게 하였고, (3) 게다가 바로 이전에 '지방시'를 읽은 탓에 (4) 대단한 쌍욕유발효과가 있었다.  불편한 만큼 더 뚫어지게 쳐다볼 수 있었야 하는데, 내 현실은 가슴 아프고 맘이 아리는 사회 곳곳의 이야기에서 끝내 눈을 돌리게 한다.  어쩌면 이 소설의 이야기처럼 화가 나고 욕지기가 올라오더라도, 아니면 너무 가슴이 아파서 불편하더라도 해결되지 않은 부조리와 이로 인해 파생되는 희생자들의 사연은 설사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도, 계속 들여다봐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도한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이어지는 한 수가 되었다.  '어제의 세계'는 나찌독일에서 쫓겨나 세계를 떠돌던 시대의 문호, 츠바이크가 죽기 얼마 전에 정리한 자신과 그 좋던 시절, 유럽의 이야기다.  


영화 'Midnight in Paris'를 보면 1차 대전이 끝나고 2차 대전의 기운이 스물스물 올라오기 전, 그러니까 대공황이 온 세계를 덮치기 이전의 데카당적인 시절을 향수어린 시선으로 보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classic 푸조를 타고 과거로 돌아간 그가 사랑에 빠진 여인은 그런데,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 과거의 질서에서 살아가던, 아마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찾아온 유럽의 평화시대를 Golden Age로 이상향을 삼고 있다.  아름다운 그 시절의 묘사나 유명한 문호들과 interact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이 이 영화를 즐기는 나의 방법이었는데, 츠바이크가 공부를 하고, 여행을 했으며, 문명을 떨친 시기가 대략 이 두 시대를 관통한다.  


다소 보수적일 수도 있는 언조로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신민으로 살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이야기 하는 부분은 그의 특이한 배경, 그리고 나찌즘이 대두하면서 그가 알던 유럽의 모든 것들과 강제로 멀어진 그의 인생 말기를 생각하면 그렇게 심한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읽는 내내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만 가득했었고, 이런 시대가 있었고, 이런 관점으로 바라볼만큼 유복했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던 수재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국제적 방랑자로 전락해버린 전체주의에 대한 분노가 후반부로 갈수록 심해졌었다.  회고록이면서 유서가 된 이 책은 사서로써의 가치도 상당히 높다고 하겠는데, 당시 츠바이크는 유럽문학계의 명사로서 많은 유수작가들과 교류했기 때문에 통사형식의 역사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역사속의 인물들을 first-hand으로 만날 수 있다.  '어제의 세계'는 사라져버린 그 좋았던 시절에 대한 추억하기와 이를 잃어버리고 삶의 희망을 거의 놓아가던 츠바이크의 마지막 몸부림이 함께 묻어나와 책을 읽은지 2-3주 이상 지나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가슴이 아려온다.


같은 시리즈로 다양한 작가와 시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시리즈의 첫 번째, 디킨즈와 콜린스가 두 가지 다른 버전의 게으름을 실천하기 위해 영국의 변두리릴 한 바퀴 돌면서 겪는 이야기를 그렸다.  한 명에게 게으름이란 leisure을 즐기는 것, 일을 하지 않고 걷거나 산책, 여행을 하면서 보내는, 단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면, 다른 한 명에게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면서 집구석에 쳐박히는 것을 의미한다.  크게 무엇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좋은 출판사에서 기획한 시리즈를 계속 이어갈 만한 정도의 재미는 얻을 수 있었다고 본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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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했어야 했다.  8시 반에 퇴근해서 잠깐 쉬고 9시에 운동을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몸은 늘어지고, 그렇게 있다가 옷을 갈아입고 문을 나서다가 그냥 주저앉았던 것이다.  나는 어쩌다가 그렇게 힘든 일정을 소화하지만 대형회사의 내 친구는 늘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한다.  아마도 일종의 익숙함과 함께 근육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그랬고, 8시까지 일을 하는 날에는 5시 정도에 바닥을 친 체력과 머리가 6시부터 서서히 다시 오름세를 타고 조금 무리를 하면 11시까지는 유지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내가 사무실에 있는 시간은 거의 모든 human interaction이 배제된 철저히 일만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기업형 로펌에서 미팅과 자잘한 대화까지 계산하면 아무리 시간이 길고 업무의 지중도가 높은 대형로펌 특유의 나날들이지만 어떤 의미로는 나보다 나은 스케줄일 수도 있다.  나의 상황은 좀 다른데, 잡다한 인간관계와 관련업무로 빠지는 시간이 없는 순수한 업무시간이 나의 하루인 것.  오늘 같은 날은 9시 부터 8시 반.  아침과 점심 모두 배가 고픈 것을 느낄 때 과일이나 빵을 조금씩 먹었고, 커피는 세 잔을 마셨으며 콜라를 한 병 마셨다.  한니발의 휴식에 대하여 시오노 나나미가 인용했던 로마인의 글이 떠오르는 하루가 아닌가...


리뷰는 덕분에 beyond 불평 stage가 되어 꾸준히 미뤄지고 있다.  요즘처럼 느린 속도에도 불구하고 네 권 정도가 밀린 것 같고, 이번 주 업무일정과 독서를 생각하면 더욱 많은 책이 후기 없이 남겨지게 될 것이다.  후기라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도 느낌도 가물가물해지는 등, 바로 작성하지 못하면 그만큼 정확하지 못한 기억에 의지한 시늉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말이다.  


지금도 무엇인가 책에 대해 몇 자라도 적으려고 페이퍼를 열고 이렇게 푸념만 하고 있다.  더 나쁜 건, 이렇게 페이퍼를 열었음에도 결국에는 책에 대한 이야기는 남기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머리가 터지기 직전...


한국의 내 또래들은 어떻게 이런 나날들을 견뎌왔을까?  99%는 나보다 더 힘들게 더 어려운 조건에서 일하고 살아왔을 것인데...벌이와 상관 없이...


당신들...너무나 존경스럽고 안쓰럽다...덜어냄도 보탬도 없이 정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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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이라는 작가를 좋아한다.  그의 책인지 모르고 우연히 읽게 된 '방각본 살인사건'이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이후 구할 수 있는 책은 모두 사들여 읽었으며, 절판된 책은 당시 세리토스 도서관의 빈약하기 그지 없었던 한국도서과에서 빌려다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이 시절은 지금도 가끔 좋지 못한 꿈을 꾸게 하는 등 무의식 속에 꽤 힘든 시절로 남아 있는데, 2009년 무렵인가 일도 익숙해지고, 그냥 재미도, 보람도 없이 보내던 하루의 위안이 돌아오는 길에 도서관에서 빌린 소설을 읽으며 운동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 정도였다.  이때 내 기억으로는 '압록강'을 읽었는데, 이 책은 아직도 다시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안다.  '압록강'뿐 아니라 그의 초기작들 중 유명세를 많이 타지 않은 책들은 여전히 절판이고, 영화나 TV 드라마로 유명해진 일부 작품들만 다시 엮어서 나오고 있다.


고작해야 14년 밖에 되지 않은 책이고, 지금은 매우 유명한 작가의 초기 작품들 중 하나인데, 시장의 논리는 냉정하기 그지없게 이 책을 여전히 절판상태로 놔두고 있다.  작품성이나 재미는 확실히 좀 떨어지지만, 그리 유명해지기 전, 김탁환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법이나 이런 것들이 상당히 풋풋하고 재미있다.  다소 촌스럽게도 자신을 작중인물에 대입하는 것이나, 이 과정에서 나오는 자신의 작품들을 이름만 살짝 바꿔 나열한다던가 하는 건 꽤 귀엽다.  단 장옥정-김만중-모독-백난파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좀더 키우고 이야기를 좀더 흥미롭게 이어갔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책의 테마를 좀더 잘 다듬고 기승전결에 따른 이야기의 당위성을 키워 장편으로 내놔도 상당히 흥미롭겠다고 생각했다.  '방각본 살인사건'에서 제대로 터뜨린 '매설가'의 테마의 시작이기도 한데, 최고의 소설을 찾는 유명한 매설가 모독, 이를 이용해서 귀양가 있는 김만중의 소설을 훔쳐 역모사화를 만들어 내려는 장희재와 장옥정, 이들을 이용하여 권력의 균형을 잡고자 하는 숙종, 그리고 이 와중에 완벽한 소설을 찾아 빼돌리기 위해 모독을 떠나 김만중에게 접근한 여자 - 소설속의 이름으로 정체를 바꾸며 실체와 실명을 숨긴 - 그런데, 이들을 잘 엮어서 정리되지 못했기에 풀리지 않은 궁금증이 너무 많다.  


공산당이던 아버지가 부임한 프라하에서 학교를 다니고 살았던 요네하라 마리가 회상하는 과거 친했던 친구들의 모습과 일본으로 돌아온 후 한참 동안 소식이 끊어졌다가 이루어진 그들과의 재회에서 그녀가 느낀 많은 이야기들이 꽤 소박하지만, 열심한 문장으로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이미 돌아가신 지도 한참이지만, 가끔 저자의 얼굴을 보고 책을 산다면 요네하라 마리의 책을 사게 되지 않을까 생각할 만큼 그녀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오랜 친구라도 늘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기회가 날 때마다 만나지 못하다가 어느 날 만나게 되면서 느끼는 당혹감을 주는 때도 있고, 어느 친구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기도 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후반부에서 그녀가 옛 친구들을 찾아보면서 느낀 감정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어제까지 TV 드라마 '잘 먹었습니다'를 재미있게 보다가 던져 버렸다. 요리도 좋고, 시대 또한 내가 흥미를 갖고 있는 일본의 한 시절인데, 중반을 넘었을 때, 관동대지진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혼란을 틈타 정적을 살해하거나 죄없는 조선인들을 관이 주도해서 대량으로 잔인하게 학살한 이야기는 쏙 빠지고, 전 일본으로부터 구호물자와 도움의 손길이 쌓여갔다는 '미담'과 당시의 모습을 자료화면으로 내보내는 부분에서 꼬인 내 심사는, 에피소드 내내 그 잔인했던 짓에 대한 일언반구도 없이 의무감과 안타까움으로 똘똘 뭉친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더욱 배배 꼬여버렸다.


사실 드라마를 시작하면서 보여준 전쟁 직후, 아이들을 거둬먹이면서 무엇인가 희망적인 장면으로 이를 전환하는 부분에서 이미 국뽕의 느낌이 있었기는 했다만.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을 넘어서 일본의 책이나 문화를 접할 때 이 부분은 늘 아쉽고, 주의해서 보아야 하는 부분이다.  요네하라 마리의 책도 조금은 그렇게 조금은 비판적으로 들여다볼 부분이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은 특별히 그런 맘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으니까, 내가 읽은 첫 번째 요네하라 마리의 책으로는 괜찮았던 셈이다.


츠바이크와 백가흠, 그리고 이젠 너무도 오래 손을 놓은 스토너까지 아직도 세 권이 남아있다. 어떻게 써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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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3-16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탁환 작가의 책은 최근 새롭게 나오는 책도 있지만 절판된 것도 많더군요.
아쉽더라구요. 개인적으로 아주 많이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열심히 쓰는 작가는 존경스럽더라구요.
소개하신 책도 언젠가 다시 복간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드라마라는 게 어느 나라나 문제가 있게 마련인가 봅니다. 특히 역사 드라마는...

transient-guest 2016-03-17 04:00   좋아요 0 | URL
조선왕조를 시리즈로 다시 나오고 있는데, `압록강`은 아직 없더군요. 꾸준히 쓰고 있고, 문제의식도 갖고 있는 작가라서 좋아합니다만, 한계는 있습니다. 일본인의 사고에서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의식은 굉장히 강하게 뿌리박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1920-45년 사이의 일본소설을 읽어보면 이건 상당히 허구적인 주입이라는 걸 생각하게 됩니다.

yamoo 2016-03-18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탁환 작가...이야기꾼이지요. 전 초기 작품만 봐고, 12년 이후 한국소설을 안 봐서 거의 잊혀진 작가가 됐습니다. 트랜스 님 페이퍼를 보니, 옛날 생각이 나네요. 불멸의 이순신을 가장 재밌게 보고 그의 작품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집에 5작품이 있지만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근데, 모르는 작품을 많이 냈었나 봅니다.언젠가 다시 읽을 날이 오려나요...그의 소설이 재밌다는 건 압니다만, 한국소설 보단 세계문학 쌓인게 너무나 많아서 한국소설은 읽을 틈이 거의 없습니다..--;;
한 때 애정했던 작가였는데, 점점 잊혀져 가니좀 거시기 하네요..^^;;

transient-guest 2016-03-18 02:31   좋아요 0 | URL
저는 한국문학을 늦게 발견한 사람이라서 소설도 문학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다시 세계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여튼 뭐든지 조금씩 늦었습니다.ㅎㅎ 꾸준히 시간을 투자해서 읽지 않으면 책의 세계에 갖혀 버리게 되는 것 같아요.ㅎ
 

아무래도 김종인 체제는 실패로 끝날 듯 싶다.  바로 지난 주엔가 그의 공천질이 수준 높은 하나의 묘수이기를 바랬건만.


당원들이 합의하여 만든 시스템 공천을 바탕으로 한 개혁을 위해 영입된 김종인은 철저한 개혁을 감행하기는 커녕 김한길-천정배의 탈당과 이에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이던 박영선을 위시한 현역들을 달래기 위해 문재인 의원이 물러난 틈을 타 새로이 등장한 '당권파'의 손에 놀아나는 모습만 보이고 있다.  아니, 보수에 뿌리를 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어떤 방법이든 동원하여 우클릭을 통해 중도층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박영선의 패거리와 배가 맞은 형국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여기에 이철희라는 사람이 박영선에 붙어있는 것도 보기 흉한데, 애당초 난 이 사람이 왜 영입된 것인지 의문이었다.  무슨 연구소 소장이라는데, 내가 아는 이철희는 종편을 주무대로 논객으로, 정치평론가로, 그러니까, 방송용 '정치논객'이라는 것 외에는 내세울만한 업적이 없기 때문이다.  전략가로 데려온 건지, 모사꾼으로 쓰겠다는 건지 알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박영선의 '꾀주머니'노릇을 하려고 불러들인 듯한 느낌이다.  


잘은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헛발질은 되돌리기 어려울 만큼 큰 데미지를 당에 입혔고, 총선의 승리는 커녕 사분오열된 야권을 더더욱 갈라놓는 결과로 돌아온 것이다.  의견들이야 다양하겠지만, 공천 컷오프는 이미 김종인과 박영선의 짝짜꿍으로 무척이나 불공평하게 진행되었고 그 결과 전략적으로나 정략적으로나 말도 안되는 인사들의 당선을 위해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이해될 수 없는 다수의 좋은 현역의원들이 배제되었고, 거기에 어제 뉴스를 보니 청년인재로 영입된 김빈 디자이너까지 날아가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최유진'이라는 금수저의 자리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인 중론인데, 이 '최유진'이라는 사람의 인지도나 연줄을 볼 때, 이 역시 아닌 수를 둔 것이다.  


공천을 제대로 했어도 국민의당-정의당 연대가 없으면 어려운 선거판에 이렇게 마구잡이로 떡수를 연발하고 있는 건 김종인의 오판과 이를 부채질하고 때로는 편승하여 오로지 '당권'의 실리만을 잡으려는 박영선과 그의 패당 때문이다.  의총에서 결정된 필리버스터를 '총선 망치고 싶냐'는 일갈로 끊어낸 김종인의 독선적인 패악질과 박영선이 흘린 악어의 눈물에 대한 반발은 김종인이 던진 국민의당과의 통합제의로 뉴스가 몰려 넘어갔고 이는 잘 풀렸더라면 '신의 한수'가 되었을 수도 있음이다.  하지만, 공천과정에서 보여준 제왕적 태도와 무원칙 무원리, 그리고 오로지 민주당의 친박을 위한 당리당략을 볼 때, 이미 더불어 민주당은 국민의당과 함께 가라앉고 있다고 본다.  


아!  불쌍한 내 조국.  불쌍한 내 민족.  여기에 나와 살아온지도 어언 20년이 넘었고, 기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대한민국의 덕을 보면서 살았다고 하기도 어렵고, 내가 뼈을 묻을 곳은 이곳이라고 믿고 살지만, 그래도 너무 가슴이 아프다.  동이 트기 직전의 어두움이면 좋으련만, 아무리 봐도, 아직도 막막한 한밤중인 것만 같아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놈의 '친박'들.  어디서나 문제다.  


PS 삼국지 2를 기준으로 보면 김종인은 아무리 봐도 80대 초반의 책사로 밖에 점수를 줄 수 없고, 이철희는 느낌이 딱 '허유'같다.  조조의 친구 허유. 원소의 진영에서 넘어와 결정적인 승리를 조조에게 가져다 주지만, 거만을 떨다가 허저에게 목이 날아간 '허유'는 수치상 79의 모사꾼인데, 이 '79'라는 게임상의 수치가 상징하는 바가 특히 '이철희'에 이를 대비하면 의미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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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6-03-16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종인을 영입할때 이제야 민주당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싶었지요.
진보당인척 하는 거짓 연기는 이제 그만두고 `제대로된 보수` 당이 되는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으니까요.

하아...하지만 이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된 보수`를 기대하는 것도 틀려 먹은건가 싶기도 합니다.


지금 제가 녹색당에 던지는 한표는, 죽은표가 되겠지만,
그래도 이땅에 뼈묻고 죽을때 후대에게 조금 덜 미안한 선택이 되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transient-guest 2016-03-16 09:2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민주당 = 보수, 정의당 등 = 진보, 새누리 = 망하면 딱 좋은 구도라고 봤습니다. 이독제독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당을 차고 앉았네요.

무해한모리군 2016-03-16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총선판을 보자니 선거제도를 어떻게든 고쳐야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가 문제네요. 김종인의 정체야 새삼 실망할것이 없는데 정치 수읽기도 낡은듯해 한심하네요. 총선후가 걱정입니다

transient-guest 2016-03-17 04:01   좋아요 0 | URL
저도 1-2등까지는 득표수에 맞춰 당선되어야 함이 옳고, 국회정원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처럼 너무 낡은 수읽기도 보이고, 스타일이 이미 새로운 시대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총선을 선방해서 개헌선을 지키면 더 큰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금요일 밤을 맨 정신으로 보내는 건 꽤 오래간만의 일이다.  주중의 스트레스는, 아무리 내 개인사업이라고 해도, 그만큼 엄청난 책임과 함께 정신노동과 이제는 피할 수 없는 관리 및 행정노동을 통해 차곡차곡 쌓이고 목요일이나 금요일이 되면 무엇인가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이를 풀어왔다.  아마도 이건 쉽게 고쳐질 것 같지는 않다만, 토요일 아침을 좀더 기분좋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개뿔이고, 내일과 일요일에도 조금씩 필요한 일을 진행시키려면 최소한 오늘밤은 건전하게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들어 자주 소화불량으로 시달리는데, 운동을 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쉬이 풀어지지가 않아서 밤이지만 커피를 끓여 마시고 이뇨작용을 유도하고 있다 (이런 얘기까지 쓰네 -_-,).


장영실이 조선의 역사상 최고의 엔지니어라고 한다면, 홍대용은 최고의 응용물리학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한다.  비록 거의 소설에서 나온 묘사로 그를 접했지만, 북경에서 보고 온 파이프 오르간을 그대로 만들어 연주했다는 일화의 반 만큼이라도 사실이라면 그는 천재다.  그것도 셸든 쿠퍼 (빅뱅이론)처럼 과학 외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천재가 아닌 그야말로 통달이 무엇인지 보여준 진정한 의미의 천재라는 말씀.  

현대과학의 눈으로 보면 틀린 것도 많이 있지만, 성리학에 편향된 교육을 받고 자라난 사람이라면 사유할 수 없는 많은 직관적인 자연과학의 깨우침은 지금의 눈으로 봐도 무척 놀랍다.  이런 천재들이 조선을 좌지우지했더라면 우리가 아는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어느 시점에서부터 정조에 투영되기 시작한 개혁전제군주의 이미지는 조금 버겁고, 실제로 전제왕조의 한계는 뚜렷했지만, 그래도 이 시대는 조선이 마지막으로 한 방을 노릴 수 있는 시대였다고 생각하기에 가끔은 아쉽다. 풀어쓴 내용으로 쉽게 읽었는데, 우화를 통해 추상적인 말장난 같은 철학보다는 파격적으로 실증주의적인 자세에 입각한 세상의 이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교양을 위해 한번 정도 읽어볼만하다.


3/12/2016 -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오후에 이어 쓰다가 말고,

3/13/2016 - 써머타임 때문에 한 시간을 빼앗긴 일요일, 역시 일하러 나와 씀.


정조대왕 시대에 잠깐 핀 실학과 개혁군주의 꿈이 우리에게 있었다면, 왜국은 우리 보다 훨씬 더 빨리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다는 건 임진년과 정유란의 왜란을 통해 톡톡히 경험한 바 있다.  문제는 그 이후에도 계속 벌어진 격차이다.  사농공상을 신분제의 기초로 한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는 점, 심지어 이사도 맘대로 갈 수 없었던 폐쇄적인 사회였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도쿠카와 막부시대는 일본역사에서 그 유례가 없는 평화로운 300년의 시대였다.  이 평화를 바탕으로, 그리고 우리 보다는 훨씬 더 자유로운 기풍과 한 분야의 실력자를 존중해주는 그들 특유의 문화는 이 태평성대를 통해 (1) 병술보다는 도로써의 검술, (2) 기-화-서-금, (3) 공예, 및 (4) 다양한 산술과 역학을 발전시키게 된다.  이 소설은 그 도쿠카와 시대가 열린 지 3-4대 정도가 되는 시점에서 당시까지 사용해온 당나라 시대의 역학산술에 큰 오차가 생겼음을 발견하고 이를 정리하여 일본 땅과 시대에 맞는 달력을 만들어 내려는 바둑명가 출신의 산술인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시대활극(?)이다.  무사가 검을 맞대고, 야규집안이나 핫토리 한조가 나오지는 않지만, 이 새로운 사업을 둘러싼 쇼군가와 천황가의 주도권 다툼, 대로들 사이에서 보이는 세력다툼, 산술시합, 기존의 역학을 주도해온 음양사 집안과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산술가의 대결, 그리고 아주 간결한 절제를 보여주는 로맨스까지 무척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찾아보니 만화와 TV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100년 조금 더 전의 이야기.  옛스러운 방법으로 산과 짐승에 대한 마음가짐으로 사냥에 임하는 '마타기'라는 직업을 가진 자들의 이야기.  이 시절이면 일본은 이미 개화기를 넘어 근대화가 진행된 나라였지만, 산간지방으로 가면 여전히 소작인들은 가난하고, 특히 가난한 산간지방에서는 이런 전문 사냥꾼으로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 유일한 삶의 방편이었다고 한다.  변화도 좋고, 무엇도 좋지만, 요즘 같이 복잡한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대를 잇는 삶이 주는 안정감도 좋아 보이기는 한다.  물론 현실은 늘 굶주리고, 하다못해 촌장이라도 누군가 늘 위에 군림하는 삶이고, 마을에서 쫓겨나기라도 하면 평생을 떠돌아야 하는 처지가 되는 것.  주인공도 그렇게 '마타기'에서 광부로 전락했다가 다시 '마타기'로 돌아오게 된다.  그 과정에서 겪는 모험도 그렇지만, 또다시 묘한 로맨스와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이 만들어주는 '썰'이 그야말로 산짐승의 냄새가 풀풀 난다고 하겠다.  화려한 수상경력이 그리 의심스럽지 않은 좋은 작품이다.  다음 '낭만픽션'이 기다려진다.


이렇게 힘들지만, 결국 몇 권을 더 정리했다.  그런데 아직도 세 권이 남아있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3/7주간에는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나마 세 권이다.  슈테판 츠바이크, 백가흠, 김탁환.  이들 중 하나의 작품도 쉽게 정리할 수 없는 수준이다.   고민과 행복이 교차하는 이 순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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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da 2016-03-14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대용 -의산문답. 제목만 외웠던 책. 읽어보고 싶네요.

transient-guest 2016-03-15 02:14   좋아요 0 | URL
저도 제목만 알고 있던 책입니다. 길고 복잡한 내용은 아니고 그저 이런 시대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글샘 2016-03-14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산문답... 저런 책 보면 인간의 두뇌가 연역할 수 있는 세계가 참 크죠~ 요즘 미국에서 태어났음 빌게이츠나 주커버거보다 잘 나갔을 수도... 인간은 자기 운에 맞게 태어나는건가봅니다. ㅋ

transient-guest 2016-03-15 02:15   좋아요 0 | URL
그런가 봅니다. 홍대용도 그렇고 조선시대의 실학자들 중에서는 정말 실리콘밸리에서 났으면 억만장자가 되었을 것 같은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