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읽고 싶은 책, 읽어야 할 책, 정말이지 다른 취미를 끊고 평생을 읽어도 모자랄만큼 많은 책을 갖고 싶고, 읽고 싶은 중독상태가 심해지고 있는 지금, 살짝 이제 그만 페이퍼를 써야겠다는 유혹까지 오기 시작했다.
여럿의 단편에서 내가 가장 몰입해서 읽은 소설은 첫 번째 이야기다. 어린 시절 주인공을 골탕먹이고 괴롭혔던 '일진'을 나이가 들어 우연히 만나는 이야기. 모든 것을 다 털어버린 듯 '좋았던 어린 시절'을 들먹이며 '친구'라고 하는 그 새끼는 기실 주인공의 친구였던 때가 없다. 혼히들 어른들이 아이들을 야단치거나 할 때, '친구'끼리 싸우지 말아라, '친구'끼리 싸울 수도 있다는 말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이건 '친구'라는 말의 심각한 오용이자 남용이 아닐 수 없다. 주인공과 그 '친구'새끼는 일방적으로 주인공이 복종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사이였고, 급기야 친했던 여사친이 그 '친구'새끼한테 겁탈당하는 계기를 만들기까지 했으니까,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그 새끼는 주인공의 '친구'가 아니다.
왕따를 당하고 숱한 고생을 거쳐 일정 부분 트라우마를 갖고 어른으로 자라난 아이가 있다고 하자. 어른이 된 그 아이가 과연 학창시절을 그리워 할까? 아니, 자신을 못살게 군 '그들'을 친구라고 여길까? 아무리 세월은 과거를 아름답게 윤색하여 기억하게 하지만, 절대로 '그들'은 친구라고 기억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이야기들도 아름답긴 커녕 성질을 돋구는 아주 raw하고 직설적인 이야기였다고 기억한다. punch를 pull하는 것이 하나도 없이, 아니면 철학적으로 관념화 시키는 것도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하나씩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1) 재미도 있었지만, (2) 주로는 나를 매우 화나게 하였고, (3) 게다가 바로 이전에 '지방시'를 읽은 탓에 (4) 대단한 쌍욕유발효과가 있었다. 불편한 만큼 더 뚫어지게 쳐다볼 수 있었야 하는데, 내 현실은 가슴 아프고 맘이 아리는 사회 곳곳의 이야기에서 끝내 눈을 돌리게 한다. 어쩌면 이 소설의 이야기처럼 화가 나고 욕지기가 올라오더라도, 아니면 너무 가슴이 아파서 불편하더라도 해결되지 않은 부조리와 이로 인해 파생되는 희생자들의 사연은 설사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도, 계속 들여다봐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이어지는 한 수가 되었다. '어제의 세계'는 나찌독일에서 쫓겨나 세계를 떠돌던 시대의 문호, 츠바이크가 죽기 얼마 전에 정리한 자신과 그 좋던 시절, 유럽의 이야기다.
영화 'Midnight in Paris'를 보면 1차 대전이 끝나고 2차 대전의 기운이 스물스물 올라오기 전, 그러니까 대공황이 온 세계를 덮치기 이전의 데카당적인 시절을 향수어린 시선으로 보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classic 푸조를 타고 과거로 돌아간 그가 사랑에 빠진 여인은 그런데,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 과거의 질서에서 살아가던, 아마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찾아온 유럽의 평화시대를 Golden Age로 이상향을 삼고 있다. 아름다운 그 시절의 묘사나 유명한 문호들과 interact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이 이 영화를 즐기는 나의 방법이었는데, 츠바이크가 공부를 하고, 여행을 했으며, 문명을 떨친 시기가 대략 이 두 시대를 관통한다.
다소 보수적일 수도 있는 언조로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신민으로 살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이야기 하는 부분은 그의 특이한 배경, 그리고 나찌즘이 대두하면서 그가 알던 유럽의 모든 것들과 강제로 멀어진 그의 인생 말기를 생각하면 그렇게 심한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읽는 내내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만 가득했었고, 이런 시대가 있었고, 이런 관점으로 바라볼만큼 유복했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던 수재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국제적 방랑자로 전락해버린 전체주의에 대한 분노가 후반부로 갈수록 심해졌었다. 회고록이면서 유서가 된 이 책은 사서로써의 가치도 상당히 높다고 하겠는데, 당시 츠바이크는 유럽문학계의 명사로서 많은 유수작가들과 교류했기 때문에 통사형식의 역사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역사속의 인물들을 first-hand으로 만날 수 있다. '어제의 세계'는 사라져버린 그 좋았던 시절에 대한 추억하기와 이를 잃어버리고 삶의 희망을 거의 놓아가던 츠바이크의 마지막 몸부림이 함께 묻어나와 책을 읽은지 2-3주 이상 지나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가슴이 아려온다.

같은 시리즈로 다양한 작가와 시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시리즈의 첫 번째, 디킨즈와 콜린스가 두 가지 다른 버전의 게으름을 실천하기 위해 영국의 변두리릴 한 바퀴 돌면서 겪는 이야기를 그렸다. 한 명에게 게으름이란 leisure을 즐기는 것, 일을 하지 않고 걷거나 산책, 여행을 하면서 보내는, 단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면, 다른 한 명에게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면서 집구석에 쳐박히는 것을 의미한다. 크게 무엇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좋은 출판사에서 기획한 시리즈를 계속 이어갈 만한 정도의 재미는 얻을 수 있었다고 본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