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이유로 고객들의 자료를 기다리느라 잠깐 시간이 비었다. 이 시간에 다른 행정업무를 보면 좋을텐데 막상 선후순위를 정해놓고서 보니 갑자기 그렇게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하는 것이 어렵다. 덕분에 비가 오는 꾸질꾸질한 아침, 간략하게 몇 가지 메일답변을 보낸 후 사무실을 둘러보며 어떻게 정리해야 좀더 깔끔한 업무환경을 만들수 있나 고민하고 있다.
처음에 시작할 때만 해도 책상과 책장이 전부라서 부랴부랴 집에 있는 책을 가져다 방을 채웠는데, 다년간의 무분별한(?) 구매로 인해 지금은 책장은 물론이고 눈에 띄는 공간에는 모조리 책이나 서류더미로 가득해진 결과, 일에 차분하게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변해버렸다. 아무래도 하루 날을 잡아서 정리해야할 것 같다만, 여기에도 딜레마가 있다. 사무실을 이전하거나 지금 사는 곳보다 조금 더 넓은 곳으로 이사를 가면 다시 또 이 '정리'라는 짓거리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계속 미뤄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사무실은 당장 일년 정도는 그냥 사용할 것 같고, 이사는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으니까, 정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이다.
책을 옮길 때에는 박스에 차곡차곡 담에 나르면 편할 것 같지만, 무게도 그렇고 들기도 그래서, 요즘 가장 선호하는 방식은 에코쇼핑백에 담는 것이다. 워낙 질긴 재질이고, 기본적인 용량이 있어서 잘 담으면 15-20권 정도가 들어가는데, 이걸 한번에 두 개씩은 들 수 있으니까, 쇼핑백만 넉넉하게 갖고오면 의외로 한번에 상당히 많은 권수를 옮길 수 있다. 금년에는 더 늙어가는 강아지 진주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금요일마다 정기적으로 일거리를 들고 부모님 댁에서 오전-오후까지 근무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이때 조금씩 옮길 생각이다.
다니구치 지로가 그린 만화의 원작이 되는 책 '사냥개 탐정'을 읽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세인트 메리의 리본'과 함께 두 권이더라. 어쩐지 만화책에서 다룬 내용과 비교하면 토막이 난 이야기 같더라. 2월의 첫 번째 주문을 오늘 보냈으니까, 두 번째 주문에 포함될 것이다. 내용은 만화와 거의 같기 때문에 만화에서 보여주는 주인공의 오두막, 이를 둘러싼 숲이 아주 쉽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만의 재주는 아니지만, 보통 책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정경이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경험하기에 사실 만화를 읽지 않았더라도 쉽게 이야기가 시각화되었을 것이다.
주인공, 류몬은 개와 함께 산속에서 살아가는 '사냥개 탐정'인데, 홈즈의 'Consulting Detective'만큼이나 희귀한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주로 하는 일은 사냥안내와 잃어버린 개를 찾아주는 것이고, '조'라는 늑대인지 개인지 모를, 맥주를 즐겨 마시는 sidekick과 함께 한다. 일인칭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르와르 그 자체라서 아주 쉽게 그 매력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책만 가득하다면 이런 삶도 나쁘지는 않겠다. 하지만, 임야를 낀 집터가 될만한 땅을 사서 집을 짓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유지보수인데, 책을 끼고 살려면 특히 습기에 조심해야 하고, 따라서 오두막은 절대 사절이다. 주방을 따로 야외에 만들더라도 최소한 책과 함께 살 주거공간 만큼은 제대로 만들어져야 하고, 주기적으로 지붕이나 벽을 손봐야 할 것이다. 숲에 둘러싸인 평평한 곳을 고르고 이렇게 집을 짓고 개 두 마리 정도와 함께 살면서 지금 하는 일을 원격으로 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만, 아직도 face to face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고, 사무실이 위치한 지역의 상징성을 따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섣불리 실행에 옮길 수 없는 요망이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꽤 자세하게 생각을 해봤다는 걸 알게 된다. 살짝 쓴웃음이 나온다.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 몇 개를 더 읽었다. 아주 흥미진진한 먼 미래의 이야기, 그리고 아메리칸 인디언의 슬픈 투쟁에, 우연히 미국에 이민간 구 아이즈 번 무사출신의 두 남자가 얽혀드는 활극까지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에는 좀더 어른스러운 무엇인가가 있다.
곧 운동을 가야할 것 같다. 오늘은 잠시 쉬어가는 페이지. 내일은 세무정리.